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7/10/10 21:42:08
Name   개마시는 술장수
Subject   백수기(白首記)
눈을 떠보니 낮선 천장이다.
...는 개뿔. 어제와 같은 오늘이다.
잠은 아무리 자도 더 필요하고 사치스럽게도 이불 속의 온도는 너무나 포근하다.

'나오기 싫다.'

10분만 더 있다 나오자고 생각하고 6분이 지났을 즈음에 기어나온다. 이미 시간을 정해놓은 이상 편치 않다.
잠에 깨어나면 가장 먼저 양치를 한다.
거의 집에만 있지만 입에서 구취가 나고 싶진 않으니깐.
어디선가 양치질이 의식이 깨어나는데 효과가 있다는 연구글을 본 것 같기에 조금이라도 효과가 있지 않을까 싶다.
적당히 입을 헹구고 쇼파에 앉아 생각에 잠긴다.

"자...오늘은 무엇을 할까"

백수가 된지 벌써 4개월째이다.
20대 중반에 대학을 졸업을 하고 서른 사이에 의도치 않은 이직을 자주 하게되었다.
열정페이, 인턴쉽 만료, 임금체불, 사내정치, 회사부도...
신물이 났다.
직장생활은 끌이 보이지 않는 터널과 같았고 이대로 끌려다니면 그 어둠속에 먹혀버릴 것만 같았다.
제대한 군인은 무엇인든지 할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마련이다.
이 지긋지긋한 열정을 먹는 자들에게서 도망칠 있다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서른이 되던 해에 대학동기와 함께 모아놓은 돈을 탈탈 털어서 사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4년하고도 214일이 되던 날, 마지막으로 모든 것을 정리했다.
남은 것 없었다. 전부 잿더미일뿐.
그나마 다행인 것은 빚은 없다는 것이었다. 모아둔 돈은 전부 사업에 부었고 잘안되던 일에 호흡기를 씌우기 위해 사용하였다.
미련한 짓이었다. 질질 끌지 않고 그 때라도 멈췄으면 지금처럼 되지 않았을텐데.....
이젠 서른중반이 된 지금 이 시점에 무자본 무경력의 백수가 탄생하였다.
사업의 성공은 자본의 양이 좌우한다. 한번의 실패가 있어도 다시 일어설 총알이 남아있다면 다시 전장으로 나갈 수가 있다.
하지만 한 탄창에 모든 것을 쏟아부은 병사에게 남은건 엎드려 적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 뿐이다.
변변한 경력도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너무나 제한되어있었다.
간신히 좁은 인맥을 동원하여 새 직장을 구했다.
하루에 12시간동안 일하며 일주일에 한번 쉬기도 어려운 노동직이다.
급여는 최저임금이며 사람이 없다는 핑계로 사실상 14시간동안 일해야했다
일자리 구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불만없이 일했다. 아니 일할 수 밖에 없었다.
6개월이 지났을때 내 왼쪽 무릎이 아작나기 전까지.

"뭐, 이력서라도 다시 써봐야지"

어제는 고용센터를 갔었다.
국가지원교육이라도 받을 수 있을지 확인하기 위해서이다.
상담원은 내 이력을 살펴보더니 심사기준에 건강보험료가 1,600원이 더 높다고 기준 미달이라고 한다.
흠...흥미롭군. 뭔가를 배우고 싶다면 자비로 충당할 수 밖에 없는건가. 계좌에 잔고가 간당간당한 입장에서는 우울한 일이다.
기술이라도 배워야 빛이 보일 것 같지만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할지도 망막한 일이다.
이미 흥미있는 일을 하기엔 너무 늦은 나이다.
돈을 벌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한다.
아니, 돈을 떠나서 취직이 가능한 일을 찾아야한다.

영어책을 펴본다. 오래 전에 끊은 토익 공부를 다시 시작하였다.
이전 성적은 만료된지 오래니까.
사실 쉰입에게 영어성적같은게 별 의미 없을테지만 없는 것보단 나을테지.
전에 알고있던 내용도 많이 잊었기에 다시 공부하기는 쉽지않다.
그보다 그동안 줄어든 뇌세포의 양만큼 학습이 어렵게 느껴지는 것이겠지만.

국가지원정책을 찾아보고 이력서를 수정하고 원서를 넣어본다.
없는 것보단 나을거라는 생각으로 영어공부를 해본다.
잠시 않아 다시 한번 생각해본다.
지금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무엇을 해야 이 상활을 벗어날 수 있을까.
어떤 것을 배워야 새 직장을 구할 수 있을까.
대학 때의 인턴쉽을 계속 버텼을으면 어땠을까.
사업을 시작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한번의 실패로 재기가 힘든 건 너무 가혹하지 않은가.
잃을게 없으니 미친척하고 공무원 시험에 올인해볼까.

