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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5/06/14 13:30:23 |
Name | meson |
Subject | 장르소설은 문학인가? - 문학성에 대한 소고 |
※예전에 쓴 글을 주워담는 차원에서 적은 글입니다. 일찍이 1999년에, 이영도는 문학평론가 정과리와의 대담에서 “판타지가 문학입니까”라는 공통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당시에도 이미 상투적이라고 느껴졌던 그 질문에 이영도는 이렇게 대답한다. “문학이 뭔지를 말해 준다면, 나도 판타지 소설이 문학인지를 답변하겠습니다.”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1999/08/31/1999083170317.html) 거두절미하고 핵심을 찌르는 말이다. 그러나 『드래곤 라자』가 문단을 당혹시켰던 그때부터 웹소설이 출판시장을 장악한 현재까지, 이 역질문은 제대로 답변된 적이 없다. 문학이 무엇인지를 안전하게 정의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언론도, 학계도, 심지어 교과서도 그런 규정을 함부로 해내지는 못했다. 이론마다 각자의 기준을 가지고 분류를 시도해 왔을 뿐이다. 그렇기에 판타지가 문학이냐는 질문은 무의미하거나, 혹은 문학관에 따라 답변이 달라질 수밖에 없는 질문이었다. 이영도가 질문의 의미를 되물은 것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물론 25년 전이든 지금이든, 장르소설에 문학으로서의 성원권(Membership)이 있는지를 논할 때 상정되는 ‘문학’은 십중팔구는 분류로서의 집합이 아니라 ‘문학성이 있는 작품군’을 지칭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렇게 본다면 논의의 초점은 조금 더 명확해진다. 문학성의 평가는 어쨌든 제도권의 인정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고, 따라서 ‘판타지가 문학이냐’라는 물음은 곧 [ ‘판타지에 문단문학에서 말하는 것과 같은 문학성이 있느냐’ ]라는 뜻이 된다. 여기서 문학성이 ‘있느냐’는 문언은 당연히 ‘문단문학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보았을 때 문학성이 충분하냐’는 의미이다. 바로 이 견지에서, 1999년의 정과리는 “한국 판타지는 '문학성'을 말할 단계에 오르지는 못했습니다”라고 단언했다. 이영도가 이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보도되지 않았다. 그가 쉬이 동의했으리라고 생각하기는 어렵지만, 위 기사가 정과리의 단언으로 끝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장르소설에 대한 제도권의 시선은 차가웠다. 게다가 『드래곤 라자』가 돌풍을 일으키던 시절이 지나간 뒤에는 부정적인 관심조차 사라져 버렸다. 그렇기에 판타지로 대표되는 한국 장르소설에 문학성이 부족하다는 인식은 현재까지도 ‘거의’ 수정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그러나 문단의 태도가 방기에 가까웠다는 점을 인정하더라도 여전히 한 가지 질문은 남는다. 한국 장르소설은 왜 문학성이 부족하다고, 그래서 진지한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여겨졌을까? 사실 이 질문도 - 앞의 것과 마찬가지로 - 제대로 답변된 적은 없다. 이 사안을 정면으로 다룬 논의는 현서(푸른꽃)라는 동호인이 2007년에 발표한 「한국 판타지의 긍정적 미래를 위하여」(https://mirrorzine.kr/forum/82623) 정도가 거의 유일한데, 그마저도 반론 1건(https://cafe.daum.net/zoozak/2Az7/13431)을 낳았을 뿐 널리 회자되지는 못했다. 상황이 이러한 이유를 말하기는 쉽다. 문단은 전통적으로 대중소설에 큰 관심이 없고(태생적으로 대중문학이라기보다는 독립문학이었던 한국 SF가 오늘날 문단에 수용된 것에는 이 점이 주효했을 것이다), 팬덤은 장르소설을 진지하게 탐구할 때조차 대개 장르적으로만 비평하며, 학계는 장르소설의 문학성보다는 그 문화적 양태에 더 관심이 많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팬덤은 문화적으로 게토화되어 있고, 학계는 그 게토의 문화를 반영한 창작물로서 장르소설을 바라보고 있다. 팬덤이나 학계에서는 장르소설의 문학성을 비평 및 논의할 유인이 약했던 것이다. 따라서 장르소설이 왜 문학성이 부족하다고 여겨졌는지를 해명하는 작업은 시론적으로 수행될 수밖에 없다. 참고할 만한 기존의 논의가 희박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짚고 넘어갈 만한 것은 앞서 언급한 「한국 판타지의 긍정적 미래를 위하여」정도인데, 해당 글은 토도로프(T. Todorov)·톨킨(J. R. R. Tolkien)·루카치(G. Lukacs) 등을 화려하게 인용하며 ‘환상소설’의 효용과 기능에 대해 논한 바 있다. 그러나 환상소설 고유의 문학성을 탐구하는 수준에서 그치고, 문단문학에서 말하는 문학성까지 폭넓게 다루지는 않았기에 이것만으로는 아직 불충분하다. 그렇다면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소위 문학성이란 대체 무엇인가? 그 기준은 당연히 문학관마다 다양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여러 기준들이 모두 공유하는 요소를 하나 꼽는다면, 그것은 [ ‘독자가 특정한 정서적 상태를 체험하도록 만드는 것’ ]을 문학의 미덕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때 정서적 상태라는 것은 이해, 공감, 새로운 감정의 경험, 인식의 전환과 같은 수많은 인지적 변화를 포괄하는 개념이다. 이러한 상태의 체험은 대체로 학술적·정합적 논리뿐만 아니라 서사적·감정적 자극까지 수반함으로써 종합적으로 달성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을 달리 말하여 감응이라고 하고, 외연의 확대라고도 하며, 간접 경험이라고도 한다. 예컨대 독자가 특정한 이성적·감성적 상태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것을 직접 느끼며, 그 배경과 의미를 파악할 수 있을 때, 문학 작품은 ‘감응’에 성공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문학성은 대개 [ 감응의 성공률과 정확성, 그리고 감응 내용의 고유성과 강렬함 ] 등에 의하여 평가되기 마련이다. 문학관마다 중시하는 가치와 방향성이 다르므로 그러한 평가에서 특정 요소에 가중치가 붙을 수는 있겠지만, 어쨌든 문학성이 평가되는 기본적인 원리는 이러하다는 것이다. 위와 같은 논의를 인정할 수 있다면, 문학성을 구성하는 사조들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동시에 장르소설의 문학성을 가늠하는 것은 원리상 가능하다. 