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25/07/10 08:30:03수정됨
Name   kaestro
Link #1   https://kaestro.github.io/%EC%84%9C%ED%8F%89/2025/07/08/%EA%B2%BD%ED%97%98%EC%9D%98-%EB%A9%B8%EC%A2%85-%EC%8B%A4%ED%8C%A8,-%EA%B8%B0%EB%8B%A4%EB%A6%BC,-%EA%B4%80%EC%9A%A9%EC%97%90-%EB%8C%80%ED%95%9C-%
Subject   『경험의 멸종』 - 실패, 기다림, 관용에 대한 단상

서문

“지금 몇 신 줄 알아? 넌 전화도 못 걸어!”
“기다리는 시간도 데이트의 일부잖아. 데이트 시간은 길면 길수록 좋은 걸.”
-h2의 명장면으로 부터-

개인적으로 h2를 보면서 굉장히 가슴이 뭉클해지는 장면이 많았습니다만, 가장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것을 하나 꼽으라 하면 위의 대사를 떠올리곤 합니다.

비가 오는 날 그 오랜 시간동안 하루까는 비가 오는 창밖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요. 전날 연습에 지친 상태로 모처럼의 휴일을 맞이하는 히로가 과연 일어는 났을까, 일어났다면 지금쯤 나와의 만남을 위해 준비는 마쳤을까, 설레여서 잠도 제대로 못 이뤄서 늦잠을 자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것일까, 혹 나와의 약속은 잊어버린 것은 아닐까. 아마 그런 수많은 생각들에 기쁘거나 설레고 두려운 다양한 감정을 느끼면서 그 순간을 온전히 보내는 하루까에게, 해당 대사는 단순히 입발린 말을 떠나 그 모든 순간이 소중한 데이트의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아침 9시부터 만나자고 약속을 잡았던 하루까가 비오는 날 하루 종일 카페에서 히로에게 한 이 대사는, 어쩌면 더 이상 사람의 심금을 울리지 못하는 시대가 돼버린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 책이 바로 경험의 멸종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언제 어디서든 접할 수 있는 유튜브와 같은 영상 매체를 넘어서 이제 1분도 길어 수십초 밖에 되지 않는 쇼츠와 틱톡을 즐기는 우리 세대는, 분명 의식하고 있는 그 모든 순간이 너무나도 다양하고 즐거운 것들로 가득하지만 과연 우리는 이전만큼 충만한 순간들을 경험하고 있을까요.

책의 내용 간단한 요약 및 예시

경험의 멸종이 제시하는 주장은 굉장히 단순합니다. 기술의 발전이 주장하는 것과 달리, 인간이 충만한 경험을 하는 것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고 있으며 그것에는 실패, 기다림, 관용과 같은 다양한 소위 경험에 수반되는 마찰에 해당하는 내용들을 사람의 경험에서 분리하고 시스템화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책에서 제시하는 예시로는 gps의 도입, 포르노로 대체된 섹스, 날씨앱에서 사라진 기상학자에 관한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제가 어린 시절만 하더라도 방문해 본 적이 없는 공간에 가는 일은 일종의 도전이었습니다. 목표 장소에 관한 지리적인 정보들을 충분히 습득하고 나면, 지도 등의 방식을 통해 공간에 대해 헤메는 과정을 수반하며 탐색을 하고 나면 그제서야 우리는 목표 지점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gps가 생겨 우리의 공간이 물리적으로 넓어진 것은 맞습니다만, 이런 과정들을 통해서 우리는 이동에 성공하면서 우리의 기억 속의 일부가 되어 내부의 공간이 확장되어갔다고 할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어린 시절 학교를 등하교 하기 위해 드나들었던 시장의 샛길들, 그 공간을 채우고 있었던 가게들은 저에게 제 동네로써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훨씬 더 많고 넓은 공간을 돌아다니지만, 그 중간의 시간은 단순히 목적지라는 장소 도착을 위해 수반될 뿐인 불필요한 과정일 뿐입니다. 더이상 마을은 내가 생활하는 공간으로 기억되지 않습니다. 그저 내가 잠 자고 일어나, 다른 목적지로 이동하기 위한 거점일 뿐입니다.

