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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5/11/27 11:12:06
Name   joel
Subject   듣지 못 하는 아이들의 야구, 만화 '머나먼 갑자원'.
풍진, 이라는 병이 있습니다. 건강한 사람이라면 감기 비슷하게 앓고 지나가면 그만인 가벼운 병이지요. 그런데 임산부에게는 정말 악마 같은 병입니다. 임신 중에 풍진에 걸리면 태아에게 치명적인 장애가 발생하거든요. 주로 청각과 심장에 장애를 일으킵니다.

일본의 오키나와에는 미군 기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1964년, 미국에서 유행한 풍진이 미군 기지를 통해 오키나와로 퍼져나가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 결과 약 500명의 아이들이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고, 그 아이들 중 대부분은 청각 장애였지요. 이 아이들을 위해 후쿠사토 농아 학교가 설립됩니다.

지금부터 이야기 할 만화, '머나먼 갑자원'은 바로 이 후쿠사토 농아 학교의 야구부원들의 이야기를 다룬 논픽션입니다.

갑자원(고시엔) 이란 본래 일본의 야구장 이름인데, 이 고시엔 구장에서 전국고교야구대회가 열리기 때문에 사실상 이 대회를 가리키는 말이지요. 야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일본 야구부원들과 지역 주민들의 꿈의 무대가 바로 이 고시엔입니다.

머나먼 갑자원의 첫 페이지는, 비행기가 날아가는 와중에도 너무나 해맑게 웃고 있는 아기와 소음을 피하려 귀를 막는 어머니의 모습으로 시작합니다. 어머니는 아이를 병원으로 데려갔다가 풍진으로 인한 청각 장애 라는 청천벽력 같은 판정을 받지요. 그로부터 시간이 흘러, 아이는 초등학교 5학년이 됩니다. 듣지 못 하는 아이, 주인공 다케아키는 놀이터에서도 또래들에게 따돌림 당하며 외롭게 자라납니다. 그런 다케아키의 낙은 이웃집 형이 가르쳐준 캐치볼과, 그로 인해 동경하게 된 야구, 그리고 갑자원입니다. 중학생이 된 다케아키는 야구를 좋아하는 농아학교의 친구들과 함께 야구를 해보려 합니다.

헌데 야구는 '소리'가 대단히 중요한 종목입니다. 공이 방망이에 맞는 소리를 듣고 공이 어디로 날아올지를 예측해야 하고 서로 목소리를 내어 자신의 위치를 알려야 하거든요. 이것이 불가능한 다케아키와 친구들에겐 치명적인 약점이 있는 셈이지요. 그들은 이웃 학교의 야구부를 찾아가 볼보이라도 좋으니 팀에 끼워달라고 부탁하지만 매몰차게 거절당하지요. 주변 사람들의 도움으로 야구부를 만들게 되지만 이번엔 농아학교는 갑자원 대회를 주관하는 연맹에 가입할 수 없다는 사실이 알려집니다. 그러나 다케아키와 아이들은 포기하지 않았고, 흙투성이가 되도록 뛰면서 졸업할 때 까지 어떻게든 1승만이라도 해보자던 다짐을 실제로 이뤄냅니다. 그리고 고교 마지막 해에는 마침내 연맹에도 가입하여 갑자원으로 가는 예선에 참가할 자격을 얻지요.

안타깝게도 이 만화는 논픽션입니다. 즉, 해피 엔딩이나 노력이 결실을 맺는 기적 같은 이야기는 없어요. 만화 제목이 '머나먼' 갑자원이듯, 갑자원 근처에도 가보지 못 합니다. 누구보다도 치열했던 야구 소년들의 고교 시절이 끝나고, 야구부는 폐부됩니다. 후쿠사토 농아 학교도 농아들의 졸업과 함께 폐교되지요. 그렇게 학교를 마치고 세상 속으로 내던져진 다케아키에게는 한층 더 잔인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다케아키는 오키나와를 떠나 도쿄로 갑니다. 물류업체에 취직한 다케아키는 어떻게든 주변의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간단한 수화를 만들어 알려주면서 그들과 함께 살아가려 노력합니다. 그러나 그를 이해해주던 상사가 전근을 간 이후 새로 온 관리자는 '네가 장애를 가졌다 해서 봐주지 않을 거다' 라고 선언하더니 그에게 불가능한 전화 받기 같은 업무를 떠넘깁니다. 다케아키가 전화를 제대로 받지 못 해 사고가 터지고, 그는 자신이 저지른 일을 수습하겠다며 밤늦게까지 일 하다가 쓰러지지요.

전화로 회사에 사정을 말하고 병원에 구급차를 불러야 했지만 다케아키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죠. 주변의 사람들에게 도움을 구해보지만 아무도 도와주지 않고 오히려 다케아키에게 화를 낼 뿐입니다. 간신히 다케아키와 같은 지역에서 학교를 다니던 농아 친구에게 발견되어 병원으로 실려가 폐렴이라는 진단을 받게 됩니다. 결국 다케아키는 자신이 동경하던 '정상인과 똑같은 삶'을 포기하고 오키나와로 돌아옵니다. 모든 것을 잃은 채. 자신에게 야구를 가르쳐 주었던 감독님을 만나 '아무리 노력해도 변하는 게 없었다' 며 눈물을 흘리지요.

