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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5/12/28 00:07:37
Name   트린
Subject   또 다른 2025년 (16)

16.

강이 바다로 향할 때 다른 강의 지류와 합쳐지듯, 인파는 홍대에서 대량의 이십대 남녀와 합류했다. 아이돌 덕질하던 손들이 만든 팻말은 귀여운 디자인, 아기자기한 서체 속 다양한 문구를 품고 있었다.

시급 1만 원도 아까운 새끼.
엔딩 요괴 윤석열.
숨을 30분만 참아주시겠습니까.
윤석열 대가리 뚜따.
인생 로그아웃 추천.

안수진이 스물일곱, 김보민이 스물아홉이니 산술적으로는 이십대에 속한다. 하지만 군인 신분으로 딱딱한 삶을 살다가 형광색으로 적힌 다양한 절규와 저주, 주장 앞에 서니 왠지 자신들은 나이를 더 먹은 다른 세대처럼 느껴졌다.  
수진이 감탄했다.

"저 문구 특히 마음에 든다."
"뭐?"
"'너희들 때문에 덕질을 못 하잖아.'"

보민이 웃었다.

"그렇지. 중요하지."

누군가는 아이돌 이름이 박힌 티셔츠를 입었다. 누군가는 캐릭터 인형을 가방에 달았다. 다들 제각각이었다. 좋아하는 게 다르고, 사는 방식이 달랐다. 그게 자연스러웠다. 그 자연스러움이 일개인에게 방해받아서 모든 사람들이 한 방향으로 걷는 중이었다.  
두 사람은 걷다가 쉬다가 하면서 아현까지 도착했다. 그 사이 두 사람은 사람들이 나눠주는 어묵, 김밥, 생수를 받았다.  
본격적인 대치는 충정로역부터였다. 경찰 기동대가 눈앞에 자리하고 모든 차도를 막아섰다. 시위대는 그들이 독립문, 서대문역, 서울역을 한 줄로 긋고 이곳을 1차로 막는다고 소곤거렸다. 진위는 확실치 않지만 그럴싸한 소문이었다. 바로 뒤에는 경찰청이 있고 북서쪽에는 정상이 295미터인 안산, 남쪽에는 서울역, 남동쪽에는 남산이 있는 이곳은 군중을 막기도 쉽고 막아야 하는 이유도 있었다.  
버스로 만든 벽과 사람으로 만든 벽이 차도를 막으면서 정체된 인파가 더 두터워졌다. 시야가 좁아졌고 조금만 멈춰도 앞사람과는 가슴, 뒷사람과는 발꿈치가 닿았다.
한낮이 되고 인파 속에서 온도가 올라가면서 파카를 입었던 사람들이 하나둘 벗고 허리에 둘렀다. 하지만 몸 선을 왜곡시키는 게 유리한 두 사람은 땀을 흘리면서도 그대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 동행하는 친구에게 물었다.

"카톡 가냐?"
"아니, 아까부터 먹통이야. 안 터져."

사람들이 하늘 높이 팔을 뻗어 휴대폰을 흔들어봤지만 소용없었다. 정보가 차단된 공간에서 믿을 건 옆 사람의 입과 귀뿐이었다.
사람들이 앞에서 소문을 받아 외쳤다.

"독립문 쪽이 약하대요. 뒤로 전달!"

보민은 같이 외치면서 나름 수긍가는 분석이라 생각했다. 일단 경기대학교나 경기초교, 인창 중고교, 감리교신학대학교가 있어 부지는 넓은데 그걸 다 지키고 서 있을 인원이 없었다. 학교 사이에 섞인 구시가지와 상권 역시 골목이 복잡하고 사통팔달 뚫려 있어 모두 막는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수진이 물었다.

"가?"
"가자."

두 사람은 출렁이는 인파의 선두에서 빠져나와 골목으로 들어갔다. 학교는 우연의 일치인지 쪽문과 정수기, 화장실을 개방한 곳이 많았다. 사람들은 빠른 걸음으로 학교와 아파트, 시장을 지나 독립문 쪽으로 올라갔다.
과연 소문대로 사직로에는 경찰 기동대가 없어 시위대가 경복궁역으로 직진하였다. 8차선을 가득 메운 인파는 경복궁역과 광화문 광장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16시경 거의 20만 명 정도 모인 사람들은 시위 조직위의 지시에 따라 구호를 외치고 이동해 자리에 앉았다.
보민이 물었다.

"더 가?"

이는 우리가 옳게 왔냐는 물음이 함축된 질문이었다.
평지에 만들어진 광장이기에 보민에게는 수많은 사람들과 도시의 높은 건물, 연단과 화면, 세종대왕 동상의 뒷모습 외에는 보이지 않았다. 광화문역 방면에는 수방사 군인으로 이뤄진 장벽이 있다는 얘기를 주변 군중에게 얼핏 들었을 뿐이다. 심지어 목적지까지 모르는 보민은 살짝 답답했으나, 수진을 믿기에 대놓고 물어보지 않으려 했다.

"일단 여기서 분위기를 보자."
"그래."

두 사람은 주최위가 건네는 소형 플래카드와 방석을 받고, 광장 대리석 바닥 한 구석에 줄을 맞춰 앉았다.
보민은 얼굴을 살짝 찡그렸다.

'냄새.'

