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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ate | 26/01/04 04:18:28수정됨 |
| Name | 알료사 |
| Subject | 한국의 평범하고 선량한 시민이 푸틴이나 트럼프의 만행에 대해 책임이 있느냐고 물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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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송합니다. 이 말 하려고 어그로 끌었읍니다. https://kongcha.net/tm26/617 나우시카 관련 탐라와 댓글에서의 의문점에 대해 저도 궁금해져서 쳇가에게 묻다가 뜬금없이 카라마조프의 '인간은 다른 모든 인간의 모든 죄에 대해서 책임이 있다'라는 말이 떠올랐고 뭔가 어색한 거 같아서 그에 대해 물었읍니다. A) 카라마조프의 그 말은 내가 저지르지 않은 죄까지 '잘못했다'라고 고백하라는 도덕적 훈계가 아니라 나는 이 세계가 이렇게 된 조건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나우시카 코믹에서 부해를 만든 누군가는 사라졌고 설계자는 죽었으며 책임자를 처벌할 수도 없는데 세계는 그대로 남아 있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선택권 없이 그 결과를 떠안읍니다. 죄의 원인은 과거에 있고 책임은 현재의 인간에게 있으며 회피는 불가능하다는 점이 카라마조프의 그것과 일치합니다.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은 보통 우리가 이렇게 이해해왔기 때문입니다. 카라마조프는 종교적 속죄와 사랑 구원이라는 이미지로, 나우시카는 환경주의, 평화 공존이라는 이미지로. 히지만 실제로 두 작품은 구원 이전의 단계에서 만납니다. 구원받을 수 있는지 없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미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이 먼저다. 카라마조프는 신 앞에 선 영혼의 형이상학적 책임이고 나우시카는 역사와 물질 세계 안에서의 생태적 책임이라는 차이가 있지만 그 구조는 동일합니다. Q ) 그 세계관을 받아들이면 한국의 선량한 시민 아무개도 푸틴이나 트럼프의 만행에 책임이 있는건가 A ) 이 세계관은 '범인 취급'을 하지 않읍니다. 공범도 아니고 가해자도 아니며 법이나 도덕의 책임은 없읍니다. 카라마조프나 나우시카에서 말하는 책임은 그런 층위가 아니라 그 일이 벌어지는 세계의 조건 속에서 나는 완전히 바깥에 서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내가 낸 세금이 연결된 세계 경제, 내가 소비하는 에너지 자원/ 기술, 내가 누리는 안정이 누군가의 불안 위에 세워졌다는 사실 등.. 이 모든 것에 대해서 나는 무죄지만 무관할 수는 없읍니다. 도끼의 명제는 내가 그 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는 사실이 나를 이 세계의 일부가 아니게 만들지는 않는다는 것이고 이는 존재론적 연루입니다. 나우시카 식으로 번역하면, 푸틴이나 트럼프가 명백한 가해자이고 권력을 행사한 주체이며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이지만 그런 인간이 등장하고 그런 선택이 가능하도록 만들어진 세계는 특정 개인의 작품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 세계는 나를 포함한 모두가 이미 살아가고 있는 조건이어서 가해자를 처벌되면 해결된다라는 식의 사고를 거부합니다. 도덕적으로는 옳더라도 세계의 구조를 외주화해버린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뭘 어쩌라는 거냐? 