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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5/12/22 23:56:07
Name   트린
Subject   또 다른 2025년 (13)

13.

수진은 다른 건 본인이 챙기고, 배남의 핸드폰을 담은 상자는 책상 위 큰 패러데이 상자 안으로 가져갔다. 그녀는 작은 상자를 열기 전, 큰 상자 윗면에 있던 포장을 아래로 내렸다. 뚫려 있던 면이 구리와 납으로 된 막에 덮였다. 손 넣을 공간과 눈으로 볼 수 있는 작은 공간만 남았다.
수진은 작은 상자를 열어 남의 핸드폰 카톡을 보기 시작했다.

"바빴네. 여기저기 만나고 다녔네."

보민은 그녀가 고개를 숙여 상자 안을 들여다보는 간단한 모습에 가슴이 심하게 뛰었다.
얼핏 들은 원리로는 전파를 전부 막는다니 당연히 해도 되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원리와 실행은 다른 법. 그녀가 틀렸다면, 또는 저 장치가 허술하다면 두 사람은 바로 철창행이었다.

'...알아서 잘하겠지.'

그녀는 저 분야 전문가였다. 삼엄하고 촘촘한 한국의 감시망을 뚫고 이곳에 숨을 수 있는 특기를 가진 사람이었다. 수진의 능력을 확인하고, 진심으로 믿자 뛰던 가슴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보민은 신경 쓰지 않기로 하고 가져온 가방을 뒤졌다. 가방에는 각종 옷가지와 생필품, 먹을것이 쌓여 있었다.

'어쩐지 무겁더라.'

그 중 눈에 띄는 건 핫팩이었다. 매복 등 동절기 야간 근무에 자주 보던 물건이라 친근감까지 느꼈다.  
보민은 핫팩을 꺼내 열심히 흔든 뒤 일단 침대 이불 안에 아홉 개를 넣었다.
차가운 물을 마시지 않아야 체력 유지에 좋다. 해서 생수통도 이불 안에 넣었다. 다음으론 체온 유지였다. 보민은 자신도 세 개 꺼내서 하나는 옷 위 가슴에 붙이고 두 개는 손으로 쥔 뒤, 나머지 세 개도 수진에게 건넸다.  
수진은 몇 번을 불러서야 받을 정도로 그동안 혼자만의 세계에 푹 빠져 있었다.

"뭘 그렇게 열심히 봐."
"대단해. 제대로 건졌어."
"어떤 걸?"
"내가 울 엄마 시켜서 박안수 전 자유대한민국수호 의장 얘기 꺼냈잖아. 얼핏 봤을 땐 그 사람이랑만 만난 줄 알았더니 아니었어. 아무래도 707은 정권의 핵심에 있는 무력 집단이라서 다른 군인들이 골고루 만나길 희망하는 것 같아. 봐봐."

보민은 수진이 가리키는 대로 상자의 좁은 틈을 통해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박안수 외에도 김용현 국방부 장관, 여인형 방첩사령관, 새로 역임한 노상원 자유대한민국수호회의 회장의 이름이 보였다. 이들은 술을 사준다, 고기를 사준다는 핑계로 자신과의 만남에 707 부대원들을 최대한 많이 참석하도록 독려하였다.

'카톡으로 이런 내밀한 얘길 하다니!'

하지만 보민은 보드게임이니 뭐니 말을 돌려 말하던 자신과 달리, 이들은 현재 한국이라는 세상을 가진 자들이기에 별 상관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니 당장 술 취한 배남이 안수진 집에 쳐들어가고, 경찰들은 손을 못 쓰는 것이다.

"놀라운 점은 또 있어. 장관이나 별 둘셋이 불러도 707은 모두 갈 때가 있고, 안 갈 때가 있어. 그만큼 정치적인 파워가 세다는 소리야."

