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 Date | 25/12/26 00:03:01 |
| Name | 트린 |
| Subject | 또 다른 2025년 (15) |
|
15. 다마스는 얼마 못 가 극심한 정체에 시달렸다. 도심으로 가는 방면은 차가 달리는 일 없이 가다 서다를 반복했다. 운전대를 잡은 수진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마스에 달린 네비게이션을 봤다. 화면 속 서울 도심은 온통 붉은색, 극심한 정체 표시로 뒤덮여 있었다. 수진의 손가락이 전자 지도 위를 빠르게 미끄러졌다. 국회가 있는 여의도와 대통령실이 있는 용산, 주요 시설이 모인 시청이 일종의 축선을 이루고 있었다. 이곳의 주변 선들은 염증이 생긴, 오염된 검붉은 핏줄을 연상케했다. "보민 씨, 라디오 좀 켜봐." "현재 광화문 일대와 여의도 진입로는 계엄군의 차량 통제로-" 아나운서의 목소리는 평온했지만 내용은 절망적이었다. 보민이 물었다. "한강 다리들도 검문 시작했을 텐데 어디로 가? 아예 외곽으로 돌까?" 수진은 지도를 노려보며 머릿속으로 군의 대처를 상상해 보았다. 그들은 서울 전체를 틀어막을 능력이 없었다. 대신 주요 시위장 주변의 교통을 끊어놓았을 것이다. 버스와 지하철은 무정차요, 주요 길목마다 바리케이드를 치고 차선을 줄인다. 대중교통은 최대한 불편하게 만들고, 차를 이용한 시민들은 지쳐서 집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술수였다. "아니. 외곽으로 돌면 오히려 갇혀. 걷자." "걸어?" 보민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걸으면 또 CCTV와 싸워야 하는 것 아냐? 우리 둘이 붙어 있으면 판별 확률도 더 올라가잖아. 떨어져 가자고?" 구로디지털의 수많은 지식산업센터에 위치한 수많은 사무실 중 하나. 기환은 열중 쉬어 자세로 브리핑을 듣는, 사복 차림의 휘하 병사들에게 말했다. "소집되었을 때 간단히 들었죠? 우리는 시청에 위치한 경찰 기동대와 경찰 정보과의 전자 정보 감청 및 작전 지원 임무를 나갑니다. 아주 가끔 불순분자, 대공용의자, 테러용의자를 체포할 일이 생기겠지만 뭐 그럴 일이 있겠어요?" 기환은 부드럽고 여유 있는 자신의 평소 이미지를 생각해서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소령인 기환이 동원할 수 있는 병력에는 한계가 있었고, 당연히 동원하는 이유마저 꾸며내야 했다. "근데 만약 체포할 일이 있으면 적극적으로 나서세요. 병은 휴가, 부사관 분들은 업무 고과 플러스, 당연히 저한테도 좋겠죠? 군의 다른 부서나 경찰에게 공을 빼앗기지 마세요. 아시겠죠?" 진심 같아선 안수진 사진 나눠주고, 외우라고 하고, 현장에서 만나면 즉시 쏴죽이라고 하고 싶었다. 그래야 마음이 편해질 것이다. 당연히 그런 명령은 불가능하니 빠릿빠릿하게 움직일 만큼의 동기를 주는 수밖에 없었다. 진실을 모르는 보안 실무 부사관 2명, 기술병 2명, 차량 운전 부사관 1명은 그냥 평소 지원 작전 나갈 때처럼 긴장 없는 얼굴로 대답하고 말았다. "네, 알겠습니다!" 장점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일행은 119 응급차 특유의 래핑과 디자인을 흉내낸 작전용 밴에 올라탔다. 응급차는 적대적인 군중이 가득한 환경 속에도 비교적 안전하고, 교통 체증에도 주변 차량이 양보해서 고속으로 움직일 수 있는 장점을 지녔다. 정보사에서 은근히 자주 사용하는 위장이었다. 군복에서 응급구조사복으로 갈아입은 차량 운전 부사관이 가림막을 손으로 열고, 뒷 밴칸에 앉은 김기환 소령에게 물었다. "시청으로 갑니까?" "그래요, 나가서 막히면 바로 사이렌 틀어요." "네, 알겠습니다." 한편 두 사람을 태운 다마스는 당산역 사거리 500미터 전방에서 완전히 멈춰 섰다. 도로는 거대한 주차장이었다. 차들은 모든 차선에서 앞으로 가지 못하고 서 있었다. 운전을 교대한 보민이 물었다. "여기부터?" "보고." 수진이 조수석 차창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저 멀리 양화대교 진입로 고가도로 위에 군용 트럭과 바리케이드가 희미하게 보였다. 헌병들이 붉은 경광봉을 휘두르며 차량들을 갓길로 빼거나 회차시키고 있었다. 저 검문소를 차로 통과하려면 서너 시간은 족히 걸릴 터였다. 반면 인도는 다른 풍경이었다. 