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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6/01/04 09:50:55수정됨
Name   joel
Subject   종말의 날을 위해 준비되었던 크래커.
2017년 7월, 미국 매서추세츠 주의 말든Malden에 위치한 해충 방제 회사인 양키 해충 방제Yankee Pest Control 사에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당시 회사의 마케팅-판매 부사장이었던 갤빈 머피 주니어 씨가 전화를 받았습니다. 전화를 건 사람은 인근에 위치한 어느 시의 특별 시장 보좌관이었죠. 그는 시청 건물에 빈대(Bed bug)들이 들끓어 날아다니고 있으니 이걸 해결해달라고 의뢰했습니다.

현장에 도착한 머피 씨는 문제의 벌레들이 빈대가 아니라 약국좀벌레(원문은 Drugstore beetle인데 여기에 해당하는 국명이 없는 것 같아 약국좀벌레로 옮겼습니다) 라는 것을 깨달았죠. 벌레들이 출몰하는 곳을 따라가봤더니 입구 근처의 보안 데스크 아래 있는 어느 해치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 해치를 열자 수백만 마리의 벌레 떼들과 함께, 50년 넘게 시청에서 그 존재를 잊어버리고 있었던 방공호가 발견되었습니다. 머피 씨와 시청 직원들이 방공호 내부를 수색하여 마침내 이 사태의 원인을 찾아냈습니다. 방공호 속에는 크래커가 담긴 알루미늄 캔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는데, 그 중 일부가 부식되면서 크래커가 노출되는 바람에 벌레들이 꼬였던 것이죠. 

결국 이 대소동을 해결하기 위해 20명의 사람들이 사흘간 작업을 했습니다. 그곳에 비축된 크래커의 양은 무려 30톤에 달했고, 그걸 모두 사람들이 일일이 손으로 들어다 버려야 했습니다. 그 다음 갤런(약 3.78리터) 단위의 살충제를 뿌리고 죽은 벌레들을 삽으로 퍼담아 버리고서야 끝이 났습니다. 

이 소동을 만들어낸 크래커들의 정체는 바로 미국이 1960년대에 핵전쟁에 대비하여 제조, 비축했던 다목적 생존 크래커(All-Purpose Survival Cracker) 였습니다. 핵전쟁의 위협이 만들어낸 냉전 시대의 유산이었죠.





미국은 1950년대 초반부터 소련의 핵공격 공포를 강하게 느끼고 있었습니다. 사실 50년대 초반에 소련의 핵무기 보유량은 미국에 비해 턱없이 적었고 투발 수단도 폭격기 정도 밖에 없었기에 이런 공포는 좀 과장된 면도 있었습니다. 소련의 전략도 '야, 나 핵 있어. 나 때리지마.' 였지 만약 미국에 폭탄을 떨군다면 미국의 격노 앞에 소련이 석기시대가 될 거라는 것 정도는 알았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핵이라는 건 본디 '한 대 맞고 두 대 치면 이긴다' 라고 넘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컨대 뉴욕이 핵으로 날아간 후에 소련 삭제해서 최종 승리! 같은 시나리오를 누가 원하겠습니까.

그래서 아이젠하워 정부는 핵공격에 대비해 미국인들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을 고심했습니다. 그 해답은 방공호였습니다. 당시 미국 정부의 계획은 소련의 핵공격이 시작되면 재빨리 경보를 울리고, 국민들이 방공호에 들어가 2주간 버텨주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미국에 방공호 건설 붐이 시작됩니다. 미 전역의 공공건물에 방공호가 설치되었고 FBI가 직접 시설을 검증하여 기준을 충족한 곳들에게만 'Fallout Shelter' 딱지를 붙였습니다. 미 육군 공병대가 나서서 대피소로 쓸 수 있는 동굴을 찾아다녔고 심지어 보이스카우트까지 여기에 참여했습니다. 

당시 미국이 얼마나 방공호에 매달렸는지, 캘리포니아에서는 교도소의 재소자들을 대상으로 기묘한 사법거래가 이뤄졌습니다. 재소자들이 감옥 대신 방공호에서 생활하면 생활한 기간만큼 형기를 줄여주겠다는 것이었지요. 이것은 방공호에서의 생활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을 조사하여 어떤 시설을 조성할 것인지를 알아내기 위한 실험이었죠. 