생각만으로 무언가를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다.
망상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었다면 이미 난 데우스 엑스 마키나 같은게 되었을테지.
희망은 보이지 않고 세상에 홀로 남겨진 기분이다. 내 자존감이 위협받고는 있는 걸까?
우울하다. 이렇게 희망이 없는 상황이 계속되면 나는...
이라는 생각에 도달했을때 잠시 생각을 멈추고 생각자체를 다시 더듬어보다 허탈하게 웃었다.


"뭐 언제는 희망이 있어서 살았나"



11
  • 춫천


https://www.youtube.com/watch?v=T5YT0HPgo9g
비트겐슈타인(신해철) - 백수의 아침

글을 읽으며 함께 들으면 괜찮을 음악 하나 소개합니다.

놀리거나 비하하는게 아니라, 백수라는건 회복을 위한 최고의 기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일이든 언젠가는 반드시 찾아오게 되어 있으니, 굳이 절망하실 필요 없이 즐기다보면 피할 수 없는 일이 나를 찾아오는 날이 올거예요. 저도 장사하기 전까지 약3년가량 푹 쉰적이 있는데 그때도 딱히 걱정없이 살았던 게, 이 쉬는 기간이 영원하진 않을거라는 느낌이 있었거든요. 기운 내시고 그냥 그 시간을 즐기시면 될 것 같습니다.
1
파란아게하
빚이 없으시다는 게 참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같잖아서 제가 드릴 말씀은 없으나 응원합니다. 춫천.
깊은잠
이따금 살면서 불운이란 게 너무 자주 찾아와서, 대체 뭘 잘못했나 싶을 때가 간혹 있습니다. 그래도 살아있으니 마저 살아야지요. 꾸역꾸역.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공지 티타임 게시판 이용 규정 2 Toby 15/06/19 32895 7
15402 도서/문학사학처럼 문학하기: 『눈물을 마시는 새』 시점 보론 meson 25/04/23 140 1
15401 일상/생각아이는 부모를 어른으로 만듭니다. 2 큐리스 25/04/23 272 9
15400 꿀팁/강좌4. 좀 더 그림의 기초를 쌓아볼까? 5 흑마법사 25/04/22 280 17
15399 일상/생각처음으로 챗GPT를 인정했습니다 2 Merrlen 25/04/22 663 2
15398 일상/생각초6 딸과의 3년 약속, 닌텐도 OLED로 보답했습니다. 13 큐리스 25/04/21 763 28
15397 일상/생각시간이 지나 생각이 달라지는것 2 3 닭장군 25/04/20 712 6
15396 IT/컴퓨터AI 코딩 어시스트를 통한 IDE의 새로운 단계 14 kaestro 25/04/20 588 1
15395 게임이게 이 시대의 캐쥬얼게임 상술인가.... 4 당근매니아 25/04/19 584 0
15394 꿀팁/강좌소개해주신 AI 툴로 본 "불안세대" 비디오 정리 2 풀잎 25/04/19 569 3
15393 IT/컴퓨터요즘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AI툴들 12 kaestro 25/04/19 721 18
15392 도서/문학명청시대의 수호전 매니아는 현대의 일베충이 아닐까? 구밀복검 25/04/18 450 8
15391 정치세대에 대한 냉소 21 닭장군 25/04/18 1144 15
15389 게임두 문법의 경계에서 싸우다 - 퍼스트 버서커 카잔의 전투 kaestro 25/04/17 358 2
15388 일상/생각AI한테 위로를 받을 줄이야.ㅠㅠㅠ 4 큐리스 25/04/16 654 2
15387 기타스피커를 만들어보자 - 번외. 챗가를 활용한 스피커 설계 Beemo 25/04/16 261 1
15386 일상/생각일 헤는 밤 2 SCV 25/04/16 363 9
15385 게임퍼스트 버서커 카잔에는 기연이 없다 - 던파의 시선에서 본 소울라이크(1) 5 kaestro 25/04/16 287 2
15384 일상/생각코로나세대의 심리특성>>을 개인연구햇읍니다 16 흑마법사 25/04/15 676 10
15383 일상/생각평범하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 1 큐리스 25/04/15 597 8
15382 음악[팝송] 테이트 맥레이 새 앨범 "So Close To What" 김치찌개 25/04/14 160 0
15381 IT/컴퓨터링크드인 스캠과 놀기 T.Robin 25/04/13 553 1
15380 역사한국사 구조론 9 meson 25/04/12 868 4
15379 오프모임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5/4 난지도벙 15 치킨마요 25/04/11 992 3
15378 스포츠90년대 연세대 농구 선수들이 회고한 그 시절 이야기. 16 joel 25/04/11 1160 8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