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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3/01/17 09:49:13수정됨 |
Name | 소요 |
Subject | 장애학 시리즈 (3) - 지리는 게 매력적인 모습은 아니잖아요?: '어른'이 되기 위해 억제를 배워간다는 것, 그리고 장애와 섹슈얼리티 |
https://www.youtube.com/watch?v=YRwpa7W9hwc Liddiard, K., & Slater, J. (2018). ‘Like, pissing yourself is not a particularly attractive quality, let’s be honest’: Learning to contain through youth, adulthood, disability and sexuality. Sexualities, 21(3), 319–333. https://doi.org/10.1177/1363460716688674 오픈 엑세스가 아니니 저작권을 고려하여 흐릿하게만 소개합니다. 많은 질적 연구가 세계의 복잡성을 최대한 드러내고자 하기에, 일부만 끌어올 수 밖에 없다는 것이 항상 아쉽네요. 댓글에 질문 주시면 가능한 선에서 더 상세히 답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들어가며 인간의 몸은 생리학적 작용 속에서 똥, 오줌, 땀, 냉, 정/애액, 눈/콧물 등 여러 부산물들을 밖으로 내보내요. 달리 말하자면 우리의 몸은 밖에서 흘러들어오고 또 밖으로 흘러나가는 유동적인 부분/신체적인 유동들이(bodily fluid) 많이 있어요. 우리는 성장해나가면서 이러한 신체적인 유동을 억제(containment)하여 통제하는 법을 익힙니다. 어디서부터요? 바로 가족/주변 사람들의 대면상호적 피드백을 통해서요. 소변/대변은 화장실에서 보아야하고, 체면을 차려야 하는 자리에서는 부산물을 내보냈다는 사실조차도 다른 사람이 알게 해서는 안 되지요. 이 억제라는 방식은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 사회적인 차원에서도 활용되어요. 사회적으로 지탄 받는 이들을 (그 정당화 여부와는 별개로) 감금하는 방식은 유동적인 신체적 부산물들을 안 보이게 처리하는 모습과 비유적으로 닮아 있지요. 이 논문은 이 억제라는 비유 혹은 담론이 젠더, 장애, 섹슈얼리티 내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탐구했어요. 장애/비장애라는 대립도식은 막연하게 떠올리는 것보다는 복잡합니다. 캠벨(2009)는 에이블리즘(ableism; 비장애중심주의 혹은 능력주의로 번역되지만 여기서는 그대로 적습니다)을 '완벽하고 종-일반적이고, 그렇기에 본질적이고 완전하게 인간적이라고 투사되는 특정한 형태의 자아나 신체(육체적 기준)를 생산하는 믿음, 과정, 실천의 연결망network of beliefs, processes and practices that produces a particular kind of self and body (the corporeal standard) that is projected as the perfect, species-typical and therefore essential and fully human'으로 정의했어요. 반대로 디스에이블리즘(Disablism)은 에이블리즘의 결과로 생겨나는, 장애화 된 사람들에 대한 억압적인 처방이 되고요. 장애화 된 신체는 근대 이후 역사 속에서 반복적으로 억제의 대상이 되어 왔어요. 푸코가 추적했던, 고프만이 보고했던 야만적 형태의 초기 정신병동이라든지, 나치 독일이 우생학을 따라 실시했던 장애인 안락사 정책(Aktion T4)을 초창기의 보다 직접적인 억제로 간주할 수 있어요. 이러한 억제의 뿌리에는 오염에 대한 위협을 제거하고, 부담을 확실하게 제거하고픈 욕망이 깃들어 있었지요. 근대 초기와 같은 형태의 억제는 줄었지만, 최근의 신자유주의적인 사회적 질서는 장애와 억제가 맺는 관계를 다시금 조형해요. 외부에서 부여된 질서에 대한 질문보다는 그 질서 속에서의 경쟁과 분투를 강조하는 신자유주의적 아이디어는, 그 기저에 '능력있는/할 수 있는able' 개인과 자아에 대한 신회를 구성해 두거든요. 