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9/11/10 09:29:12
Name   사슴도치
Subject   이론과 실제 : 귀납적 구치소법학의 위험성
질게를 보다 문득 생각나서...

요즘은 형사사건을 받을 일이 없지만, 한창 때 형사사건을 의뢰받아 구치소를 접견하던 때가 생각납니다. (요즘 많은 분들이 아시게 되었지만, 구치소는 교도소와는 달리 재판이 확정되기 전의 구속된 피고인들을 구금하는 기관입니다. 미결수들이 있는 곳이죠)

구치소라는 곳도 사회와 마찬가지로 어느정도 제약만 있지, 사람들이 모여있는 곳이기 때문에 서로간의 커뮤니케이션과 네트워크가 이루어집니다. 제가 직접 체험해보지는 않았지만, 접견신청한 피고인들을 접하다보면 그들 사이의 가장 큰 관심사는 아무래도 자기가 어느정도의 형을 구형, 선고받을지, 나갈 수 있을지 정도가 가장 큰 관심사인듯 싶습니다.

이들은 주로 다른 사람이 어떤 범죄로 어떤 형을 받았는지, 어떤 변호인을 선임하여 어떤 결과를 얻었는지에 대해 서로 의견을 교환하여,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운명을 예단하곤 합니다.

예컨대-

(1) A라는 범죄로 n년형을 선고받았기 때문에, 나도 그럴 것이라는 결론

(2) ㅇㅇㅇ변호사를 국선변호인으로 선임한 B가 집행유예를 얻어냈다고 한다면, ㅇㅇㅇ변호사를 자기 국선변호인으로 지정해달라고 신청

등입니다.

주로 타인의 사례들을 모아 자신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는 귀납적인 추론을 하는 것이죠.

사실 이런 판단방법은 비단 구치소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인터넷에서도 꽤 쉽게 찾아볼 수 있는데, 주로 악플에 대한 명예훼손죄, 모욕죄에 대한  고소방법 내지는 어떤 처벌을 받게될지에 대한 글들이 그렇습니다. 또는 어떤 문제점에 대해 형량만을 가지고 비교를 한다거나, 타인의 경험을 좇아 나홀로소송을 하는 경우들은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재판이라는 것은, 그리고 법조인들의 판단 방법이라는 것은 그와 같이 전범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3단추론이라는 (논리학에서 익숙한) 방법에 의해서 이루어지는데

(1) 법조문(및 판례와 법이론)에 규정된 대전제(이론)에 (2) 실제 사실관계에 해당하는 소전제가 (3)부합하는지(결론)를 기반으로 결정하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위와 같은 귀납적인 추론은 (1)의 대전제가 생략되어 있기 때문에, 그래서 유사해보이는 사실관계(2)라도 실질적으로 (1)에 부합하는지 여부 및 부합하는 정도가 다르기 때문에 그 결과(3)가 다르게 나타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물론 유사해보이는 사실관계 자체에 반영되는 요소는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이것을 단지 겉으로 드러난 몇몇 요소들만 보고 동일한 사건이라고 보는 것도 매우 위험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변호사들은 (1)과 (2)사이의 관계성(correlation)을 긍정하거나 부인하기 위해 여러가지 논리를 구성하고 증거를 찾습니다. 즉 (2)-(3)보다는 (1)-(2)에서 쟁점의 준거를 찾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귀납법학 내지는 구치소법학에서는 (2)-(3)에 집중하고 (2)에 해당하는 다른 사례의 유사성에만 집중하기 때문에 이에 근거하여 분쟁을 해결하려다 보면 예상치 못한 결과를 받아들게 되는 경우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물론 변호사들도 자기가 맡은 사건에 대해 리서치할 때 기존의 판례를 찾아보고 이를 통해 사례의 유사성을 확인하긴 하지만, 이 작업은 (2)-(3)보다는 (1)의 준거가 되는 이론의 확립 과정에 가깝습니다.

더하여, 구치소 내에서 혹은 인터넷에서 공유되는 사례들은 자기에게 유리한 부분 위주로 각색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를 일반화시켜 보는 것 역시 위험합니다.

특정한 약이 자기의 어떤 질환에 효능이 있다는 글을 보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 약을 먹는 것과 비슷한 것이죠.

