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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5/05/04 23:10:39
Name   당근매니아
Subject   내각제와 대법원
티타임보다는 타임라인이 어울릴 수도 있는 잡상입니다만, 기록 겸 정리 겸 해서 간단히 써봅니다.

과거에 주기적으로 나오던 소리 중 하나가 의원내각제 개헌이었습니다.
민주당의 첫 대통령 ㅡ 김대중이 배출되기 이전에도 민정당계에서 저런 주장을 했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그 이전에는 의원내각제를 주장할 이유가 없었을 겁니다.
애초에 40년 동안 권력이 야당에 이양되어 본 사례 자체가 없었으니까요.
대통령 선거를 그대로 하거나, 아예 판을 엎어서 독재하든가 하면 안정적으로 권력을 독점할 수 있었고, 의원내각제 같은 형태를 고민할 이유도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대선을 두번 연속으로 지고 나니 이제 의원내각제 떡밥을 들고 오기 시작합니다.
해당 제도가 [민주주의 선진국]에 걸맞는 제도라는 당의정을 씌워서 기사들을 뽑아냈죠.
그 당시까지의 인식은 이러했을 겁니다.

[일발역전이나 빅 이벤트로 대선을 한두번 질 수는 있겠으나, 지역 기반 등을 고려했을 때 의회 다수를 빼앗길 염려는 당분간 없다]

그런 구도가 무너져내린 게 20대 총선입니다.
물론 그 이전에 17대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과반의석인 152석을 단독 확보한 사례가 있긴 했습니다만,
이건 노무현 대통령 탄핵 시도라는 특발성 이벤트에 힘입은 바가 컸습니다.

그 이후인 18대, 19대에서 민정당계는 여전히 안정적으로 단독 과반의석을 챙겨왔습니다.
특히 18대 총선은 자유선진당이나 친박연대 같은 계열, 영남 등 텃밭 무소속까지 합치면 거의 200석 가까이를 확보했죠.
당시에 민주당은 서울에서 딱 7석 가져왔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여전히 민정당계에서는 위 명제가 진리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20대 총선에서 민주당은 안철수의 분당에 힘입어 당내의 호남 토호 세력 비중을 급격히 줄이는 데에 성공했고,
일전에 천관율이 분석했던 것처럼 리버럴-도시권 정당으로 포지션을 전환하는 데에 성공합니다.
20대 총선에서는 서울에서만 35석, 21대 총선에서는 서울 41석을 가져왔고, 결과적으로는 22대 총선에서 서울 37석을 가져온 것조차 실패처럼 느껴지는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반면 20대 총선에서 120석을 겨우 넘겼던 민정당계는, 이후 두번의 총선에서 이제 110석도 확보하지 못하는 수준으로 쪼그라들고 맙니다.

이제는 의원내각제를 시행한다고 해도 본인들이 정권을 확보할 수 있는 가능성 자체가 없어졌고,
오히려 대선에서의 일발역전을 기대해야 하는 건 민주당이 아닌 민정당계가 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지난 20대 대선에서는 화력을 총 집결해서 이재명을 악마화하고, 반대로 윤석열의 결점은 덮어씌우는 데에 성공하여, 대업을 이뤄냈습니다.
그러나 이게 앞으로 몇번이나 가능할까요.

최근 개헌 이야기가 나오는 와중에도 민정당계에서는 십수년간 부르짖었던 의원내각제 얘기를 꺼내지 않습니다.
요새 의원내각제를 화두에 올리고 싶어하는 건 민주당 내의 소수계파 쪽이죠.
민주당이 총리를 안정적으로 배출하게 되면, 당내에서의 이합집산을 통해 일발역전을 노릴 수 있게 되니까요.

많이 돌아왔습니다만, 결국 하고 싶은 얘기는 이겁니다.

민정당계는 [이승만 이래로 지난 5~60년]을 비교적 손쉽게 정권 확보하고, 상당한 권력을 독점해 왔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대통령제든 의원내각제든 간에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는 길이 거의 다 막힌 상태입니다.
이번 이재명 선거법 사건에서 검찰과 사법부가 극도로 무리한 방법을 택하는 건, 해당 세력들이 너무나 코너에 몰린 상황이기 때문으로 해석됩니다.

이해찬이 일전에 민주당 20년 정권을 이야기했다가 욕을 더럽게 많이 먹었습니다만, 그 아저씨가 헛소리를 했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지난 대선과 이번 대선 모두, 민정당계와 조선일보에 정신을 위탁한 세력이 저 정도까지, 저잣거리 작부마냥 추한 꼴을 보일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을 뿐이죠.

사법부의 미친 폭주가 어디서 어떤 식으로 멈추게 될 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심한 경우엔 내전까지도 가정하고 고민 중인데, 그런 일이 벌어지지는 않길 바랄 뿐입니다.

아 그리고 이건 요새 꼭 남겨놓고 싶었던 말입니다.

민주당이 입법부와 행정부를 독점하게 되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것처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네트 여기저기서 보입니다.
그러니 절대 둘 중 하나는 가지지 못하도록 견제해야 할 중대한 책무가 있다는 듯 말하더군요.
근데 이 나라는 애초에 최초 4~50년 이상을 민정당계에서 입법/행정/사법까지도 독점한 상태로 유지되었었습니다.

뭐 그 당시에 나라꼴이 정상이었고, 모든 것이 잘 돌아갔으니, 민주당이 독점해도 된다는 흰소리를 하려는 건 아닙니다.
마치 과거에는 의원내각제가 당연한 발전도상인 것처럼 들고 나오던 작자들이 상황 변화에 따라 말을 바꾸듯,
그네들도 과거에 전혀 중요한 가치로 생각하지 않았던 [권력 견제]를 지금 와서는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게 우스울 뿐이죠.

그리고 그런 소리하는 사람들 중 대부분은 입법/행정/사법의 독점체제를 깨기 위해 그야말로 본인들 대가리를 찧었던 세대를 매우 무시하고 폄하하더군요.
이 또한 우스운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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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네들도 과거에 전혀 중요한 가치로 생각하지 않았던 [권력 견제]를 지금 와서는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게 우스울 뿐이죠.” — 이부분 통렬합니다 ㅋㅋ 써먹을 데가 있을 것 같읍니다
    과학상자
    대통령 문재인 + 국회의원 180석 + 대법원장 김명수 때도 정권은 불안했고 한번의 재창출도 못한 채 운석열에게 정권을 내줬죠. 대통령 이재명 + 국회의원 180석해봤자 대법원장 조희대는 버틸 거고 언론은 정권의 정당성을 계속 흔들겁니다. 장담하는데 이재명이 입법행정을 장악해도 견제시스템은 지금보다는 훨씬 훌륭하게 작동할 겁니다.
    2
    (음... 조희대는 정년 당겨서 올해 빨리 집에 보내드렸으면 하는 희망사항이 있어요... 청년 일자리가 없어서 힘든데 제일 위에서부터 한칸씩 당겨 앉으면 밑칸에서도 한결 숨쉬기 편해지지 않을까요)
    과학상자
    저도 빨리 보내드리고 싶은데... 생각처럼 쉽지 않을 것 같읍니다. 괜히 법룡인이란 말이 있는게 아닌데...
    하물며 그 왕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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