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26/01/02 21:26:13
Name   트린
Subject   또 다른 2025년 (19)

19.

민석도 고개를 빼고 결국 확인했다.
총 앞에 장사 없으니 구급차는 광화문 나오는 길, 인파가 적은 도로 한 켠에 멈춰 섰다.
시동까지 끄도록 수진이 유도하고, 피투성이로 누워 있던 보민은 부스스 일어나 서윤 곁으로 옮겨 앉았다. 죽을 것처럼 굴던 이가 금세 멀쩡해졌다.
서윤이 묻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보민이 입을 열었다.

"무에타이 수법이었어요."
"무에타이요?"
"어, 그러니까 격투기 하면 팔꿈치로 눈 위 부위를 일부러 찢는 연습하거든요. 별로 아프지도 않은데 피는 많이 나고, 그러면 군중들 보기에 안 좋으니 심판이 경기를 빨리 끝내요. 서로 정강이 많이 안 부딪혀서 좋고, 시합은 몰수패로 끝낼 수 있어서 좋고. 그걸 응용해서 칼로 찢었죠, 뭐."
"뇌진탕은요?"
"경기하면서 다운된 경험을 되살렸습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해요."

민석이 화를 억누르는 태도로 물었다.

"이런 짓을 하고도 신사적인 척, 예의바른 척하지 마십쇼. 당신들 뭡니까. 뭘 어쩌자는 겁니까."

민석의 물음에 수진이 말했다.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안 좋은 짓이라는 건 압니다만 어쩔 수가 없었어요. 저희 사정이 되게 안 좋아요."

수진은 준영을 보며 말했다.

"계속 얼어붙어 있는 걸 보니까 저희를 알아보신 모양이죠?"
"네... 707 부사관을 권총으로 살해하고 탈영..."

준영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민석과 서윤의 얼굴이 굳었다. 수진과 보민이 주는 정중한 인상을 권총이 주는 공포가 압도했다. 한동안 히터 소리, 밖에서 들려오는 구호 소리, 인파들의 소음만 차량 안에 가득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진은 안전장치를 건 다음 권총을 침대 한가운데 놓았다. 민석이 중얼거렸다.

"이게 또 무슨..."

준영이 움찔거리며 권총에 손을 뻗었다. 서윤이 그의 손을 가로막으며 민석에게 눈짓했다. 민석은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준영이 화를 냈다.

"아니, 믿을 사람이 따로 있죠. 총을 들이댄 건 저쪽이잖아요. 혹시 모르니까 그래요."
"맞아요. 못 믿으시는 것도 당연해요. 원하시면 총을 쥐세요. 대신 우리 얘기만 들어주세요. 저희에게 정부를 부술 수 있는 무기가 있어요. 그래서 쫓기는 거예요. 도와주세요."

수진은 지금까지의 얘기를 간략하게, 핵심적인 것들을 빠짐없이 이야기했다. 이젠 총이 문제가 아니었다.
이야기가 끝나자 민석은 침묵하는데 준영과 서윤이 동시에 물었다.

"잡히면 우리한테 이 이야기했다는 소리 안 할 거죠?"
"증거는요?"

수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주머니에서 USB를 꺼냈다.

"기록이 담긴 핸드폰은 켜자마자 추적당해서 보여드릴 순 없는데 이건 있어요."

민석은 받아들어 C타입 젠더 사용 가능한 패드에 꽂았다. 코파일럿365가 수진이 목숨을 걸고 외워서 가져온 데이터를 화면에 비췄다. 세 명은 뒤로 갈수록 느리게 스크롤을 내리면서 몰두했다. 끝에 이르자 세 사람 모두 얼굴이 어두워졌다.
민석이 아예 뒤로 와서 침대에 앉더니 권총을 집어 잠시 망설이다 수진에게 주며 짜증을 냈다.

"이쯤 되면 거짓말이라고는 말할 수 없겠군요. 근데 왜 하필 우립니까. 이런 위험한 얘기를 우리에게 왜 하는 거예요. 나도 그렇고 다른 분들도 가족이... 미안합니다. 하지만 무슨 말인지 이해할 거예요. 힘들게 쌓은 일상이잖아요. 공부하고, 노력하고, 운동하고. 우리는 이게 달갑지 않습니다. 솔직히 말해 무서워요."

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수진은 입을 달싹이다 그저 눈물이 고인 눈으로 세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모두 알 것 다 아는 어른이다. 고로 1이냐 0이냐의 문제이지, 설득으로 될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부탁을 들어줄 사람은 들어주고, 아닌 사람은 아니다. 들어준다고 착한 사람, 안 들어준다고 나쁜 사람도 아니다.
자신도 기회와 사고가 겹쳐 이 지난한 길을 걸었지, 하나라도 어긋났으면 시작 안 했을 겁쟁이였다. 게다가 사람까지 죽였다. 오해였지만 분명 죄는 죄였다. 겁쟁이 죄인이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을까. 말석이나마 협조했던 내가 일상이 소중하다는 진리를 말하는 사람의 마음을 바꿀 수 있을까? 안 되면 말아야지. 여기까지 온 것도 대단하니 그대로 받아들여야지.
보민이 침을 튀기며 외쳤다.

"제발 도와주세요! 저 수진이랑 결혼하고 싶습니다. 저 수진이랑 잘 살고 싶습니다. 지금 이대로면 저희 다 죽어요. 한국에서 살 수가 없습니다. 나쁜 일도 아니잖아요. 아니, 진짜 옳은 일이잖아요. 저희 좀 도와주세요."

