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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1/09/19 19:48:16수정됨 |
Name | 거소 |
Subject | 합리적인 약자 |
의식의 흐름대로 대충 쓰겠습니다. 보험을 까는 이유는 열은 받았고 정리하기는 싫고 한 편으로는 이러한 주장에도 하나하나 숫자를 가져와야한다는 것에도 좀 염증이 나서 그렇습니다. 당연한 것을 해체하고 숫자를 요구하는 이면에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들을 말살하고 자신의 위치와 입장을 교묘하게 숨기는 경우가 있는 것 같아서요. 숫자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숫자가 전부는 아니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쓰레기 매립지, 원전 등의 발전소, 치매요양시설, 장애인 복지시설, 장애인 학교, 오물처리장 제가 아는 대표적인 님비시설들입니다. 그리고 무엇하나 현대 국가에 필요하지 않은게 없는 시설이기도 하고요. 도덕의 잣대로 지리하게 옳고 그름을 따지려고 글을 판 것은 아닙니다. 제게 있어 탈근대적 합리성이란 가치의 해체와 맞춤형 공리주의 입니다. 무형의 이익을 없애고, 경제적 내지는 재산권적 이익을 합리의 기준에 두고 우리라는 집단을 일종의 계층으로 묶어 묶여있는 집단이 강하면 이익을 추구해도 되는것을 그 행태라 생각합니다. PC주의의 일종일지는 모르겠지만, 언젠가부터 사람들이 다들 남보다 잘 나고 싶은 약자이고 싶어한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이를테면 이번 배현진 국회의원의 발언에 합리성을 찾는 것들이 그렇습니다. 송파구의 대단지 아파트의 인프라 편의성, 이를테면 공공시설과 치매 노인 요양시설의 이익갈등이 딱 그렇습니다. 저는 여기서 10억이 넘는 대단지 아파트에 사는 이들이 자기 의사도 제대로 주장할 수 없는 치매노인이 들어서는 시설과 이익으로 다투는 모양새가 골계 그 자체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서울시의 어디를 가더라도, 아파트 입주민이 부족한 인프라의 편의성이라는것은 슬리퍼와 반바지 반팔 차림으로 닿을 거리에 행정서비스와 편의서비스가 제공되어야 한다는 수준의 이야기입니다. 서울의 마을버스, 버스, 지하철 정류장들과 도보거리를 생각하면, 대단지 아파트 근처에 우체국이 없다든지 병원이 없다든지 혹은 뭐 맛있는 술집이 없다든지, 동사무소가 멀다든지 하는 문제는 그래봐야 5분 거리가 아니라 15분거리더라 같은 투덜거림에 가깝습니다. 이런 투덜거림이 사실 인간적으로 이해가 안가는 것은 아닙니다. 불편은 자기 위치에서 느끼는 것이죠. 어떤 부자는 운전도 기사가 주차장 앞까지 나와 있어야하고, 가정부가 모든 가사노동을 완벽하게 처리해야하며, 비서의 스케쥴링 없이는 삶을 살 수 없을만큼 불편할 수도 있는 것이니까요. 그러나 이걸 합리성으로 포장하면 너무 비극적입니다. 서로의 상황이나 토대를 무너뜨리고, 갑자기 자신을 구성하던 많은 요소들, 재력, 학력, 능력, 지성, 권력, 건강, 젊음과 같은 것들을 잠시 망토로 가리면서 나도 너와 동등한 '한 명'인데 라는 식으로 접근합니다. 혐오시설과 갈등하는 것을 보면 특히 그렇습니다. 한 편으로는 이 사람들이 이런 경우가 아닐 때는 늘 사회에서 성공하고 합리적이고 어느정도 괜찮고 뛰어난 사람들로 대접받길 바란다는 것입니다. 나의 이익에 조금의 손해가 생길 때면 아주 자연스럽게 자신을 강자의 입장에서 약자의 입장으로 바꾸고, 합리성으로 치장합니다. 분명히 존재하던 계급을 바꾸고 각자의 이유를 대는 것은 그들이 약자를 핍박할 때에 분명 '감성팔이'라고 때리던 것이었는데 자신의 일이 되자 슬그머니 감성 위에 자신의 존재를 안착시키고 말합니다. 우리도 피해자다. 