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원들이 추천해주신 좋은 글들을 따로 모아놓는 공간입니다.
- 추천글은 매주 자문단의 투표로 선정됩니다.
Date 20/10/12 05:10:31
Name   아침커피
Link #1   https://crmn.tistory.com/118
Subject   사귀지도 않고 헤어진 제 친구의 연애 아닌 연애 이야기
벌써 한참 옛날 일이네요. 복학생 막학기 시절 어느날 밤에 친구한테 갑자기 연락이 왔어요. 그땐 스마트폰이 없어서 문자-_-하던 시절이었습니다. 동네에서 원래 친했던 친구였는데 대학까지 같은 곳으로 가게 되어 계속 친하게 지냈던 친구였습니다. 느닷없이 밤 10시에 치킨 먹게 나오라길래 아 이놈 뭔가 일이 있구나 느낌이 왔어요. 청바지에 쓰레빠를 신고 (슬리퍼라고 하면 느낌이 안 사네요) 친구네 단지 상가에 있는 호프집으로 갔는데 이놈이 저 오기도 전에 치킨 시켜놓고 소주를 까고 있었어요. 의자 끌어다가 앉으면서 거두절미하고 물었습니다.

"야 뭐야? 무슨 일 있어?"

"아까 낮에 헤어지고 왔어."

"뭔소리여 너 사귀는 사람도 없었잖아"

"연주. (당연히 가명입니다)"

"........"

한 10초정도 뭐라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 유튜브 렉걸린것처럼 가만히 있다가, 술 따르라고 말하기도 뭐해서 그냥 제가 자작 했습니다. 이놈이 저를 불렀던 것도 이것저것 어떻게 헤어졌네 설명할 필요 별로 없이 일단은 입 다물고 같은 테이블에서 술 먹어줄 사람이 필요해서였었을 거에요.

제 친구의 연애 아닌 연애 이야기는 대학교 1학년 때 시작되었습니다. 그때 오메글인가? 하는 외국 랜덤 채팅 사이트가 반짝 유행했던 적이 있었어요. 외국인이 대부분인 사이트였는데 제 친구가 거기서 우연히 한국인을 만났습니다. 대학교 친구들과 함께 PC방에 갔던 날이었는데 이놈이 랜덤채팅에서 만난 한국사람과 코드가 잘 맞았는지 스타 대여섯 판을 할 동안 피씨방에서 계속 채팅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더니 나중에는 서로 MSN 메신저 (홍차넷에는 아시는 분 많으실 줄로 압니다) 계정을 교환하더라고요. 랜덤채팅은 한번 채팅 종료하면 다시는 못 만나니까요.

친구는 거의 한 달간 매일같이 MSN으로 장시간 채팅을 했습니다. 성격이 어지간히 잘 맞았었나봐요. 그러더니 핸드폰 번호를 교환하고, 나중엔 밤새도록 통화를 하더라고요. 그때 요금제가 무슨 쇼곱하기 쇼는 쇼였나 하는 거였던 거로 기억합니다 (...)

그러더니 갑자기 어느날 그 주 토요일에 만나기로 했다는 거에요. 예상 외의 급전개에 그 예의 피씨방 멤버들은 다 놀랐습니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 만나서 뭐 할거냐고 물었더니 카페에서 만나기로 한 것 외에는 정해진게 아무것도 없다는 거에요. 그래, 우리도 이런 상황은 전혀 모르겠다만 어쨌든 커피는 엔간하면 니가 사라는 말로 저희는 그 친구를 배웅(?)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일요일, 그 친구를 동네 편의점으로 불러냈습니다. 주말에 심심하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했어요. "야, 무슨 얘기 했어?"

"어, 이런 저런 얘기 엄청 많이 했어. 한 두시간 쯤?"

"처음 만난 사람하고?"

"얘기가 잘 통하더라고 ㅎ"

"그래서? 그 다음은?"

"그냥 헤어지기도 어색해서 뭐할까 서로 고민하다가 영화 보러 갔어."

"처음 만났는데 카페에서 두시간 얘기하고 영화관??"

"응. 그렇게 영화 보고 헤어졌어."

"저녁은 같이 안 먹고?"

"어. 아 그게 영화 보고 나오다가 그 사람이 에스컬레이터에서 발을 좀 삐어서. 심한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집에 빨리 가는 게 나아 보이더라고."

