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12/21 23:05:48
Name   bullfrog
Subject   여러분의 마흔은 안녕한가요

저는 1981년생, 한국 나이로 마흔입니다.

마흔이 이제 열흘이 남았습니다. 내년이면 마흔 하나네요. 살 날이 산 날보다 적어지고 있구나 새삼 실감하는 요즘입니다. 저와 딱 30년을 차이에 둔 아버지는 호스피스 병동에 계십니다. 올해 칠순이신데, 투병 때문에 잔치를 못했습니다.

스물, 갓 대학생이 되었을 때는 꿈과 설레임이 가득했던 것 같습니다. 물론 그 이후로 닥칠 실망과 환멸과 늦은 현실인식은 생각도 못했고요. (네, 저는 90년대 운동권 끝자락, 그 잔여물에 걸쳐친 00학번입니다.)

서른, 그 즈음의 저는 취업 3년차에 결혼을 앞둔 겉으로는 평범한 생활인이었습니다. 고대에서 CFA 3차 시험을 보고 나와 김규항 선생의 강의를 들으러 가는 모순적인 인간이기도 했구요.

서른 이후 삶은 어떻게 살것인가의 고민은 점점 줄어들고 직장과 가정의 미션들- 승진, 육아, 이동, 이사 등등-로 채워지는 나날의 연속이었습니다. 마흔이 오는 줄도 모르고 무심히, 영원히 삼십대일 것만 같던.

마흔 즈음이 되어서야 삶을 되돌아 보게 됩니다. 제일 큰 계기는 아버지의 투병이겠고, 그 다음은 점점 더 변방으로 밀려나는 듯한 느낌의 직장 생활, 그리고 열심히 살아봐야 부동산과 불로소득에 대한 상대적 박탈감은 커져만 가겠구나하는 실망감이 다음일 것입니다.

마흔 이후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나날이 여위어가는 아버지를 볼 때면 삼십여년 후 저 자신을 투영하게 되고, 천진난만한 두 아이들을 보고 있자면 왠지 저의 세상에 대한 실망과 환멸을 되물림해줄까 두렵고, 거울 속의 나는 십여년 전의 내가 원하던 모습은 아무래도 아닌 것 같고. 그냥 하루하루 가는 모습이 광석이형의 노래처럼 매일 이별하는 것만 같습니다.

투정이라 생각합니다. 세상, 얼마나 많은 사람이 칠순도 못 보고 갈까요. 하물며 마흔 전에는요. 스스로 목숨을 끊은 친구, 선배도 여럿 있었습니다. 점점 더 살기 힘든 세상에 이만하면 먹고 사는데 지장 없는 것이, 애들 키우며 아직까지 큰 고민 안 하는 것에 감사합니다.

그런데 문득 드는 이 두려움과 슬픔은 무엇일까요. 마흔 해를 살아오며 후회되지 않는 게 한해도 없는 것만 같은 느낌은요. 그냥 나는 질투와 욕심이 많은 자기연민에 빠진 중년일 뿐일까요.

여러분의 마흔은 어떻습니까, 아니면 어떠셨습니까. 혹은 어떠실 것 같습니까. 저는 이제 열흘이 남았습니다.













23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1266 일상/생각2030세대는 공정에 민감하다? 54 이그나티우스 20/12/23 5673 7
    11259 일상/생각여러분의 마흔은 안녕한가요 27 bullfrog 20/12/21 4720 23
    11249 일상/생각2020년 내가 산 전자기기들 돌아보기 4 루아 20/12/18 3315 1
    11247 일상/생각전문가는 무엇인가? 3 2막4장 20/12/18 4371 3
    11245 일상/생각추억 되살리기 - 오래된 피쳐폰 데이터 다운로드 받기 5 자크 20/12/18 9960 1
    11234 일상/생각아이들을 싫어했던 나... 28 whenyouinRome... 20/12/15 4277 33
    11228 일상/생각우울증과 나 1 머랭 20/12/15 4117 11
    11223 일상/생각아버지께서 긴 여행을 가실 거 같습니다 10 bullfrog 20/12/14 4037 7
    11211 일상/생각사이버 네크로맨시 6 타키투스 20/12/10 4039 0
    11209 일상/생각책들(슈독 vs 규칙없음) 1 2막4장 20/12/10 3723 1
    11206 일상/생각푸념.. 2 당나귀 20/12/09 3825 1
    11201 일상/생각논리의 모순성. 일관성에 대한 고찰 8 sisyphus 20/12/08 4164 1
    11196 일상/생각아이폰 12 미니 2주 사용기 12 copin 20/12/05 4093 0
    11193 일상/생각할아버지, 데리버거, 수영장 2 사이시옷 20/12/03 3857 23
    11190 일상/생각한가할 때가 더 괴롭다 4 2막4장 20/12/02 4083 3
    11182 일상/생각사유리의 선택과 부작용 17 토끼모자를쓴펭귄 20/11/29 4761 2
    11180 일상/생각장애인의 결혼생활에 대한 짧은 생각들 10 오구 20/11/28 4786 4
    11171 일상/생각모 바 단골이 쓰는 사장이 싫어하는 이야기 6 머랭 20/11/26 3749 25
    11165 일상/생각아플 때 건강을 지키려는 노력은 살면서 꼭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13 오구 20/11/24 4077 16
    11163 일상/생각고향에 가고 싶어요. 9 2막4장 20/11/22 4286 7
    11162 일상/생각아마 저는 죽을때까지 고민할 것 같습니다. 3 오구 20/11/22 4031 11
    11154 일상/생각중대에서 운전하다가 사고날뻔한 이야기 9 Cascade 20/11/20 3798 1
    11152 일상/생각이어령 선생님과의 대화 4 아침커피 20/11/19 3774 13
    11148 일상/생각회사일기 - 5 "학벌" 6 Picard 20/11/19 3992 0
    11146 일상/생각비혼 출산은 과학적 남용일까? 10 sisyphus 20/11/19 3870 0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