책에서 이야기하기로 최근 많은 커플은 포르노에서 섹스의 환상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의 섹스를 포르노의 재현 수단으로 삼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자극적인 컨텐츠를 제공하기 위해 비현실적일 수밖에 없는 포르노의 장면들을 재현하는 것은 현실에서 그렇게 즐겁지 못합니다. 그러니 현실의 섹스는 포르노만큼 자극적이지도 즐겁지도 못하다는 생각에 오늘도 사람은 의무 생산활동을 기피하고, 진정한 즐거움을 얻기 위해 화면을 킵니다.

최근 텍사스에서 홍수로 백여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이에 대해 공공기관의 감축이 주 원인 중 하나로 꼽히는데, 해당 사건을 보며 책에서 제시한 날씨 앱에는 기상학자가 없다는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기상 앱들은 이전의 일기예보들이 기상학자들의 노하우를 기반으로 제공됐던 것과 달리, 시스템을 기반으로만 동작하기 때문에 더 이상 이레귤러 사태에 올바르게 대응하기 힘들다고 저자는 주장합니다.

미국 정부는 기관들의 예산 삭감을 하면서도 해당 기관들이 충분히 효율적으로 동작하지 않기 때문에 단행하는 작업이며, 어느 정도의 고통을 감수하고 나면 이전만큼 혹은 더 좋은 시대를 맞이할 수 있을 것이라 말하며 일을 진행했습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가 감당해야하는 고통이란 것이 이런 종류의 것이란 사실을 말하려던 것이었을까요. 우리는 얼마나 더 많은 고통을 겪어야만, 비효율적이더라도 안정적이고 위급한 상황에 대응할 수 있었던 체계보다 비로소 더 좋은 시대를 맞이할 수 있을 것일까요.

개인적으로 반추하는 실패, 기다림, 관용의 멸종에 대한 경험

최근에 해당 책을 읽고 나서 다르게 생각하게 된 인상 깊었던 경험에는 결혼식, 결혼과 연애에 대한 달라진 세대의 인식, 온라인 게임의 매칭 시스템 등이 있습니다.

우리의 결혼식은, 분명 모든 결혼식에서 말하기를 인생에 단 한 번 밖에 없을 영원히 계속될 사랑을 말합니다만, 장소와 음식이 얼마나 비쌌고 하객이 얼마나 많이 모여서 축의금이 모였는지 만을 다룰 뿐이지 그 본질을 따지고 보면 모두가 다 같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 요즘에는 스스로 결혼에 대한 일정도 세우지 않고 웨딩 플래너를 사용하여 자신의 일생의 새로운 장으로 나아가는 시작을, 실패하지 않고 남들만큼 혹은 남들보다는 더 잘 하기 위해서라는 목표 하나만을 가지고, 결혼식장에서 제시하는 모두가 따라하는 프로그램을 따라합니다.

그런데 그 결혼식장에서 신랑 신부와 하객들 사이에는 그 어떤 소통도 없습니다. 그나마도 있는 것은 짧은 10초나 될 법한 시간 동안의 와 줘서 고맙다는 인사 뿐, 하객은 숫자와 기호로써 결혼식장에서 단순히 소비될 뿐입니다. 결혼식은 분명 그 무엇보다도 개인적인 축하의 장소여야 할 것이지만 과연 결혼식에서 진정한 축하라는 것이 존재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에 이어지는 것이 주변에서 연애와 관련해서 이야기하는 견해였습니다. 이전에는 오랜 시간, 9, 10년씩 연애했다면 결혼하겠지라는 이야기가 나왔던 것과 달리 지금의 상태로 지내는 것도 충분히 만족스러운데 결혼을 한다 해서 지금에서부터 얼마나 달라지겠어? 우리는 서로 어떤 생각을 하는지도 다 알고 있고, 서로에게 간섭하지 않는 것이 좋아. 밥을 먹을때도 서로 너무 맞지 않아서 각자 다른 음식을 시켜 먹어.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란, 특히 그것이 깊어지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자신과 다른 점을 수용하고 그 사람을 서로 닮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더 이상 우리는 그것들을 사람과의 관계를 맺어가면서 내가 변해가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 모든 것을 스트레스라고 생각한다고 생각합니다. 연애에서조차 우리가 원하는 것은 짧은 즐거운 순간들 뿐이고, 그에 따르는 기다림이나 생각의 차이를 맞춰가는 비용을 우리는 더이상 관용의 자세로 받아들여주지 않습니다.

