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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 26/01/06 20:43:06 |
| Name | 트린 |
| Subject | 또 다른 2025년 (21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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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 끝 . 한편 기현은 완전무장한 주경이 화난 얼굴로 다가오는 모습을 차창 너머 바라보았다. '뭔 일 있나?' 저지선이 뚫려서 군중이 들어오는 걸까? 만약 그런 거면 얼른 후퇴해야 한다. 주변 통신을 확인하라고 지시하려는데 밴 화물칸에서 모니터를 들여다보던 기술병이 선수를 쳤다. "안수진 핸드폰과 대포폰이 100미터 근처에서 움직입니다." "대포폰? 김보민이 아니고?" "네, 그렇습니다. 군 검찰이 제공한 데이터가 대포폰으로 자동 지명합니다." 박안수 보좌관 얘기가 또 나왔다. '안수진이 박안수랑 손잡고 노상원이에게 대미지를 줄 방도를 꾸미나? 그런 카드까지 마련해 놓았어?' 기현은 수진의 지독함과 치밀함에 혀를 내둘렀다. 그리고 안수진과 미지의 인물을 추격해야 하는데 줄지어 세운 전투 차량과 텐트가 만들어낸 길로 잘못 들어가 놓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차 일단 세워. 속도는?" "시속 8킬로미터로 움직였다가 멈췄습니다." "근처 차량인가?" 투석과 최루탄과 물대포가 난무하는 시위 현장에 차량이 돌아다닐 수 있는지, 이미 노출된 대포폰은 왜 쓰는지 의문을 정리하기도 전에 뛰어온 주경이 거세게 조수석을 두들겼다. "뭐야? 왜 이래요." "김기현 소령님, 저랑 이야기 좀 하시죠." 주경의 살벌한 얼굴과 분위기에 부하들은 HK416, MP7, 생김새가 예뻐 SF 영화에 종종 나오는 터키 산탄총 UTS-15 등을 저마다 고쳐잡고 자리를 잡았다. 시키지도 않았지만 특수한 훈련에 더해 몇몇은 이미 사람을 죽인 적 있는 자들이라 반응이 남달랐다. 무기에 기세까지 보는 사람들을 압도하는 기운이 있었다. 기현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조수석 창문을 내리고 조심스레 물었다. "얘기? 뭘 하자는 거죠?" "일단 내려보시죠. 그리고 밴 뒷문 좀 열어주시겠습니까?" "뒷문요?" 이미 강압적인 분위기에 먹힌 기현이 별 생각 없이 말을 따르려던 찰나, 주경이 머물던 텐트에서 한영교 중위가 머리를 쏙 내밀고 이쪽을 구경하는 걸 보고 말았다. 본능적으로 큰 소리가 나는 좋은 구경거리를 놓치지 않으려던 것 같았다. 눈이 마주친 영교는 얼굴을 붉히며 다시 들어가 버렸다. 기현은 여기서 1차 폭발했다. "당신 텐트에 왜 한영교 중위가 있습니까?" "...네?" "왜 내 부하가 당신 텐트에 있느냔 말입니까." "그것은." 이번에는 주경이 당황해서 말을 잇지 못했다. 기현은 운전 부사관에게 절대 어떤 문도 열지 말라고 지시한 다음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서부영화에서 역마차를 둘러싼 인디언들처럼 둥글게 구급차를 둘러싼 707 대원들을 냉정히 바라보았다. 몇몇은 고깝게, 하지만 몇몇은 전술 고글 뒤로 눈을 살짝 피했다. 명백히 분위기가 바뀌었다. "한영교 중위가 뭘 했는지 물었습니다." "저를 도와줬습니다." "도와요? 제 허락도 없이요? 뭘요? 왜요?" 이쯤 되니 소문이 쫙 퍼져서 전면에서 시위를 진압하는 부대 외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영화 같은 구경거리인데다 실무일선에서 뛰는 두 실세의 충돌이기 때문이었다. 