"어? 발을 삐었는데 어떻게 집에 빨리 가?"

"아, 내가 부축해서 전철로 집 근처까지 데려다 줬어."

...뭐지 이 이말년씨리즈같은 급전개는?

그러니까 친구 말은 처음 만난 여자분하고 두시간 동안이나 화기애애하게 카페에서 담소를 나누다가 즉석에서 영화보러 가고, 그랬다가 여자분이 에스컬레이터에서 발목을 접질려서 넘어진 바람에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는데 그 분이 걸을 수 없을 정도여서 어깨동무(?) 식으로 부축해서 전철을 타고 그분 집 근처 전철역까지 바래다줬다는, 어디 문예창작대회에 내면 바로 예선탈락할만한 이야기였습니다.

그 후로 제 친구는 그 여자분 발목이 다 나은 후(...) 그분과 자주 만났습니다. 나이는 동갑이었고 사는 곳은 저희 동네에서 대중교통으로 두시간 쯤 걸리는 곳이었어요. 그래서 중간지점에서 만난다는 핑계(?)로 코엑스도 가고 남산타워도 가고 하더라고요. 우리 동네와 그분 동네의 중간지점이 코엑스와 남산타워이려면 비유클리드 기하학을 써야 할 것 같은데? 그래서 너 뭐냐, 사귀는 거냐고 물어봤더니 아니래요. 그냥 서로 엄청 좋은 친구래요. 친구x100.

내가 이상한건가 세상이 이상한건가 의문이 스물스물 피어오르던 어느 날 얘가 저한테 그 여자분을 같이 만나자고 초대를 했습니다. 친한 친구 소개해주고 싶다고 말해놨다면서요. 야 그게 뭐야, 내가 그 분을 왜 만나냐 하며 거절했는데 얘가 "그러면 당연히 그쪽도 자기 절친 데리고 나오지 않겠냐?" 하길래 바로 네가 내 진정한 죽마고우요 한신이요 장자방이로다 하면서 따라 나갔습니다. 장소는 중간지점(...)이라고 주장되는 신천역이었습니다. 요즘은 어느샌가 역 이름이 바뀌었더라고요?

그렇게 그 날 넷이 만나서 재미있게 놀았습니다. 말도 그날 바로 다 텄고요. 그런데 제 친구랑 연주(위에서 말씀드렸듯 가명입니다)가 걸을 때 팔짱을 꼈다가 손을 잡았다가 하는 겁니다. "야 왜 사귀면서 안사귄다고 거짓말했어!!" 라고 장난기 있게 소리쳤는데 둘 다 정색을 하고

"아니야 우리 그냥 친구야"

하는 겁니다.

뭐지 이게, 몰래카메란가, 짐 캐리처럼 굿모닝 굿애프터눈 굿나잇을 외쳐야 하나 혼란스러운 기분으로 그 함께 나온 연주의 친구를 쳐다보니 연주 친구가 한숨을 쉬며 어깨를 으쓱 하더라고요. 누가 봐도 사귀는 게 맞는데 자기들은 끝까지 아니라고 한다면서요.

본인들 말로는 커플이 아니니 커플이라고 하는것도 어폐가 있긴 한데, 이 커플은 하여튼 여러모로 특이했습니다. 일단 서로 엄청 좋아하는 것은 맞아 보였어요. 그런데 공식(?)적으로는 사귀는 게 아니니 당시 대학교 1, 2학년들이면 다들 따질 100일, 200일 같은 기념일이 없었습니다. 어디에서 연애 이야기가 나오면 이들은 다 싱글이었어요. 그렇다고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제 친구에 대해서는 제가 알고 연주에 대해서는 연주 친구가 증인입니다. 그리고 그러고 말고 할 것도 없이, 그 둘은 다른 사람을 만날 틈이 없을 정도로 자주 만났어요. 거의 붙어 있었습니다.

그렇게 1년쯤 지났던 것 같아요. 제 친구가 학교에서 여자친구가 생겼습니다. 뭐?? 친구한테 뭔소리냐, 연주는 어떻게 된거냐 물었더니 연주는 친구(...)래요. 미친놈아라고 저도 모르게 욕을 하고 연주한테 전화를 했는데 (저야말로 모범적인 의미로서 친구였으니) 연주도 이미 알고 있었고, 더 놀라운 것은 연주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태도를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대답도 똑같았어요. "우린 그냥 친구야."