그러던 어느 날 다케아키는 옛 농아학교의 친구, 고이치를 만납니다. 고이치는 청각 뿐만 아니라 심장에도 장애를 가진 아이였고, 그로 인해 뛸 수도 없는 몸이었습니다. 하지만 고이치는 심장 수술을 받은 후 꾸준히 운동하면서 마침내 뛰어도 좋다는 진단을 받은상태였지요. 그렇게 '난 야구도 할 수 있다' 며 의지를 불태우는 고이치를 보면서 다케아키는 다시 한 번 용기를 얻습니다. 마지막으로, 다케아키와 옛 야구부원들은 오사카에 있는 갑자원 야구장에서 모입니다. 그토록 가고 싶어했던 장소에 서서 다케아키는 그동안 자신이 그토록 싫어했던 수화가, 자신과 타인을 잇는 연결 고리가 되어 자신을 자유롭게 해줄 거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렇게 만화가 끝납니다.

이 만화를 흔하디 흔한 '감동적인 이야기'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것은 바로 이 처절한 현실묘사에 있습니다. 만화를 읽는 독자들이 '이만하면 대충 해피엔딩으로 얼버무리고 끝내도 되잖아' 라는 생각을 품으려는 순간마다 냉혹한 현실을 들이대지요.

다케아키는 이 만화에서 끊임없이 장애를 극복하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남들이 할 수 있는 일을 나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하지요. 그렇기에 다케아키에게 있어 수화는 애증의 대상입니다. 수화가 있기에 다른 사람과 소통할 수 있지만 그 수화는 다케아키의 정체성을 '농아' 라고 못 박아 버리거든요. 하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다케아키는 그토록 거부하던 수화를 받아들입니다. 자신이 '정상인'과 같은 사람이 될 필요가 있는 게 아니라 있는 그대로 자신을 긍정하고 타인과 소통하는 것이 소중하다는 것을 깨달은 후에야, 다케아키는 자유를 얻지요. 다케아키는 결국 자신의 의지로 세상을 바꾸기 보다는 자신을 바꾸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이 만화가 수많은 히어로물처럼 노력과 의지로 세상을 바꾸는 내용이었다면 이토록 명작이 되지는 못 했겠지요.

그렇게 이 만화는 '장애' 라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화두를 던져줍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텔레파시를 쓸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게 장애라고는 생각하지 않지요. 텔레파시를 쓸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엔 없거든요. 만약 그런 초능력자들의 세상이 있다면 어떨까요. 야구 선수들은 손짓 발짓으로 불편하게 사인을 보내는 대신 실시간으로 작전을 주고받을 수 있을 것이고, 축구 선수들은 미리 약속된 전술이 없어도 언제 패스를 하고 언제 움직일 것인지를 알려줄 수가 있겠죠. 만약 우리가 이런 세상에 떨어진다면 어떨까요. '텔레파시를 쓸 수 없는 장애아' 라는 이유로 '너희는 운동을 할 수 없어!' 라는 소리를 들어야 하고, 졸업 후 취직을 한다면 우리가 전화기 라고 부르는 물건이 '장애인용 텔레파시 단말기' 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을 봐야 하겠죠. 직장 동료들의 '너 때문에 내가 불편하게 텔레파시 단말기를 들고 다녀야 하잖아' 라는 비아냥은 덤일 거고요.

그러니 어쩌면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진정 불편하게 하는 건 그 불편함 자체가 아니라, 자신들이 할 수 없는 것을 당연히 해야 한다는 전제 하에 설계된 이 세상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덧붙이면, 이 만화의 또다른 가치는 다케아키와 야구부원들을 둘러싼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가 충실하게 묘사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야구 소년들이 야구를 할 수 있도록 백방으로 노력하는 어른들, 그들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려 노력하는 농아신문의 기자들이 나오지요. 그리고 결정적으로 아이들의 어머니들의 감정도 그려집니다.

위에서 풍진이라는 병이 악마 같다는 표현을 했는데, 이건 단지 장애를 일으키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자식이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는 것만큼 비극적인 일이 있으랴만은, 그 대부분은 원인을 알 수 없는 그저 운명의 장난이기에 부모들은 그나마 견딜 수 있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이 악마의 병은 참으로 잔인하게도, 어머니들에게 '내 아이가 건강하게 태어나는 미래' 가 있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각인시킵니다. '내가 그 병에만 걸리지 않았어도!' 라고 말이죠. 물론 당연히, 결코 그게 부모의 잘못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모정이란 것은 그런 합당한 논리만으로 위안을 받을 수 있을 만큼 가벼운 감정이 아니겠지요. 듣지 못 하는 아이가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해 눈물을 흘릴 때마다, 심장이 있는 가슴을 부여잡고 헉헉 거릴 때마다, 어머니들은 그 잔인한 운명을 떠올려야 할텐데, 그게 얼마나 끔찍한 일일지 저로서는 차마 상상도 못 하겠군요.

다케아키의 어머니는 아이가 장애 판정을 받고 돌아오는 길에 바다를 보면서 자살을 생각했습니다. 다케아키가 자라난 이후에도 차마 바다를 쳐다보지 못 할 정도로요. 다케아키가 야구를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며 어머니는 고백합니다. 행여나 다케아키가 자신을 듣지 못 하는 아이로 낳아줬다는 사실에 엄마를 원망할까봐 늘 걱정했다고 말하며 눈물을 보이지요. 다케아키는 그런 엄마를 보며 바다는 이렇게 아름답다, 나는 야구를 할 때면 내가 듣지 못 한다는 사실을 잊을 수 있다면 대답합니다. 그렇게 야구라는 소재는 아이들 뿐만 아니라 어머니 또한 구원해줍니다.

머나먼 갑자원은 80년대에 나온 오래된 만화이고 한국에는 97년에 소개되었습니다. 상업적으로 따졌을 때 그다지 성공하기 힘든 만화였을 텐데도 이런 만화가 번역 소개될 수 있었던 행운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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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감사합니다
  • 좋은 만화 소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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