김기현에게 은혜를 입고 부쩍 친해진 정보과 형사들 십여 명도 웅성거리며 구급차 주변에 둘러섰다. 그 중 최선임인 이 반장이 기현을 보며 고개를 끄덕여 격려해 주었다. 유감스럽게도 이 끓어오르는 난장판 속에서 주경은 말로 상황을 정리할 능력이 없었다. 한영교가 뭘 도와줬는지를 다 말할 수 없었다. 말하면 김기환이 즉시 한영교를 체포하고, 정보 출처가 끊긴다. 정보의 불법 획득과 불법 사용도 추궁받을 판이다. 안수진을 추적 중이라는 사실도 말할 수 없었다. 그럼 김기환과 똑같은 목적인데 왜 협력 안 하고 대립하냐는 질문이 나온다. 안수진을 획득할 수 없다. 주경은 그저 구급차 뒷문만 열면 모든 게 해결된다고, 없으면 사과하고 있으면 강압으로 밀어붙여 안수진을 데려오면 된다고 생각했다. 주경이 목소리를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길게 설명할 시간이 없습니다. 뒷문을 열어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그럼 오해는 모두 풀립니다." 여기서 기현이 완전히 폭발했다. "아니, 오해는 무슨 오해. 당신 계급이 뭐야 대체? 상사가 소령보다 낮다는 기본적인 사실을 알려줘야 해? 설명을 하라고 했더니 지금 같은 편 협박해?" "김기현 소령님, 전 협박을 한 적이 없습니다. 제 말씀에 따라주시면 좋게 좋게 끝낼 수 있는데 왜 이렇게 거칠게 나오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너희들이 총을 꺼냈잖아. 총은 뭐 장식이야? 너희들의 전유물이야? 나는 뭐 총 없는 줄 알아?" 기현은 롱 패딩을 젖혀, 가죽 홀스터에 있던 K5권총을 꺼내 손에 들었다. 주경의 부하들은 훈련받은 대로 반사적으로 기현의 머리를 겨눴다. 그 중 한 명인 MP7 사수가 한심하다는 듯 한마디했다. "경거망동하지 마십쇼. 총기는 함부로 쓰시는 게 아닙니다." "내가 꺼냈지, 겨눴어? 이놈들은 상사랑 하나같이 다 똑같구먼. 무슨 살인면허 혼자만 발급받은 것처럼 나대는 꼴이 아주 볼 만해. 너 누구야. 관등성명 대 봐." 주경처럼 MP7 사수도 묵묵부답이었다. 두 사람에게 주의가 쏠린 사이, 정보과 형사들 중 롱 패딩에 살짝 긴 머리라 군인 티가 덜 나는 사람이 쓱 다가오더니 MP7 사수의 방탄모에 K5 권총을 찔러넣었다. 그가 우렁찬 목소리로 웃으며 외쳤다. "동작 그만. 정보사 보안 실무 부사관 상사 장경훈이다." HK416 사수 한 명이 놀라며 총부리를 기현에게서 경훈으로 고쳐 겨냥했다. 서서히 짙어지는 긴장 속에서 흥미진진하게 구경하던 구경꾼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갈수록 일이 꼬인다고 직감한 것이다. 다들 총기 앞에서 좌우로 흩어지고, 몇몇은 아예 구경을 포기하고 텐트 사이로 사라졌다. 기현이 반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장경훈 상사!" "욕보셨습니다. 이 웃기는 놈들." 장경훈은 정보과 형사들과 협력해서 시위 현장을 돌아다니다가 사이에 숨어서 기회를 보던 참이었다. 상사와 달리 같은 소속 이지황 하사는 경훈 뒤에 서서 덜덜 떨면서 총을 뽑되 707을 겨누지는 못하고 애매하게 땅을 향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경훈은 우렁찬 소리로 외쳤다. "당당하면 나처럼 관등성명 다 밝히고, 최고위 상관을 보좌하면서 행동하는 것이다. 알겠냐? 기껏해야 중사 주제에 계란말이 좀 쳐먹었다고 중령 대령처럼 행동하냐? 건방진 놈의 시키. 강주경 상사도 그러는 것 아뇨. 여긴 군대요." "뭘 안다고 지적질이요, 장경훈 상사." "그럼 속시원하게 왜 그러는지 말을 하라고요." "..." 경훈이 피식 웃었다. "그럼 내가 똑같이 만들어준다. 