저는 그 때 이 둘을 이해하는 것을 포기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다가 당시 병무청 사이트에 접속해서 바로가기 버튼이 있길래 눌렀는데 그게 웹사이트 바로가기가 아니라 진짜 군대 바로가기여서 4일 후에 입대하는 코미디를 찍고 군대에 가게 되었습니다. 제 친구는 죄를 많이 지은 대학생이 가는 대학원이라는 곳에 진학할 예정이었어서 군대에 안 가더라고요. 저 군대에 있는 동안에 친구가 면회를 오기도 했었고 제가 휴가 나가서 만나기도 했었는데, 연주 이야기를 물어보니 얘가 여자친구가 있는 시기에는 연주와 연락을 잘 안 하고, 싱글인 때에는 이전처럼 연주와 자주 만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연주는? 걔는 연애 안 해?" 하고 물었더니 자기는 물어본 적도 없고 연주도 말 한 적도 없다고 합디다.

하여튼 버튼 잘못 눌러서 군대에 바로갔다 온 후 저는 복학을 했습니다. 제 친구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대학원에 가 있었고 연주도 자기네 학교에서 대학원에 갔더라고요. 이 때에는 다들 각자 바빠서 자연스레 연락이 뜸해졌었습니다. 제 친구랑 연주도 그렇게 시나브로 안 만나게 되었고요.

여기까지가 제가 아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렇게 친구놈이 불러낸 호프집에서 각자 소주 한 병씩을 말도 없이 다 비워갈 무렵 제가 물었습니다.

"너네 서로 친구잖아. 뭘 어떻게 헤어졌다는 거야?"

"며칠 전에 갑자기 연주가 생각나더라고. 그래서 오랜만에 전화를 했어. 연주가 받고서 무슨 일이냐고 묻길래 갑자기 너 생각나서 전화했다고 했지. 그랬더니, "

"그랬더니?"

"얘가 한숨을 푹 쉬더니, 너는 갑자기 내 생각이 나겠지만 자기는 항상 내가 생각난다고 하더라고."

"......"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속에서 뭐가 꽝 하고 나를 때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더라고. 내가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기억 안 나. 너무 정신이 없어서 횡설수설하다가 끊었어."

"......"

"전화를 끊고 며칠 동안 엄청 생각했어. 이게 어떻게 된 건지, 내가 왜 이렇게 울고 싶은지 머리가 너무 복잡하더라고. 하나하나 되짚어봤어. 제일 처음까지."

"그 랜덤채팅 말하는거지?"

"응. 아직도 나는 연주 마음이 그때그때 어땠는지는 잘 모르겠어. 하지만 하나는 확실하더라고. 그게... 내가 필요로 할 때마다 연주는 항상 내 옆에 있어줬어. 나는 그걸 친한 친구이기 때문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며칠 전의 전화 내용을 돌아보니 아 그게 아니었구나 싶더라고."

"... 그래서?"

"나한테서 연주가 없어진다면? 하고 생각해봤어. 생각만 해도 슬프고 못 견디겠더라."

"야 그러면 사귀자고 해! 너네 이미 내가 볼땐 진작부터 사귀고 있었어."

"차라리 처음부터 사귀는 사이었으면 좋았겠어. 이젠 내가 연주를 좋아하는건지 아니면 친구라는 핑계로 연주를 내 삶에서 편하게 이용하려 하는 건지 모르겠어. 내 감정에 스스로 의심이 가."

"... 내가 볼 땐 너네 둘다 서로 엄청 좋아해. 그런 걱정 안 해도 될 듯 하다."

"지금까지 잘못한 거로 충분해. 연주한테 잘못을 하나 더 하고 싶지는 않아. 그래서 오늘 낮에 만나서 헤어지자고 말했어. 연주한테 이제는 그만 잘못하려고."

"너네 사귀지도 않았는데 뭘 헤어져?"

"...오늘이 처음 만난 때부터 1400일째 날이야."