신체 또한 개인이 통제하고 관리할 수 있는 대상이며 사회에서 요구하는 깔끔함을 유지해야 하지요. 저자들은 상기한 이론적 틀에 더해, 발달 담론(developmental discourse)라는 아이디어를 통해 관점을 다시금 좁혀요. 억제는 다양한 형태의 (젠더든, 인종이든, 섹슈얼리티든) 성인기의 삶에서 규범적으로 기대되는 역량이고, 여기에 부응하지 못하는 이들은 성인이 아닌 어린아이로서 억압적으로 취급되거든요 (oppressive infantilization). 아이와 성인 사이에 있는 청년(Youth)는 이 억제를 학습하는 시기에요. 또한 성인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유동적인 (신체적)부산물이 누출되는 걸 억제해야 하고요. 저자들의 초점은 바로 (성적) 억제를 학습하게 되는 청년 혹은 성인기의 누출의 순간들, 그리고 이 담론 앞에서 취약할 수 밖에 없는 장애화 된 신체를 지닌 사람들의 경험을 드러내는데 있어요. 추상적이고 익숙하지 않은 얘기들이 많이 나왔으니 제 해석을 섞어서 정리를 해볼게요. 하나, 인간은 사회 속에서 성인으로 인정받기 위해 유동적인/흐르는 자신의 생리적 부산물(bodily fluid)을 끊임없이 억제하고 관리할 요구를 받는다. 둘, 생리적 부산물의 억제는 유아기부터 청년 성인기에 이르는 발달적 궤적 속에서 학습되지만, 무엇이 발달의 목표이고 언제 그 목표를 이루어야 하는가를 정의하는 것은 다분히 논쟁의 여지가 있다. 셋, 억제라는 관념은 사회적인 차원에서 오염과 부담을 격리하거나 제거하는 형태로 실현되며, 에이블리즘/디스에이블리즘의 상호작용 속에서 장애화 된 신체는 오염 혹은 부담으로 인식되어 (극단적으로는) 직접적으로 제거되거나 혹은 (보다 온건한 형태로는) 비가시적으로 처리되었다. 넷, 최근의 신자유주의적 담론은 '능력있는/할 수 있는' 자아와 개인에 대한 신화에 뿌리를 두며, 따라서 이에 부응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도덕적인 책임을 묻는다. 방법론 이 논문은 각 저자의 박사학위 논문 자료들을 종합하여 재분석하여 썼습니다. 첫 번째 연구는 1년 간의 (자기)에스노그라피 연구로, 장애를 지닌 27명의 다양한 사람들과 반복적으로 워크샵을 하면서, 동시에 3개월 간 2명의 장애 여성과 살았어요. '청년', '성인', '장애화 된', '능력있는/할 수 있는' 등에 대한 그들의 의미를 탐구하는 한 편, 저자 자신의 경험도 포함했습니다. 두 번째 연구는 장애 남성과 여성이 비장애중심적인 성적이고 친밀한 삶, 자아와 신체를 관리하고 협상하는 복잡한 방식을 파고들었어요. 총 25명의 장애화 된 사람들, 그리고 비장애인 파트너 1명을 인터뷰 했습니다. 자세한 분석 방법이나 절차는 각각의 학위논문을(Liddiard, 2012; Slater, 2013) 참고하면 될 것 같습니다. 어른이 되어가기: 억제되어 가기Becoming-Adult: Becoming-Contained 사람들은 어른이 되어간다는 것을 '자연적'인 진행으로 생각해요. 유년기, 청년기를 거쳐 성인기로 자연스레 진입하는 것으로요. 하지만 이러한 발달(development)이란 사회-문화-정치적으로 구성되어요. 레스코(2012)는 청년(youth)이 20세기 들어 고안된 개념이고, 청년기가 아이를 미국의 식민주의 꿈에 걸맞는 이상적인 성인 시민으로 키우기 위한 중요한 시기로 간주되었다고 주장했지요. 발달은 흔히 심리학/생물학적 관점에서 이해되는 주제이지만, 저자들은 레스코를 따라 발달의 사회-문화-정치적인 측면에 주목합니다. 청년이란 아이와 어른 사이에서 경계선으로 기능하는 사회적 사실이라는 것이지요. 논문은 '억제'가 섹슈얼리티에 대한 위험하고 규범적인 수업 속에서 어떻게 출현하는지에 초점을 맞춰요. 학교, 가족, 사회복지와 같은 기술들은 청년이라는 경계지대를 거쳐 불완전하고, 비합리적이고, 비생산적이고, 무성적인 아이를 완전하고, 합리적이고, 생산적이고, 성적인 어른으로 바꾼다는 도식을 지녀요. 하지만 아이들이 성적으로 순수하다는 전제는 무엇이 비/정상적인 젠더이고 섹슈얼리티로 간주되는지를 어린 시절부터 암시적으로 가르치지요. 대소변을 가리게 하는 훈련을 둘러싼 지침과 이야기들은 젠더, 섹슈얼리티, 장애를 가로지르는 복잡한 양상을 드러내요. 