수진은 그동안 떠돌던 소문과 카톡을 보면서 알게 된 사실을 조합해 보민에게 들려주었다.
군인들은 윤석열에게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주7일 술을 마시며 만취한 윤석열은 극언을 서슴치 않았고, 술자리가 잦을수록 실수도 잦아져서 개인적인 감정을 쌓았다. 특히 군을 모르면서 자꾸 모든 걸 아는 척, 자신이 모든 분야에 전문가인 척 하는 태도가 가장 반발을 샀다.
생각해 보면 현 정권 유지를 위해 윤석열이 잦은 도발로 북한과 DMZ 내에서 분쟁을 일으킬 때 다치거나 죽거나 고생하는 계층도 군인, 시위 진압에 나서야 하는 것도 군인이었다.  
군인들은 불만 속에 드러내놓고 말은 안 하지만 서서히 하나의 꿈을 가졌다. 어차피 이젠 민주국가도 아니고 북한처럼 윤석열 일당독재 상황인데 선배 박정희, 전두환, 아프리카 많은 나라처럼 쿠데타를 또 한 번 일으키지 말라는 법이 어딨겠는가. 왕후장상에 씨가 있나?  

"로마 황제가 자꾸 바뀔 때 다 밑의 친위대가 바꾸다가 나중엔 친위대 지휘부 중에 황제가 나왔거든. 역사가 되풀이되는 거지."

비 공식적이지만 박안수는 가장 먼저 마음을 드러내놨다가 여인형이 제보했고 격노한 윤석열이 강제로 끌어내린 상태였다. 노상원은 윤석열의 비위를 맞추고 현 상태를 유지하려 들었다. 김용현은 대놓고 드러내진 않지만 노상원을 끌어올린 윤석열을 미워하며 밑의 군인들 단속을 소홀히 하였다.  
여인형은 이 권력 게임에 참여한 선수 중 가장 유망한 대상으로 자리 매김하였다. 계엄 상황 아래 방첩사를 가지고 군대 내의 감시, 도청, 체포권을 가졌다는 사실은 민간인은 물론 군인에게도 공포적인 존재였다. 박안수를 제거하는 데 공을 세워 윤석열에게 신임을 얻은 동시에 김용현을 존중하며 자신의 편으로 만들려고 노력 중이었다.  
물론 아직까지는 희미한 낌새뿐이지만 윤석열과 노상원, 김용현과 여인형은 서서히 대립이 가능한 불만과 이유를 쌓았고, 이 한복판에 707은 피 묻은 단검으로 탁자 위에 꽂혀 있었다.
보민은 눈을 빛내는 수진 앞에서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듣기엔 그럴싸한데 이건 언론에 제보하거나 폭로해서 네 구명에 쓸 계획은 아니지? 네가 말한 대로 시작도 안 됐고, 무엇보다 약해. 쉽게 덮이고 부인할 수 있잖아. 널 위해서는 강력한 여론을 만들어줄 무언가가 필요해."

그러고 보니 보민은 계획이 있단 얘기만 얼핏 듣고 그 계획이 뭔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이제는 들어야 할 시간이었다.
수진은 망설이다가 캐니스터와 B-1 벙커, 그 안에서 죽어나가는 정치인과 반체제 인사 얘기를 했다.  

"남은 헬기 안에서 캐니스터를 배경으로 기념 사진을 여러 장 찍었어. 그리고 이 핸드폰은 캐니스터를 버린 GPS 좌표를 지녔어. 핸폰과 내가 가진 USB를 결합하면 정말 완벽한 증거가 될 거야. 이 정권에 완벽한 타격을 줄 수 있어. 난 그걸 언론에 직접 전하고 싶어."

보민은 충격에 빠졌다.

"아, 이건..."

수진의 어투가 좀 더 뜨거워졌다.

"국내 언론에는 못 맡겨. 어디 대사관에 망명해서 진행할 문제도 아니야. 일본, 중국, 유럽 다 조금이라도 자신들 이득 있으면 눈 감고 넘어가줄 거야. 그게 국제 정치고 현실이야. 특히 미국 대사관은 안 되지. 트럼프는 이런 것에는 확실히 관심없고 자칫하다가는 협상 대상으로 트레이드 돼서 미국에 있다가 끌려올 수도 있을 거야. 모두가 모인 데서 모두가 보는 앞에서 터뜨릴 거야. 가장 국제적인 무대에서 보여줄 거야."