다시 치매요양시설로 들어와서, 사실 치매요양시설의 결정에서 주변 주민들의 재산권이 꼭 고려되지 말아야 할 것은 아닙니다. 현대의 행정에서의 합리성은 경제적 효율성을 무시할 수 없고, 이는 인민의 자원을 국가가 '잘 쓸 수 있다'는 믿음으로 실행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이런 소위 '혐오시설'들은 지역의 반대에 대한 충분한 사회적 가치를 입증해야 하기도 합니다. 이번 치매 요양시설에서 사실 백지화의 가장 큰 문제로 다뤄져야 하는것은 도심 한복한의 접근성 좋은 시설의 수용인원이 너무 작다는 것이겠죠. 그런데 이런 이익조차 계량에 들어가면 머리가 아파집니다. 다수의 이익을 우선하는 것이 최대가치이자 최대정의라면, 메트로 폴리스안에는 어떠한 혐오시설도 존재할 수 없게 됩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메트로폴리스 안으로 진입해 사는 사람만이 평등한 가치기준 위에서 평가받고, 메트로폴리스 바깥의 사람들은 평등하게 대우받을수 없습니다. 개인대 개인의 이익으로 평등하다고 했으나, 집단대 집단의 이익의 힘이 차이가 나면, 작은 집단의 개인은 큰 집단의 개인을 위해 항상 희생할 준비가 되어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이런 혐오시설 건설에 있어 제일 좋은 해결책은 결국 돈입니다. 받아들여주는 대신에 얼마의 돈을 그 손해를 감당할 주민들에게 주느냐가 핵심이 되었죠. 이런 결론이 지어지는 이유의 핵심은, 누구도 가치의 당위로는 갈등을 봉합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위에서 이야기 해왔으니 느끼시겠지만, 개인, 집단의 이익이 상충할 때의 당위를 평가할 때에 어떤 방식으로든 모순과 자가당착에 빠지기 때문이죠. 이러한 모순을 벗어나기 위해 때로는 기존 정의관념이나 도덕관념을 해체하기도 합니다. 왜 노인을 그렇게 국가에서 꼭 저기에서 살려야 해? 하는 질문을 해 보는 거죠. 그러나 사실 이런 질문은 무척 전략적입니다. 우리는 이런 질문의 끝에 닿아있는 의문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사람에게 인권이란? 우리는 인권을 '권리'라고 주장하지만, 사실 그런 권리는 물리적으로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무엇인가에 자원을 소비하고 누군가의 손익을 결정할 때에 강자존의 율법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던 근현대의 자유국가 모델에서는 그러한 핵심 관념에 대한 질문을 거부합니다. 이러한 그 국가의 핵심 관념이 대체로 헌법에 등재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명시되어있지 않더라도, 일반화된 당연한 관념들은 법 이상의 것으로 사회를 엮어둡니다. 그 관념을 해체하기 시작하면 명문화된 법으로는 도저히 메꿀 수 없는 빈 틈 사이로 다시금 강자들의 이익만이 존중받는 상황이 늘어나는 거죠. 이걸 피하려고 사람들이 약자가 됩니다. 내가 약자가 될 수 있는 지점에서 합리적으로 자신을 주장합니다. 그러니까 서울 사람들은 원전을 피할 수 있고, 그러니까 강남 3구의 고액 아파트 주민들도 불행을 전시할 수 있습니다. 일 평생을 맘껏 써도 다 못 쓸 것 같은 재력을 과시하는 이들 조차, 영예로 가득찬 삶을 사는 사람들 조차 언제든 자신이 나약하게 보일 수 있는 판을 만들고 자신을 약자로서 전시합니다. 이렇게 하면 자신들이 이 사회의 많은 이익을 차지하는 지위로서 '관념적으로' 감당할 책임들로부터 훨씬 자유로워지기 때문입니다. 나 정도면 부자는 아니지. 나 정도면 힘든 사람이지. '나보다 잘 난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요새 들어서 이런 생각을 많이 합니다. 