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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7/09/19 03:46:11
Name   프렉
Subject   어째서 10덕인가? (前)

사실 반쯤은 이 처자들 책임도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카마츠 켄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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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년도와 00년도는 나에게 있어서 정말 심심한 때였다. 학교 생활이 재미가 없었고, 가정사가 급격히 기울어가던 시기였다.
하라는 공부는 안했으니 성적이 신통할 리 없었다. 그 무렵의 IT 버블은 내가 실업계 고등학교에 원서를 내는 좋은 핑계였다.

일단 공고에만 붙으면 그 이후엔 선생님들이 안철수 아저씨나 빌 게이츠처럼 만들어 줄거라 생각했으나 터무니 없는 망상이었다.
성적이 아니라 오로지 기능으로 우열을 매기는 곳이 실업계였고, 게으름뱅이는 앉아서 의자 덥히다가 다섯시가 되면 일어나 집으로 가는게 전부였다.

그럼 집에 가서 무엇을 했느냐. 십덕질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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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애니의 역사가 어떻게 흘러왔는지, 어떤 것이 유행이었는지, 감독의 이름이나 유명 원화가의 이름 같은 건 나보다 잘 아는 사람이 훨씬 많을 것이다.
내가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은 어쩌다가 이렇게 볼만한 것들이 없어졌는가에 대한 하나의 성토(?)이자, 개인적인 의견이다.

일본 애니계의 중요 포인트는 수도 없이 많았겠지만 물 건너에서 말하는 '버블 시대'를 언급하지 않고서는 구체적인 십덕짓이 불가능할 정도다.
컷신마다 유려한 펜선처리와 지금 이 짓을 하려면 수십, 수백억원을 때려박아야 한다는 셀지 도배. 그 무렵 포텐이 폭발한 전설적인 만화 원작 등등.
동서양 십덕들 막론하고 "그 때가 좋았지"라며 꼰대 짓을 하게 만드는 원인들은 죄다 저 버블 시대에 탄생한 애니메이션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글 상단에 러브히나의 이미지를 박아넣으며 아카마츠 켄을 까댔지만 그 무렵엔 그럼 하렘물이 없었느냐? 그건 또 아니다.
작품 종료 이후 호랑이 무늬 비키니를 입은 처자가 예뻐 보일 수 있다는 걸 입증한 시끌별 녀석들, 지금도 사골 끓듯 후속작이 나오는 천지무용등이 있다.

그럼 대체 십덕 글쓴이인 본인이 말하는 예전과 지금의 결정적인 차이는 무엇인가? 바로 스토리가 없어도 팔리는 십덕 시장에 있다.

시끌별 녀석들은 후대의 십덕들에게 강제로 쳐들어온 신부라는 클리셰를 남긴 탄탄한 스토리가 있고, 천지무용은 은하 제일의 제국 '쥬다이' 가문의 등골을 쪽쪽 빼먹는 남자 주인공 텐치가 본인의 페로몬으로 우주평화를 지킨다는 어마어마한 스케일의 백그라운드 스토리를 두고 있다.

즉, 앞서 예로 든 두 작품은 어쩌다가 이렇게 이쁘고 매력있으며 설정상 부자 혹은 아주 강력한 뒷배를 둔 히로인이 헤노헤노모노지 같은 얼굴을 가진 놈들에게 몸과 마음을 다바쳐서 애정 공세를 펴느냐에 대해 꽤나 심도있는 설정을 부여했고 이 설정들은 후에 이삼십년이 지나도록 또 우려먹고 또다시 우려먹을 수 있는 탄탄한 기반을 제공했다는 점이다.

당장 에반게리온만 봐도 그렇다. J.J. 에이브람스가 떡밥의 제왕이라고? 그보다 이십여년 앞서서 에반게리온은 설정놀음이라는 짓으로 일본 남성 덕후들의 등골과 뇌세포를 뽑았으며 불멸의 투톱 히로인인 레이와 아스카를 통해 그들의 젊음을 흡수하기에 이르렀다. 지금도 에반게리온이 시들지 않는 이유는 수학능력시험에 나오는 국어 지문보다 더 해석하기 빡치는 수많은 설정들과 중얼거리고 있으면 크큭하면서 내면이 포팔할 것 같은 성경 단어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이것보다 레이, 아스카 비중이 2천 배 정도 더 중요하지만 그건 넘어가자.