지황이." "하사 이지황." "이놈 겨눠." "...네, 알겠습니다." 지황이 떨면서 MP7 사수를 맡자, 경훈은 자신을 겨눈 HK416 사수로 총을 옮겼다. 더 이상은 안 되겠다 싶은지 군수지원 담당관들이랑 정보과 형사들이 모두 나서 입을 열었다. "자자, 너무 흥분들 말고." "다들 총 내려 놓으세요. 험악한 모습 안 좋아요." "맞습니다. 그러다 사고납니다." 구경꾼들 중 가장 이질적인 사람인 최민석 소방위는 생각이 좀 달랐다. 혼란이 필요했다. 텐트 사이에서 숨어서 이를 보던 민석은 약속대로 무전기 버튼을 두 번 딸깍거려 보민에게 신호를 보냈다. 신호를 받은 보민은 능숙한 솜씨로, 전술형 확장 범퍼 탄창으로 19발이 장전된 글록 17을 꺼내 120미터 떨어진 구급차 상부에 전탄을 발사했다. 19발은 공기저항을 고려해 유선형으로 만들어진 하이루프 플라스틱 사이렌등에 모조리 들이박혔다. 붉은 플라스틱이 사방으로 튀고, LED 등이 합선돼 불꽃이 요란히 날렸다. 갑작스러운 굉음에 가장 먼저 반응한 건 이지황 하사였다. 2024년이었으면 총소리는 당연히 실수에 의한 단순한 오발이었다. 하지만 2025년 707이 무엇을 했는지 보고 듣고 느낀 사람들의 무의식 속에서는 언제나 위기감이 동굴 속 괴물처럼 도사렸다. 살인자들 앞에서는 뭔가 먼저 행동해야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군인도 마찬가지였다. 총기 훈련이 상대적으로 덜 된 지황은 보민의 총소리를 707의 사격으로 오인하고 방탄모 밑의 뒷목에 방아쇠를 당겼다. MP7 사수는 바로 절명했다. 주경을 포함해 가장 잘 훈련된 707 대원들은 절반은 지황을, 이어서 경훈도 사살해 버렸다. 나머지 절반은 진짜 발포 지점인 크레인에 집중 사격을 가했다. 보민은 글록 17을 버리고 두 손으로 밧줄을 타고 미끄러져 오다가 한 발을 오른쪽 어깨에 맞았다. "윽!" 공중에 찬연히 튀는 살점과 피가 중상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하지만 보민은 한 손으로 밧줄을 완전히 내려가 최루 가스와 군중 사이에 숨었다. 주경은 욕설을 중얼거리며, 비명과 시체와 피가 낭자한 현장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았다. 피 위로 납작 엎드린 기현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707이 또 사람을 죽인다! 테러다, 반란이다!" 주경은 군홧발로 얼굴을 갈겨 그를 기절시켰다. 그러나 늦었다. 분노한 부하들이 쏜 강력한 5.56미리 연발 사격이 가장 큰 문제였다. 지황과 경훈 뒤에 있던 사람들 십수 명이 피를 쏟고 쓰러졌다. 미리 빠진 구경꾼이 없었다면 40명 이상 다쳤을 것이다. 몇몇 사람도 기현과 비슷한 내용으로 떠들며 계엄군들이 모인 텐트를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이론으로야 사람 많을 때는 소구경탄을 살살 조심스레 쏘라고 교육받지만 아군은 원형으로 서 있는 상태, 구경꾼들이 둘러싼 상황, 아예 방탄복이 없는 목표 등 악재가 세 개나 겹쳐 최악의 결과가 나왔다. 사람들의 고함과 비명, 울음이 계엄군 집결지에 가득했다. 다시 한번 대량 살인 현장에 선 주경은 첫 번째 국회에서 받았던 심적 충격은 온데간데없고 그저 수습을 어떻게 해야 할지 짜증만 난다는 사실에 살짝 놀랐다. '이런 것도 익숙해지는구나.' 주경은 피를 밟으며 모든 것의 원인이었던 구급차에 다가갔다. 그가 옆문을 발로 걷어차자 안에서 상병과 일병이 흐느끼며 문을 열었다. "죽이지 마세요. 아무것도 없어요." 그 말대로 차에는 콘솔과 모니터, 이 두 사람 빼고는 아무도 없었다. "운전 부사관을 찾으시면 방금 도망-" 주경은 더 듣기 싫어 문을 닫아버렸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나? 