장르소설 역시 ‘독자가 어떤 정서적 상태를 체험하도록’ 만든다는 점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관건은 그 정서적 상태가 얼마나 특별한지, 그리고 그 감응이 얼마나 성공적인지에 달려 있다. 장르소설의 자장 안에 존재하는 작품일지라도 이러한 관점에서 분석했을 때 유의미한 성취를 거두었다고 판단된다면, 문학성이 높다고 평가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서두에서 제시된 질문에 답하는 합당한 방법이다. 이 지점에서 돌아볼 때, 이영도가 『현대문학』 2019년 9월호에 『시하와 칸타의 장』을 발표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물론 이 소설은 『드래곤 라자』나 『눈물을 마시는 새』에 비하면 분명 대중성이 덜하다. 그러나 이영도의 색채는 여전하며, 판타지 소설인 것도 변함없다. 1999년 정과리와의 대담 이후 20년 만에 이영도의 판타지가 문예지에 실리는 날이 온 것이다. SF가 아니라 판타지 작가가, 그것도 등단하지 않고 대중소설로 성공한 작가가 이처럼 뒤늦게 인지된 것은 결국 이영도 소설에 ‘문단에서 말하는 의미의’ 문학성이 있었음을 뜻한다. 그러므로 굳이 스터전의 법칙(“Ninety percent of everything is crud”)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장르소설 중에 ‘문단에서 말하는 의미의’ 문학성을 담지한 작품이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대중성의 정도와는 상관없이, 독자가 어떤 특별한 정서적 상태를 성공적으로 체험하도록 만들 수 있다면 문학성은 성취되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무협에서는 좌백이 이영도와 유사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고, 판타지에서는 전민희가 이영도와 비견되는 작가로 흔히 거론된다. 정도의 차이는 다소 존재하지만 이 작가들의 소설 역시 문학성을 인정받을 만하다. 흥미로운 부분은 이런 관점에서 문학적 비평의 대상으로 포착되는 장르소설을 꼽아 볼 경우, 그중 다수는 웹소설의 몫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1세대’ 장르소설군의 기풍과 성취가 일종의 정전(Canon)처럼 여겨지는 마니아층의 인식을 고려할 때 이러한 판단은 사뭇 어색할 수 있다. 그러나 웹소설 시대가 불러온 시장의 확대가 작품의 가짓수는 물론 다양성에도 기여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러한 결과는 오히려 당연한 것이다. 오늘날 웹소설의 작가 풀(Pool)은 과거보다 훨씬 넓고 출간의 문턱은 훨씬 낮으며, 이것이 다채로운 시도들로 연결되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웹소설 시장의 대표적인 히트작들에서 간취되는 문학성은 괄목할 정도이다. 싱숑의 『전지적 독자 시점』, 퉁구스카의 『납골당의 어린왕자』, 유진성의 『광마회귀』는 모두 각 장르에서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는 동시에 고유한 문학적 성취까지 이룬 작품들이다. 독자가 특별한 정서적 상태 - 이해, 공감, 새로운 감정의 경험, 인식의 전환 등 - 를 성공적으로 체험하도록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이중 싱숑과 퉁구스카는 『멸망 이후의 세계』와 『제국사냥꾼』에서도 대중성이 덜할 뿐 문학성으로는 자신의 대표작에 밀리지 않는 성과를 보여주었다. 대표적인 히트작이라는 조건에서 벗어나면 더욱 많은 작품들이 눈에 띈다. 학인생의 『메이지 슬레이어』, 파비야의 『그리스의 방랑기사』, 견마지로의 『추구만리행』, 검미성의 『21세기 반로환동전』, 감기도령의 『전생하고 보니 크툴루』 등은 모두 문학적으로 비평할 가치가 있는 소설들이다. 첨G의 『세상의 끝에서 클리어를 외치다』, 습생의 『무정신검마』, 시코르스키의 『심야십담』 등에서도 정도는 덜하지만 문학성을 논할 만하다. 게다가 이 목록들은 실제 확인이 가능했던 작품 중에서, 그것도 남성향 웹소설에서만 꼽아본 것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이미 20세기 말에 이영도가 등장했을 때부터 그러했지만, 2025년이 절반이나 지난 작금의 시점에서도 장르소설 비평은 충분히 가능하다. 학계에서 문화적으로 해석하고 팬덤에서 장르적으로 분석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평단의 입장에서 문학적으로 비평하는 것이 가능하다. 문학성이 두드러지는 웹소설들이 지금처럼 많았던 적이 없었고, 그들이 제공하는 정서적 체험은 장르적 관습을 매개로 전달되는 것이기에 실제로 고유한 면이 많다. [ 단지 그러한 성취를 해명하고 비평하는 작업이 너무나 희박했기에 ] 이 사실이 널리 알려지지 못했을 뿐이다. 한 명의 장르소설 독자로서 말하자면, 이러한 현실은 아마도 비평계의 경로의존성에서 기인했을 공산이 크다. 장르소설의 편폭이 대부분 길고, 문학성을 담지한 작품을 찾아내기가 어려우며, 기존에 쌓여 있는 비평이 거의 전무하다고 해도 그것이 문학적 평론이 불가능한 이유가 될 수는 없다. 하지만 비평의 시작이 어려워지는 측면은 분명히 있다. 그러니 장르문학에 대한 선호가 웬만큼 강한 비평가가 아니고서는 개척자를 자처할 유인이 없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지적은 이미 2012년부터 있었고(https://mirrorzine.kr/features/39255), 현재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따라서 장르소설의 문학성이 의심받는 것은 이를 밝히려는 사람이 없었던 탓이지 문학성이 없어서는 아니다. 비평가의 문제 때문이지 작가의 문제 때문은 아니다. 비평가들이 이를 ‘문제’로 여길지는 물론 불분명하지만 말이다.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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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서점에 갔다가 든 생각은, 일반 문학 코너에 꽂혀있는 책들이 웹소 잘쓴거보다 내용이든 형식이든 문장이든 딱히 낫다는 보장도 없더라..라는 겁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예전 고전소설 중에서도 신문연재작들도 많이 있잖아요?
요즘 서점에 갔다가 든 생각은, 일반 문학 코너에 꽂혀있는 책들이 웹소 잘쓴거보다 내용이든 형식이든 문장이든 딱히 낫다는 보장도 없더라..라는 겁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예전 고전소설 중에서도 신문연재작들도 많이 있잖아요?
