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25/05/23 08:26:18
Name   경계인
Subject   단일화 사견
요즘 또 단일화 얘기가 심심찮게 들려옵니다.
그래서 문득 궁금해졌습니다.
"한국 정치에서 단일화란 도대체 뭐지?"
정치 기술? 연대의 상징? 아니면 그냥 선거철 단골 메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전 단일화를 한국 정치가 만든 "국민들의 일종의 생존 기술"이라고 봅니다.
마치 한국 축구가 ‘경우의 수’에 집착하듯, 우리는 선거 때마다 어김없이 단일화를 소환해냅니다.

1987년 YS–DJ 단일화시도후 결렬 → 노태우 당선 (야권 분열)
1990년 삼당합당 → YS 단일화 성공, 민정계 흡수 후 축출
1997년 DJP 단일화 → DJ 당선 (이후 공동정부는 결렬)
2002년 노–정 단일화 → 정몽준 선거 전날 철회, 노무현 당선
2007년 야권 단일화 실패 → 이명박 압승
2010년대 지방선거 → 야권 단일화 경험치 축적
2012년 문–안 단일화 시도 → 안철수 사퇴형식, 박근혜 당선
2017년 보수 단일화 실패 → 문재인 당선
2022년 윤–안 단일화 → 윤석열 당선, 이후 안철수 권력에서 배제

이걸 보고 있으면 단일화가
정치권만 하는 얘기가 아니라, 사실 유권자들 스스로 늘 기대하고 있던 풍경이었던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흔히 선거를 ‘총칼 없는 전쟁’이라 하죠. 저는 선거야말로 집단 심리의 분출구라고 봅니다.
대통령제라는 구조는, 한 사람에게 모든 권력을 몰아주는 시스템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유권자는 그 구조를 본능적으로 불안해합니다. 그래서 심리적으로 균형과 분산을 원하게 되죠.

그리고 그 욕망의 정서적 해소 방식이 단일화입니다.
"그래, 이 사람이 후보긴 한데, 이 사람이 혼자 권력을 갖는 건 아니야."
그 말 한 줄이 주는 안도감.


우리는 대통령제를 살고 있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내각제적인 협상과 조율을 그리워하나봅니다.
하지만 그걸 제도화할 길이 없으니, 단일화라는 장면을 통해 잠시나마 '연정의 환상'을 실현해보는 거죠.

이건 정치보다도 심리의 문제입니다.
심리적 내각제. 이게 제도로 안 되니, 감정과 장면으로라도 구현해보려는 시도입니다.

겉으로 보면 선거는 이성적인 절차 같지만, 실은 아주 명백한 감정의 무대입니다.
“내가 가진 불안을 누구에게 위임할 것인가?” 그 결과가 ‘표’라는 형태로 나옵니다.

그리고 단일화는 그 감정을 정리해주는 장치입니다.
혼란을 줄여주고, 선택지를 정리해주고, 투표할 명분을 만들어주는 것.
사표 방지용 종합 심리치료제 같은 거죠.

이게 중도층이나 무관심층에게는 아주 강력하게 작동합니다.

그런데 단일화는 왜 늘 오래 가지 못할까?
대부분의 단일화는 선거만 끝나면 깨지거나, 소수 쪽이 흡수당하거나 사라집니다.
그리고 유권자들은 생각보다 그걸 심하게 비난하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아마도 대부분의 유권자들은 이미 선거 과정에서 너무 많은 감정 에너지를 써버렸기 때문입니다.
몰입하고, 응원하고, 실망하고...그 과정을 겪고 나면 선거가 끝나자마자 정신적 탈진 상태에 빠지고

그래서 단일화가 깨져도, 흡수돼도, “xx, 그럴 줄 알았지” 하면서 감정적으로 거리두기를 시작하는 거죠.


그래서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단일화는 대통령제 국민이 스스로 발명한 심리적 내각제다.
제도적으로는 구현할 수 없는 걸, 감정과 상징을 통해 잠시나마 실현해보는 것.
그 짧은 순간만큼은 한국 정치가 내각제처럼 보이는 유일한 장면입니다.