안수진은 무슨 꾀로 자신을 엮어매었나? 주경은 강렬한 빛 앞에 현기증이 일었다. '빛?' 해가 막 지는 판에 눈을 찌르는 빛은 부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주경은 고개를 돌려 1, 3배율 가변이 가능한 조준기로 빛의 원천을 겨눴다. 18층쯤에서 다양한 인종을 이룬 자들이 망원 렌즈과 플래시를 낀 카메라로 주경을 연거푸 찍어대었다. 외국인 기자들이었다. 아까는 몇 대만 집중하여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는 모든 카메라가 그를 향했다. 총을 겨눈 상태에서도 빛 무리는 마치 별처럼 꺼지지 않고 오히려 더 강해지기만 했다. 피, 시체, 부상자, 완전무장한 병력, 부서진 구급차, 총을 겨누는 군인. 안 찍는 게 이상했다. '빛. 기자. 기자 회견.' 주경은 그제야 수진의 진짜 목표를 깨달았다. 대한민국 정부와 계엄사가 손을 쓸 수 없는 조직, 외국 언론이었다. 주경은 이를 갈면서 외쳤다. "프레스 센터다. 프레스 센터로-" "넵!' 그러나 제대로 반응하는 부하는 열 명 중 겨우 2명이었다. 나머지는 부상자의 동료들에게 멱살을 잡혀 쩔쩔 매는 중이었다. 이번 피해자는 공무원이요, 군인이었다. 그들은 반란이라고 악을 썼다. 국민은 2024년 12월 3일부터 겪었지만 그들이 피부로 체감하는 반란은 바로 오늘, 지금 여기였다. 몸이 자유로운 부하들이 동료를 구하려고 했으나 주경이 말렸다. "여기 있다간 갇힌다." 총소리와 반란이라는 소리에 놀라 전방의 수방사 병력 절반 정도가 바리케이드를 포기한 채 이쪽으로 달려 도망을 쳤다. 사실상 무법 상태에 살인이 횡행하는 판을 견딜 수 없는 자들이었다. 그 뒤로는 기세가 등등한 시위대의 함성이 점차 가까워졌다. 아직도 바리케이드를 지키는 나머지 병력이 아무리 물과 최루탄을 쏴도 기세는 꺾이지 않았다. 오히려 천지사방을 최루탄 구름으로 덮어 혼란하게만 만들 뿐이었다. 그 혼란 속에서 주경의 눈에 거슬리는 것이 하나 있었다. 최루탄 연기를 뚫고 형광색 등산복을 입은 노인이 비틀거리며 걷고 있었다. 그는 육십대 후반에 화려한 형광색 등산복을 갖춰입은 사람이었다. 호리호리한 몸에 날카로운 눈, 고집스러워 보이는 주름진 입매가 한 번 결정하면 결코 물러서지 않는 그의 평소 성격을 대신 말하였다. 그는 두 손에 어제 사망한 노인 이상만의 대형 영정을 두 손으로 꼭 쥐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수퍼마켓에 쇼핑 온 것처럼, 마치 뭔가 절실한 것을 찾는 사람처럼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도 충혈된 눈을 부릅뜨고 돌아다녔다. '별 미친...' 주경은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총도 없는 노인 따위가 뭘 어쩌겠는가. 부하들도 위협이 안 된다고 판단했는지 그를 무시하고 지나쳤다. 주경은 방독면을 꺼내 쓰며 두 명의 부하에게 말했다. "사격은 내가 지시하면 즉각 발포. 목표는 안수진과 동승자 1인." "넵." 주경의 군화 위로 피 묻은 손 하나가 쑥 올라왔다. 아까 기절한 줄 알았던 김기현이었다. 그는 피범벅이 된 얼굴로 주경의 발목을 꽉 움켜쥐었다. "어딜 가... 이 살인마 새끼야..." 김기현은 부하들을 잃은 분노로 눈이 뒤집혀 있었다. 총을 쏠 힘은 없었지만 이놈을 보내줄 생각도 없었다. 마치 지옥에서 온 망자처럼 질척하게 매달렸다. "쏴... 날 쏴..." 주경은 미간을 찌푸렸다. 수진의 술수를 제대로 파악했다는 기쁨에 오물이 묻은 기분이었다. 주경은 허리를 숙인 뒤, 정중히 예의를 갖춘 말투로 속삭였다. "김기현 소령님, 그게 무슨 말이십니까. 제가 소령님을 왜 쏩니까. 