실제로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소설은 본격문학(?)의 범주에 들지 못했죠. 대제학이 문권을 쥐고 있었다는 그 시절을 생각하면 한국 문단이 가끔 연상되기도 합니다.
https://youtu.be/xieq0j0PYdQ?si=QnGlKJyKAoG6gXIO
볼때마다 울어버려서 자주 안 꺼내는데, 또다시 르귄옹의 전미도서상 수상연설을 소환할 수 밖에 없군요. 예술이 자유를 추구하는 한, 어쨌든 우리의 시야는 점점 앞으로 옆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어슐러 K. 르 귄 미국도서상 수상연설
볼때마다 울어버려서 자주 안 꺼내는데, 또다시 르귄옹의 전미도서상 수상연설을 소환할 수 밖에 없군요. 예술이 자유를 추구하는 한, 어쨌든 우리의 시야는 점점 앞으로 옆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논지에 동의합니다만, 문학성에 대한 정의를 보편적인 것으로 수용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해당 정의를 들으면 당장 신비평(과 그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수많은 이들)은 그건 "정서적 영향의 오류"라고 공격할 것이라...
문학성이란 문학 작품에서 드러나는 예술적 속성(= 예술성)으로 정의되어야 합니다. 미학으로 옮겨서 생각해 본다면, 감상자에게 미치는 정서적 영향을 예술성으로 정의하면 추상미술은 미술이 아닐 가능성이 높아지지요.
이영도의 작품이야 고유의 성취에 따라 문학성을 정의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을 것 같습니다... 더 보기
문학성이란 문학 작품에서 드러나는 예술적 속성(= 예술성)으로 정의되어야 합니다. 미학으로 옮겨서 생각해 본다면, 감상자에게 미치는 정서적 영향을 예술성으로 정의하면 추상미술은 미술이 아닐 가능성이 높아지지요.
이영도의 작품이야 고유의 성취에 따라 문학성을 정의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을 것 같습니다... 더 보기
논지에 동의합니다만, 문학성에 대한 정의를 보편적인 것으로 수용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해당 정의를 들으면 당장 신비평(과 그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수많은 이들)은 그건 "정서적 영향의 오류"라고 공격할 것이라...
문학성이란 문학 작품에서 드러나는 예술적 속성(= 예술성)으로 정의되어야 합니다. 미학으로 옮겨서 생각해 본다면, 감상자에게 미치는 정서적 영향을 예술성으로 정의하면 추상미술은 미술이 아닐 가능성이 높아지지요.
이영도의 작품이야 고유의 성취에 따라 문학성을 정의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을 것 같습니다. 주로 떠오르는 것은 관념을 직접 등장인물화하여 탐구하여 그 충돌이나 한계, 성취 등을 드러내려 한다는 것이고(폴라리스 랩소디가 아마 가장 극적인 예가 될 것이고, 피마새/눈마새도 그렇지요. 애초에 드래곤 라자도...) 현실 배경에선 보통 관념을 물화하는 데 그치지만 판타지에선 이들에게 직접 인격을 부여할 수 있다는 차이 때문에 쉽게 긍정하게 되는 것 같아요.
주장하신 정서적 영향은 독자 반응 이론 계열이나 수사학/서사학에선 반기겠지만 그것으로만 작품을 평가하는 것은 오히려 여러 웹소설의 가치를 제한하는 일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말씀드려요. 이미 텍스트릿이 내놓은 비평집도 있고요...
문학성이란 문학 작품에서 드러나는 예술적 속성(= 예술성)으로 정의되어야 합니다. 미학으로 옮겨서 생각해 본다면, 감상자에게 미치는 정서적 영향을 예술성으로 정의하면 추상미술은 미술이 아닐 가능성이 높아지지요.
이영도의 작품이야 고유의 성취에 따라 문학성을 정의하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을 것 같습니다. 주로 떠오르는 것은 관념을 직접 등장인물화하여 탐구하여 그 충돌이나 한계, 성취 등을 드러내려 한다는 것이고(폴라리스 랩소디가 아마 가장 극적인 예가 될 것이고, 피마새/눈마새도 그렇지요. 애초에 드래곤 라자도...) 현실 배경에선 보통 관념을 물화하는 데 그치지만 판타지에선 이들에게 직접 인격을 부여할 수 있다는 차이 때문에 쉽게 긍정하게 되는 것 같아요.
주장하신 정서적 영향은 독자 반응 이론 계열이나 수사학/서사학에선 반기겠지만 그것으로만 작품을 평가하는 것은 오히려 여러 웹소설의 가치를 제한하는 일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말씀드려요. 이미 텍스트릿이 내놓은 비평집도 있고요...
광마회귀는 제 인생 무협이자 인생 “문학”입니다. 가벼운 문체 안에 너무나 많은 내용이 담겨있어요.
다만 21세기 반로환동전은 왜 평가가 좋은지 개인적으로 이해를 못 하고 있습니다..
이영도 작품은 이제 드래곤 라자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다른 추천작 담기 위해 스크랩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다만 21세기 반로환동전은 왜 평가가 좋은지 개인적으로 이해를 못 하고 있습니다..
이영도 작품은 이제 드래곤 라자부터 시작하고 있습니다.
다른 추천작 담기 위해 스크랩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장르/판타지/SF/웹소/환상은 다 다른 용어인데, 글이 넘어가면서 혼재되다보니 답글달기 좀 꺼려지는 부분이 있었어요. 중간에 링크하신 글에서도 '한국 판타지의 긍정적인 미래를 위하여'에서도 환상문학의 범주에 SF와 판타지를 넣어놨네요. 그건 해당 글의 주석에 명시되어 있긴 하지만요.
'한국 판타지의 긍정적인 미래를 위하여'를 보면, 문단에서 제시하는 문학성에 따라 환상문학이 독자에게 불러일으키는 정서적 상태(혹은 감정 중 하나는)는 '회복'이겠죠? 예시로 들어주신 작품 중에서 읽어본 게 '제국사냥꾼'이에요. 전 제국사냥꾼을... 더 보기
'한국 판타지의 긍정적인 미래를 위하여'를 보면, 문단에서 제시하는 문학성에 따라 환상문학이 독자에게 불러일으키는 정서적 상태(혹은 감정 중 하나는)는 '회복'이겠죠? 예시로 들어주신 작품 중에서 읽어본 게 '제국사냥꾼'이에요. 전 제국사냥꾼을... 더 보기
장르/판타지/SF/웹소/환상은 다 다른 용어인데, 글이 넘어가면서 혼재되다보니 답글달기 좀 꺼려지는 부분이 있었어요. 중간에 링크하신 글에서도 '한국 판타지의 긍정적인 미래를 위하여'에서도 환상문학의 범주에 SF와 판타지를 넣어놨네요. 그건 해당 글의 주석에 명시되어 있긴 하지만요.