그 양상이란 몸에서 무언가 흘러나간다(leakage)는 사건이 지니는 물질성(materiality)이고요. 영국 국민보건서비스(NHS) 사이트에는 재미있는 내용이 있어요. '모든 아이들은 각기 다르다'라는 점을 강조하면서도, 배변/배뇨 훈련으로 들어가면 언제 어떤 목표를 달성해야 하는지 명확한 지침을 제공하거든요. 2살 때부터 오줌을 가릴 수 있는 아이들이 있지만 상당히 빠른 편이고, 4살에 이르면 대부분이 오줌을 가리는 것이 가능하고 이런 식으로요. 싸는/새는 것(leakiness)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거나 알리거나 도움을 받거나 하는 것은 아이일 때는 허용되지만, 특정 시기에 이르면 신체적인 유동성을 독자적으로 처리할 것을 기대받게 되어요. 여기에는 젠더화가 들어오는데, 이를테면 양육 가이드가 어머니는 딸을 '훈련'시키고, 아버지는 아들에게 관심을 둘 것을 제시한다는 것이 지니는 젠더 이분적인 함의를 생각해볼 수 있지요. 신체적인 유동성의 억제는 개개인에 따라 실시되어야 하는 한 편, 남성/여성을 구분하여야 하는 것이기도 해요. 화장실의 선택은 가장 일상적인 형태로 젠더 이분법을 확인하는 것이고요. 장애라는 맥락을 겹치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국민보건서비스 사이트는, 장애를 가진 아이는 '유아용 변기나 화장실을 사용하는 법을 배우는데 어려움을 더 많이 느낄 수 있다. 이는 당신과 당신의 아이에게 어려움을 야기할 수 있다. 하지만 배변/배뇨 훈련을 너무 오래 회피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find it more difficult to learn to use a potty or toilet. This can be challenging for them and for you, but it’s important not to avoid potty training for too long'고 적고 있어요. 장애를 가진 아이도 반드시 억제되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장애를 가진 아이의 배변/배뇨 훈련과 관련된 요구사항은 규범적인 젠더 이분적 요소를 약하게 포함해요. 이러한 젠더없음의 주장은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섹슈얼리티를 억압하는 기제가 되기도 하지요. 자, 이렇게 보면 그래서 젠더이분이 좋다는 건지 나쁘다는 건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헷갈릴 수 있을텐데요. 저자들은 젠더 이분법의 극단에 존재하는 것들에서 우리가 생산적으로 읽어낼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에 주목하고자 해요. 그리고 젠더 이분의 극단에 있는 것들이, 장애화 된 신체가 주로 문제가 되는, 관리와 억제의 절박한 장치들을 따라 자주 일어난다는 점을 생산적으로 주목하자고 역설하고요. 장애화 된 사람들의 실제 삶에서 젠더와 섹슈얼리티가 어떻게 교차하는지 사례를 한 번 볼까요? 연구 노트 중 하나에는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엠블라가 나를 마중하러 나왔기에 서둘렀다. 프레야는 좀 더 늦게 만나기로 했다. 엠블라는 '개는 여전히 화장 중이에요. 화장하는데 무슨 수십년은 걸린다니까요. 그래서 늦는 거예요'라 말했다. 나는 돌아서서 엠블라를 봐라봤다. 그는 검은 드레스, 가죽 자켓, 굽 있는 구두, 화장한 얼굴, 정돈된 머리를 하고 있었다. 이상한 건 없었다. 보기 좋았다. 나는 옆에 거울을 통해 나를 봤다. 화장하지 않고, 머리는 개털이고, 평범한 청바지, 가장 '아이슬란드인다운' 양털 점퍼, 우의 장갑, 모자, 방한장화를 입고 있다. 엄마는 최소한 내가 추운 날씨에 적합한 옷을 입고 있다는 건 만족할거다. 트렌디한 레이캬비크(아이슬란드 수도) 다운타운의 힙스터들과 어울리기에는 조금 불편할지도 모르지만 뭐. 나는 엠블라에게 '멋진데요. 여러분들이랑 있으면 제가 꾀죄죄해보일 것 같아요'라 말했다. 엠블라는 나를 안심시켰다. '당신한테는 괜찮아요. 장애가 없잖아요. 전 반드시 차려 입어야 해요. 