하얗게 질린 연인의 얼굴을 보며, 수진은 걱정되었다. 생각해 보면 1년도 못 사귄 인연인데 위험한 길에 같이 동행하는 게 무리일 수 있었다. 당장 보민이 잡힐 시 비밀 유지를 위해 자신이 어디를 노리고 있는지 끝까지 말을 안 하는 판이었다. 그만큼 위험한 길 위에서는 수진은 공평하게 선택의 여지를 줘야 했다.
수진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보민 씨는 가도 돼. 지금 가면 죄가 가벼울 거야. 내가 잡히더라도 잘 말할게."
  
보민은 대답 대신 그녀를 꼭 껴안았다. 거의 망설임 없이 즉시였다. 어떤 말이나 설명보다 확실한 대답이었다. 반가운 나머지 수진도 사력을 다해 보민을 껴안았다.
보민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가 내 갈비뼈 부러지겠어. 왜 이렇게 힘이 세."
"몰라."

수진이 울기 시작했다.
보민은 가슴이 젖는 것을 느끼며 수진의 등을 쓰다듬었다.

"우리 울보. 콧물만 묻히지 마."
"묻힐 거야!"
"아유, 더러워."

수진은 보민을 바라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보민 씨."
"응."
"나 사람 죽였어."

보민은 입맞춤을 했다.

"그래."
"총으로. 이 손으로."

수진은 보민의 스웨터를 움켜쥐었다.

"눈 감으면 보여. 그 사람 쓰러지는 거. 피 흐르는 거."
"괜찮아."
"괜찮지 않아."

수진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나 망가진 것 같아. 자꾸 생각나. 방아쇠 당기던 게. 총 쏘던 게."

보민은 그녀를 더 꽉 안았다.

"정당방위였어."
"알아. 머리로는 알아. 안 그랬으면 나도 죽고 엄마도 죽고 보민 씨도 죽었을 거야."

수진은 울먹였다.

"근데 가슴은 안 그래. 자꾸 그 사람 얼굴이 보여. 살려달라던 목소리가 들려."

보민은 아무 말 하지 않았다. 그저 그녀를 안고 있었다.

"보민 씨."
"응."
"영화 같은 거 있잖아. 평행세계."
"..."
"계엄 안 일어난 세계 같은 게 있으면 좋겠어."

수진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그 세계에서는 나 지금 엄마랑 아침 먹고 있을까. 보민 씨랑 데이트하고 있을까. 사람 안 죽이고 살고 있을까."
"그럴 거야."
"그 세계의 나는 행복할까."
"행복할 거야."

수진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다 다시 입을 열었다.

"나 이제 평범하게 못 사는 거지. 밥 먹을 때도 생각날 거야. 잘 때도 꿈에 나올 거야. 평생."
"시간 지나면 나아질 거야."
"언제? 얼마나?"

수진이 고개를 들어 보민을 봤다. 눈이 빨갛게 부어 있었다.

"나 이제 어떻게 살아."

보민이 그녀의 눈물을 닦아줬다.

"같이 살아갈 거야."
"혼자야. 결국 나 혼자야. 이 기억은 나만 가지고 있는 거야."
"아니야. 나도 있어. 나도 봤어."

수진은 다시 보민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미안해."
"왜."
"보민 씨까지 이렇게 만들어서. 헤어지자고 한 게 이유가 있었어. 나 같은 사람이랑 있으면 안 되는 거야."
"그런 소리 하지 마."

보민이 그녀를 더 꽉 안았다.

"넌 잘못한 거 없어."
"있어. 엄마를 위험에 빠뜨렸어. 보민 씨도."
"우린 다 선택한 거야."

수진은 한참을 울었다. 보민은 그녀를 안고 기다렸다.
한참 후 수진이 말했다.

"고마워."
"뭐가."
"안 가줘서. 옆에 있어줘서."

보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수진은 보민의 품에서 천천히 몸을 떼었다. 눈물을 닦았다.

"일해야지."
"쉬어도 돼."
"못 쉬어. 쉬면 자꾸 생각나."

수진은 다시 패러데이 상자 쪽으로 몸을 돌렸다. 보민은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작고 외로워 보였다.
결과적으로는 그녀를 아끼는 일이 되었지만 사실 보민은 불안하던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기쁨이 찾아왔다. 시위를 보면서 느꼈던 답답함, 슬픔, 당황이 완전히 사라졌다. 이 길은 수진과 자신 모두를 위한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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