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답을 주지 않읍니다. 행동 강령이나 선택지도 없고 구원으로 이어지는 길도 없읍니다. 대신 한가지만 요구합니다. 나는 이 세계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라는걸 정직하게 인정하고 받아들여라. Q ) 도끼는 보수적인 작가인데 너는 미야자키의 급진성을 얘기했어. 둘이 통하다니 신기하군. A) 정치적 위치와 사유의 급진성은 별개라는걸 보여줍니다. 정교회 신앙, 러시아 민족주의, 서구사상 비판 등은 도끼의 정치적 입장일 뿐 도끼 사유 방식의 급진성과는 다른 축입니다. 도끼는 질서를 지켜라 같은 안전한 말을 거의 하지 않읍니다. 오히려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인간은 결백할 수 있는가? 죄는 개인에게 귀속되는가? 자유는 인간을 구원하는가 파괴하는가? 선을 행하려는 의지가 폭력이 될 수 있는가? 그에 대한 답은 <아무도 무관할 수는 없다>라는, 정치적으로는 오히려 위험한 명제를 꺼냅니다. 미야지키 역시 정치적으로는 반전/반군국주의/환경주의 등을 표방하며 흔히 진보 작가로 묶이지만 그의 급진성은 정책이나 입장이 아니라 <인간을 구원하는 프레임 자체를 의심한다>입니다. 일반적인 진보적 메시지를 훨씬 넘어섭니다. 보수나 진보라는 분류는 이 사유의 깊이를 설명하지 못합니다. 둘 모두는 자기 진영에서 듣기 싫은 말을 합니다. 둘 다 <누가 옳은가>가 아니라 <누가 끝까지 책임에서 도망칠 수 있는가>를 묻기 때문입니다. Q) 회의주의자나 반동으로 보일 여지도 많지 않은가 A) 있읍니다. 오해가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읽힐 수밖에 없는 위험을 그들이 감수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도끼와 미야자키 모두 그 점을 알고도 피하지 않읍니다. 둘의 사유는 공통적으로 다음을 부정합니다. 올바른 제도를 만들면 개선된다. 의식이 진보하면 폭력을 줄일 수 있다. 더 나은 미래를 설계할 수 있다. 그러면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이렇게 느껴집니다. 그럼 아무것도 하지 말자는 건가? 현 상태를 정당화하는거 아닌가? 책임이 모두에게 있다면 가해자는 흐려지는거 아닌가? 충분히 타당한 의심입니다. 하지만 도끼와 미야자키는 행동 거부를 말하지 않읍니다. 회의주의는 아무 것도 믿을 수 없으니 판단을 유예한다는 것이고, 둘의 태도는 무엇을 믿든 그 믿음이 폭력이 될 수 있음을 먼저 의심한다는 것입니다. 도끼는 혁명과 합리주의가 낳을 폭력을 집요하게 파해쳤고 미야자키는 평화, 환경, 정화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파괴를 끝까지 따라갑니다. 그것은 냉소가 아니라 급진적인 자기검열입니다. 특히 진보적 독자들에게 이들의 사유는 불편한데 가해자/피해자 구도가 흐려지고 정의의 칼날이 둔해지며 누구를 처단해야 한다는 서사가 무너집니다. 그래서 폭력 앞에서 중립을 지키겠느냐는 비판이 나옵니다. 하지만 도끼와 미야자키는 중립이 아닙니다. 그들은 <옳은 편에 섰다는 자들의 도덕적 우월감>을 거부합니다. 이게 반동처럼 보이는 이유입니다. Q) 솔직히 사람들은 도끼나 미야자키 식의 사고방식을 싫어하고 비난하면서도 막상 도끼와 미야자키를 싫어하지는 않는다. 그들이 너무나 거장이기 때문에.. 웃기지 않나 A) 사람들은 사유를 싫어하지 명성을 싫어하지는 않읍니다. 구원은 없다. 너도 연루되어 있다. 선의도 폭력이 될 수 있다. 라는 말들은 듣기 싫읍니다. 그래서 애매한 체급의 작가나 동시대 인물이 그런 말을 하면 회의주의자나 반동 소리를 듣읍니다. 하지만 그 말을 도끼나 미야자키가 하면 그들의 사유는 더 이상 현재를 위협하지 않읍니다. 