그런데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십덕 시장에 하나의 단어가 유령처럼 거리를 배회하기 시작한다. 바로 모에(萌え)였다.
모에라는 요소가 등장하면서부터 일본 십덕시장은 급격하게 흔들리기 시작한다.

모에가 등장하면서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은 아래와 같다.

1. 작품의 흐름과 캐릭터의 행동 양식을 설명하는 설정이 반 이상 줄었다.
2. 스토리 플롯을 내부에서 생산하는 것보다 잘나가는 원작을 구하는 것이 훨씬 빠르다.
3. 캐릭터성을 전면에 내세워 작품을 소비시킨 후에 이어지는 굿즈로 빠르게 현금전환하는 것이 가능하다. 즉, 단기몰빵이 가능하다는 것.

위의 세 가지 요소는 기존의 애니메이션 제작사들에겐 큰 충격이었다. 특히 불황인 일본에서 경영적 측면에선 쌍수를 들고 반길만한 사건이었다.
사실상 감독과 작가를 겸하던 사람들은 사라지고 직종을 세분화해서 빠르게 인력을 모았다가 작품이 끝나면 팀을 해체해서 인력비를 줄일 수 있었다.

사람들이 애니메이션 오프닝 말미에 나오는 '무슨무슨 제작위원회'를 보며 십덕 클리셰라 낄낄대지만 십덕계의 최고 적폐가 바로 제작위원회다.
이 인간들이 돈을 어디에 대느냐, 무슨 작품을 꼽느냐, 심지어 어떤 히로인을 어떻게 밀어줄 것이며 어떤 컨셉의 굿즈를 어디서 생산할지 전부 정한다.

돈이 넘치던 시절엔 일단 돈을 작품에 갖다박으면 어떤 모양새가 되던 감독과 스텝의 역량책임이었지만, 장기불황으로 접어든 일본 시장에선
그나마 남아있는 돈줄을 쥐고 흔드는 제작위원회를 절대 무시할 수 없었고, 모에의 흐름을 타기 위해 제작위원회는 무던 애를 쓰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 십덕 시장은 열 개 중에 한 두개만 히트하는 분기만 나와도 그 때가 좋았지 하면서 회상하는 뫼비우스의 띠에 걸려 허덕이기 시작한다.
처음엔 메인 히로인에 몰빵시켜서 어떻게든 작품을 띄우려 애를 쓰는 패턴이었지만, 누군가가 하나가 안되면 물량이라는 SM식 플랜을 떠올린다.

그 선두주자가 글 상단에 있는 이미지의 주인공 러브히나였다.

소꿉 친구에 츤데레, 멍한 이미지와 글래머 속성의 서브히로인, 신비한 힘과 반듯한 성격에 미인이라는 점을 추가한 히로인, 후배 히로인, 실눈 색기담당 히로인, 천재 메카닉 왕녀 히로인, 피가 안섞인 여동생 히로인... 이 중에 니가 좋아하는 것 하나는 걸리겠지, 뭘 좋아할지 몰라서 싸그리 준비했어.

그리고 보란듯이 십덕들은 여기에 낚여서 주머니 쌈짓돈 까지 털어서 그들의 2D 신부를 사랑하기 시작한다.

설정집, 특장판, 문고판, 소장판, 소설판, 성우들 실황 라이브, DVD였지만 시절이 좋아지자 블루레이, 십덕들이 재생산한 팬북, 데이터 집, 애니메이션 오프닝은 오리콘 차트 상단에 박히고, 계절마다 계절 특별판이 나오고, 캐릭터별 캐릭터 송에 그 캐릭터 송을 모아서 만든 특별 음원CD에 게임은 게임대로 속편이 나오고..