오히려 소령님이 절 죽이려 드셨잖습니까." 안면이 모두 뭉개진 기현의 충혈된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 "이 근처 CCTV에는 소령님의 부하가 선제적으로 사격을 지시한 게 다 찍혔습니다. 저와 부하들은 그들이 소령님의 지시에 따라 발포했다고 입을 모아 증언할 거고요. 그럼 저희의 대응 사격 간 실수도 정상 참작이 될 겁니다. 왜냐. 누가 됐든 저희는 재판 당일날 권력을 가진 쪽에 줄을 설 생각입니다. 그러면 군 검찰도 우리편이죠. 부상자들은 무서워서 우리 말이 맞다고 하거나 기억나지 않는다고 증언할 겁니다. 심지어 방아쇠를 당긴 사람들은 사망해서 반대 의견을 못 냅니다." "이 인간 쓰레기..." "글쎄요. 그 의견엔 동의가 힘드네요. 그러게 성질 건드리지 마시고 그냥 문을 여시지 그러셨어요." 기현은 반박하려다 기력이 다해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주경은 이제는 문제거리가 안 될 패배자를 내려다보다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가자." 보민의 오른쪽 어깨는 기적적으로 승모근만 깔끔하게 관통당했다. 하지만 대량의 출혈과 고통은 어쩔 수 없었다. 맞은 직후에는 아드레날린 때문에 방망이로 맞은 것처럼 둔탁하고 뜨거운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 뒤로는 눈 앞이 하얘지고 구토가 나올 정도의 격통이 몰려왔다. 크레인 차주는 입술이 파래진 채, 식은땀과 함께 덜덜 떠는 보민을 떠메고 의료 텐트로 데려왔다. 간이 들것에 눕힌 보민은 시야가 터널 속처럼 좁아져서 제대로 보이는 것은 없고, 심한 이명과 함께 정신이 오락가락 하는 상태였다. 어느새 돌아온 민석은 서윤을 도와 출혈을 잡으며 계속해서 외쳤다. "죽지 마, 보민. 행복해지고 싶다며." "그래. 버텨." 출혈은 간신히 잡았다. 샘솟던 피가 그나마 잦아들었다. 타이밍 좋게 준영이 땀을 뻘뻘 흘리며 멀리 떨어져 있던 구급차에서 휴대용 EKG 모니터와 산소 호흡기를 가져왔다. 수액, 호흡기, 모니터 센서를 차례대로 꽂으며 서윤이 물었다. "어때." "못 가요. 완전 난리예요." 차가 못 움직인다는 소리였다. 어차피 병원에 가서 살아나도 바로 군사 법정에서 사형을 확정받을 테니 울고 있는 수진 말대로 전진뿐이었다. 맨앞에서 수진이 인도하고, 나머지는 따르기로 정했다. 민석이 앞에서, 준영이 뒤에서 들것을 들었다. 서윤은 수액을 들것보다 높이 들고 옆에서 걸었다. 건물숲이 품은 고고한 불빛은 지상에 잘 닿지 않았다. 최루탄 분말이 폭풍처럼 휘몰아치며 군데 군데 가로등이 깨져 생긴 어둠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사람들의 모습이 막에 비친 것처럼 실루엣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어떨 때는 모두가 한 방향으로 뛰며 구호를 외쳤다. 어떨 때는 격렬히 쇠파이프와 몽둥이를 서로에게 갈기며 피를 튀기며 싸우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민석은 왼쪽, 오른쪽, 멈춰를 바꿔가며 움직였다. 덕분에 이순신 동상에서 프레스 센터까지는 고작 200미터지만 응급 구조사들에게는 2000미터처럼 느껴졌다. 수진은 그러든 말든 반쯤 정신을 잃은 보민에게 계속해서 약속했다. 결혼처럼 큰 건부터 테니스를 배우겠다, 꽈배기는 너무 많이 시켜 먹지 않겠다는 작은 건까지 내려갔다. 자연스레 약속할 거리마저 떨어졌다. 할 수 없이 수진은 울먹이며 같은 말을 반복해야 했다. "우리 살아나기만 하면 같이. 응?" 보민의 눈이 완전히 감겼다. 산소 호흡기 위에 입을 맞추던 수진이 기겁해 외쳤다. "죽은 것 같아요! 어떡해요!" 