0


    유권자들이 단일화를 원하는건 승률을 높이기 위해서이지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거대 정당의 경우 비슷한 스펙트럼의 지지층을 가진 군소정당과 단일화함으로써 큰 이탈 없이 표를 획득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군소정당은 국회에서 다수석을 확보하지 못하면 법안 상정이 불가능한데 다수당과의 단일화를 조건으로 원하는 법안 상정을 진행할 수 있게 됩니다.
    국내 정치역사를 보면 알 수 있지만 의외로 거대양당의 경쟁구도가 자리잡은지 얼마 안되었습니다. 대선에서 민정당계의 단일화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기 시작한건 민정당계와 민주당계의 기울어진 운동장과 지역차별 갈라치기가 해소되기 시작하면서 제3자와의 단일화 없이 승리를 보장할 수 없게 되면서부터이고요.
    2
    경계인
    말씀하신 부분에 대해서 대체로 동의합니다. 그리고 말씀대로 유권자들이 승률을 높이기 위해서라는 것에 목적에는 동의하는데, 그 방식으로 '단일화'가 유권자들에 의해서 선택되는 것에 대한 저의 사견입니다. 과거 제3자와의 단일화는 민주당계열의 필살기였는데, 현재 보수세력이 집착하는 이유는 박근혜 탄핵이후 수도권 보수와 영남보수가 갈라지면서 나온 현상이라고 봅니다.
    민정당계는 특별한 일이 없으면 단일화 안해도 충분히 승리할 수 있었으니까요.
    제가 기억하기로 대선에서 민정당계가 분열 안하고 한타 붙어서 진 적이 16대 대선 한번 뿐일겁니다.
    1
    당근매니아
    그냥 승자독식 구조니까 2, 3위 합쳐서 1위 지지율 넘어가면 단일화하자는 소리는 당연한 수순이긴 하죠. 심지어 둘이 합쳐도 한참 못미치는 이번 대선에서조차 컨벤션 효과로 모멘텀을 만들어보려고 단일화 얘기 나오는 판이니까요.
    1
    유료도로당
    결선투표제가 생기면 단일화 난리치는것도 과거 정치의 추억이 되겠지요 ㅎㅎ
    3
    과학상자
    재미있는 시각입니다. 단일화 소동이 매번 반복되는 것에 대해 결선투표제 등이 대안으로 거론되는데, 결선후보가 협상없이 결정되는 결선투표제의 경우 그런 효과가 없긴 하겠군요. 윤석열-안철수 때 같은 전격적 단일화의 경우도 말씀해주신 효과는 거의 없었던 듯 합니다. 안철수 지지자들은 완전히 배제되어 있었고, 그 이후 안철수 지지자를 보기가 어려워졌습니다. 표도 거의 반반으로 나뉘어져 갔을거고, 안철수의 정치생명을 스스로 끊은 순간이었죠.
    경계인
    문-안 단일화가 제가 글을 쓰게 만든 흥미로웠던 지점인데,
    왜 그 당시 단일화는 실패하였는가?에 대한 답을 찾던 과정이 "형식적인 과정; 의례(ritual)의 부재"라고
    생각하다보니 심리적으로 접근하게 되었습니다.
    1
    과학상자
    그쵸. 의례라는 게 참 중요합니다. 결론은 뻔해도 의례적 과정을 통해 예측가능성을 주고 관전자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수용성을 넓히게 되는데... 그런거 다시 무시하고 다 내맘대로 내멋대로 할거야 하는 놈들이 날뛰는게 참 봐주기 힘들었어요.
    2
    정당민주주의에서 의례는 당원들을 설득하기 위해 가장 중요한 부분이죠. 정당의 결정을 당원들이 수긍하려면 일련의 절차가 설득력을 가져야 합니다.
    의례 무시하고 당대표 패싱 입당했던 윤석열, 계속해서 지지층을 이탈시키는 행보만 보였던 안철수, 경선 불복하고 당 흔들어보려고 했다가 당심 다 잃고 쪽빡찬 이낙연 등이 모두 그 예 이고요.
    그런 점에서 윤석열을 바지사장으로 옹립한 친윤세력이 권력 계속 움켜쥘 수 있는 국힘이 참 재미있습니다. 저정도로 당원 개무시하는 정당은 해체하는게 맞지 않나 싶고요. (계엄이랑 별개로)
    2
    절름발이이리수정됨
    본문대로라면 권력에 제일 근접한 1등 후보일수록 더 큰 견제심리가 작용해 단일화 압박을 받겠지만, 실제로는 늘 마이너들끼리 단일화하는 걸 보면 그냥 승률 높이기 위한 합종연횡이지요. 2위이하 후보 지지자들이 자신의 지지 후보 한사람에게 권력이 몰릴걸 두려워하고 연정을 꿈꾸는 경우는 거의 없을겁니다.
    3
    경계인
    옳으신 지적입니다. 전체 유권자의 심리라기 보다는,