장애에 대한 선입견에 맞춰 살기는 싫거든요." (연구 일기, 2012년 2월 4일) Embla arrives to pick me up so I rush out. Freyja’s going to meet us later, Embla tells me: she still needs to do her makeup. She takes ages doing her make-up, so will be late. I turn to look at Embla: she’s wearing a black dress, leather jacket, heeled boots, face made-up, and hair done. Nothing unusual there, she always looks great. I catch a glimpse of myself in the rear-view mirror: make-up-less, hair a mess. I look down at my attire: the usual jeans, my most ‘Icelandic’ woolly jumper, hidden under my rain- coat. Gloves, hat and snow-boots finish the outfit off nicely. Mum would be pleased at least: very sensible clothing for the cold weather. Maybe I won’t feel so comfortable with the hipsters of trendy downtown Reykjavik though. ‘You look nice’, I say to Embla, ‘I’m going to feel a right scruff coming out with you two.’ ‘Don’t worry about it’, Embla reassures me, ‘it’s okay for you, you’re not disabled. I have to get dressed up; don’t want to live the disability stereotype!’ 저자는 젠더와 섹슈얼리티에 대한 규범적인 가정들을 '문제삼을 수' 있는 다양한 방식에 대해 프레야/엠블러와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연구자가 차려입지 않기로 택한 것은 '여성적 아름다움'에 대한 기대에 도전하는 것으로 읽히지만, 엠블라와 프레야는 가시적인 손상을 지닌 여성은 (규범적으로) 젠더화되고 섹슈얼한 자신을 주장하기 위해 더 급진적인(radical)한 선택을 내려야 한다고 느꼈어요. 하지만 자기 자신을 여성으로 주장하는 의식적이고 정치적인 프로젝트는 종종 피로하고 힘들기 때문에, 엠블라와 프레야는 '귀엽고 작은 장애 소녀의 선입견에 맞춰 사는living the stereotype of the cute little disabled girl' 방식으로 '귀찮게 하지 않는not bothering' 전략을 취하기도 했어요. 이 사례에서 억제는 젠더 규범에 자기감시적으로 순응하는 형태로 일어나요. 장애를 지닌 사람들이 청년기에 발전시키는 자기감시(self-surveillance)는 호간(2003)의 사례연구에서도 잘 드러나요. 학교에서의 성교육에 대한 토론에서, 주류학교에 다녔던 집단은 자신들이 소녀들에게 섹스와 임신에 대한 겁을 주기 위해 출산의 어려움을 강조하는 비디오를 봤다고 얘기했어요. 특수 학교에 다녔던 집단은 이를 매우 흥미로워 했어요. 특수 학교 교사들은 섹스 혹은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지나치게 두려워했다고 했고요. 한 여성은 이에 대해 강력한 의견을 지니고 있었고요. 그는 이것이 특수 학교가 학생들을 다루는 전형적인 방식으로, 장애를 가진 소녀가 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임신하는 상황만 피하고자 하는 거라고 얘기했어요. 그는 교사들이 학생들을 유리잔처럼 다루는 방식이 학생들을 거의 질식시킬 지경이라고 설명했어요. '특수 학교'에 다니는 장애를 지닌 젊은 사람들이 섹스를 할 수 있는 그리고 임신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가정은 교사들이 아무것도 말하지 않게 만들었어요. 