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호신,진경산수 중 달집태우기 이화여대 박물관 소장
일곱살 되던 해 설 지나 대보름날 시골 국민학교 교정 캄캄한 어둠에서 본 불꽃을 잊지 못한다. 살면서 본 어떤 화려한 불꽃도 그만큼 인상적이진 않았다.그 해를 분명하게 기억하는 이유는 그러고 며칠 후 할아버지의 손에 끌려 황간역에서 생전 처음 기차를 타고, 학교 문제로 몇 해 전부터 먼저 나와있던 식구들과 합류하던 무렵이기 때문이다.
화목인지 조개탄인지 기억도 가물거리는 빈약한 난로 하나가 유일한 난방수단이었던 을씨년 스러운 역사 안에서 성애낀 나무격자의 유리창을 통해서 처음 본 기차는 정말 운명의데스티니급 컬쳐쇼크였다.
내 유년의 초반부는 어둠속에서 마주했던 그 불꽃과 생전 처음 본 기차와 함께 그렇게 막을 내렸다.
고향을 떠나오고 북부 경상도 지역을 여행하거나 지날 일은 거의 없었다.
스물 몇 살 무렵 친구들과 동해쪽으로 해서 7번국도를 타고 내려와 느지막히 안동의 하회마을에 들러 하룻밤 묵었던 게 마지막이었으니,
중간고사를 마치고 5월 대동제도 끝나고, 나와 동기여자애 하나 그리고 동기남자애의 다른 학교 친구까지 셋이 함께였다. 구성이 좀 웃긴다 싶었는 데, 그 땐 친구의 친구면 중간에 하나가 빠져도 ‘그냥 친구’가 가능했다.
늦은 오후에 도착해서 묵을 곳을 정하고 둘러 본 하회마을은 단정하고 예뻤지만 나는 몹시 지루했다.
생각하면 당연하다 싶은 게 내가 보고싶은 건 360년도 넘었다는 오래 된 집들이 가진 반들거리는 대청마루와 처마, 건물의 배치와 구도, 마당 그리고 나무들인데 경제적으로 불편함이 없는 고택의 주인 입장에선 살림을 낯선이에게 구경거리로 내줄 이유가 없는 거다. 그들의 담장은 수백년 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견고하고 높았다.
한편 마을의 입구 초가나 슬레트 지붕의 주막들과 뒷편에 자리잡은 현대식 기와집의 민박들은 의미없고..
마을은 큰 강이 감싸고 돌았는데 곡면이 생기면서 강폭은 바깥으로 밀려나고 유속이 느려진 탓인지 강과 마을쪽 제방 사이에 만들어진 백사장이 무척 넓었고, 제방은 차가 한 대는 지날 수 있을만한 정도였는데 비포장도로라 곳곳이 패여져 지날때마다 바퀴가 덜컹거렸다.
저녁을 먹고 잠시 쉬던 우리는 누구랄 것도 없이 강으로 가자!
흥건한 달빛만 가득하던 너른 백사장, 우리는 대취한 것도 같고 술을 전혀 마시지 않은 말짱한 정신이었던 것도 같다. 원래 그렇다. 오래된 기억이란 제 스스로 이야기를 보태거나 빼버리기도 하는 법. 우리 중 누군가 들국화의 ‘그 것만이 내 세상’을 불렀고, 나와 친구는 춤을 추고 추임을 넣었다.
그리고 당시의 세상은 우리들 머릿속에서 많이 슬펐다. 우리 학번만 해도 운이 좋은편이라 몸을 갈아넣어 뭔가를 해야하는 상황을 피했는데 몇 학번 위의 선배들은 몸으로 그 모든 것을 감당해야 했고, 기회가 될 때마다 자신들이 무엇을 보았는지 얘기를 해 주던 시절이기도 했다. 그들은 지나듯 요즘도 그 때의 얘기를 한다. 사람이 몸에 불을 붙이면 어느 순간 수수깡처럼 몸이 반으로 접하는 것을 알게된 날 이란 얘기를 해 준 이는 2학년 봄 학관앞에서 선배의 분신을 눈앞에서 봤던 나의 '유아쏘퍼킹스페셜'한 친구이다.
마을쪽 제방 아래에는 수령이 오래된 나무가 있었는데, 셋이 팔을 활짝펴고 달라붙어도 서로의 손이 닿지 않을 정도로 몸체가 두터웠다. 초여름 밤의 어둠과 달빛아래 무성한 잎들과 서로 서로의 그림자로 나무들은 실제보다 거대하게 느껴졌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
6월, 일년 중 가장 생기있고 아름다울 무렵에 젊었던 친구들과 함께 봤던 나무를 가장 앙상하고 볼품없는 계절에 혼자서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들 중 다른 누구라도 그후에 이곳을 다녀간 이가 있을까 그 시간들을 기억은 할까 궁금하다. 특별히 수소문할 생각은 없지만 그들은 나처럼 세상에서 등돌려 살지 않았기를... 평범하게 모서리를 잃어가는 그런 시간들이 아니었길 다만 그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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