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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5/05/01 23:31:15수정됨 |
Name | meson |
Subject | 양비론이 가소로워진 시대 |
※ 예전 글(https://kongcha.net/free/15362)과 일부 연결되는 내용의 글입니다. 1년 전까지만 해도, 정치적 양비론은 대단히 일리 있는 입장으로 다가왔다. 양비론자의 이점은 언제나 사실에 근거해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느 정치인을 가지고 이야기하든 아무런 흠결도 없는 사람은 찾아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장 자체만을 놓고 판단했을 때 근거가 진실되고, 지적이 타당하면, 그러한 입장을 공표하는 일은 내적인 정당성을 가진다. 그러므로 양비론은 가히 무적의 논법이다. 물론 양비론자를 언짢아하는 측에서는 사실이 생성되는 구조 자체가 편향적이라고 주장하곤 했다. 예컨대 언론 지형이 편향적이거나, 언론에 사실을 제공하는 검찰의 수사와 기소가 선택적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이런 관점은 1년 전에도 광범위하게 찾아볼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야당이 그렇게 큰 격차로 총선을 승리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나는 구조가 편향적이라는 항변에 미온적이었다. 이유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그런 항변이 구차하게 보인다는 것이고, 둘째는 그런 항변에도 불구하고 오점 자체는 진실이라는 것이다. 이른바 구차하다는 것은 자신의 문제를 반성하는 대신 상대를 공격함으로써 사안을 호도하는 수법이 비겁하다는 뜻이다. 이른바 진실이라는 것은 구조가 편향되어 있다고 인정하더라도 밝혀진 잘못이 없던 것이 되기란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이 둘이 양비론의 요체였다. 따라서 사고의 흐름은, 원리 자체로만 따지자면 양비론자와 논박하여 승리할 수 있는 관점이 없다는 것으로 되돌아온다. 양비론에서 벗어나 어느 한쪽을 택하기 위해서는 결국 무언가를 어느 정도는 눈감아야 한다. 그렇게 했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도 기꺼이 논쟁에 뛰어들어 양비론자에게 패배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쟁론을 하지 않을 작정이라면 평소에 어떤 관점을 가지든 아무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굳이 정치적 의사표현을 하고 싶은 이상에는 양비론을 인정하는 것이 언제나 편안했다. 꼭 모든 표현에서 양비론을 준수하지는 않더라도, 기저에 있는 의식으로는 양비론을 수용하고 있고자 했다. 그래야 양비론자의 칼날이 다가왔을 때 적절한 동의를 표함으로써 망신을 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비판할 만하면 비판하되, 비판할 만한데 옹호하지는 않았다. 안전한 입장으로는 이만한 것이 없었다. 한데 모를 일이다. 고작 1년이었건만, 지금은 무엇 때문인지 그러고 싶지가 않다. 그 1년 동안 나의 가치체계와 판단 규준이 급격히 변화한 것도 아니고, 행동에 영향을 미칠 만한 새로운 이해관계가 생겨난 것도 아니다. 정치인들이 갑자기 청렴해진 것도 아니고, 그들의 결백이 극적으로 밝혀진 것도 아니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혹 반대로, 정치적 비행의 무게가 양비론으로 저울질할 수 없을 만큼 커지기라도 했는가. 물론 그러했다. 터놓고 말하자면 그 사실이 어떤 체념과도 같은 용기를 주었다. 나는 왜 양비론을 인정하고 수긍하고, 나아가 사용했던가. 본질적으로 그것을 벗어나서 어느 한쪽의 입장만을 사수할 만한 각오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당시의 정치상황을 선악(善惡)의 구도로, 정오(正誤)의 관점으로, 역사의 옳은 편과 그른 편의 대결로 파악하는 시선이 지나치게 과장되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늘 진영논리를 경계하고 양비론을 수용했던 것이다. 그러나 만일 과장이 아니었다면 어떤가. 45년 전의 망령이 되살아나고 법체계에 대한 신뢰가 허물어져서, 38년 만에 처음으로 이보다 더 순역(順逆)이 명확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면 어떤가. 스스로 그런 세태가 도래했다고 판단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것이다. 옳다고 믿는 방향이 생겼기 때문이다. 일단 그것을 정한 다음에는 양비론을 취할 수 없다. 도리어, 양비론의 무망함을 강조하는 입장에 서게 된다. 예컨대 양비론자에 대해, 용기가 없는 사람이거나 저의가 있는 사람일 뿐이라고 공격할 수 있다. 실제로 양비론은 스스로 하고자 하는 것이 없을 경우에는 한탄을 내포하며, 은밀히 하고자 하는 것이 있을 경우에는 기만을 내포한다. 전자라면 스스로의 절망을 남에게 전파시키는 유아적 행위에 불과하고, 후자라면 유리한 측의 흠결을 상기시키려는 반대파의 술책에 불과하다. 모두 자신감 있는 자의 태도는 아니다. 당연히 양비론자의 입장에서는, 양비론의 논법에 모순이 없으므로 이를 따르지 않는 자들은 비합리적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혹은 양비론이 옳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무시하는 태도를 두고 선민의식이라 칭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지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스스로가 선민(選民)이 될 수 있다고 확신하는 경우, 양비론은 고려 대상이 아니다. 무적의 논법과 맞선대도 두렵지 않다. 역사가 그들의 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장판파로 행군하던 유비의 마음으로, 또한 창의문을 돌파하던 최명길의 심정으로, 혹은 여의도에 운집했던 시민의 정념으로, 마침내 지금과 같이 말하게 되는 것이다.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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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가 선민이 된다고 확신함이
개개인의 역사에서 단 한번으로 그치지는 않겠지만,
일단 이번에는 씨게 들어온거 같읍니다.
살짝 과장하여 이 시대의 집단 트라우마의 너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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