이는 의심의 여지없이 억압적이에요. 그렇다고 주류 학교에서 성교육을 다루는 방식이 괜찮다는 건 아니에요. 주류학교의 성교육에서 섹스와 임신은 위험으로만 다루어지거든요. 하지만 장애를 지닌 사람들의 성적 자율성에 대한 거부는 우생학적 실천과 연결되어요. 젋은 장애 여성에 대한 불임시술은 감소했지만, 지적 손상을 지녔다는 꼬리표가 붙은 젋은 여성들이 종종 설명, 이해, 동의없이 장기간 피임약을 복용하게 되는 경우는 왕왕 발견되어요. 성인-아이라는 도식을 떠올려보면 주류/특수 학급의 성교육 사례 모두 특정한 형태의 성인을 조형하기 위한 장치로 파악할 수 있어요. 청소년은 좋은 배우자를 찾을 수 없고 찾지 못하며, 남성기를 여성기에 삽입하고 받아들이는 방식(아이를 만드는)외의 섹스는 섹스로 받아들여지지 않아요. 섹스가 즐겁고, 행복하며, 타인과 혹은 자신과 실시하며, 긍정적이고 지속적인 동의 과정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점은 다루어지지 않고요. 섹스와 섹슈얼리티는 (규범적인) 성인기가 도래하기 전까지는 억제되어야 하는 것이에요. 이하의 장은 간략하게만 언급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원문을! 지저분한 순간을 관리하기: 규범적인 성인의 모습을 흔들기Managing the messier moments: Disrupting normative adulthood 테리는 교사와 나누었던 대화를 충격으로 기억했어요. '(교사) 오늘 우리는 근육이 약한 사람들이 어떻게 콘돔을 낄 수 있는지 배울 것이에요.' '(테리) 아니 진짜 초콜렛 봉지도 뜯을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해 이야기 하는 거 맞죠? 제가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건가요?' '(교사) 피임약을 쓰지 않는다는 뜻인가요?' '(테리) 음 아니요. 전 그냥 다른 사람한테 콘돔을 끼워달라고 해요' 장애를 지닌 젊은 사람들이 섹스, 섹슈얼리티, 친밀성에 대해 학습할 수 있는 공간과 과정으로부터 거의 배제되어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나마 20살의 헤테로 장애 남성인 테리 성교육에 참여할 수 있었다는 건 긍정적인 신호라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선천적 장애를 지닌 테리가 자유롭게 사정하고 콘돔을 쓴다는 점에 대해 교사가 공포에 가까운 놀람을 느꼈다는 점은 새는 존재가 된다는 것(being leaky)을 향한 세상의 반응에 대해 많은 것을 시사해요. 상호의존성에 대한 거부(콘돔은 스스로 껴야지)는 남성적인 성적인 존재가 궁극적으로는 통제와 자율성에 있어 단수적인 존재로만 가능하다는 발상과 맞닿아 있어요. 또한 억제되고/제한될 수 없는 불구의 신체를 관리해야 하는 노동이 결코 끝나지 않는다는 걸 보여줘요. 하지만 불가피하에 무언가가 새어나가게 되는(leakage occurs) 위태롭고 문제적인 순간들은 장애화 된 사람들만 경험하는 건 아니에요. 결국 모든 신체는 - 서론에서 똥, 오줌, 땀, 냉, 정/애액, 눈/콧물을 하나씩 열거했듯이 - 새어나가거든요. 그런 면에서 볼 때 장애에 대한 지배적인 담론은 역설적으로 성인기에 대한 신자유주의적이고 규범적인 담론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요. 스스로를 어른으로 유지하는 것은 스스로를 계속해서 억제하여 이루어진다는 이야기를요. 공적인 누출 Leakage as public 섹스와 친밀한 삶에서 일어나는 누출(혹은 실금)을 이야기 하는 것은 장애를 지닌 사람들에게 정말 어려운 작업이에요. 한 편으로는 불편감 때문에, 다른 한 편으로는 유아화라는 담론을 재확인하는 공포 때문에요. 모리스(1989)가 실시한 장애를 지닌 여성에 대한 연구에서, 실금은 이들이 성적 관계를 지니거나 찾는 걸 포기하게 만드는 원인이었어요. 좀 더 최근 연구에서 라비오비츠(2005)는 실금에 대한 장애 여성들의 공포가 섹스를 즐기고, 자신을 성적인 존재로 개념화하고, 사고 이후에 새로운 남자를 만나려는 의지를 지니거나 성적 활동을 재개하는데 영향을 크게 미친다고 지적했지요. 