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7/08/04 00:00:00
Name   프렉
Subject   가난한 배부름.


#1.

우리 부모님은 내가 어렸을 적에 맞벌이를 했다. 그 무렵의 시대상을 감안하면 맞벌이는 꽤나 흔치 않은 생활양식이었다.
지금이야 9시 출근-6시 퇴근이 이상적인 시간대라지만 그 무렵엔 여덟시-오후 다섯시 반이 가장 흔한 출퇴근 패턴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패턴 속에서 나와 내 동생이 부모님과 얼굴을 맞대는 시간은 오전 일곱시, 아침 식사시간 뿐이었다.
몸 단장을 해야하는 어머니는 좀 더 일찍 일어나서 찬을 차려주셨고, 아버지는 전날의 과로로 얼굴이 벌개져서 일어나기 일쑤였다.
4인용 탁상에서 서너가지 반찬을 둘러싼 네 명은 서로 할 일과 해야할 일, 그리고 언제 집에 돌아오는지 공유했다.

'국민'학교 저학년을 벗어난 무렵부터 저녁을 해먹는 건 우리 형제의 몫이었다. 어머니는 요새 학교에서 급식을 해줘서 너무 좋다고 했다.
어머니는 항상 여섯시에 일어나기 직전 눈뜨기 싫어하는 사람처럼 도리질하다 일어나는 버릇이 있었다. 나는 어머니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2.

그 무렵엔 키가 2미터는 넘길 기세로 먹어대던 시절이었다. 항상 배고팠고 뭔가 뱃 속에 남아있는 감각을 좋아했다.
나는 2교시 무렵에 나오는 우유를 항상 두 개씩 마셨다. 반 친구들 중 한 녀석이 우유만 먹으면 꼭 설사를 했기 때문이다.
170이 안되는 아버지의 아들이지만 180의 키를 가지게 된 것도 그 녀석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4교시가 끝나고 나오는 급식은 엄마가 해주는 밥에 비하면 맛이 없었지만 못 먹을 정도는 아니었다. 고기 반찬을 많이줘서 좋아했다.
내심 가장 좋아했던 것은 금요일 무렵에 나오는 경양식 비슷한 메뉴였다. 함박 스테이크에 가루 풀어서 만든 스프.
항상 그런 반찬을 접하게 되면 "아 배부르다 그만 먹어야지." 라는 생각보다는 "지금 먹어둬야지" 라는 생각이 앞섰다.

토요일에 나오는 빵은 꼭 두 개씩 챙겼다. 빵 싫어하는 애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토요일 저녁은 학교에서 가져온 빵에 우유를 적셔 먹었다.

#3.

어느 날 부모님이 유난히 기분이 좋았다. 이유는 모르지만 놀러가자는 말이 어머니의 입에서 나왔고 우리는 어디로 가느냐며 물었다.
아버지는 '부페'라는 곳에 갈 꺼라고 했다. 그 때는 어려서 그게 뭘 뜻하는 말인지 몰랐다. 아무튼 넷이서 어디를 같이 가는게 좋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 살림에 고급 음식이 깔린 뷔페를 갈 수 있을리가 없었다.

도착한 곳은 예식장이었고 아버지 어머니가 알던 사람들의 결혼식이었다. 나와 내 동생이 관심은 신랑, 신부, 하객이 아니라 초밥이었다.
밥을 동그랗게 말아서 회를 올려놓은 말도 안되는 사치였다. 조그만 그걸 입에 넣으면 약간 매콤한 맛이 났고 씹어 삼키면 단 맛이 났다.
우리 둘은 아예 초밥 앞에 자리를 깔고 앉아서 예식장 직원이 그걸 새 것으로 채워줄 때마다 게걸스럽게 비웠다.

이런 반찬을 접하게 되면 "아 배부르다 그만 먹어야지." 라는 생각보다는 "지금 먹어둬야지." 라는 생각이 앞섰다. 그리고 사고가 났다.

#4.

뭘 먹다가 체를 했는지는 모르겠는데 뱃 속이 너무 아팠고 화장실에서 일어나질 못했다. 피로연은 진작 끝났지만 나와 내 동생은 화장실에 있었다.
아버지 어머니는 다른 예식팀의 피로연이 끝날 때까지 화장실 앞에서 우리를 기다렸다. 맛있는 걸 먹었고 배가 불렀지만 속이 쓰렸다.
동생은 집에 가는 길에 연신 헛트름을 해댔고, 나는 속이 쓰려서 혼자서 끙끙 앓았다. 집에 가서 데운 보리차를 좀 마시니 속이 나아졌다.

#5.

이후 시간이 많이 흘렀고, 그 중엔 종종 뷔페를 접할 경험이 있었다. 쓴 맛을 보았음에도 나는 유달리 맛있는 메뉴에 집착했다.
항상 나의 패배였고, 고등학교 무렵에 배앓이를 제대로 했다가 장염이라는 병도 얻었다. 컨디션이 안좋은 날에는 지금도 쿡쿡 쑤시듯이 아프다.