    2-3위 지지자들의 단일화를 통한 통합의 의미라고 보는게 더 맞겠네요
    절름발이이리수정됨
    그리고 한국유권자들은 대체로 내각제를 좋아하지 않고 연합세력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단일화 컨벤션 효과는 실존하지만 그건 당내 후보 선출과정 같은 일일 뿐입니다.
    2
    경계인
    저역시 내각제를 선호하지 않고 경험도 없습니다만, 이글을 쓰면서 한국 유권자들의 심리분석이 궁금해졌습니다. 중앙중심적인 대통령제에 대한 선호가 압도적으로 많지만, 그 과정에서 스스로 보완을 하고 있다고 해석했습니다.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5591 댓글잠금 정치극우 펨대남들을 막지 못하면 다음은 독재국가다 15 명동의밤 25/07/10 1545 1
    15584 정치제가 만든 데이터기반 정치사이트 공유? 홍보? 합니다. 12 후천적평발 25/07/06 1254 16
    15536 정치상반기 KPI 평가중 든 잡념 9 길든스턴 25/06/19 918 1
    15517 정치만약에..(윤석열과 한동훈, 이명박과 박근혜) 7 Picard 25/06/12 1071 0
    15511 정치정치 대화의 재구성 영원한초보 25/06/10 760 1
    15510 정치교육부 장관 출사표 20 문샤넬남편 25/06/10 2121 17
    15504 정치준스기는 그때 왜 그 발언을 했는가 50 매뉴물있뉴 25/06/08 2054 2
    15503 정치선거에 이기는 방법은? 5 닭장군 25/06/08 1056 4
    15499 정치대법관 늘리는 부분이 충분히 숙의가 필요한 이유. 21 kien 25/06/06 1585 8
    15496 정치다수파의 교체는 어떻게 가능한가? meson 25/06/04 688 8
    15495 정치대선 후기 12 알탈 25/06/04 1255 6
    15492 정치오냐오냐가 내 세대 특정 계층을 망쳤다 40 명동의밤 25/06/04 3047 17
    15491 정치개표 참관 후기 5 dolmusa 25/06/04 925 19
    15490 정치대선 결과 소회 9 사슴도치 25/06/04 969 10
    15489 정치오늘 아침 정치뉴스 2가지 보고..(득표율, 총리) 4 Picard 25/06/04 985 0
    15488 정치두서없는 선거 소회 8 내알아할게요 25/06/04 1005 15
    15487 정치문재인정부 시절의 실수를 반복하면 안됩니다. 34 닭장군 25/06/04 1752 4
    15485 정치20년 전의 망상이 설마 진짜로 실현될 것인가? 8 닭장군 25/06/03 1200 0
    15484 정치[불판] 제21대 대선 60 이이일공이구 25/06/03 1955 0
    15477 정치이재명/민주당/의원/지지자들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까 25 kien 25/05/31 1870 0
    15475 정치『오염된 정의』 - 김희원의 정의는 깨끗한가? 5 meson 25/05/31 981 12
    15474 정치5월 2 곰곰이 25/05/31 801 12
    15470 정치이번 선거에서 이재명을 찍을 이유 15 명동의밤 25/05/28 2086 12
    15467 정치독립문 고가차로와, 국힘의 몰락 16 당근매니아 25/05/28 1545 1
    15466 정치이재명식 재정정책은 과연 필요한가. 다마고 25/05/28 999 3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