이렇게 누출을 둘러싼 아슬아슬한 '경계성'과 여성성이 서로 얽혀들어가는 사례로는, 연구에 참여한 64살의 휠체어 사용자 줄리아의 섹스 이야기를 들 수 있어요. '말하자면, 지리는 게 매력적인 특징은 아니잖아요. 솔직해지자고요. Like, pissing yourself is not a particularly attractive quality, let’s be honest.' 줄리아는 여성의 몸에 요구되는 적절한 억제를 엎어트리는 자신의 몸이 문화적으로 상정된 매력에 어긋난다는 걸 명확하게 인식했어요. 이를 막기 위해 줄리아는 섹스 도중 오줌을 싸서나 똥이 새어나가는 걸을 막기 위해 자신이 체화한 복잡한 전략을 설명했어요. 요약하자면, 줄리아는 섹스 전에 자신의 방광과 장을 최대한 비우고는 했어요. '사고'가 일어날 가능성을 최소화 하기 위해서요. 이런 일상적인 실천은 줄리아가 자신의 신체를 이성애규범성이 요구하는 적절한 젠더/섹스 카테고리에 맞추는 걸 가능하게 했어요. 하지만 이 때문에 즉흥적인 섹스에 참여하는 건 힘들었지요. 나가며 논문을 추천한 친구가 알려주기로는, 저자들은 영국의 장애/섹슈얼리티 연구에서 떠오르는 신성들이래요. 본문에서 언급한 신체적 유동(bodily fluid), 누출(Leakage) 등이 그들이 연구를 통해 제안한 핵심적인 개념적 도구이고요. 인간의 생리적/물질적 현실이면서, 이를 억제하는 방식이 섹슈얼리티/젠더의 구성에 폭넓게 영향을 미치고, 동시에 장애를 가진 사람들의 삶에서 첨예한 문제로 떠오르는 주제이거든요. 이를 관리하는 것이 성인으로서의 자신을 보여주는 핵심적인 '역량'으로 요구되기 때문에 그간 모두가 경험하는 현실이면서도 담론적으로 잘 부상하지 않았었나 싶기도 하고요. 저는 모든 신체는 새어나간다는 저자들의 주장이 좋았어요. 장애화 된 신체 중 '일부'와 장애화 되지 않은 신체 모두 생리작용 속에서 무언가를 밖으로 내보내는 건 똑같은데, 그저 이를 타인에게 혹은 공적으로 드러나지 말라는 사회적 규범을 지킬 수 있/없는 정도의 차이일 뿐이라는 얘기에 고개를 끄덕이게 되더라고요. 그리고 새어나가는 신체를 억제하라는 사회적 규범을 지킬 수 없는 몇몇 순간들이 장애를 지닌 몸들을 '정상적인' 성인의 범주에서 배제하는 기제로 작용한다는 것, 성인의 범주로 장애를 지닌 사람들을 집어넣고자 하는 사회 시스템(가족으로 대표되는)이 이들의 새어나가는 신체를 끊임없이 감시하고 확인한다는 것도요. 후자의 얘기는 위 논문 소개에서는 상세히 풀지 않았는데, 본문에서 아브람의 이야기를 통해 상세하게 표현되어요. 장애를 가진 신체가 이러한 외부의 감시에 어떠한 전략을 동원하는지도 함께요. 젠더와 억제에 대한 사회적 규범은 상당히 복합적으로 결합하는 듯해요. 유동하는 신체를 억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사회적 요구는 생리와 냉이라는 생리적 기전을 지닌 여성들에게 상징적으로 더 불리하게 작동해요. 줄리아에게 드러나듯이 억제-청결에 대한 사회적 요구는 여성들에게 더욱 강하게 부여되는 지점이 있고요. 그렇다고 남성은 섹스든 젠더든 억제를 둘러싼 규범에서 여성보다 더 자유롭냐고 묻는다면 그건 또 의문이에요. 남성에게 요구되는 억제는 정서/감정적인 측면에서는 훨씬 더 강력한 것 같거든요. 저자들의 새어나가는 신체라는 개념이 신체를 통해 '새어나가는' 감정까지도 확장되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다만 우리 몸에서 새어나가는 눈물을 생각할 때 분명 이론적으로 연결될 가능성은 있어보여요. 또한 남성성과 헤테로중심주의가 강하게 결합된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왜 남성 동성애자들을 모욕주기 위해 '잦은 항문섹스의 결과로 똥이 샌다'는 표현들이 유통되는지를 생각해 볼 수도 있겠고요. 개별 젠더를 넘어 젠더이분 구조까지 자연스레 나아간다면, 왜 MTF 트랜스젠더와 공간을 공유하는 논의에서 일부 여성들이 화장실에 천착하는지를 설명할 수 있고요. 강간 혹은 성적 침입에 대한 공포를 넘어, 억제를 학습하는 과정 속에서 젠더 이원주의가 가장 내밀하게 스며드는 공간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섹슈얼리티 이야기는 이전 연작에서 주구장창 이야기했으니 넘어가고... 