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 25/06/03 14:10:09 |
Name | 거소 |
Subject | 내란 밤 이야기 |
내란 밤 이야기 학교 후배 하나는 사람들과 두루 잘 어울리고 말하길 좋아하는 친구였습니다. 늦깍이 대학생이라 동년배보다 나이가 한참 많았어도 위아래 없이 잘 지냈어요. 그 친구는 적당히 착하고 적당히 꾀부리고, 아무튼 적당히 꼰대같은 수식이 잘 어울렸습니다. 맨정신일때는 동기 잘 챙기고 선후배 잘 대하고, 술이 만취하면 내가 형인데 이쒸 너네 너무하지않냐 정도로 투덜대는 그런 소인배같기도 하고 대인배 같기도 한. 적당히 중인배 같은 친구였어요. 그러니까, 적당히 정감도 가고 미워하기도 뭐한. 그 친구가 어쩌다 보니 작은 진보정당에서 조그만 일거리를 시작했고, 또 거기서도 적당히 두루두루.. 잘 지내고 잘 하다 보니까 조금 더 큰 조직에서 너 나랑 일 하나 같이할래? 이런식으로 흘러흘러.. 뭐 엄청나게 대단한 사명감과 세상을 바꾸겠다는 결심 이정도는 아니지만 적당히 책도 읽고 적당히 공부도하고 적당히 문제의식도 느끼며.. 그렇게 정치정당의 구성원으로서 일을 하며 살아가는 적당한 사회인이 되었습니다. 결혼도하고, 애도 생기고.. 그 적당하게 뭐든 좋았던 친구의 어느 날 밤, 아이가 아직 아내의 뱃속에 있던 밤. 하필이면 여의대로를 지나 사랑하는 가족의 곁으로 돌아가던 그 밤. 계엄령이 선포되었습니다. 국회의원이 아닌 당직자에게 얼마나 큰 사명감이나 민주주의적 열망같은게 있었을까요? 적당한 소시민에 가까웠던 그는 그 날 강제로 누군가에게 의해 민주주의의 투사 역할을 맡게 되었습니다. 겨우 경찰버스를 회피해 국회의사당 주차장으로 들어서서 차를 대고, 펑펑 울었다고 해요. 몇 번이나 그냥 집에 갈까 하는 고민 아래에서, 직장 동료들과 의원들의 연락이 계속 쏟아지고, 차는 운전중이고, 가서 내가 뭘 할 수 있지 싶으면서도 관성적으로 일단 가야한다는 그런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그렇게 주차장에 차를 대고 나니 아내의 걱정어린 카톡과, 사람들의 연락과.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 모든 것이 어깨위로 쏟아졌다고 합니다.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는 아빠 없이도 잘 살 수 있을까? 제일 먼저 스쳐지나가는 걱정을 필두로, 책에서만 봐왔던 민주화운동의 역사가 떠오르고. 마음 깊이 떠오르지 않을 것만 같았던 두려움이 스멀거립니다. 평화롭게 끝날 수 있을까? 한 편으로는, 의원과 자신의 값어치가 다르다는 것도 느꼈겠지요. 이 날, 죽음에 순서가 있다면 그나마 포로라도 될 가치가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중에서는 그렇지 않은 쪽의 편에 서 있다는 것을. 외면하는게 맞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는 결국 적당한 사람이었어요. 적당한 사람은, 뻔뻔하게 도망칠 수도 없었습니다. 내란범들의 권력에 대한 욕망이, 그냥 열심히 살며 행복한 가정을 만드는데 열심이던 한 청년을 민주투사로 만드는 순간이었겠죠. 내란의 밤, 수많은 의원과 당직자들이 군인들 앞에서 항의하고, 저항하고. 마치 드라마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소비하던 입장에서는 분노는 있을지언정 공포는 희박했습니다. 그 공포는 막연하게도 별 일 없을거라는 근거없는 확신때문이었지요. 그래서 그들이 격렬하게 항의하는 일면에 대해 '쇼'하고 있다는 사람들의 반응도 많았습니다. 결국 내란의 밤은 큰 유혈사태 없이 마치 '쇼'처럼 끝났고, 그 때문에 지금도 그들이 벌인 짓에 대해 아주 가벼운 댓가를 치르고 있는 것 처럼 느껴집니다. 그 쇼의 한 가운데에서, 술 좋아하고, 사람 좋아하고, 월급 더 받고 싶어하고, 그래서 하기 싫은 공부하고, 책 읽고, 아이를 갖고나서는 건강히 오래살겠다며 운동하고, 그렇게 청년에서 아빠로 성장하던 사람은 공포에 떨며 민주투사가 되었습니다. 그들의 과장된 몸짓, 격렬한 몸싸움, 총구 앞에서도 무모해지는 일종의 광기. 그것은 스타가 되겠다는 권력욕의 분출보다는, 그저 여기서 내가 각오를 하고 막아야만 우리가 적당히 기대하던 미래를 지키고, 넘겨줄 수 있다는 감각때문이 아니었을까. 공포도 슬픔도 미뤄두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스스로를 더 격양시켜야했고, 다음 날 아침에 똑같이 지루하고 평화로운 하루를 넘겨줄 수 있도록 남은 목숨을 다 걸어본 것은 아닐까. 뱃속의 아기를 못 만날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 앞에서도, 아이가 살아갈 곳이 독재권력의 땅이 아니길 바라는 마음 하나에 기대어 울음을 멈추고 이를 악문 것은 아닐까. 그렇게 긴 내란의 밤은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은 짧은 쇼처럼 끝났다고 했지만, 그 자리에서 목숨을 건 사람들의 감정은 깊게, 길게, 오늘까지도 앙금으로 남아있겠지요. 사는 날 내내 그런 역할을 맡을 일이 없었으면 좋겠지만, 어느 날 내게도 이런 결정의 순간이 주어진다면 그 날, 그 밤에 도망치지 않고 미친자들처럼 버티어 선 사람들의 모습이 제게 용기를 주겠지요. 의원 뱃지 없이도 무기 앞에 선 맨몸의 사람들이, 결국은 이겨냈다는 것을. 당은 그에게 1급 표창을 수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다시는 이런 일로 표창을 받는 일이 없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과연 우리에게 새벽이 왔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동이 트고 있을까요? 오늘의 선거 결과가 그 새벽의 알림일수도 아닐수도 있습니다. 이재명이 당선된다고 하루 아침에 모든 것이 밝아질 리는 없겠지요. 그에게도 어떤 밤을 일으킬 속성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은 그가 아니라 김문수, 이준석, 더러는 권영국 그 누가 대통령이 된다 한들 새벽이 밝아진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마지막까지 제 마음속에서 누군가를 뽑을지를 결정하게 한 것은, 대한민국의 경제나 미래, 뛰어난 후보, 비전, 똑똑함, 이런 것들이 아니었어요. 저는 그저 운이 좋아 그 날, 내란의 밤에서 집에 있어도 되는 역할을 받았고, 그 빚을 갚는다는 마음으로 투표를 했습니다. 도망치지 않은 자들이 작은 명예라도 역사로 남길 바라며. 3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