지하철이 멈춘 탓인지, 아니면 시위에 참여하려는 건지 수만 명의 사람들이 두꺼운 패딩 모자를 뒤집어쓴 채 강 쪽을 향해 걷고 있었다. 그 거대한 인파의 물결은 인도로 모자라 양 차선 두 개를 가득 메웠다. "여기 좋다." "어디다 댈까?" "저 골목. 응. 저기저기. 갓길에." 수진은 걷기를 두려워하는 보민에게 인파 속에 섞이면 AI CCTV 분석량을 압도할 것이라고 설득했다. 과연 그랬다. 이 엄청난 인파 앞에선 AI도 수많은 인간이 쏟아내는 퍼센테이지를 관리하고 보고하느라 능력에 한계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또한 능력의 대부분은 실제로 기물을 파손하거나 선두에 서서 사람을 선동하는 등의 적극 가담자에게 쏠릴 것이다. 여기서 시작하면 중구 광화문까지 대략 8킬로미터. 세 시간 동안 당산역, 양화대교, 합정, 마포, 공덕, 아현, 서대문, 광화문을 거치면서 군중 속에서 움직일 수 있었다. 들켜도 군중 속에 있는 한 안전했다. 다마스는 결정한 지 20분 뒤에야 2개 차선을 지나 골목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수진은 연신 사과하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다. 그렇게 했어도 양보받은 공간이 좁아 차체가 작은 다마스가 아니면 불가능할 뻔했다. 수진은 내리기 전, 송장과 종이 영수증이 든 글로브 박스를 열어 현금으로 200만 원을 넣어두었다. 이렇게 하지 않고서는 고마운 마음을 표현할 길이 없었다. 차문을 열고 내리자 차가운 바람과 함께 사람들의 소음이 좀 더 크게 들렸다. 두 사람은 다른 사람들처럼 양화대교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보민이 말했다. "앤트맨인 줄 알았더니 부자맨(*영화 <저스티스 리그>에서 파생된 밈. 배트맨이 자신의 능력을 자조함.)이다." "그렇지. 근데 난 여자니까 배트우먼." "목표가 좋네. 너랑 친해져야겠네." "그럼 보민 씨는 스파이더맨." 아무 일 없는 듯, 부러 여유롭게 실없는 농담을 몇 번 주고받은 보민은 가방을 메고 수진의 손을 잡았다. 수진이 살짝 당황했다. "확률이 올라가. 들키면 어떡해." "그런데 그 죄목은 무려무려 수진이 남자친구라는 사실. 그게 죄라면 나는 중죄. 어서 잡아가주세요, 짜잔." 수진은 그만 웃어버렸다. 보민 덕분에 기분이 조금 가벼워졌다. 모자와 마스크 뒤에서 웃고 나서 시위 참가자가 웃는 게 좀 그런가 하고 걱정했는데 기우였다. 주변 사람들도 아직까진 마치 산책나온 사람들처럼 좀 들뜬 느낌으로 걷는 듯했다. 미소 짓는 사람들도 흔했다. 차도에 사람이 많다는 사실, 평소에는 보행이 금지된 양화 대교를 걸어서 건넌다는 사실, 뜻을 함께하는 이가 주변에 5만 명은 넘어간다는 사실이 비일상성을 제공하기 때문인 듯했다. 인파는 양화대교로 올라갈수록 늘어났다. 양옆 인도에 그 옆 3차선까지 포함해 4개 차선을 차지했던 사람들은 콘크리트 블럭으로 중앙선을 분리해 예비용으로 남긴 중앙 예비 통로마저 점령했다. 다리 중간쯤 이르자 인파는 멈춘 차 사이를 걸어 바리케이드, 군용차량으로 이뤄진 검문소를 지나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곳에 사람들이 있었다. 그 사이를 바람이 휩쓸었다. 강 위에서 바로 올라오는 바람이었다. 옷자락이 붙잡아 끌리듯 흔들렸고,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찬 공기가 목 안쪽을 긁었다. 차를 타지 않았을 땐 몰랐던 강풍이었다. 강풍을 그대로 맞으며 검문소를 운영하는 군인들은 유난히 춥고 작아 보였다. 그들은 차로를 지키는 시늉을 했지만 바리케이드를 뚫고 지나치는 인파는 손을 못 댔다. 숫자가 너무 많았다. 심지어 차도 회차시키는 게 불가능해졌다. 그들은 대체로 차 아니면 하늘을 노려보는 게 일이었다. 검문소 바리케이드 옆, 경광등을 든 채 소총은 뒤로 돌려멘 헌병 한 명이 수진과 눈이 마주쳤다. 계급장을 뗐으나 앳된 얼굴로 판단컨대 기껏해야 이등병쯤 되어 보였다. 그는 수진의 눈을 피하며 고개를 푹 숙이고는 발로 아무것도 없는 바닥을 찼다. 두 사람은 무사히 그 앞을 지나쳤다. 수진이 작게 속삭였다. "무섭나 봐." "..." "사람들이 자신을 적으로 보는 게." '맞아. 나도 그랬어.' 보민은 뒷말을 삼켰다. 1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