이전에 pvp, pve 게임에서 다른 사람과 함께하는 경험을 하기 위해서는 같이 시간을 보낼 사람을 모으고, 그 사람들과 인간적인 유대관계를 맺어가는 과정을 거쳐야 했습니다. 오락실과 문방구에서 동전을 쌓아놓고 줄을 서있는다거나, mmorpg의 광장에서 채팅으로 사냥 갈 파티원을 모집하기 위해 부르짖던 순간들을 기억하는 게이머분들은 있으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수준에 맞는 최적합의 효율적인 경험을 제공할 수 있는 매칭 시스템을 통해 게임을 즐깁니다. 그리고 저는 이것이 롤이 이전의 게임들과 비교해 비인간적이고 소위 ‘게임은 질병이 아니지만, 롤은 질병이다’라는 말이 불리게 된 원천이라 생각합니다. 다른 게임에서도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만, 롤은 제가 경험한 온라인 게임 중에서는 가장 훌륭한 최초의 mmr 기반의 매칭 서비스를 제공한 게임입니다.

이제 게임들은 더 나아가서, 사람간의 상호작용을 아예 없애기 위해 채팅을 없애고 우리가 원하는대로 편하게 움직여주는 ai 동료들과 함께 쾌적한 게임을 즐길 수 있는 것을 셀링 포인트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마무리

분명 위에서 이야기한 기술의 발전은 경험이 충만한 형태로 축적되는 것을 방해할 수도 있습니다만, 그 효율적인 측면에서 가져다 주는 가치 역시 상당하고 그것이 우리에게 당장에 훨씬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장 저에게 gps가 없이 가 본 적이 없는 장소에 가라고 요구한다면 저는 굉장히 당혹스러울테고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을지 여부조차 장담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스마트폰을 들고 카페에서 하로에게 언제 일어나서 오냐며 카톡을 보내면서 유튜브에서 쇼츠를 보는 사람보다는, 하염없이 내려오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기다림이라는 시간을 온전히 즐길 수 있는 하루까라는 사람이 훨씬 사랑스럽다고 생각합니다.




15


    nothing
    공감가는 주제라 일단 추천부터 눌러버렸습니다.
    kaestro
    주제는 괜찮았던 것 같은데 제 글빨이 좀 아쉽긴 했던거 같습니다 ㅋㅋ
    API가 느리면 성능개선하지말고 커피한잔의 여유를 위한시간으로..
    코드가 엉망이면 복잡하게 꼬인 실타래를 벽난로 앞에서 실뜨기하는 마음가짐으로 살살 풀어보는 자세를..