보민은 수진이 놀란 눈으로 보든 말든 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보민 씨..."
"포기하지 마. 이제 다 왔어. 이분들께 열심히 부탁드리면 돼. 응?"
"..."
"선생님들 꼭 좀 부탁드립니다!"

보민이 연신 고개를 숙이며,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수진은 퉁퉁 부은 얼굴에 피가 묻어 엉망인 보민의 얼굴을 새삼 신기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바보처럼 직선으로만 움직이는 사람이 옆에 있다는 사실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보민이야말로 자신의 안위는 물론, 가족도 둘째로 미뤄두고 그녀를 따라왔다. 심지어는 그녀를 죽음에서 구해 주었다.
그렇다. 당장 살 이유를 잘 모를 수는 있다. 생을 자연스레 마감하고 싶어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렇게 중립적이고 자유로운 삶을 누군가를 위해, 예를 들면 나보다 나를 더 아끼는 그를 위해 살려고 노력해 보는 건 어떨까?


시위가 격화되었다. 이름 모를 부상자가 격화의 단초가 되었다. 슬슬 해가 지는 17시 10분에 시위 지도부는 연단 사회자에게 지시하여 대형 스크린에 사진 하나를 띄우고 공세에 들어갔다. 피를 철철 흘리는 보민의 얼굴을 확대한 사진이었다. 스크린 밑에는 활짝 웃는 이상만의 대형 영정 사진이 놓여 있어 열띤 분위기를 더했다.

"여러분 또 시작되었습니다. 어제는 이상만 선생님을 죽이고 모자라, 오늘은 이 이름모를 청년을 심하게 구타해, 좀 전에 구급차가 이 청년을 싣고 병원으로 향했습니다. 이놈들은 폭력을 목수가 주머니의 도구꺼내는 것마냥 마음대로 씁니다. 누가 허가해 준 것처럼 자연스레 활용하고 그걸 법이라 우깁니다. 하는 짓이 딱 70년대 박정희, 80년대 전두환입니다. 하지만 그건 명백히 틀린 헛짓입니다. 국가의 주인은 누구입니까."
"국민."
"주권은 어떻게 나옵니까."
"투표."
"대한민국은 어떤 국가입니까."
"민주주의 국가."
"맞습니다. 군인이, 일개 대통령 놈이, 미신 믿고 손바닥에 왕 자 쓰고 나온 놈이 대한민국이 본인 마음에 안 든다고 실제로 왕이 되려고 덤비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혼쭐 내야겠지요? 우리의 결기를 보여줍시다. 놈들 마음대로 되는 세상이 아니라는 걸 보여줍시다. 지금 이 시각부터 총공세에 나서겠습니다.  
여러분은 선두에 서지 않아도 좋습니다. 모두가 결사대가 될 수는 없습니다. 저들은 물과 총, 최루탄, 방망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가주십시오. 결사대의 뒤를 받쳐주십쇼. 국민이 무섭다는 걸 보여주십쇼! 부탁드립니다!"

박수와 고함이 터지며 오와 열을 맞춰 앉아 있던 사람들이 벌떡 일어났다. 물론 대다수는 뒤로 슬슬 빠지며 시위대는 양분되었다. 계엄군의 벽 쪽으로 움직이는 인원은 2요, 독립문 쪽으로 걷는 인원은 8이었다.
남은 2는 대체로 다친 가족이나 친구가 있었다. 그 앞에서 방독면, 간이 방독면, 헬멧, 몽둥이, 돌, 쇠파이프로 무장한 결사대는 대체로 심하게 다친 가족이나 친구가 있었다. 몇몇은 심각한 장애가 생겼거나, 실종되었거나 사망해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그들은 눈앞의 군인을 한 명이라도 그리 만들겠다는 적개심에 불탔다. 누군가는 참사에 책임을 져야 했다. 문제는 군인 중에도 다친 가족이나 친구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명령에 의해 무인지대에 선제적으로 최루탄이 궤적을 그리며 떨어졌다. 땅에 떨어진 최루탄은 빙글빙글 돌며 회색 안개를 펼쳤다. 그러나 현재는 21세기, 성능 좋은 가스 마스크는 얼마든지 있는 시대였다. 무장한 결사대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천천히 그 거리를 좁혀갔다.
그때였다.
결사대 앞을 앞질러 수방사 계엄군 사이로 들어가려는 사람이 있었다. 방독면으로 입을 가린 사십대 후반의 남자는 구급낭을 멘 채, 오렌지색 구급복과 119 구조대란 명찰로 자신의 신분을 증명하였다.

"에잉? 119?"
"아저씨들, 119예요. 돌 조심히 던져요!"
"네네!"

전쟁터에서도 위생병은 우대하는 판에 아직은 전쟁터가 아닌 바, 결사대는 그는 무시하고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놔뒀다.
최민석 소방위는 분노의 고함과 눈물의 안개, 죽음의 물보라가 난무하는 무인지대를 무사히 건너 비싼 돈을 들여 만든 최신식 바리케이드 앞에 설 수 있었다.
방독면 너머로 쓸쓸한 눈을 한 군인이 물었다.

"어떻게 오셨어요?"
"뒤에 환자입니다. 차에 깔렸다고 들었어요."

군인은 확인도 안 하고 방패 한 면을 열어 민석을 입장시켰다. 그는 누가 봐도 응급구조사였다. 거기에 그를 검문할 시간에 바퀴 달린 바리케이드를 앞으로 밀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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