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6/06/11 11:09:04
Name   No.42
Subject   나는 너보다 늦었다.
밤은 늘 길다. 그리고 하얗다.

많은 이들에게 허락된 숙면은 내게는 사치다. 온갖 단상과 망상의 사이를 헤매다 희끄무레 밝아지는 창가를 바라보아야 하는 날이 더 많다.

오늘도 어김없이 새벽빛을 향해 한숨을 보낼 때, 문득 깨달았다. 길었던 지난 하루, 무겁게 잠에서 깨어 다시 잠들려 노력하는 이 시간까지...

나는 너의 이름을 한 번도 떠올리지 않았다.


네가 떠난 지 얼마나 되었나.

누군가는 충분히 길다고 할 만 한, 누군가는 얼마 되지 않았다 할 만 한, 그리고 나는 잘 모르겠다고밖에 할 수 없을 만큼의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그 시간동안 나는, 너의 이름을 떠올리고 추억하기를 하루도 거른 날이 없었다. 나의 일상 속에 그것은 버릇이 되어 있었다.

칫솔을 쥘 때에, 신발끈을 고칠 때에, 가방을 여닫으며 나는 나도 모르게 너의 이름을 부르곤 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왔다.

그것이 어제 그쳤다.

몸을 씻고, 옷을 꿰입고, 신발을 끌고서 나가면서도... 여기 저기 지폐를 꺼내고 카드를 건넬 때도, 담배를 꺼낸답시고 가방을 여닫을 때도

나는 너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언젠가 이런 날이 오리라 생각했다. 이런 날이 절대 오지 않기를 바라기도 했다. 하지만 죽음처럼 이 날은 피할 수 없을 것이라 체념했다.

나는 이 날이 나의 이별이 완료되는 날이라 느끼고 또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너보다 늦었다.

먼저 마음을 가진 것도, 그 마음을 표현한 것도 너였다.

네가 내민 손에 이끌려 나는 너와 함께 같은 길을 걸었다.

길이 편치만은 않았다. 비틀거리기도 하고, 넘어져 다치기도 여러차례였다. 난 늘 네가 나를 앞서서 걸어갔다고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이 여정의 어떤 끄트머리에 먼저 다다른 것도 너였다. 그렇게 너는 먼저 이 길에서 벗어났다.

나는 네 뒤를 따랐다. 얼마나 뒤쳐졌던 것일까. 일부러 먼 길로 돌고 있었던 것일까.

네가 오래 전에 떠난 이 길의 끝에 나는 이제서야 다다랐다.

이제 한 발자국이면 나는 너와 헤어진다.


나 스스로 막다른 길의 표지판을 세워본 들, 내가 너의 이름을 읊조리는 버릇이 말끔히 사라지진 않을 터이다.

하지만 어제처럼 너를 한 번도 추억하지 않는 날이 곧 또 찾아올 것이고, 다시 또 찾아올 것이고, 그렇게 그런 날이 늘어갈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렇게 널 생각하지 않는 나 자신을 노여워하고 슬퍼하지 않는 날도 올 지 모른다.

하지만 너의 이름과 거기에 매달린 그리움, 미안함, 그리고 사랑... 그 무게를 거뜬히 들어올리는 날은 결코 오지 않을 듯 하다.

그리 가끔 너를 그리워하고 공허히 닿지 않을 고백을 되뇌이는 것은

내 스스로 널 잃은 내게 베푸는 마지막 관용같은 것이다. '이것만큼은' 이라는 어찌보면 비겁한 말머리를 달아서.


나는 이제서야 이별을 마주한다.

날카로운 아픔이나 무거운 슬픔이나 이제서야 똑바로 바라보고 온전히 짊어질 일이다.

내가 잃어버린 널 사랑할 자격을 희구하는 일도

널 사랑할 자격이 없는 나를 희롱하는 일도

외면치 않고 감당해야 할 것이다.


내가 너보다 늦었다, 또.

그 이유가 망각이든 외면이든 인내든

내가 없는 일상에 익숙해져 환하게 웃으며 살아가는 너보다

나는 늦었다.


내 가장 깊은 곳에서 가장 높은 곳까지 감추는 것 없이 진심으로 전하고 싶다.

사랑한다.

나를 미워하든, 잊든... 부디 행복하길 바란다.



7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3122 일상/생각게임과 함께하는 노년. 16 Obsobs 16/06/25 3881 0
    3121 일상/생각3600마리의 닭, 360개의 엔진, 30명의 사람. 2 켈로그김 16/06/25 3983 11
    3116 일상/생각브렉시트 단상 27 기아트윈스 16/06/25 6296 9
    3115 일상/생각묘한 꿈을 꾸었습니다. 11 OshiN 16/06/24 4019 5
    3114 일상/생각명상의 효과 4 까페레인 16/06/24 3281 0
    3109 일상/생각영국 국민투표 현황 57 기아트윈스 16/06/24 4560 0
    3098 일상/생각홍씨 남성과 자유연애 62 Moira 16/06/22 7520 12
    3094 일상/생각의사 '선생님' 이란 용어는 적절한가? 69 Zel 16/06/22 7917 0
    3086 일상/생각[회고록] 우수에 젖어있던 너의 슬픈 눈망울. 2 수박이두통에게보린 16/06/21 3095 1
    3085 일상/생각시궁창 2 나나 16/06/21 3259 6
    3082 일상/생각홍차넷 삼행시 공모전 당선 후기 16 혼돈 16/06/21 5372 4
    3072 일상/생각"개 패듯이" 3 우너모 16/06/19 3806 2
    3055 일상/생각DR-S5 7 성의준 16/06/17 3250 1
    3044 일상/생각니 가족이 동성애라도 그럴래? 11 세인트 16/06/16 3158 0
    3032 일상/생각억울한데 하소연하긴 좀 그런 이야기 12 Xayide 16/06/16 3447 1
    3030 일상/생각2015년 11월 29일의 일기 1 YORDLE ONE 16/06/15 3439 3
    3024 일상/생각오랜만입니다. 14 세인트 16/06/15 3862 4
    3020 일상/생각겨자와 아빠 6 매일이수수께끼상자 16/06/14 4181 14
    3017 일상/생각MDR-E888 54 성의준 16/06/14 4824 1
    3009 일상/생각퀴어에 대한 농담 19 Beer Inside 16/06/12 4642 3
    3008 일상/생각결혼과 사람과 나 7 레이드 16/06/12 3682 0
    3000 일상/생각스탠포드 대학교 강간사건과 피해자의 편지 6 barable 16/06/11 5232 5
    2996 일상/생각나는 너보다 늦었다. 2 No.42 16/06/11 3838 7
    2995 일상/생각정합게임이라는 달콤한 제안 16 김덕배 16/06/11 5430 1
    2994 일상/생각학교에서 자치법정이 열리게 되었습니다. 31 헤칼트 16/06/11 4714 0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