겸손도 좋고, 자신의 고통에 솔직한 것도 좋다. 계급, 성별, 자본, 능력과 상관없이 연민과 사랑이 필요한 고통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런데 이 사실 만큼이나, 명확한 것이 있습니다. 더 가난한 사람은 더 많은 손해를 받고 살아야 하고, 더 가난한 사람은 더 위태롭게 살아야 합니다. 늙고 병든 사람은 위태롭고, 가난하고 늙고 병든 사람은 죽음 앞에 저항할 수 있는 수단이 많이 모자랍니다. 내가 어느 위치에서 살아가는지 누구도 정확하게 알려줄 수는 없지만, 가끔은 의심해 봐야합니다. 나는 언제까지 나의 이익을 위해 약해보이고 싶은가. 내 이익은 누구와 갈등하여 더 얻고자 하는 것인가. 밥먹다가 잠깐 든 생각입니다. 많은 복지들이 연소득 3500정도를 기준으로 세워진다고 생각합니다. 더욱 척박한 이들에 대한 복지들은 고정소득이 있느냐 없느냐를 따지기도 합니다. 연소득 3500이상부터 6~7천만 까지의 구간이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고통스러운 삶 속에서 절치부심하여 소득을 올리는 구간입니다. 이보다 좋은 운과 더 큰 노력을 통해 그 위로 올라갈 수도 있겠지만 직종을 불문하고 저 이상의 연소득을 얻는 구간은 몹시 좁습니다. 이 구간을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은 다들 겪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노력으로 성공한 사람들이 때로는 더 그러지 못한 이들을 핍박하기도 하는거겠죠. 가장 고통스럽게 성장하던 시간동안에 사회에서 사각지대에 놓이니까요. 그러나 어떻게든 저 구간 바깥으로 다시 나와 자산을 쌓고 자가를 만들어 내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기도 합니다. 싫은건 싫을 수 있다지만, 그걸 합리적인 이유로 치장해 동등하게 이익을 비교하려 한다면 사회가 왜 필요한거냐고. 격투기도 체급을 나누는데, 왜 삶의 비교에서는 자꾸 체급에서 내려와 같이 주먹을 휘두르고 싶어하냐고. 저는 우리집 근처에 혐오시설이 들어와서 가치가 떨어지고 재산피해를 입는다면 속이 많이 상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내 속이 상하고 내 재산가치가 떨어졌어도 내가 손해보는 이익이 저 시설이 필요한 사람들의 필요와 같은 층위에서 다뤄져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진정으로 이것이 같은 층위의 문제였다면 보상금 같은건 필요하지 않을 겁니다. 평등하게 우리의 이익을 다퉈보면 될 일이니까요. 그러나 이런 시설을 지을 때마다 온갖 유인책과 보상금과 부탁과 때로는 굴욕적인 자세로 읍소해야만 가능한 것이라면, 그거야 말로 그 필요가 우리의 이익보다 훨씬 다급하고 중요하기에 다뤄지는 문제인 경우가 많다는 생각을 합니다. 너무 이 얘기 저 얘기가 길었는데 사실 하고 싶은 말은 이렇습니다. 탈근대의 사회에서 따질 것 못 따질 것 나눔이 없어야 한다마는 최소한 그 따짐이 누가 누구로부터 가는 것인지는 봐야 하지않나. 명백히 더 나은 삶의 토대로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 나보다 잘난 사람이 얼마나 많냐며, 나보다 잘 사는 사람이 얼마나 많냐며 내가 얼마나 고생하고 노력했는데 저들에게 손해를 보고 발목잡히냐며 말하는 것에 귀를 기울이는 일이 평등이나 동등한 권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위로 향할 불만을 더 쉬운 아랫것들에게 갈등할 수 있다는 점 부터가 사실은 어떤 삶인지를 명확히 보여주는 것임을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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