'한국 판타지의 긍정적인 미래를 위하여'를 보면, 문단에서 제시하는 문학성에 따라 환상문학이 독자에게 불러일으키는 정서적 상태(혹은 감정 중 하나는)는 '회복'이겠죠? 예시로 들어주신 작품 중에서 읽어본 게 '제국사냥꾼'이에요. 전 제국사냥꾼을 읽으면서 이 작품이 문단에서 가치있다고 말하는 정서적 상태나 링크된 글의 '회복'에 이르지 못헀어요. 그런 이유로 제국사냥꾼을 나쁘다 평가하려는 게 아니라, 그런 목적을 가지고 쓰여진 글이 아니라고 여겼거든요. 그래서 퉁구스카의 제국사냥꾼에서 글쓴이가 체험한 상태가 무엇이고, 제국사냥꾼이 어떤 감정적 자극이나 서사적 구조를 통해 그런 상태에 이르게 했는 지 평이 궁금합니다.
글쓴이가 본문에서 말씀하신 것 처럼 장르문학에서 'SF'는 이미 한국에서는 문단안에 포섭되었고, 비평씬이 만들어져서 이미 존재하는 문학성이 비평에 의해 발굴되고 또 '방어'되는 시점에 왔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사실 제목만 보고서는 조금 의아했죠. 이는 도전하고 죽어간 불새, 행복한책읽기 등 열정으로 이루어진 SF 출판사들과 팬들의 노력으로 이루어낸 문학적 토양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봅니다. 판타지의 경우는 SF씬에 하위분과로 남아서 비평의 대상이 되고 있다고 보는 데. 이게 추리와 같은 다른 장르로도 확장될 수 있을 지 기대하는 중이에요. 다만, 이런 비평적 토양은 어떤 이유에서든(지금 댓글로 다 정리하기 힘든) 웹소설로는 이어지지 않다고 보는 데. meson님과 같이 이미 웹소에서 문학성을 보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면, 언젠가는 비평가들이 나타나고 상아탑을 세워주지 않을까 기대해볼만 하네요.
그리고, 좋은 글을 써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댓글들이 글 본문보다는 제목을 보고 본문과 관계없이 '나는 문학이라 생각한다 아니다.'정도만 말하고 가는 게 참 안타까운 풍경입니다. 인터넷의 글쓰기라는 게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한데 그냥 글쓴이가 아닌데도 제가 다 '긁'해버림.
'한국 판타지의 긍정적인 미래를 위하여'를 보면, 문단에서 제시하는 문학성에 따라 환상문학이 독자에게 불러일으키는 정서적 상태(혹은 감정 중 하나는)는 '회복'이겠죠? 예시로 들어주신 작품 중에서 읽어본 게 '제국사냥꾼'이에요. 전 제국사냥꾼을 읽으면서 이 작품이 문단에서 가치있다고 말하는 정서적 상태나 링크된 글의 '회복'에 이르지 못헀어요. 그런 이유로 제국사냥꾼을 나쁘다 평가하려는 게 아니라, 그런 목적을 가지고 쓰여진 글이 아니라고 여겼거든요. 그래서 퉁구스카의 제국사냥꾼에서 글쓴이가 체험한 상태가 무엇이고, 제국사냥꾼이 어떤 감정적 자극이나 서사적 구조를 통해 그런 상태에 이르게 했는 지 평이 궁금합니다.
글쓴이가 본문에서 말씀하신 것 처럼 장르문학에서 'SF'는 이미 한국에서는 문단안에 포섭되었고, 비평씬이 만들어져서 이미 존재하는 문학성이 비평에 의해 발굴되고 또 '방어'되는 시점에 왔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사실 제목만 보고서는 조금 의아했죠. 이는 도전하고 죽어간 불새, 행복한책읽기 등 열정으로 이루어진 SF 출판사들과 팬들의 노력으로 이루어낸 문학적 토양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봅니다. 판타지의 경우는 SF씬에 하위분과로 남아서 비평의 대상이 되고 있다고 보는 데. 이게 추리와 같은 다른 장르로도 확장될 수 있을 지 기대하는 중이에요. 다만, 이런 비평적 토양은 어떤 이유에서든(지금 댓글로 다 정리하기 힘든) 웹소설로는 이어지지 않다고 보는 데. meson님과 같이 이미 웹소에서 문학성을 보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면, 언젠가는 비평가들이 나타나고 상아탑을 세워주지 않을까 기대해볼만 하네요.
그리고, 좋은 글을 써주셨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댓글들이 글 본문보다는 제목을 보고 본문과 관계없이 '나는 문학이라 생각한다 아니다.'정도만 말하고 가는 게 참 안타까운 풍경입니다. 인터넷의 글쓰기라는 게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한데 그냥 글쓴이가 아닌데도 제가 다 '긁'해버림.
장문의 댓글 감사드립니다. 본문에서 문학성을 논할 수 있는 정서적 상태로 '이해, 공감, 새로운 감정의 경험, 인식의 전환과 같은 수많은 인지적 변화'를 제시하기는 했습니다만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동의한다고 치고 넘아간다고 하더라도 위에서 예시로 든 소설들이 실제로 그런 정서적 상태를 제공하는지에 대해서는 또 이견이 나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게 당연하기도 하죠. 이 글은 선언과 관점이 있는 글이지 구체적인 논증을 한 글이 아니니까요. 결국 설득이든 이해든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비평이 필요할 겁... 더 보기
장문의 댓글 감사드립니다. 본문에서 문학성을 논할 수 있는 정서적 상태로 '이해, 공감, 새로운 감정의 경험, 인식의 전환과 같은 수많은 인지적 변화'를 제시하기는 했습니다만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동의한다고 치고 넘아간다고 하더라도 위에서 예시로 든 소설들이 실제로 그런 정서적 상태를 제공하는지에 대해서는 또 이견이 나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게 당연하기도 하죠. 이 글은 선언과 관점이 있는 글이지 구체적인 논증을 한 글이 아니니까요. 결국 설득이든 이해든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비평이 필요할 겁니다. 인상비평이 아니라, 작품을 일관된 관점하에 재서술하고 주제를 건져내며 성취를 정리해내는 정격적인 비평 말이죠.