하지만 명심해야 할 것은, 지푸라기는 지푸라기라는 것입니다. 어떤 법률적 문제가 생겼을 때는 인터넷을 통해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근처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법률전문가를 찾아가보도록 하세요. 스스로 수습하려 하다보면, 오히려 시기적으로 실기하여 할 수 있었던 여러가지 솔루션을 잃어버리게 될 수가 있습니다.





17


    다람쥐
    크크크 너무재밌어요...!!! 재밌게읽었습니다
    2
    사슴도치
    ㅋㅋㅋ감사합니다ㅋㅋ 업계인이셔서 더 재밌게 읽으신듯 해요 ㅎㅎㅎ
    다람쥐
    구치소 시리즈 되게 재밌을 것 같아요 ㅋㅋㅋㅋㅋ
    전에 박근혜 구속됐을때 배우자에게 당신 구속되면 내가 선임계내고 매일매일가준다고 했는데ㅋㅋㅋㅋ
    2
    DX루카포드
    그때 국선들 아무도 안한다면 저희한테 올까봐 쫄았었죠 ㅋㅋ 실제로 국정농단사범중에 한명 와서 변호해달래서 커트함..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공지 티타임 게시판 이용 규정 2 Toby 15/06/19 33546 1
    15543 기타나는 동네고양이다. 사슴도치 25/06/22 125 5
    15542 창작사람을 죽이는 일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4 Cascade 25/06/22 869 9
    15541 영화아재들을 위한 영화 재개봉 - 클리프행어 삼치 25/06/21 248 0
    15540 사회국내 최고 농구 커뮤니티의 반말 욕설 허용 사건 14 시간아달려라 25/06/21 737 0
    15539 문화/예술니고데모 書에 있는 이야기 10 오르페우스 25/06/20 497 4
    15538 기타[자문단] 나는 어떤 글을 추천하는가? 2 moneyghost 25/06/19 354 4
    15537 일상/생각 넷플릭스를 보다가 찡하고 아려온 백인우월주의자. 1 코리몬테아스 25/06/19 651 3
    15536 정치상반기 KPI 평가중 든 잡념 6 길든스턴 25/06/19 633 1
    15535 일상/생각경험의 주관성에 대해서 6 큐리스 25/06/19 400 8
    15534 일상/생각와이프랑 둘이 같이 연차를 냈는데요.ㅠㅠㅠㅠ 8 큐리스 25/06/19 855 5
    15533 일상/생각읽었다는 증거, 말하지 못한 말 – 응답의 심리와 소통의 변질 9 사슴도치 25/06/19 540 17
    15531 게임우왁굳에 대한 내맘대로 피상적인 이해.. 와 스타여캠 13 알료사 25/06/19 890 14
    15530 철학/종교니고데모 이야기 10 매뉴물있뉴 25/06/18 428 11
    15529 음악[팝송] 크리스토퍼 새 앨범 "Fools Gold" 김치찌개 25/06/18 116 0
    15528 문화/예술[사진]을 찍는다는 것 6 사슴도치 25/06/18 324 10
    15527 일상/생각5개의 아비투스를 지나… 4 골든햄스 25/06/17 628 5
    15526 댓글잠금 기타김재환의 정체에 대한 추측, 그리고 백종원은 아마 이미 알고 있다. 21 단비아빠 25/06/17 1592 1
    15525 일상/생각와이프는 언제나 귀엽습니다. 7 큐리스 25/06/17 622 3
    15524 일상/생각진공청소기가 내게 가르쳐 준 것 1 큐리스 25/06/16 487 5
    15523 기타백종원과 김재환PD의 생사결 19 단비아빠 25/06/16 1671 3
    15522 게임[LOL] 6월 15일 일요일의 일정 1 발그레 아이네꼬 25/06/14 229 0
    15521 도서/문학장르소설은 문학인가? - 문학성에 대한 소고 25 meson 25/06/14 950 12
    15520 게임[LOL] 6월 14일 토요일의 오늘의 일정 발그레 아이네꼬 25/06/14 376 0
    15519 문화/예술스마트폰과 불안 세대와 K-컬처의 승리 6 바쿠 25/06/13 658 5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