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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5/06/17 23:10:48
Name   골든햄스
File #1   IMG_8947.png (28.8 KB), Download : 4
Subject   5개의 아비투스를 지나…



만화 <신의 탑>은 네이버 웹툰의 명실상부 유명작 중 하나다. (요즘은 그 유명세가 조금 빛바랜 감이 있지만.) 이 만화는 끝없이 긴 탑을 층층이 올라가며 매층마다 새로운 도전과 경쟁을 맞닥뜨리는 내용인데, 주요 인물들은 탑 안에서 순위권 안의 랭커(Ranker)들로 묘사된다.

수직적 공간 배열이 인상적인 이러한 <신의 탑>의 세계관은 다음과 같은 작가의 경험에서 우러나왔다고 한다. 학교들을 다니며 청소년들에게 한국에 사는 느낌을 그리라 하자 층층이 탑을 오르는 느낌, ‘어떤 높이 솟은 하나의 탑’으로 한국을 형상화하는 경우가 많았단 것이다. 그에 충격 받은 SIU 작가가 탑을 기반으로 상상력에 기반해 그려낸 것이 <신의 탑>이다.

<신의 탑>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별의별 이유로 탑을 오른다. 그저 탑 위에 올라서 별하늘을 보고 싶어서. 누군가를 쫓고 싶어서. 왕이 되고 싶어서. 부자가 되고 싶어서… 그렇게 저마다의 소원을 좇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매번 새롭게 룰이 바뀌는 험악한 경쟁, 배틀로얄, 목숨을 건 게임이다.

삐- 하고 <오징어게임> 소리가 들리는 거 같다면, 맞다. 인위적으로 서구 자본주의를 이식해 시골 촌구석 정다운 아랫목에서 오골오골 모여있던 형제자매들이 이촌향도해 만난 자본주의 현실은, 아무래도, 현실이라기보다는 게임 같았나보다. 그 어느 나라보다 악랄하다는(!) 리니지라이크 게임의 과금 모델들도 그런 데서 착안됐을지도 모른다. 이 게임을 할려면 목숨을 거세요. 그렇기에 오히려 그 게임이 가치 있다는 것이 증명되는, 희한한 상황. 종교 없는 국가의 종교. 그건 게임이다.

시골 우체국 공무원 아버지 밑에서 자라 별안간 프랑스 명문대 그랑제꼴에 입학한 피에르 부르디외는 고민 끝에 문화적 자본이 계급을 형성하는 <아비투스> 개념을 형상화했다. 그의 저서에 나오는 개념들을 보면, 정말 현실이 마법 같다. 악의는 없어도 대화에서 장(Field)이 형성되며 이로 인해 차이가 생겨난다는 것이다. 그 장에서의 투쟁 대상은 상상 자본이란다. 이쯤이면 그를 게임 판타지 계의 원로로 모셔도 문제 없다.

그런데 학대적인 반사회적 아버지 밑에서 엉금엉금 맞기 싫어서 기어다니던 입장에서, 조금 컸다고 대학에 가고, 거기서도 무시를 당하다 조금씩 다른 일을 하고, 대학원에 가고, 졸업을 하고, 장기 연애를 하고, 결혼 약속을 하고, 취직을 하다보니… 어라? 정말로 점점 몸이 이상하다.

용인외고에서 점수를 바닥에서 천장까지 올린 것이 자부심이라 인터뷰까지 했던 내 전 애인 중 하나는 (결국 내가 불우하게 커서 자신의 이상적 가족이 안 된다고 차버렸는데) 내가 너무 어깨를 움츠리고 거위처럼 걷는다고 불평하곤 했다. 좀 가슴을 펴라는 것이었다.

공동체를 찾아다니다 가게 된 가상화폐 관련 모임의 면접에서 나는 ‘눈을 마주치지 않아 신뢰하기 어렵다’는 피드백을 받았다.

참 신기하게 인간이 알아서 자기 위치에 맞춰 움츠러든다.
비버는 말하곤 한다. “돈이 중요하다니까.” 그런 걸까? 누구는 말한다. “돈이 있어도 명예가 없으면..” 누구는 신축 아파트, 누구는 명품 가방, 아, 그리고 곧 죽어도 사회생활은 해야지. 요즘은 점점, 가게들에서 받는 친절이 늘어난다.

엎드려서 포복 전진하며 하나씩 아비투스를 열어가는 거 같다. 장을 여행하는 기분이다. 대한민국이란 나라의 아스팔트 맨바닥을 기어가며, 부모에게 버려진 창녀부터 버려진 껌, 한시도 시끄러운 음악과 스마트폰을 끄지 못하는 오토바이 배달부를 보고, 교양 있는 학군지 학부모와 여유 넘치는 교수들을 본다.

한 번 궤도 이동을 할 때마다 머리가 토할듯 어지럽고 미국에서는 이미 여러 단어로 담론화되어있다는 계급 이동과 관련된 심리적, 신체적 불편감이 소용돌이친다. 토했다가 울었다가 아팠다가 멍들었다가 .. 아니 에르노 소설을 읽다가, <힐빌리의 노래>를 읽다가, 마침내 성경을 펼쳐든다.

첫눈에 ‘쎄하다’고 평가되는 범죄자 같은 관상은 왜 꼭 가난하고 가족도 불우할 때 생겨나는 걸까? 그런 평가를 받았던 나는 지금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 학원에서 일과 시작 전 짧게 기도를 한다. 오늘 아이들에게 친절하게 하게 해주십시오. 하나님.



5
  • 상냥한 햄스 선생님
  • 울지 말아요


게임이라는 말을 쓰셔서 그런지 '셀프 프린세스 메이커'라는 어구가 떠올랐습니다. 햄스님 화이팅.
4
켈로그김
강자를 대하는 태도는 쌍팔년도 만화랑 크게 달라지지 않은거 같기도 하읍니다.
근데 많이 달라진건 강자가 되는 방법/과정/인과.

그러면서 뭔가 바리에이션이 생긴거 같기도 하고
반대로 질서에 도달하지 못하는 미성숙아가 늘어나는거 같기도 하고(...)
그렇읍니다.
2
더샤드
영국 사람들이 보기엔 미국 사람들이 전문 용어나 어려운 용어 써서 먹물들이 자기들끼리 구분하려는 게 느껴진다하고
미국 사람들이 보기엔 영국 사람들은 단어만 쉽게 하는 척하지 자기들끼리 공유하는 문화적인 예절이나 표현으로 멕이는 거 같다고 하더군요.

어딜가든 자라온 경험과 환경의 차이는 어쩔 수 없으니.. 최소한 남한테 멸시나 모멸은 안주려고 노력합니다.
2
레디미르
존경스럽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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