이런 글을 쓴 마당이니 저도 그런 비평을 할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본문에서의 광오함과는 달리, 한편으로는 이 글이 누군가가 비평을 수행하도록 하는 계기나 영감으로 작용할 수는 없을까 하는 속 편한 생각도 조금은 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하려면 죽이 되든 밥이 되는 제대로 해야 부끄럽지 않을 텐데, 그러자면 어쩔 수 없이 공력이 들기 때문이겠지요. 저야 예전에 채식주의자 글도 쓰고 눈마새 글도 썼습니다만, 본문에서 언급한 것처럼 작품의 편폭이 길고 쌓여 있는 논의가 적을수록 비평이 해내야 할 몫은 커지기 마련일 겁니다. 이런 이유로 저는 뭐라도 시험삼아 써야 한다면 이왕이면 짧고 굵은 작품을 - 즉, 추구만리행이나 반로환동전을 - 대상으로 해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글이야 마감이 쓰는 것이니 무슨 기약이 있는 것도 아니긴 하지만요.
그렇지만 이렇게 댓글을 써 주셨으니, 말씀하신 제국사냥꾼도... 노력은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본편만 700화가 넘는 작품으로 알고 있어서 이걸로 시작을 하면 거의 기진맥진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비평을 쓴다고 해도 웬만하면 견마지로부터 하겠지만, 그래도, 하다 보면 갈 수는 있겠죠. 그리고 이렇게 뜬구름 잡는 소리만 하는 것은, 물론 짤막하게 말씀드려서는 그냥 영감만 공유될 뿐이지 논증이 안 되다 보니 의미가 없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단평이야 당장 소설넷 같은 곳에 찾아보면 뭐 많이 있습니다만, 어디서 신형철 평론가도 말했듯이, 평가는 짧으면 짧을수록 폭력이 될 수 있는 법이니까요. 그래서 좀 구차해 보이긴 합니다만 일차적인 답변은 이걸로 갈음해 보려 합니다.
말씀해 주신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는 저도 대체로 공감합니다. 좋은 댓글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이런 글을 쓴 마당이니 저도 그런 비평을 할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본문에서의 광오함과는 달리, 한편으로는 이 글이 누군가가 비평을 수행하도록 하는 계기나 영감으로 작용할 수는 없을까 하는 속 편한 생각도 조금은 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하려면 죽이 되든 밥이 되는 제대로 해야 부끄럽지 않을 텐데, 그러자면 어쩔 수 없이 공력이 들기 때문이겠지요. 저야 예전에 채식주의자 글도 쓰고 눈마새 글도 썼습니다만, 본문에서 언급한 것처럼 작품의 편폭이 길고 쌓여 있는 논의가 적을수록 비평이 해내야 할 몫은 커지기 마련일 겁니다. 이런 이유로 저는 뭐라도 시험삼아 써야 한다면 이왕이면 짧고 굵은 작품을 - 즉, 추구만리행이나 반로환동전을 - 대상으로 해야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글이야 마감이 쓰는 것이니 무슨 기약이 있는 것도 아니긴 하지만요.
그렇지만 이렇게 댓글을 써 주셨으니, 말씀하신 제국사냥꾼도... 노력은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본편만 700화가 넘는 작품으로 알고 있어서 이걸로 시작을 하면 거의 기진맥진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비평을 쓴다고 해도 웬만하면 견마지로부터 하겠지만, 그래도, 하다 보면 갈 수는 있겠죠. 그리고 이렇게 뜬구름 잡는 소리만 하는 것은, 물론 짤막하게 말씀드려서는 그냥 영감만 공유될 뿐이지 논증이 안 되다 보니 의미가 없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단평이야 당장 소설넷 같은 곳에 찾아보면 뭐 많이 있습니다만, 어디서 신형철 평론가도 말했듯이, 평가는 짧으면 짧을수록 폭력이 될 수 있는 법이니까요. 그래서 좀 구차해 보이긴 합니다만 일차적인 답변은 이걸로 갈음해 보려 합니다.
말씀해 주신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는 저도 대체로 공감합니다. 좋은 댓글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https://redtea.kr/free/3942
https://redtea.kr/free/4478
예전에 이 사이트에서 문학과 문학성에 대해 논했던 글입니다. 첫번째는 밥 딜런의 노벨상 수상이란 결과에 대한 비판인데 여기서는 문학장에서 의미있게 받아들여지는 문학성이 무엇이며, 어떤 조류가 있는지에 대한 글입니다.
둘째는 영화란 장르가... 더 보기
https://redtea.kr/free/4478
예전에 이 사이트에서 문학과 문학성에 대해 논했던 글입니다. 첫번째는 밥 딜런의 노벨상 수상이란 결과에 대한 비판인데 여기서는 문학장에서 의미있게 받아들여지는 문학성이 무엇이며, 어떤 조류가 있는지에 대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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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이 사이트에서 문학과 문학성에 대해 논했던 글입니다. 첫번째는 밥 딜런의 노벨상 수상이란 결과에 대한 비판인데 여기서는 문학장에서 의미있게 받아들여지는 문학성이 무엇이며, 어떤 조류가 있는지에 대한 글입니다.
둘째는 영화란 장르가 궁금하다고는 하는데... 실제로는 20세기 소설 가운데 특정한 비평 조류를 다루고 있습니다.
두 글 모두 좀 고리타분한 구석이 있습니다. 문학장이란 말을 쓰면서 제도주의자인 척하는데 군데군데 형식주의적인 냄새도 좀 진하게 나고요... 그래도 meson님이 궁금해하시는 게 소위 주류문학계의 의견인 거 같은데 인터넷에서 쉬이 구할 수 있는 의견 중에서는 가장 가깝지 않을까 싶네요.