    그런얘기 맞죠??
    kaestro
    커피한잔 말고 위스키는 어떻습니까
    kaestro
    각설하고 그래서 책에서는 아마존이었나 구글에서 연구한 api 응답속도가 10ms 느려질수록 유저의 웹페이지 도달률 이야기도 하면서 사람들이 계속해서 인내심이 적어지고 있다는 이야기도 다루긴 합니다 ㅋㅋ
    튜닝하는게 젤 잼나긴해요
    kaestro
    천성이 백엔드 개발자신것 ㅋㅋ
    제 몸(?)과 정신에 남은 전 여친들 흔적이 떠오르는 글이군요 ㅋ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란, 특히 그것이 깊어지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자신과 다른 점을 수용하고 그 사람을 서로 닮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계속 아내와 아웅다웅 싸우고, 화해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가끔은 '어휴 저 인간이랑 진짜'하면서, 또 아내의 여러 모습들을 제 안에 새겨넣게 되더라고요. 아내도 그렇다고 하고요.
    1
    kaestro
    그러는 것이 싫어서 사람간의 관계가 더 깊어지길 원하지 않는다, 나는 지금의 나에서 만족하고 바뀌고 싶지 않아서 결혼도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 뭔가 뭔가였습니다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5613 도서/문학『마담 보바리』에서의 '나비'의 이미지 막셀 25/07/14 314 1
    15611 도서/문학뉴욕타임스 칼럼 "소설이 중요했던 시절" - chatGPT 번역 3 막셀 25/07/14 564 5
    15609 도서/문학밀레니엄 시리즈 1부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 감상 4 에메트셀크 25/07/13 784 0
    15590 도서/문학『경험의 멸종』 - 실패, 기다림, 관용에 대한 단상 9 kaestro 25/07/10 605 15
    15581 도서/문학체어샷 감상 2 에메트셀크 25/07/05 695 2
    15565 도서/문학또래 소설가들의 소설을 안 읽은 지 오래 되었다. 20 골든햄스 25/06/30 1478 8
    15521 도서/문학장르소설은 문학인가? - 문학성에 대한 소고 25 meson 25/06/14 1237 12
    15494 도서/문학(마감) 그림책 나눔합니다 27 왕킹냥 25/06/04 920 18
    15452 도서/문학다영이, 데이지, 우리 - 커뮤니티 런칭! (오늘 밤) 2 김비버 25/05/22 1178 5
    15418 도서/문학백종원과 신창섭 사이에는 무슨 관계가 있을까? 2 구밀복검 25/05/01 1413 6
    15410 도서/문학쳇가씨 답정너 대담 백치 1 알료사 25/04/28 990 3
    15408 도서/문학'야성의부름' 감상 1 에메트셀크 25/04/27 998 5
    15402 도서/문학사학처럼 문학하기: 『눈물을 마시는 새』 시점 보론 meson 25/04/23 976 6
    15392 도서/문학명청시대의 수호전 매니아는 현대의 일베충이 아닐까? 구밀복검 25/04/18 1139 10
    15336 도서/문학[서평] 행복에 걸려 비틀거리다 - 대니얼 길버트, 2006 1 化神 25/03/24 1138 9
    15287 도서/문학[추천]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는 공부 4 moqq 25/02/28 1278 6
    15271 도서/문학「비내리는 시나카와역」, 「우산 받은 요꼬하마의 부두」 6 피터 오툴 25/02/16 1532 6
    15256 도서/문학『눈물을 마시는 새』 재론 - 눈부시게 잔혹한 이야기 meson 25/02/08 1190 7
    15225 도서/문학사람의 내면을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는 기분, 기욤뮈소 데뷔 20주년 기념작 <미로 속 아이> 1 인생살이 25/01/21 1581 2
    15201 도서/문학'압도감'으로 정렬해본 만화 300선 25 심해냉장고 25/01/11 2838 10
    15199 도서/문학만화책 티어리스트 500종(중에 안본게 대부분인) 33 kaestro 25/01/10 2307 1
    15175 도서/문학마르크스가 본 1848년부터 1851년까지의 프랑스 정치사 3 카페인 24/12/30 1646 6
    15168 도서/문학밀란 쿤데라가 보는 탄핵정국 sisyphus 24/12/28 1545 1
    15151 도서/문학24년도 새로 본 만화책 모음 6 kaestro 24/12/23 1653 5
    15133 도서/문학소설 읽기의 체험 - 오르한 파묵의 <소설과 소설가>를 중심으로 5 yanaros 24/12/18 1446 5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