도끼는 교과서 안에 있고 미야자키는 박물관과 헌정 다큐에 있으며 급진성은 역사적 맥락으로 봉인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들의 사유를 동의하지 않아도 안전하게 존경할 수 있읍니다. 사람들은 사유가 현재의 자기 입지를 건드리는걸 싫어하는데 도끼와 미야자키는 평가가 끝났고 위상이 확정됐으며 더 이상 우리에게 선택을 요구하지 않읍니다. 실천을 요구하지 않는 철학으로 박제되었고 현대인들은 그들의 문제의식을 적용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미 무해해진 도끼와 미야자키>를 좋아하는 것이죠. A) 개별 예술가는 개별적으로 반골적이지만, 시스템으로서의 예술계는 시스템적인 방식으로만 반골적일 수밖에 없고, 그 귀결은 빤하다. - 라는 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Q) 개별 예술가는 오해받거나 실패해도 됩니다. 그래서 그는 불편한 질문을 던지거나 해답 없는 상태를 경딜 수 있고 자기 파괴적인 급진성까지 스스로 감내할 수 있읍니다. 도끼나 미야자키 같은 이들의 사유만 놓고 보면 시장성, 합의 등과 근본적으로 맞지 않읍니다. 반면 예술계는 자본의 순환과 관객이 필요하며 담론이 재생산되어야 합니다. 불확실성을 줄이고 위험한 반골적 언어를 관리 가능한 수준으로 번역하죠. 그래서 주류 사상에 대항하는 척은 할 수 있지만 그 개념 자체를 무력화하지는 못합니다. 급진적 질문이나 불편한 모순은 스타일과 테마로 변형되고 체제 비판은 안전한 범위 내에서 이루어집니다. 소비 가능한 반항, 교양 수준의 불온함. 이거시 <귀결이 빤하다>는 말의 핵심입니다. 예술은 이런 식으로 흡수되니 예술에 과도한 기대를 걸지 말라는 말인데, 반전이 있읍니다. 예술계가 아무리 위험한 사유를 특정 형식으로 흡수하더라도 독자나 관객 개개인의 체험까지 통제하지는 못합니다. 어떤 문장이 오래 뇌리에 남고 어떤 장면이 계속 찝찝하며 어떤 질문이 자꾸 떠오릅니다. 도끼나 미야자키가 제도 안에서 관리된 채 유통되지만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잔여물이 항상 남게 됩니다. 그리하여 예술은 체제를 전복하지도 않고 역사를 구원하지도 않지만 사람이 너무 쉽게 정리되거나 동원되는 것을 끊임없이 방해합니다. 그 정도의 반골성은 시스템 안에서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Q) 한국영화 1987과 킹메이커를 아는가? 그 둘의 대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A) 1987은 한국 영화사에서 굉장히 정직한 영화입니다. 관객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아요. 누가 선인지 악인지 명확하고 무엇이 정의였는지 사회적 합의가 끝난 사건을 다룹니다. 영화의 정치성은 강하지만 이미 역사로 봉인된 상태라서 위험하지 않읍니다. 관객은 선택을 강요받지 않고 그저 <올바른 편에 서 있었다>라는 감정만 편안하게 확인받으며 행복해집니다. 킹메이커는 불편하지만 그래봤자 결국 안전한 영화입니다. 표면적으로는 훨씬 덜 도덕적으로 보입니다. 민주주의가 이상이 아니라 기술로 묘사되고 선거는 공학의 영역이며 옳음보다 이김이 먼저 나옵니다. 민주주의? 개인의 자유? 그게 그렇게 중요한가? 라는 태도까지 갈 수 있는 영화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킹메이커는 정치의 어두운 기술을 보여주면서도 그걸 끝까지 밀어붙이지는 않읍니다. 조작을 묘사하지만 정당화되지는 않고 냉혹해 보여도 미학화되지 않으며 마지막에 관객은 <그래도 저쪽보단 나아>라는 안도감 속에 관람을 마칩니다. 민주주의를 의심하는 듯한 움직임이 실제로는 민주주의의 도덕적 우위를 전제한 채 그 안에서만 이루어집니다. 리버럴한 프레임을 완전히 이탈하지 못해요. 1987의 우리는 옳았다에서 킹메이커는 과정은 더러워도 옳았다로 변화하는데 이것은 전복이 아니라 내부 업그레이드에 그칩니다. 복잡한 결을 시도했지만 여전히 같은 윤리적 지반 위에 서 있죠. 