물론 뭐... 링크의 팟저님이라면 "대다수의 장르소설이 문학장에서 의미 있게 다뤄지지 않는 이유는 대개가 과거의 문학이 선취해왔던 구시대적 미적 감흥을 오늘날의 소재만 바꾸어서 되풀이하기 때문"이라고, 그러니까 간략히 줄여서 "키치이기 때문"이라고 말할 것 같긴 하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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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이 사이트에서 문학과 문학성에 대해 논했던 글입니다. 첫번째는 밥 딜런의 노벨상 수상이란 결과에 대한 비판인데 여기서는 문학장에서 의미있게 받아들여지는 문학성이 무엇이며, 어떤 조류가 있는지에 대한 글입니다.
둘째는 영화란 장르가 궁금하다고는 하는데... 실제로는 20세기 소설 가운데 특정한 비평 조류를 다루고 있습니다.
두 글 모두 좀 고리타분한 구석이 있습니다. 문학장이란 말을 쓰면서 제도주의자인 척하는데 군데군데 형식주의적인 냄새도 좀 진하게 나고요... 그래도 meson님이 궁금해하시는 게 소위 주류문학계의 의견인 거 같은데 인터넷에서 쉬이 구할 수 있는 의견 중에서는 가장 가깝지 않을까 싶네요.
물론 뭐... 링크의 팟저님이라면 "대다수의 장르소설이 문학장에서 의미 있게 다뤄지지 않는 이유는 대개가 과거의 문학이 선취해왔던 구시대적 미적 감흥을 오늘날의 소재만 바꾸어서 되풀이하기 때문"이라고, 그러니까 간략히 줄여서 "키치이기 때문"이라고 말할 것 같긴 하지만요.
위에 올린 건 비슷한 주제에 대해 재밌게 읽었던 적 있는 글이니 님께서도 한번 읽어보시라고 올렸고...
제 의견을 피력하자면, 장르소설은 문학이 맞습니다. 다만 이건 아무런 의미값도 될 수가 없겠죠. 본디 뜻하시는 건 장르소설이, 정확히는 meson님께서 본문에서 언급하신 장르소설들이 제도권 문학에서 진지하게 다룰만한 문학이냐, 일 테니까요.
아쉽게도 제도적인 측면에서보든, 형식적인 측면에서보든 그렇지 못합니다.
먼저 제도적인 측면을 보자면, 본문에서 잘 말씀해주셨듯 기성 제도권 문학에서 작품으로서 90년대 후반부... 더 보기
제 의견을 피력하자면, 장르소설은 문학이 맞습니다. 다만 이건 아무런 의미값도 될 수가 없겠죠. 본디 뜻하시는 건 장르소설이, 정확히는 meson님께서 본문에서 언급하신 장르소설들이 제도권 문학에서 진지하게 다룰만한 문학이냐, 일 테니까요.
아쉽게도 제도적인 측면에서보든, 형식적인 측면에서보든 그렇지 못합니다.
먼저 제도적인 측면을 보자면, 본문에서 잘 말씀해주셨듯 기성 제도권 문학에서 작품으로서 90년대 후반부... 더 보기
위에 올린 건 비슷한 주제에 대해 재밌게 읽었던 적 있는 글이니 님께서도 한번 읽어보시라고 올렸고...
제 의견을 피력하자면, 장르소설은 문학이 맞습니다. 다만 이건 아무런 의미값도 될 수가 없겠죠. 본디 뜻하시는 건 장르소설이, 정확히는 meson님께서 본문에서 언급하신 장르소설들이 제도권 문학에서 진지하게 다룰만한 문학이냐, 일 테니까요.
아쉽게도 제도적인 측면에서보든, 형식적인 측면에서보든 그렇지 못합니다.
먼저 제도적인 측면을 보자면, 본문에서 잘 말씀해주셨듯 기성 제도권 문학에서 작품으로서 9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는 인터넷 소설 특유의 심미성에 대한 접근은 이뤄지지 않았거나, 이뤄졌던들 단발성에 그치고 별 반향을 못 일으켰습니다. 한편, 이러한 인터넷 소설들을 향유하는 계층에서 기성 문학에 대한 반대 입장에서 자신들이 느끼고 경험한 바를 이론화하지도 않았고요.
다음으로 형식적인 측면에서도 그렇지 못하다는 게 무슨 뜻이냐면, 아마 이건 많은 분들의 반발을 살 거 같은데, 대다수의 인터넷 소설들이 문학계에서 진지한 비평의 대상이 될만한 작품이 못되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사람마다 의견이 다를 수는 있겠죠. 그리고 문학장 안밖의 여러 사람들이 장르소설을 다루지 않는 가장 결정적인 요인이라고 할 수도 없을 거고요.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제도권에서 인정 받냐 아니냐를 따지기 전에 작품 내적으로 결핍 사유가 분명해요. 그 결핍은 meson님께서 말씀하신 '문학성'을 대부분의 장르소설들이 결핍하고 있기 때문이고요.
그럼 그 문학성이 무얼까요? 사람마다 각자 의견이 있겠죠. 누구는 호메로스부터 시작하는 아주 역사주의적인 관점을 들이밀 수도 있겠고, 누구는 근대문학을 논할 수도 있겠고, 해럴드 블룸처럼 자기만의 형식주의를 쌓는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meson님처럼 '독자가 특정한 정서적 상태를 체험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고요. 허나 과학을 비롯한 다른 많은 제학과 예술 분야가 그러하듯, 보편적으로 문학성은 해당 시기의 문학장에 의해 결정됩니다. 제도적인 입장을 다소 수용한다면, 사실 이론의 여지도 없는 부분이죠.
근대 문학 이후로 문학성의 가장 핵심을 차지하는 키워드는 '문학에서(만) 구현할 수 있는 아름다움'이었습니다. 시기에 따라, 집단에 따라 구현하는 바가 달라졌을지언정, 문학성을 추구하는 문학가들이 출발하는 최초의 고민은 늘 같았죠.
뻔한 소립니다. 영화나 드라마, 뮤지컬로도 구현가능한 아름다움보다는 문학에서만 추구할 수 있는 아름다움을 찾아내고 그걸 문학으로 구현한 작품이 더 수준 높은 문학성을 갖추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어요?
사실 여기서부터 대부분의 장르물들은 탈락입니다.
드래곤라자나 눈마새를 비롯하여 본문과 댓글에서 언급된 수많은 소설들은 각자 제 나름의 심미적 쾌락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그중 과연 '문학으로서만 구현할 수 있는 아름다움'을 추구한 작품은 과연 몇 개나 될까요? 드래곤라자든, 눈마새든, 전독시든, 광마회귀든, 칼맛별의 21세기 반로환동전이든 그 이야기를 드라마나 영화, 게임으로 만드는 게 아니라 꼭 소설로 보았을 때만 드러나는 아름다움이 과연 있나요?