억제를 둘러싼 사회적 요구 속에서 다양한 신체적 조건을 지닌 장애인들이, [억제할 능력이 없는-성인이 아닌/유아적인] 범주로 인식되고 그 인식에 따른 주변의 피드백과 (지속적인 감시든, '본질적'으로 부족한 사람으로 취급하든) 상호작용하는 과정 속에서 심리적/정서적으로 '비장애인'과 다른 장애인 정체성을 발전시켜나가는 과정은 흥미로웠어요. 이건 꼭 장애 뿐만 아니라 모든 정체성 형성 과정에 동일에게 적용될 수 있는 테마인데, 저는 인간은 정체성에 따라 서로 다른 질문에 응답할 것을 요구받게 되고, 각각의 응답은 다를지라도 그 질문의 구조적인 차이가 영향을 끼치게 된다는 생각이 강해지고 있거든요. 아마 독자들 중에서는 문화-사회적인 분석틀 자체에 의문을 품는 분도 계실 것 같아요. 저자들의 분석적 접근이 문화-사회적인 부분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저자들이 개념화 한 신체적인 유동들 중 다수는 재흡수가 신체에 부정적인 영향을 야기하는 노폐물들이니까요. 역사적 맥락에서 벗어난 인간을 상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만, 신체적인 유동에 대한 거부감을 문화-사회적인 특수성으로만 한정할 수는 없어보여요. 저자들이 학위논문에서 어떤 논증을 발전시켰는지를 더 상세히 봐야겠다만, 저도 물질적인 특징에 대한 고려 없이 문화-사회적으로 환원하는 건 위험하다고 생각해요. 저자들이 물질성을 언급하는 걸 봐서는, 그리고 장애 연구의 특성상 문화-사회적 환원론은 당연히 아닐거고요. 하지만 거부감의 형태가 구체적으로 어떤 심리적 기제를 따르는지, 그 크기는 어떤지, 이 거부감을(혹은 역설적으로 등장하는 매혹을) 사회가 어떻게 다루어나가는지는 충분히 사회-문화적인 맥락을 통해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고 생각해요. 그런 면에서 볼 때 저자들이 언급한 신자유주의적 아이디어의 영향은 좀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보여요. 현재는 약간 흐릿하게 거칠게 언급하고 넘어간 면이 있거든요. 본문에 따로 언급한 일부 참고문헌은 다음과 같습니다. Campbell FK (2009) Contours of Ableism: The Production of Disability and Abledness. Basingstoke: Palgrave Macmillan. Horgan G (2003) Educable: Disabled young people in Northern Ireland challenge the edu- cation system. In: Shelvin M and Rose R (eds) Encouraging Voice: Respecting the Insights of Young People Who Have Been Marginalised. Dublin: The National Disability Authority, pp. 100–120. Leibowitz RQ (2005) Sexual rehabilitation services after spinal cord injury: What do women want? Sexuality and Disability 23(2): 81–107. Liddiard K (2012) (S)exploring disability: Sexualities, intimacies and disabilities. PhD thesis, University of Warwick. Morris J (1989) Able Lives: Women’s Experience ofParalysis. London: The Women’s Press. Slater J (2013) Constructions, perceptions and expectations of being young: A critical dis- ability perspective. PhD thesis, Manchester Metropolitan University.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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