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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5/06/09 19:47:44
Name   사슴도치
Subject   그럴 듯함의 시대
요즘 유행은 빠르게 만들어지고, 더 빠르게 소비된다. 거리에는 도쿄를 닮은 카페가 넘쳐나고, SNS에는 파리 감성의 조명과 샌드위치를 파는 베이커리가 줄을 세운다. 뉴욕의 베이글은 ‘런베뮤’라는 이름으로 재탄생하고, 두바이산 초콜릿은 하루 만에 ‘인스타템’이 된다. 마치 세계를 압축해 둔 듯한 서울의 풍경 속에서, 우리는 각기 다른 문화의 이미지를 복제한 ‘무대’를 경험하며 살아간다.

이런 흐름을 두고 비판적인 시선도 적지 않다. 무지한 모방, 맥락 없는 차용, 얄팍한 상술—그런 키워드로 요약되는 담론은 언제나 일정한 긴장을 동반한다. 하지만 정말 그 모든 소비가 비난받아야 할까? 아니면 지금의 소비 자체가 애초에 그렇게 작동하도록 구조화되어 있는 것일까?

근데 뭐 또 이런 거라도 향유하면서 사는 삶을 굳이 악마화할 건 뭔가 싶기도 하다. 런베뮤가 뉴욕의 정통 베이글과는 거리가 멀고, 일본풍 카페나 파리 감성 베이커리들이 원본의 깊이를 지니지 못한 건 맞지만, 누구나 ‘정통’을 향유하며 살 수는 없다. 한국에서 유행하는 많은 것들이 사실, 깊은 문화적 맥락보다는 ‘예쁘다’, ‘그럴 듯하다’, ‘사진이 잘 나온다’는 기준에 따라 소비된다. 그리고 그 가벼움을 인정하는 태도 자체가, 어쩌면 지금 이 사회의 소비 방식의 핵심일지도 모른다.

물론 나도 이런 현상을 썩 좋아하진 않는다. 어디선가 본 듯한 인테리어, 복붙에 가까운 메뉴, 트렌드만 좇는 패션—이 모든 것들이 줄을 세우고, 인증을 낳고, 다시 유행이 된다는 사실에 피로감을 느낄 때도 있다. 하지만 분명히 말하고 싶은 건, 무지한 일반 소비자의 소비에는 죄가 없다는 점이다. 모든 맥락을 알고 움직이기는 어렵고, 그것이 꼭 필요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문제는 그 감각적 빈틈을 노려 겉모습만 번지르르하게 만든 콘텐츠를 시장에 대량 투하하는 상술일 것이다. 그런데 냉정하게 보면 그것조차 ‘아이템을 잘 잡은’ 셈이다. 법을 어기지 않는 한, 시장은 그런 전략을 성공이라 부른다.

더 깊이 들여다보면, 지금의 유행은 진짜 ‘원본’의 경험이 아니라, 그 원본을 흉내 낸 이미지나 분위기를 소비하는 것에 가깝다. 파리의 어느 골목을 걸어보지 않아도, 서울 어딘가의 베이커리에서 그 느낌을 살 수 있다. 도쿄의 뒷골목에 가지 않아도, 그와 유사한 조도를 가진 조명과 공간, 음악이 있다면 그 ‘그럴 듯함’은 이미 충족된다. 이는 보드리야르가 말한 ‘시뮬라크르’—즉, 복제된 이미지가 원본을 대체하는 현상—와 다르지 않다.

중요한 건, 사람들이 더 이상 물건의 내재적 가치나 문화적 진정성을 우선적으로 추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보다는 "내가 이걸 경험했다"는 감각, 그리고 그것을 기록하고 인증할 수 있는 상징성(symbolic value)이 훨씬 중요한 기준이 된다. 오늘날의 소비는 더 이상 물질을 구매하는 행위가 아니라, 특정한 분위기와 정체성을 소비하고 연출하는 상징적 소비로 이동했다. 내가 그 장소에 있었다는 사실, 내가 그 스타일을 입었다는 이미지, 내가 그 경험을 누렸다는 서사가 곧 자산이 된다.

이런 변화는 단지 취향의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사회 속에서 축적된 개인의 문화 자본—부르디외가 말한 ‘아비투스’—의 발현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문화적 위치에 맞는 수준의 소비를 반복하고, 그 틀 속에서 가장 매력적이고 ‘안전한’ 선택을 한다. 그래서 얄팍하다고 비난받는 소비는, 실은 얄팍하게 설계된 시장 구조와 감각 교육의 결과물일 수 있다.

더욱이 이러한 소비는 자율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매우 모방적이다. 사람들이 어떤 공간에 줄을 서는 이유는 꼭 그게 좋아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그곳에 줄을 선다는 사실’ 자체가 신호이기 때문이다. 나도 그 문맥에 참여해야 한다는 압력, 뒤처지지 않겠다는 불안, 사회적 위치를 계속 확인받고 싶다는 심리가 작동한다. 밴드왜건 효과든, 모방 욕망이든, 우리는 남들이 가진 것을 나도 갖고 싶어 하는 구조 속에 살아간다.