제가 보기에는 하나도 없습니다. 당연하죠. 애초에 작가들은 여기에 관심조차 없었으니까요. 제가 읽었던 장르소설 가운데 여기에 부합하는 소설은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와 로버드 홀드스톡의 '미사고 시리즈'가 있습니다. 이 두 소설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화자성'을 환기합니다. 테드 창이 형식적으로 성취한다면, 로버트 홀드스톡의 소설 속 세계관과 서사로서 화자성이란 주제를 표현한다랄까요(그래서 미사고 연작은 꼭 환상문학으로 표현된 이스마엘 카다레의 H 서류 같은 느낌을 주죠.). 그러니 당신 인생의 이야기의 영화화가 그토록 엉망진창일 수밖에 없는 겁니다. 다른 매체로 옮겨질 경우 원작이 선사했던, 문학이란 미디어와 아주 단단히 결부된 미적 심상과 주제의식이 다 박살이 나버리니까요. 그걸 다른 걸로 대체해야만하니까요.
소설에서 화자는 가장 근원적인 요소입니다. 화자 없는 소설이란 존재할 수 없죠. 대화로만 구성된 소설이래도 최소한 그 대화를 바라보는 시점은 존재하며, 그 시점이 곧 화자가 됩니다. 그러니 소설에서만 구현할 수 있는 아름다움을 추구하고자 할 때는 당연히 이 화자에 대한 고민에서부터 출발해야합니다. 오늘날에 집필되는 유의미한 문학 작품 가운데서도 명시적으로 화자성이 드러나지 않는 작품은 있습니다만, 그조차도 화자의 성격에 대한 의식은 분명히 있습니다. 극중 인물이 아닌 3인칭 화자일지언정, 내러티브에 부합하는 화자의 캐릭터가 강렬히 느껴지는 작품들이 있죠. 코맥 매카시나 이언 매큐언(특히 암스테르담)의 소설들이 그러합니다.
물론, 이러한 기준에서 예외가 될 작품들은 있습니다. 그러니까 질적인 측면에서 문학적으로 떨어지는 작품들이요. 그리고 이런 작품들조차도 제도권 문학에서는 다룹니다. 관성적으로요. 하지만 그런 작품들 역시, 일부를 제외하면 과거의 문학들이 닦아놓은 화자성에 의해 합의된 최소한의 토대는 의식하면서 집필됩니다. 흔히 말하는 '작법'이란 형태로요. 예컨대 서술 시점과 화자 시점 사이의 분리와 이 분리에 근거한 시점의 통일과 해체 등이요. 그러나 대부분의 인터넷 소설들은 그렇지 않죠. 일단 화자가 통일되기나 하면 다행이고, 시점 변화를 하면서도 그 변화의 형식적 근거 따위는 찾아보기 어려운 경우가 부지기수입니다.
제 의견을 피력하자면, 장르소설은 문학이 맞습니다. 다만 이건 아무런 의미값도 될 수가 없겠죠. 본디 뜻하시는 건 장르소설이, 정확히는 meson님께서 본문에서 언급하신 장르소설들이 제도권 문학에서 진지하게 다룰만한 문학이냐, 일 테니까요.
아쉽게도 제도적인 측면에서보든, 형식적인 측면에서보든 그렇지 못합니다.
먼저 제도적인 측면을 보자면, 본문에서 잘 말씀해주셨듯 기성 제도권 문학에서 작품으로서 9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는 인터넷 소설 특유의 심미성에 대한 접근은 이뤄지지 않았거나, 이뤄졌던들 단발성에 그치고 별 반향을 못 일으켰습니다. 한편, 이러한 인터넷 소설들을 향유하는 계층에서 기성 문학에 대한 반대 입장에서 자신들이 느끼고 경험한 바를 이론화하지도 않았고요.
다음으로 형식적인 측면에서도 그렇지 못하다는 게 무슨 뜻이냐면, 아마 이건 많은 분들의 반발을 살 거 같은데, 대다수의 인터넷 소설들이 문학계에서 진지한 비평의 대상이 될만한 작품이 못되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사람마다 의견이 다를 수는 있겠죠. 그리고 문학장 안밖의 여러 사람들이 장르소설을 다루지 않는 가장 결정적인 요인이라고 할 수도 없을 거고요.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제도권에서 인정 받냐 아니냐를 따지기 전에 작품 내적으로 결핍 사유가 분명해요. 그 결핍은 meson님께서 말씀하신 '문학성'을 대부분의 장르소설들이 결핍하고 있기 때문이고요.
그럼 그 문학성이 무얼까요? 사람마다 각자 의견이 있겠죠. 누구는 호메로스부터 시작하는 아주 역사주의적인 관점을 들이밀 수도 있겠고, 누구는 근대문학을 논할 수도 있겠고, 해럴드 블룸처럼 자기만의 형식주의를 쌓는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meson님처럼 '독자가 특정한 정서적 상태를 체험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고요. 허나 과학을 비롯한 다른 많은 제학과 예술 분야가 그러하듯, 보편적으로 문학성은 해당 시기의 문학장에 의해 결정됩니다. 제도적인 입장을 다소 수용한다면, 사실 이론의 여지도 없는 부분이죠.
근대 문학 이후로 문학성의 가장 핵심을 차지하는 키워드는 '문학에서(만) 구현할 수 있는 아름다움'이었습니다. 시기에 따라, 집단에 따라 구현하는 바가 달라졌을지언정, 문학성을 추구하는 문학가들이 출발하는 최초의 고민은 늘 같았죠.
뻔한 소립니다. 영화나 드라마, 뮤지컬로도 구현가능한 아름다움보다는 문학에서만 추구할 수 있는 아름다움을 찾아내고 그걸 문학으로 구현한 작품이 더 수준 높은 문학성을 갖추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어요?
사실 여기서부터 대부분의 장르물들은 탈락입니다.
드래곤라자나 눈마새를 비롯하여 본문과 댓글에서 언급된 수많은 소설들은 각자 제 나름의 심미적 쾌락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그중 과연 '문학으로서만 구현할 수 있는 아름다움'을 추구한 작품은 과연 몇 개나 될까요? 드래곤라자든, 눈마새든, 전독시든, 광마회귀든, 칼맛별의 21세기 반로환동전이든 그 이야기를 드라마나 영화, 게임으로 만드는 게 아니라 꼭 소설로 보았을 때만 드러나는 아름다움이 과연 있나요?