자본주의의 나라답게 민간 방공호 건설업체들도 붐을 부추겼습니다. Bomb Shelters 라는 업체는 신혼부부들을 대상으로 방공호에서 2주간의 신혼여행(?)을 보내는 이벤트를 열었습니다. 2주간 방공호에서 생활하고 나온 부부에게는 회사가 후원하는 멕시코로의 '진짜' 신혼여행이 기다리고 있었죠. 아예 미국 정부에서도 프린스턴 대학의 심리학 교수와 공동으로 이런 실험을 했습니다. 뉴저지에서는 어느 5인 가구가 하루에 30달러를 받는 조건으로 2주간 방공호에서 생활하는 실험이 이루어졌죠. 근데 실험 주최측에 의해 참가자들 몰래 방공호 속에서의 대화가 도청, 녹음되었다고 하네요. 네브래스카 주에서는 식량 생산을 위해 아예 사람이 아닌 소를 피신시키는 방공호까지 만들어졌습니다.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여기에 더해서 할머니의 수납장(GRANDMA'S PANTRY)이라는 캠페인을 시작했습니다. 그 왜, 손주들이 할머니 댁에 놀러가면 언제나 수납장 안에서 간식이 뿜어져 나오고, 아이들이 간식으로 배를 불리고 나면 '그럼 이제 할미는 식사를 준비하마'라고 하잖습니까. 그것처럼 미국인들이 스스로 비상식량을 준비해두자는 의미였지요. 그리고 이것은 주부들이 마땅히 해야 할 사회적 책무 쯤으로 포장, 선전되었죠. 



실제로 사용된 홍보물. Women in Civil Defense 라는 문구가 보여주듯이 이렇듯 비상식량을 준비하는 것이 민방위 활동의 일부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개인이 방공호를 직접 마련하는 것은 굉장히 많은 돈이 드는 일이었기에 성과는 지지부진 했습니다. 결국 방공호를 만들고 물자를 비축하는 것은 국가의 몫이었지요. 헌데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기존에 있던 통조림 같은 보존식품 만으로는 수요를 맞출 수 없었거든요. 자연스레 무엇을 비상식량으로 저장할 것인지가 화두로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종말의 날 식량(Doomsday food)을 개발하기로 했습니다. 그 식량은 오래 보존 할 수 있고, 영양가 높고, 저렴하고, 먹기 쉬워야 했습니다. 미국 정부는 서아시아와 북아프리카 일대에서 오랫동안 먹어온 불구르Bulgur 라는 식품에 주목했습니다. 불구르는 밀을 찌고 말려서 만드는 보존식품으로, 메소포타미아 문명 시절부터 먹어온 유서 깊은 음식입니다. 이렇게 하면 아주 오랫동안 보존할 수 있지요. 

미국은 수백만 달러를 들여 연구한 끝에, 핵 전쟁 이후의 생존자들이 통밀 크래커를 먹으며 생존할 수 있을 거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미국 정부는 불구르에 옥수수 가루, 쇼트닝, 방부제, 콘 슈거, 소금 등을 사용해서 만든 크래커를 다목적 생존 크래커(All-Purpose Survival Cracker)라고 부르며 약 2억 8천만kg을 생산해 비축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크래커는 1인의 1일치 식량이 단 37센트에 불과했다고 하니 딱 적당한 음식이었던 것이죠. 갑자기 폭주한 불구르 가공과 크래커 제조 수요를 맞추기 위해 미 국방부는 1961년 전국의 시리얼 회사들을 불러 모아 대책을 논의했고 잇따라 수백만 달러 짜리 공급계약을 맺었습니다. 1964년 프로그램이 종료될 때까지 200억개 이상의 크래커들이 생산되었다고 하니 그야말로 show me the money의 천조국의 위엄입니다. 

방공호에는 이 크래커 이외에도 탄수화물 보충용 사탕이나 식수도 함께 비축되었습니다. 종합적으로 방공호에는 1인당 1만 칼로리(대문자 C를 쓰는 칼로리, 정확히 말하면 kcal)의 식량이 비축되는 것을 목표로 했는데 2주간 1만 칼로리면 하루에 겨우 700칼로리를 조금 넘기는 정도에 불과합니다. 성인 여성의 1일 기초 대사량이 1200 칼로리를 넘는 것을 볼 때 그야말로 딱 2주간 죽지 않을 만큼의 열량이었죠. 당시 미국 정부의 계산으로는 딱 2주만 버티면 사람들이 방공호 밖을 나와서 식량을 구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고 하네요. 