전날 밀고 당기기를 했는지 주위에선 최루탄 냄새가 희미하게 감돌았다. 그만큼 격전지인 광화문 삼거리는 스피커와 연단, 대형 스크린, 간이 화장실, 지휘부용 텐트, 의료팀까지 갖춰진 명실상부한 시위대의 핵심이었다. 크레인에 매달린 스피커는 엄청난 소리로 구호와 함께 마이크 쥔 연사의 연설을 쏟아냈다. 어찌나 크고 우렁차던지 연단과 200미터쯤 떨어진 두 사람에게도 마치 옆에 있는 것처럼 잘 들렸다.

"저들은 1991년 당시 안기부에서 의문의 추락사를 당한 한진중공업 박창수 노조위원장의 시신을 백골단 22개 중대를 투입해 장례식장에 난입해 운구를 빼앗은 이후 34년만에 이상만 열사의 운구를 강탈하는 야만을 저질렀습니다. 이 대명천지 21세기에 어디서는 AI다 로봇이다 뭐다 하는 이 최첨단 시기에 91년에는 해머로 장례식장 벽을 쳐 부쉈고, 2025년에는 군인들이 유가족과 직원 들을 총기로 협박해 운구를 강탈한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이상만 열사의 고귀한 뜻을 꺾기 위해 국과수는 열사의 사인이 심정지라고 발표했습니다. 그들은 맞아서 쓰러진 게 아니라 쓰러지면서 머리에 가벼운 타박상을 입었을 뿐 물대포는 직접적인 사인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2015년 고 백남기 농민 사건과 판박이인 이 사건은-"

보민은 처음 듣는 소식에 귀 기울이다가 대형 스크린에 활짝 웃는 노인의 얼굴이 나오자 얼어붙었다.
보민은 노인을 본 적 있었다. 이틀 전 종로 탑골 공원에서 일어난 시위에서 형광색 등산복 차림에 고집스러운 인상의 친구를 다독이던 초로의 남자였다.  

'돌아가셨구나...'

망연자실한 보민 주변에서 연설을 듣고 격분한 이들은 원색적인 욕설과 함께 저주를 퍼부었다.

"다 죽여야 해."
"죽이지 않으면 안 바뀌어."
"총이 없는 게 한이다."

홍대나 합정에서는 분노가 살짝 포장지를 썼는데 이곳에는 완전히 날것이었다. 연설은 광장에서 호응해 주셔도 좋고, 선두에 서서 투쟁에 적극적으로 나설 분들은 텐트로 오셔서 상의해 달라는 내용으로 끝났다. 열띤 박수가 쏟아졌다.
보민은 현실로 돌아와 수진을 바라보았다. 수진은 뭔가 어두운 얼굴이었다.

"힘들겠는데..."
"광화문까지 말이지?"

수진이 귀를 빌려달라 손짓했다. 보민이 가까이 붙자,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나는 한국 프레스 센터를 노리고 있어. 거기 18층이 외신기자클럽이야."

보민은 이제야 그녀의 진짜 목표를 알게 되었다. 거리로 치면 그들이 있는 장소에서 얼추 400미터 떨어졌으며, 효과적인 동시에 빠른 자살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계엄사 본부 바로 앞이잖아!"

계엄사령부는 바로 이 너머인 서울 시청에 위치했다. 서울 시청 바로 앞 서울 광장에는 간이 헬기장에 수방사 기동타격대가 주둔하는 천막 막사까지 설치되었다. 서울에서 용산과 국방부 외 경비가 가장 삼엄한 곳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래서 수방사 군인들이 동원돼 기동대처럼 시위 진압에 나선 상황이었다. 프레스 센터 또한 50미터 거리인 계엄사령부에서 국방부 대변인이 나와 비정기적 브리핑을 하는 데인 만큼 대놓고 군인 신분을 뽐내는 자부터 국정원 요원까지 골고루 숨어 있으리라.

"외신 기자들이 거기 모여 있대?"
"응. 거기 휴게실이 있고, 서울 시내도 내려다 보이고, 종종 대변인이 소집해서 기사도 있으니 붙박이로 자리한대."

보민은 주변을 손짓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여기 있는 사람들에게 퍼뜨리는 건 안 돼? 일테면... 시위 지도부 말이지."
"정 안 되면 그래야지. 하지만 흔히 생각하는 방법은 모두가 아는 방법인 거야. 내가 시위대에 도움을 요청할 거라는 생각은 수사단이라면 다 하고 있을 거야."

보민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수진은 귀에 따뜻한 숨과 함께 천천히 설명했다.  

"하나. 시위 지도부 주변에는 당연히 정보과 형사들이나 그들의 제보자가 있어. 신분을 밝히고 접촉을 요구할 때 체포될 가능성이 있어. 둘. 발표 도중 신원이 특정되면 바로 체포조랑 기동대가 몰려올 거야."

보민이 화면과 스피커, 연단을 가리켰다. 판을 벌린 규모가 커도 너무 컸다.

"지금은 안 오잖아."
"그거야 사람이 죽고, 운구 탈취하고, 사인 조작하고 여론이 안 좋으니
좀 쉬어가는 것뿐이지."

생각해 보면 맞는 말이었다. 총, 물, 최루탄, 조직을 가진 쪽에서는 언제든지 먼저 시작하고 마칠 수 있었다.

"우린 잡히면 바로 죽어. 우릴 보호할 수 있는 건 국제적인 여론뿐이야."

수진이 준 정보가 뇌리에 스며들었다. 구구절절 옳은 말이었다.
보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어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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