제가 보기에는 하나도 없습니다. 당연하죠. 애초에 작가들은 여기에 관심조차 없었으니까요. 제가 읽었던 장르소설 가운데 여기에 부합하는 소설은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와 로버드 홀드스톡의 '미사고 시리즈'가 있습니다. 이 두 소설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화자성'을 환기합니다. 테드 창이 형식적으로 성취한다면, 로버트 홀드스톡의 소설 속 세계관과 서사로서 화자성이란 주제를 표현한다랄까요(그래서 미사고 연작은 꼭 환상문학으로 표현된 이스마엘 카다레의 H 서류 같은 느낌을 주죠.). 그러니 당신 인생의 이야기의 영화화가 그토록 엉망진창일 수밖에 없는 겁니다. 다른 매체로 옮겨질 경우 원작이 선사했던, 문학이란 미디어와 아주 단단히 결부된 미적 심상과 주제의식이 다 박살이 나버리니까요. 그걸 다른 걸로 대체해야만하니까요.
소설에서 화자는 가장 근원적인 요소입니다. 화자 없는 소설이란 존재할 수 없죠. 대화로만 구성된 소설이래도 최소한 그 대화를 바라보는 시점은 존재하며, 그 시점이 곧 화자가 됩니다. 그러니 소설에서만 구현할 수 있는 아름다움을 추구하고자 할 때는 당연히 이 화자에 대한 고민에서부터 출발해야합니다. 오늘날에 집필되는 유의미한 문학 작품 가운데서도 명시적으로 화자성이 드러나지 않는 작품은 있습니다만, 그조차도 화자의 성격에 대한 의식은 분명히 있습니다. 극중 인물이 아닌 3인칭 화자일지언정, 내러티브에 부합하는 화자의 캐릭터가 강렬히 느껴지는 작품들이 있죠. 코맥 매카시나 이언 매큐언(특히 암스테르담)의 소설들이 그러합니다.
물론, 이러한 기준에서 예외가 될 작품들은 있습니다. 그러니까 질적인 측면에서 문학적으로 떨어지는 작품들이요. 그리고 이런 작품들조차도 제도권 문학에서는 다룹니다. 관성적으로요. 하지만 그런 작품들 역시, 일부를 제외하면 과거의 문학들이 닦아놓은 화자성에 의해 합의된 최소한의 토대는 의식하면서 집필됩니다. 흔히 말하는 '작법'이란 형태로요. 예컨대 서술 시점과 화자 시점 사이의 분리와 이 분리에 근거한 시점의 통일과 해체 등이요. 그러나 대부분의 인터넷 소설들은 그렇지 않죠. 일단 화자가 통일되기나 하면 다행이고, 시점 변화를 하면서도 그 변화의 형식적 근거 따위는 찾아보기 어려운 경우가 부지기수입니다.
장문의 댓글 감사합니다. 문학관의 다양성은 언제나 전제로 인정하고 들어가야 할 부분이죠. 다만 저도 뭐 문학장 잘 모릅니다만, 작금의 문학장에도 문학관의 다양성이 있는 반면에 어떤 공유할 수 있는 준거점도 함께 존재한다면 그걸 토대로 장르소설의 문학성을 판별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생각은 아마도 공유하시는 것 같아서 기쁩니다.
그러면 결국 중요한 건 비평이겠죠. 이게 나늬라고 설득하기 이전에, 나늬인지 보늬인지 구별하기 위해서라도 일단은 궁구를 해서 평론을 풀어 써놓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갑자기 눈마새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는 제가 눈마새 글을 쓰면서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 더 보기
그러면 결국 중요한 건 비평이겠죠. 이게 나늬라고 설득하기 이전에, 나늬인지 보늬인지 구별하기 위해서라도 일단은 궁구를 해서 평론을 풀어 써놓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갑자기 눈마새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는 제가 눈마새 글을 쓰면서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 더 보기
장문의 댓글 감사합니다. 문학관의 다양성은 언제나 전제로 인정하고 들어가야 할 부분이죠. 다만 저도 뭐 문학장 잘 모릅니다만, 작금의 문학장에도 문학관의 다양성이 있는 반면에 어떤 공유할 수 있는 준거점도 함께 존재한다면 그걸 토대로 장르소설의 문학성을 판별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생각은 아마도 공유하시는 것 같아서 기쁩니다.
그러면 결국 중요한 건 비평이겠죠. 이게 나늬라고 설득하기 이전에, 나늬인지 보늬인지 구별하기 위해서라도 일단은 궁구를 해서 평론을 풀어 써놓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갑자기 눈마새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는 제가 눈마새 글을 쓰면서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작업을 해본 뒤에도 여전히 이런 건 문학장에서 다룰 가치가 없다고 하면 뭐, 본문 말미의 링크글이나 이런 글(https://web.archive.org/web/20190331163829/http://textreet.net/board_GybH00/15224)에서 말하는 대로 문단 비평가와는 좀 다른 준거점을 가진 장르비평가(?)를 따로 양성하든지 해야지 어쩔 수 없겠지만요.
이렇게 쓰고 보니 정말로 후속 글을 써야 할 것 같아서 굉장히 부담스럽긴 합니다만 뭐 아무튼 그렇습니다. 유익한 댓글 감사드립니다.
그러면 결국 중요한 건 비평이겠죠. 이게 나늬라고 설득하기 이전에, 나늬인지 보늬인지 구별하기 위해서라도 일단은 궁구를 해서 평론을 풀어 써놓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갑자기 눈마새 이야기가 나오는 이유는 제가 눈마새 글을 쓰면서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작업을 해본 뒤에도 여전히 이런 건 문학장에서 다룰 가치가 없다고 하면 뭐, 본문 말미의 링크글이나 이런 글(https://web.archive.org/web/20190331163829/http://textreet.net/board_GybH00/15224)에서 말하는 대로 문단 비평가와는 좀 다른 준거점을 가진 장르비평가(?)를 따로 양성하든지 해야지 어쩔 수 없겠지만요.
이렇게 쓰고 보니 정말로 후속 글을 써야 할 것 같아서 굉장히 부담스럽긴 합니다만 뭐 아무튼 그렇습니다. 유익한 댓글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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