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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7/03/19 17:19:32
Name   은머리
Subject   세상에... 인터넷 만세..슈테판 츠바이그의 < 연민 >
옛날에 그러니까 20년도 더 전에 티비에서 <주말의 영화>나 <명화극장>류의 코너를 통해 본 영화일 거예요. 제가 영화라고 기억하고 있는 이 작품은 평생 각인되어 잊혀지지 않는 몇몇 장면들을 포함하고 있는데 다시 보고 싶었지만 영화제목이며 원작이며 찾을 길이 없었어요. 그러다 수 년 전에 뒤죽박죽인 기억을 되살려 영화줄거리를 인터넷에 올린 적이 있어요. 그 때 어떤 분이 영화의 원작이 스테판 츠바이그의 < Beware of Pity >인 것 같다고 답을 주셨어요. 우리나라에선 < 연민 >, 또는 < 초조한 마음 > 이라고 번역되어 출간됐어요. 검색을 해 보니 분명 원작가는 그가 맞으나 이를 영화화한 작품은 1946년에 제작된 구닥다리영화 밖에 없는 거예요. 넷상을 아무리 샅샅이 뒤져봐도 제가 기억하고 있는 샤프한 남주와, 절세미인은 아니지만 강렬했던 연기가 인상적이었던 여주가 등장하는 영화작품은 눈씻고 찾아봐도 없었어요. 참... 귀신이 곡할 노릇이야...어떻게 이렇게 꽁꽁 숨어있을 수가...

그러다 오늘 찾았어요. 스테판 츠바이그의 원작을 1979년에 프랑스에서 드라마로 제작한 거였던 거예요. 세상에 열심히 뒤져보니 이 드라마는 세시간이 넘는 장편이에요. 아마 우리나라에선 편집해서 보여줬었나봐요. 이 드라마가 러시아에서 인기가 좋았던 모양인지 러시아어로 더빙된 비디오가 세 시간 몽땅 업로드되어 있어요.

https://ok.ru/video/81861413565

배경은 1910년대 쯤이고 젊고 유능한 장교가, 천대받지만 부를 거머쥐고 거대한 저택에 사는 유대인의 딸을 알게 돼요. 그녀를 처음 대면하게 된 날은 이랬어요. 그녀의 부유한 유대인 아버지와의 인연으로 파티에 초대되어 간 장교는 여흥을 즐기는 사람들을 관망하다가 자신을 빤하게 바라보는 여인에게 호기심으로 다가가 동정심에 손을 내미는데 그녀는 걷지 못하는 불구였어요. 그녀는 절망감에 울음을 터뜨리고 당황한 그는 황급히 자리를 떠요.

그 인연을 계기로 그녀와 알고 지내는 젊은 장교는 사랑에 빠진 그녀의 집착을 연민 때문에 뿌리치지 못하고 심지어 결혼까지 약속하게 돼요. 그녀가 다시 걷게 된다면 자신과 결혼해 줄 수 있냐는 종용에 그러마 대답하죠. 그녀의 사랑을 수락할 당시의 그는 이미 그녀의 주치의를 만나 평생 불구로 살 수밖에 없을 것이란 확답을 듣고 난 뒤이거나 동정심에 못 이겨 결혼의 희망을 안겨 준 자신을 책망하며 의사를 만나 그녀를 걱정하는 척 대화를 이끈 뒤 내막을 듣고 안도했거나 둘 중 하나였을 거예요. 자신이 누군가를 그토록이나 행복하게 만들 수 있음을 목도하며 희열에 고취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그는 괄시받는 불구자에 유대인인 그녀와 교제하는 것이 꺼려지기도 하는 속물이기도 했어요.

그의 절제없는 동정은 그녀로 하여금 더더욱 이 말쑥하고 친절한 젊은 장교에 빠져들게 만들죠. 1시간 47분의 영상을 보시면 그에게 저돌적으로 입맞춤을 시도하는 그녀에게 심한 거부반응을 느끼는 장교의 표정이 주의를 끌어요. disgust가 표정에 적나라하게 드러나요.

이미 사랑하는 감정을 제어할 길이 없는 그녀는 초인적인 의지를 발휘해 그에게 목발없이 걷는 모습을 선보이고 싶었어요. 2시간 39분 쯤 보시면 이 장면이 나오는데 상상도 못한 그녀의 의지력에 온몸이 굳어버린 장교는 잔인하게도 이번에도 역시 당황하며 도망쳐 버려요. 이 장면이 제 뇌리에 꽤 오랫동안 남아 있었거든요. 드라마가 가지는, 시각적으로 관람자를 사로잡는 것의 정수가 모두 여기에 응집되어 있는 것 같았어요. 다시 보니 역시나 실망시키지 않는군요.  

그리고 또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2시간 58분에 나와요. 며칠이 흘렀을까요. 희망에 부풀었다가 순식간에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진 그녀는 언니일 법한 이에게 첨탑에 올라가 햇볕을 쬐고 싶다며 데려다 달라 요구해요. 태양이 따스한 그날 언니에게 사소한 부탁으로 자리를 뜨게 만든 그녀는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몸을 힘껏 끌어다가 아득한 바닥으로 낙사해 죽고 말아요.

마지막 장면에서 장교의 얼굴이 클로즈업되면서 독백이 이어지는데 제 기억에 의하면 '내 동정심이 불러일으킨 이 비극의 죄책감에서 난 평생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이 비슷한 말을 했을 거예요.  