약간 선문답같은 마지막 대답에 저는 굳이 처음 만난 날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냐고 되묻지 않았습니다. 뭔가 어렴풋이 이해가 갈 듯 말 듯 하기도 했고, 걔나 저나 각자 소주 두 병째씩을 비워가는 상태였어서 더 이상의 대화가 불가능하기도 했었어요. 결국 친구놈이 뻗어버려서 제가 술값 다 계산하고 (우쒸!) 얘를 일으켜 세웠는데 못 걷더라고요. 꽐라가 된 놈을 부축해서 나가는데 연주 절친에게서 저에게 문자가 왔습니다.

"너도?"

"응." 이라고 답장 보낸 후 친구놈을 집에다 데려다 줬습니다. 그렇게 제 친구는 사귀지도 않은 사람과 헤어졌어요. 1400일 사귀고서.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글 분류 (창작) 에서 보실 수 있듯 소설입니다. 절대로 실화가 아닙니다 =_=ㅋ

* Cascade님에 의해서 티타임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20-10-25 12:47)
* 관리사유 : 추천게시판으로 복사합니다.



17
  • 친구 얘기는 뭐다..?
  • 본인 이야기는 추천이지!
  • 어머. 선생님 생각보다 어리셨군요. ㄷㄷㄷ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1037 역사생존을 위한 패션, 군복 9 트린 20/12/10 4817 11
1036 정치/사회판결을 다루는 언론비판 ㅡ 이게 같은 사건인가? 4 사악군 20/12/06 4484 16
1035 게임체스에 대해 배워봅시다! [행마와 규칙] 29 Velma Kelly 20/12/02 6549 20
1034 의료/건강심리 부검, 자살사망자의 발자취를 따라간 5년간의 기록 4 다군 20/11/28 4911 5
1033 일상/생각모 바 단골이 쓰는 사장이 싫어하는 이야기 6 머랭 20/11/26 5728 27
1032 일상/생각이어령 선생님과의 대화 7 아침커피 20/11/19 5469 21
1031 체육/스포츠손기정평화마라톤 첫풀코스 도전기 12 오디너리안 20/11/17 4102 22
1030 일상/생각아빠의 쉼 총량제 22 Cascade 20/11/13 5484 41
1029 정치/사회현 시대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_ 관심에 대해서 9 Edge 20/11/09 4535 10
1028 일상/생각팬레터 썼다가 자택으로 초대받은 이야기 19 아침커피 20/11/06 6274 34
1027 일상/생각오랜만에 고향 친구를 만나고 4 아복아복 20/11/05 4283 12
1026 정치/사회툰베리가 당신의 변명을 들었습니다. 툰베리:흠, 그래서요? 34 코리몬테아스 20/11/03 6411 18
1025 일상/생각미국 부동산 거래 검색 이야기 8 풀잎 20/10/30 5457 12
1024 정치/사회공격적 현실주의자 Stephen M. Walt 교수가 바이든을 공개 지지하다. 6 열린음악회 20/10/29 4649 13
1023 창작어느 과학적인 하루 5 심해냉장고 20/10/27 5259 14
1022 체육/스포츠로마첸코-로페즈 : 초속과 변칙 5 Fate 20/10/18 5876 9
1021 경제내집 마련을 위하는 초년생들을 위한 짧은 팁들 24 Leeka 20/10/21 7660 19
1020 창작그러면 너 때문에 내가 못 죽은 거네 (1) 8 아침커피 20/10/19 4749 12
1019 꿀팁/강좌[사진]노출차이가 큰 풍경사진 찍기 - GND필터 사용하기 9 사슴도치 20/10/18 4617 5
1018 철학/종교타이완바 세계사중국편 (5.4운동) 6 celestine 20/10/15 4584 11
1017 체육/스포츠르브론 제임스의 우승은 그를 역대 2위 그 이상으로 위치시킬 수 있는가? 15 손금불산입 20/10/14 5545 21
1016 창작사귀지도 않고 헤어진 제 친구의 연애 아닌 연애 이야기 33 아침커피 20/10/12 7022 17
1015 일상/생각그렇게 똑같은 말 1 머랭 20/10/06 4551 17
1014 기타30개월 아들 이야기 25 쉬군 20/10/05 5852 47
1013 일상/생각나는 순혈 오리지날 코리안인가? 50 사이시옷 20/10/05 6537 24
목록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