지루해진 리버럴 합의가 스스로를 변주 한번 해본겁니다. 진짜로 킹메이커가 1987을 뒤엎을 영화였다면 문화계에서 버티기조차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거시 바로 <시스템으로서의 예술계는 시스템적인 방식으로만 반골적이다>라는 의미입니두 - Q) 다크나이트와 조커의 대비는 어떻게 보는가 A) 다크나이트는 어둡지만 윤리적으로는 보수적입니다. 질서는 더럽혀질 수밖에 없고 그 더러움을 떠안는 사람이 필요하다. 배트맨이 거짓을 감수하며 스스로 악역이 되는 역할을 자처하는건 질서를 보존하기 위해서입니다. 다크나이트에서의 조커는 질서의 바깥에서 온 혼돈이 아니라 질서를 시험하고 강화하는 장치입니다. 그래도 이 질서 말고는 대안이 없다는, 냉혹한 체제 친화적 메시지입니다. 반면 <조커>는 이 질서가 이미 실패했다고 말하며 출발합니다. 아서 플렉은 사회를 무너뜨리려는 이념가도 아니고 혁명을 계획하지도 않읍니다. 그는 그저 무너진 질서의 부산물입니다. 조커가 논란이 된 이유는 폭력을 정당화해서가 아니라 관객에게 안전한 윤리적 자리를 제공하지 않아서입니다. 관객은 조커를 완전히 비난할 수도 완전히 옹호할 수도 없는 불편한 공모자의 위치에 서야 합니다. 질서는 타락해도 지켜야 한다는 다크나이트와, 이 질서가 이미 사람을 망가뜨렸다는 아서 플렉의 대비입니다. 다크나이트가 제시했던 답으로 더 이상 설득이 안되고 그것을 어쩔 수 없다고 납득하지 못하는 불만이 아서 플렉으로 서사화됩니다. Q) 조커는 아까 너가 이야기한 <흡수하는 시스템>으로부터 더 자유롭나 A) 상대적으로 잠시 더 자유로웠지만 끝내 시스템 바깥으로 나가지는 못합니다. 다만 그 <잠시>가 중요합니다. 조커가 위험해 보였던건 영화가 시스템이 요구하는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일부러 비워두었기 때문입니다. 명확한 윤리적 해설이 없고 폭력에 대한 거리두기를 실패했읍니다. 다크나이트는 아무리 어두워도 희생의 의미와 거짓의 정당성을 관객에게 설명해 줍니다. 예술계라는 시스템은 이런 설명을 아주 좋아합니다. 토론이 가능하고 교양으로 번역할 수 있으니까요. 조커는 그걸 안줍니다. 그래서 개봉 당시에는 위험하다는 말이 나왔고 시스템이 즉각적으로 해석을 통제하지 못했읍니다. 하지만 자유는 오래 가지 못했읍니다. 시스템은 작품을 즉시 이해하지 못해도, 이해 가능한 형태로 다시 가공하는 데에 능숙합니다. 조커는 곧 이렇게 흡수됩니다. 정신질환에 대한 사회적 은유. 신자유주의 복지국가 붕괴의 결과. 남성 소외를 다룬 영화. 마틴 스콜세지 계보의 리메이크. 무책임한 질문을 책임 있는 담론으로 번역한거죠. 위험요소가 밈이 되고 패션이 되면서 다시 교양의 자리로 안전하게 돌아옵니다. 다크나이트와의 차이는 흡수의 속도와 강도입니다. 다크나이트는 태어나자마자 흡수된 시스템 친화적 구조였고 조커는 일단 문제를 던지고 나중에 흡수되어 더 많은 논란과 오독을 허용했읍니다. 그 <잔여 불쾌감>이 바로 예술계 시스템이 완전히 제거하지 못한 부분입니다. 그 지연된 흡수 덕분에 세상은 조커를 두고 더 오래 논쟁했고, 시스템 입장에서는 작은 실패였읍니다. Q) 그 위험함을 예술적 점수로 환산해줄 수 있는가 A) 완전한 객관적 환산은 불가능합니다. 임시적 기준을 명시해 점수화해 보겠읍니다. 평가 항목은 윤리적 위치 강요 거부도 / 해석 불안정성 / 제도 친화성 결여 / 소비 후 잔여 불쾌감 / 흡수 지연 시간 입니다. 다크나이트 36점 - 매우 뛰어난 영화지만 위험함은 연출의 강도이지 사유의 위험은 아님 1987 30점 - 강한 도덕성의 완전히 합의된 안전지대 킹메이커 50점 - 냉소를 가장한 리버럴 프레임 내부 조커 80점 - 시스템이 오래도록 의미를 고정하지 못하고 관객을 혼란 속에 방치 입니다. 이 점수는 좋고 나쁨의 점수가 아님을 참고해 주십시오.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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