러브히나는 모에의 최전선에서 극한의 모에 뽑아먹기를 선보였다. 코단샤 건물 올릴 때 이 양반이 벌어들인 돈이 절반이었다는 루머가 루머처럼 들리지 않을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 아카마츠 켄 본인도 이 작품의 성공 이후로 이것보다 더 큰 성공을 경험한 적이 없을 정도다.

이후 하렘물과 모에를 굴리는데 러브히나는 일종의 가이드 역할을 했고 이후 가끔씩 흥행하는 하렘물은 이 공식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설정 몇 개를 더하거나 뺐을 뿐 작품 굴려서 성과내는데 이만한 모델이 없었던 것이다.

물론 이후에도 십덕들이 인정하는 명작들은 몇 개씩 드문드문 보이긴 하지만 모에는 이미 일본 시장 깊숙히 자리잡으며 돈을 버는 안정적인 플랜으로 굳어진다. 뜰지 안뜰지 모르는 스토리나 만들기엔 역량이 후달리는 다른 만화-소설 원작에 손을 댈 리스크를 감수할 필요가 없었다. 제작사 직원들을 항상 인터넷 게시판을 주목했고 그들 사이에 한창 소비되고 있는 모에요소들을 찾아 구석구석 찔러서 십덕들의 호주머니를 터는데 주력했다.

작품을 소비하는데 충성심을 내세우는 이들은 그들 밖에 없었고, 오타쿠라는 단어가 수면 위로 떠올라 몇몇 사람들에게 본격적으로 붙여지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애니메이션을 소비하는게 아니라 유사연애대상인 캐릭터를 소비 혹은 사랑하는 사람들. 자신과 주변을 돌보지 않는 사람들. 냄새나는 안경 돼지, 혹은 안경 멸치의 클리셰들이 비웃음과 함께 게시판을 점령하고 있어도 그들은 묵묵히 충섬심이란 이름의 소비를 멈추지 않았다.

이 글에서 불쾌함을 느낀 사람들은 이런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도 옛 시절부터 이어져 내려오며 탄탄한 스토리와 제작 역량을 갖춘 작품들이 있는데 왜 자꾸 하렘물과 일부 사례들만 언급하면서 내부총질을 하는 것이냐? 네 정녕 십덕이 맞는 것이냐며 출신 성분을 따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글쓴이가 정말 슬픈건 이 불쾌한 플롯이 아직도 잘 팔리고 있으며 대부분의 '보통' 사람들이 기억하는 애니메이션은 눈 크고 가슴 큰 여자애 나와서 헐벗는 그런 것들이 되어버린 세월이 십 년 넘는다는 점이다. 이건 지금도 뒤집을 수가 없다. 오죽하면 여성층을 공략한 역하렘물이라는 단어가 나왔고 지금도 잘 팔리고 있겠는가.

그러면 어쩌란 것인가, 솔직히 눈 크고 가슴 큰 애들 나오는 애니메이션 중에도 재밌는 것들은 있지만 당신 논리대로라면 그것들 다 때려치고 이제와서 드라마 보라는 말인가? 난 이미 차원이 연하인 여친을 만나서 행복한 삶을 살아왔는데 이걸 부정하란 말인가 당신 너무하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사실 앞서 잠깐 언급했지만 돈 줄 쥐고 있는 제작위원회가 이 원패턴을 놓치 않고 있다는 것이 정말 크다. 제작위원회 논쟁은 예전부터 십덕들 사이에서 주된 논란이었지만 어쨌든 그들이 작품을 내주고 있었기에 울며겨자먹기로 받아먹을 수 밖에 없었다. 특히 애니계의 큰 손이자 절대강자로 군림하고 있는 카도카와 계열은 십덕 시장의 적폐 1호로서 지금도 보란듯이 제목에 스무자가 넘어가는 요상한 라노베를 원작삼아 애니메이션을 뽑아대며 나름의 소소한 이득을 취하는 중이다.

그런데 최근 카도카와를 긴장케하는 미지의 존재가 바다 건너에서 나타났으니 그게 바로 넷플릭스다.

<다음 시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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