생존을 위한 식량이 다 그렇듯, 이 크래커의 맛도 대단히 처참했다고 합니다. 크래커를 시식해보았던 어느 기자는 그 맛을 벽판용 석고wallboard에 비유했고 뉴욕타임스는 핵전쟁 시대가 되면 이 크래커가 2차대전의 스팸(질렸는데 먹을 게 없어서 죽지 못 해 먹는 음식)과 같은 역할을 할 운명이라고 보도했습니다. 



실제로 이 크래커를 먹어보는 유튜버의 영상. 이 영상에는 불구르를 설명하면서 뜬금없이 한고조의 초상화와 함께 고대 중국이 언급되는데 이건 아마 옛날 아시아 지역에서 사용되었던 곡물을 쪄서 말리는 보존 기법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핵공격의 공포는 50년대 후반 스푸트니크 쇼크를 맞이하며 극도로 심해졌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당시 기술로는 택도 없는 소리지만 당시 미국인들은 '이제 소련이 우주궤도에서 핵무기를 쏘면 우리가 막을 방법이 없다!' 라며 충격에 빠졌지요. 물론 미국의 우주항공산업 종사자들은 그게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었겠지만 굳이 그러한 오해를 바로 잡아서 자신들이 쓸 예산을 깎는 건 원하지 않았을 거고요. (그리고 이 쇼크는 미국의 과학 교육을 뿌리부터 싹 갈아엎습니다)

60년대에 케네디 행정부 들어서는 점점 방공호와 비상식량 문제가 구체화 되기 시작합니다. 케네디는 민간과 공공 대피소(Shelter)들을 연계하면 미국인의 97%가 핵공격으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다고 주장하며 5천만 명이 대피할 수 있는 방공호와 그에 맞는 물자를 비축하겠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1968년까지 2억 4천만 명이 피신할 수 있도록 물자가 갖춰진 대피소들을 만들겠다며 2억 700만 달러의 예산을 국회에 요청했지요. 그 중 약 1억 6천만 달러가 승인되어 사용되었습니다. 지금 돈으로 따지면 최소한 10억 달러가 넘는 거액입니다. 

하지만 70년대에 들어서 미국과 소련 간에 유화적인 관계가 들어서는 이른바 데탕트의 시기가 왔고, 방공호 열풍도 사그라들었지요. 그리고 결정적으로 SLBM을 비롯한 핵무기의 발전은 방공호 전략 자체를 점점 회의적으로 만들었습니다. 핵공격을 감지하고 경보를 울려봐야 대피할 시간이 없는데 방공호가 무슨 소용인가? 라는 의문 때문이었죠. 위의 벌레 소동에서 보여지듯이 방공호의 존재 자체가 잊혀 갔습니다. 그리고 쓸모가 없어진 생존 크래커는 해외에 원조 물자로 재활용되었습니다. 70년대 초 니제르와 차드에 보내져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살렸는데, 반대로 76년에 니카라과에 보내졌을 때는 그걸 먹은 사람들이 배탈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그 사이에 부패한 것인지 모르겠네요.  

78년에 미국 정부는 유명무실해진 생존 크래커를 회수하라는 지시를 내렸지만 어차피 방공호의 존재가 이미 다 잊혀 가는 판이어서 별 의미는 없었고, 이후로도 가끔 어딘가에 묻혀 있던 생존 크래커들이 발견되는 일들이 벌어졌습니다. 2006년에는 뉴욕의 브루클린 대교의 기초를 점검하는 도중 생존 크래커들이 발견되었는데 당시 뉴욕의 교통 국장이었던 아이리스 웨인셜이 이걸 먹어보고 다음과 같은 소감을 남겼습니다. '종이상자의 맛 위에 몇 시간 동안 입에 남는 불쾌한 쓴맛이 더해졌다. 나는 이제 솔트 크래커를 먹을 때마다 이 맛을 떠올리게 생겼다.'  

위의 유튜브 영상에서 보이듯이 이 크래커는 오늘 날에도 여전히 이베이 등지에서 팔리고 있습니다. 이제는 식품으로서의 가치보다는 색다른 경험과 도전으로서의 의미가 큰 음식이 되었지요. 하지만 본디 무기의 가장 좋은 사용법은 한 번도 사용되지 않고 창고 안에서 잠들어 있는 것이듯이, 미국인들이 이걸 꺼내 먹을 일이 없었던 것이 인류에게도 행운입니다. 




참조한 자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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