내 주변의 잘 사는 친구들은 항상 식사 양이 적은 대신 여러가지를 먹어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맛을 즐기는 사람들이었다.
식사가 필수가 아닌 선택인 사람들이었고, 사실 그것이 올바른 식도락이겠지만 내 눈에는 질투의 대상이었다.
난 항상 배가 불러 있어야 했다. 왜냐면 밥을 해줄 사람도, 같이 먹어줄 사람도 열 한시가 넘어야 돌아왔기 때문이다.

#6.

항상 밥을 먹으면서 생각한다. 포만감은 무엇을 기준으로 생각해야하는 것일까.
맛있는 걸 많이 먹으면 배가 부른 것일까, 아니면 식사를 포함한 여러가지를 두루 경험한 뒤의 정신적 만족감이 포만한 상태를 말하는 걸까.

항상 혼자먹는 음식들은 칼로리가 높고, 기름지고 맛있지만 뒤돌아서면 공복감을 느낀다.
혼밥이라는 것은 혼자서 공복을 해결하는 요식행위 인 것 같다. 포만감은 언제쯤 다시 느낄 수 있을까.



16
  • 다이닝 메이트가 필요합니다 ㅠ
  • 날카로운 통찰력에 탄복하고 갑니다.
  • 추천드립니다.


카레똥맛카레똥
적게 먹다 보면 포만감 레벨도 점점 낮아지는 것 같더라구요.
저 무렵엔 식사량 조절이란 생각이 없었죠. 뒤돌아서면 배고프고, 놀다보면 목 마르고, 씻고 나면 다시 밥벌레가 부르고..
지금은 적게 먹으려고 하는데, 그러다보면 아예 끼니고 뭐고 안 챙기게 되는 것 같습니다.
카레똥맛카레똥
저도 비슷한 것 같아요. 아예 안 챙겨 먹거나 너무 많이 먹거나... 혼밥의 정서랄까 조건이랄까, 뭔가 다들 공유하게 되는 게 있는 것 같아요.
추천이요. 추천.. 정말로 추천.
CONTAXS2
저는 어렸을 적 엄마가 결혼식이나 회갑연같은데를 가셔서 미제 타파통에 싸오시는 전같은거를 좋아라하면서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가끔 요새도 결혼식에서 전이나 갈비같은거 바리바리 싸시는 어른들 볼때, 처음엔 '뭘 왜 저렇게..'하다가
당시 생각하면 정신이 번쩍 나곤 하지요.

당연히 남아 버리는 음식 싸가는게 모든 면에서 좋은건데도.
켈로그김
저도 예정된 뷔페식사에 갈 때는 항상 크린백과 락앤락을 들고 갑니다.
총각때는 생존을 위해서(...) 였고,
결혼 후에는 혼자 갈 때는 당연히 처자식 맛 좀 보라고 조금씩 담아가려고 하고,
같이 가서 먹을때도 시간상 못먹었던 것들. 혹은 집에서도 잘 먹을만한 것들은 조금씩 담아가죠.

아내는 쪽팔려하지만, 저는 그게 제 아이에게 어떤 추억이 될거라 생각해요.
맛있는 음식을 먹었다... 보다는 '아빠가 뭘 싸왔었다' 는.. ㅋㅋ
요샌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국물요리 조차 남는건 포장해주는데도 남기고 가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켈로그김
저는 밥은 어찌어찌 잘 해먹었습니다.
그것보다 혼자있는 시간 자체가 참.. 그랬던 것이,

평일은 같이 노는 애들이라도 있는데, 주말이 되면 친구들 거의 대부분이 가족과 함께 어딜 갑니다.
낮시간엔 오락실이라도 가는데, 저녁이 되면 엄마 들어올때까지 두어시간을 집 앞에 쪼그리고 앉아있습니다.
할게 없으니 오늘 오락실에서 했었던 플레이를 복기하고 있었지요 ㅡㅡ;;;
저는 본문의 포만감- 저에게는 오락 -을 초라하게 만드는 것은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현실" 이라고 어느샌가 생각을 했던거 같아요.

그래서.. 개의치... 더 보기
저는 밥은 어찌어찌 잘 해먹었습니다.
그것보다 혼자있는 시간 자체가 참.. 그랬던 것이,

평일은 같이 노는 애들이라도 있는데, 주말이 되면 친구들 거의 대부분이 가족과 함께 어딜 갑니다.
낮시간엔 오락실이라도 가는데, 저녁이 되면 엄마 들어올때까지 두어시간을 집 앞에 쪼그리고 앉아있습니다.
할게 없으니 오늘 오락실에서 했었던 플레이를 복기하고 있었지요 ㅡㅡ;;;
저는 본문의 포만감- 저에게는 오락 -을 초라하게 만드는 것은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현실" 이라고 어느샌가 생각을 했던거 같아요.

그래서.. 개의치 않고 열심히 놀았던거 같습니다.
보살펴 줄 상황되면 보살펴주겠지.. 일단은 노는데 집중하자..
가족 드라마를 보면 어떤 일이 일어나던지 항상 거하게 차려진 식탁에 둘러앉아서 밥 먹는 광경이 나오죠
지금이나 어린 시절이나 그게 참 부러웠던 것 같아요. 다같이 있다는 느낌이 제일 고팠던 것 같습니다.
부익부빈익빈과 배고픔, 배부름. 다시 말해 식욕과 자본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력.

추천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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