모니터를 본 서윤이 담담히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아니었다. 그러나 곧 그럴 수 있었다. 절규에 하늘이 답을 하듯 최루탄 안개가 반쯤 걷히고 잘 조성된 정원과 함께 프레스 센터 건물의 현관이 나타났다. 현관에는 분명 기자로 보이는 외국인들이 밖을 내다보는 중이었다. 감히 나갈 생각은 못 하지만 보이는 모든 걸 보겠다는 눈빛이 형형했다. 그들의 동기는 대체로 이기심이겠지만 그마저 고마운 시기였다. 민석이 외치며 들것의 속도를 높였다. 산에서 야호를 외치는 것보다 열 배는 큰 고함에 실제로 들것과 수액백 속 수액이 출렁였다. "환자입니다! 이머전시 페이션트!" 민석의 사자후에 기자들은 잠시 망설이다가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안에서 한국인 경비원과 군 관련자가 분명한 사람들이 격렬한 항의를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누군가 서툰 한국어로 말했다. "얼른 이리 들어와요!" "감사합니다." 모든 사람이 안도하며 들어서려는 그때, 근처 조각과 대형 침엽수 뒤에서 주경과 부하 두 명이 뛰쳐나왔다. "멈춰, 계엄군 강주경 상사다!" 기자와 응급 구조사들, 수진은 마법에 걸린 것처럼 제자리에 얼어붙었다. 죽음이 결국 따라잡았기 때문이었다. 맥락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도 그가 사신이라는 점을 바로 이해했다. 주경은 활짝 웃으며 총기를 앞세운 채 천천히 다가왔다. "드디어." 주경은 방독면의 안면부 반을 거의 눈물로 채운 안수진을 바라보며 뿌듯함을 느꼈다. 이거였다. 이게 일하는 보람이자 살아가는 낙이었다. 정정당당하게 경쟁하고, 간교한 적에게 당해 고생하지만 결국 이겨내고 모든 걸 거머쥐는 게 군인의 기쁨이었다. 부하들은 주경의 마음을 대충 읽고 들것에 손을 대려다 말고 그대로 제자리에 서 있었다. 모두가 그를 바라보는 가운데, 마무리를 지어야 할 것 같아 주경은 미드나 한드에서 본 것처럼 미란다 비슷한 것을 읊기 시작했다. "안수진, 그리고 그 들것의 남자가 김보민이죠? 그리고 다른 분들은 두 사람을 도왔고요. 계엄사 관계 법령과 국보법에 의거 모두 체포합니다. 여러분들은 변호사를 선임할 권리가 있-" 등 뒤에서 최루탄 안개가 소용돌이치더니 초로의 남자 한 명이 이를 가르고 나타났다. 아까 바리케이드 근처에서 봤던 바로 그 노인이었다. 그는 두 손에 어제 사망한 이상만의 대형 영정을 꼭 껴안고 달려왔다. 몸만큼 큰 대형 영정을 들었음에도 노인은 마치 쏜살처럼 직선으로 달렸다. 그 짧은 순간, 주경의 부하들을 제외한 모두가 주경을 쳐다보았다. 노인은 단박에 이해했다. 그가 현현한 죽음임을, 그래서 가장 가치가 높은 상대임을, 투표를 잘못한 과오와 친구의 죽음을 한 방에 만회할 표적임을 확인했다. 노인은 웃는 얼굴로 울면서 외쳤다. "상만아!" 부하들의 경악한 얼굴과 노인의 고함에 주경이 뒤돌아보았다. 그러나 그게 악수였다. 가만히 있었으면 방탄모에 막혔겠지만 보느라 얼굴이 고스란히 노출되었다. 웃는 이상만의 사진틀이 광대에 정통으로 박히면서 왼쪽 안면을 그대로 밀고 나갔다. 타격은 눈, 볼을 넘어서서 턱까지 후려갈겼다. 사진틀의 무게와 노인의 무게가 실리면서 주경은 기절해 땅에 넘어졌다. 부하들이 경악해 외쳤다. "뭐, 뭣." "이게 무슨!" 아래로 내렸던 총구를 드는 순간 등 뒤에서 손들이 나왔다. 수진과 서윤이 들것을 맡은 사이, 민석과 준영이 한 명씩 맡아 군인들을 껴안고 졸랐다. 그리고 빛이 터졌다. 온통 빛이었다. 사람이 찾고, 사람이 만드는 빛이었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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