그래서 마음 한켠으로는 씁쓸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납득이 간다. 이건 단지 누군가의 무지나 시장의 얄팍함으로만 설명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원본이 없어도, 그 원본이 뭔지도 몰라도, ‘그럴 듯함’만으로 충분한 사회. 지금의 유행은 바로 그 욕망과 구조 위에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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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골든햄스
    저는 런베뮤를 보고 와 다르긴 다르다 문구 하나도 물품 하나도 신경써서 골랐구나 어떤 사람의 살아온 삶의 공기를 담고 그걸 브랜딩했구나 어쩜 직원도 이런 결로 다 뽑았나..하고 감탄했었습니다 사람들은 늘 잘 모르고도 뭔가 뛰어나고 진정성 있는 걸 좇아간다!고 느꼈고요 ㅋㅋㅋ 근거가 뭐냐고 물으면 막상 없지만.. 전 런베뮤에서 어떤 에너지를 느꼈습니당 ㅋㅋ 사람들은 결국 탁월한 걸 추구한다고 생각하고 한국이 특유의 역사적 고립성 및 무맥락성으로 여러 나라의 문화를 가볍게 섞거나 하는 특징은 있지만 오히려 그래서 자유로워서 나오는 것도 많은 거 같습니다 (힙합그룹 방탄처럼 ㅋㅋ) 그렇다구 말씀을 부정한다기보단.. 그냥, 그냥 적어봅니다 .. 전 장사 잘되는 곳에 쌓인 노력을 보고 아름다움에 감탄하는 편이라 ㅜㅜㅋㅋㅋ
    사슴도치
    그 감탄은 분명 진짜고, 그런 방식의 몰입이야말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진정성’에 가장 가까운 태도일지도 모릅니다. 매장 하나에 담긴 공기, 브랜드가 가진 결, 직원들의 태도, 디테일의 완성도—이런 요소들을 통해 어떤 사람의 삶과 취향, 에너지에 접속하는 순간은 분명 존재하죠. 런베뮤가 그런 브랜드였다면, 그건 분명히 존중받아야 할 경험이에요.

    다만 제가 비판적으로 본 지점은, 사람들이 그 진정성이나 탁월함을 감지하지도 못한 채—혹은 감지했다고 생각하면서도—복제 가능한 겉모습만 재현하려 드는 현상에 있어요. 정작 그 진정성이 ... 더 보기
    그 감탄은 분명 진짜고, 그런 방식의 몰입이야말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진정성’에 가장 가까운 태도일지도 모릅니다. 매장 하나에 담긴 공기, 브랜드가 가진 결, 직원들의 태도, 디테일의 완성도—이런 요소들을 통해 어떤 사람의 삶과 취향, 에너지에 접속하는 순간은 분명 존재하죠. 런베뮤가 그런 브랜드였다면, 그건 분명히 존중받아야 할 경험이에요.

    다만 제가 비판적으로 본 지점은, 사람들이 그 진정성이나 탁월함을 감지하지도 못한 채—혹은 감지했다고 생각하면서도—복제 가능한 겉모습만 재현하려 드는 현상에 있어요. 정작 그 진정성이 통째로 옮겨지는 건 거의 없고, 표면적 ‘형식’만 흉내 내는 유행이 반복되고 있다는 점이죠.

    예를 들어 누군가 런베뮤의 본질이 ‘뉴욕스러움’이라고 단정하고, 콘크리트 벽에 흑백 메뉴판만 붙인 베이글집을 낸다면—그건 형식의 소비이지, 탁월함에 대한 감탄은 아닙니다. 저는 바로 이 복제와 소비의 속도가 때로는 무지에 기댄 미메시스로 작동한다고 생각한 겁니다.

    햄스님이 말한 것처럼, 사람들은 탁월한 것을 좇습니다. 저도 동의합니다. 다만, 문제는 탁월함을 어떻게 인식하고, 어떤 방식으로 이어가느냐의 문제라고 생각해요. 어떤 사람은 그것을 디테일로 느끼고, 어떤 사람은 줄 선다는 사실로 느끼기도 하죠. 그리고 그 간극이 커질수록, 문화 소비는 ‘그럴 듯한 복사본’으로 채워지게 됩니다.

    또한 말씀하신 것처럼 한국은 오히려 무맥락성의 자유로움을 통해 전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기도 하죠. 방탄소년단이나 뉴진스 같은 그룹이 그 대표적인 사례고, 저도 그런 문화적 결합의 가능성을 과소평가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그 자유가 ‘무제한 복제의 무비판성’으로 흐르지 않기를 바라는 거죠.

    결국 중요한 건 깊이를 향한 감각을 유지할 수 있는가 아닐까 싶습니다. 표면만 복제할 것인지, 그 속의 공기까지 감응할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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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골든햄스
    그건 그렇습니다 ㅜㅜ…
    당근매니아
    그냥...... 바샤커피랑 같은 맥락이라고 봅니다.
    없는 헤리티지를 만들어내고, 가상의 명성을 먼저 만들어 현실로 옮기는.
    원금복구제발ㅠㅠ
    브랜딩 하는 지인분이 말씀해주셨는데.. LBM은 브랜딩의 신이라고 하더라구요
    뉴욕도 한때는 저급한 대중성으로 비판 받을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세계 미식이 모이는 도시가 되었죠. 서울의 그럴 듯한 유행도 지금은 가볍고 빠르게 소비되지만, 그 반복 속에서 나름의 취향과 기준이 쌓여갈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한국의 냄비성도 잘만 쓰이면 그런 변화의 속도를 앞당기는 힘이 될 수 있으니까요.
    유행에 빠르게 반응하는 소위 말하는 한국의 냄비성도 소비문화에서는 오히려 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걸 빠르게 시도하고 확산시키는 과정에서 진짜 새로운게 나오기도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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