제가 이 드라마를 본 시점이 아마 여고 때였을 거예요. 어린 제 눈에는 남주의 훤칠하고 샤프한 외모가 꼭 순정만화에서 튀어 나온 왕자님 같았었는데 지금 보니 영 제 스탈이 아니군요 -.- 여주는 모두가 감탄할 만한 미인은 아니고 참 기쎄게 생겼다 그런 느낌이었는데 나이 들어 다시 보니 마스크가 상당히 매력적이에요. 예쁜 사진 가지고 와 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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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e-Hélène Breill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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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eer Inside
    러시아 더빙은 혼자서 대사를 다 읽어주는 더빙인가요?
    은머리
    ㅎㅎㅎ 여자랑 둘이 다 커버하나 봐요.
    Beer Inside
    두명이서 커버하면 좀 인기가 있는 작품인가보군요.

    한국드라마 러시아 더빙보면 한명 또는 두명이서 다 더빙을 하더군요.

    문맹률이 높은 편이라서 자막은 힘든 모양인 것 같고, 돈은 넉넉하지 않으니 대부분 성우 1명 또는 두명이 해결하는 것 같더군요.
    가끔 이렇게 머리에 남아만 있으나 찾을 단서가 없는 작품이나 물건들을 우연히 떠올릴 때 전 기쁘더라고요. 그렇게 한 번 되새기면 다음부터는 잊지도 않죠. 여자 배우가 인도 사람 같다는 생각이 처음 봤을 때 들었고, 조금 더 보니 서구권 백인이 또 보이네요. 그렇게 하고 아마도 가장 유명할 인도 사람인 간디 사진을 보니 그에게서도 백인이 보여요. 아리아인도 넘나 재밌는 것. 냠냐암...
    은머리
    어제 이거 찾느라 시간 왕창 보내고 찾고 나서 이거 쓰느라 시간 왕창 보내고 늦게 자서 피곤해 죽겠네요;;; 그래도 다시 보길 갈망하던 예술작품을 20여 년만에 찾게 되니 으아! 너무 행복해요. 제 기억보다 훨씬 훌륭한 사실에 감탄하고 있어요.
    구밀복검
    반세기가 지나면 심미감도 달라지는군요.
    은머리
    우리나라 같았으면 넙대대한 턱을 촵! 깎아버렸을텐데 오히려 그게 마스크를 유니크하게 만들어줘요. 그래서 말인데 우리나라 여자 탤런트들이나 배우들은 왜 그렇게들 천편일률적인 얼굴들을 하고 있는지 생긴 건 재미가 없고 사고는 게을러요.
    二ッキョウ니쿄
    은머리님 한국사시면 경복궁역 근처 철학아카데미서 진행하는 재미난 시민강의들 진짜 재밌게 들으셨을텐데 아쉬워여
    은머리
    호호호호 제가 그런 거 좋아할 것 같은가부다 오호호호. 지적으로 보이능? 아항항항항항. 지적으로 마이 딸려서 어제 도스토예프스키 얘기 구경만 했어요. 정말 재밌었어요!
    이 여주 왜 낯설지가 않죠? --;;

    프랑스어에 러시아어.....쿨럭
    은머리
    http://www.huffingtonpost.kr/2016/12/03/story_n_13403484.html
    어머 ㅠㅠ 이 여배우 동의없는 강간장면으로 논란이 되었던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에 나왔던 그 배우군요.
    어머어머 ㅠㅠㅠㅠ
    (욕 나와요 ㅠㅠ)
    은머리
    강간장면은 원래 시나리오에 있었고 말론 브란도와 감독이 여배우의 수치심을 유발하기 위해 몰래 버터를 사용한 것이 화근이었군요. 수치심을 유발하기 위해 모의한 두 사람의 야비함에는 여전히 공분을 느끼게 돼요. 으아 그래도 넘 끔찍했었는데 그마만큼은 아니라 다행이에요. 그 감독도 생각나요. 미치광이 독일배우 클라우드 킨스키의 광기를 자극해서 카메라에 담은 간사한 감독이요. 헤어조크 감독.
    네. 저 기사에 따른 후속기사도 아셔야 할거 같았습니다.
    세인트
    주이 디샤넬이 언뜻 보이는 외모... 근데 이분이 좀 더 고급지신듯.
    나방맨
    뭔가 주이 디샤넬 + 마리옹 꼬띠아르 같아여
    세인트
    글고보니 꼬띠아르도 보이네요
    은머리
    왕방울 같은 눈이 닮았네요. 말씀하신대로 이 여배우가 더 분위기있게 생겼어요. 이름은 마리아 슈나이더래요. 방금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기사 읽고 기분이 잉 ㅠ.
    이 글 읽으니..예전에 본 영화 백야가 생각나요. 영어버전으로 이 나이에 지금 다시 보면 어떤 감정이 들까 하는 생각요. 어릴때 너무나 빠져서 한동안 미하일바리시니코프 좋다고 발레 보고 했던 기억들이...

    어릴때 TV 를 끼고 살았었기에... 저도 연민 아마 보았을 것이지만 ㅎㅎ 아무 기억도 남아있지 않아요. 내용이 딱 제가 좋아하는 타입이네요. ㅋㅋ
    은머리
    일전에 와플 님이 찾아주신 <라스트 나잇 크리스마스>도 그렇고 어떤 예술작품을 접하고 잔상에 남아 있던 기억들이 강산이 몇 번 변하고 난 뒤 다시 선명하게 호출당했을 때의 기쁨은 상당하거든요. 전 그런 새로운 경험을 할 때 미래의 잔상을 염두에 둬요. 할머니가 돼서 떠올리면 정말 애틋하겠다란 생각을 해요.
    오 좋은 습관이시네요. 저는 찰나의 기쁨에 일희일비 ㅎㅎ 가끔 남편이랑 나이들어서 우리는 30년-50전 순풍드라마나 시그널 같은 것들 돌려보고 있겠다 하기는 해요. 시니어 되는 것도 새로운 경험일 것 같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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