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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18/11/26 21:25:39 |
Name | 파랑새의나침반 |
Subject | 말을 제대로 못 하고 있습니다. 도와주세요. |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전까지는 말을 하지 않아 말을 하지 않는다는 느낌이었지만, 요즘 들어서는 말을 해야 하는 상황임에도 입이 무엇인가 막는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현재 제대로 된 문장구사를 못하고 예 아니오와 간단한 말로 끝나게 되는 상황입니다. 이 글은 왜 말을 안 하게 되었는지의 이유, 머릿속에서 겪었던 그 많은 이유들 중 주요한 영향을 줬던 것을 모아 최대한 뇌 속을 끌어당기며 짜낸 글입니다. 안 되는 것을 최대한 끌어내어 쓰려다보니 너무 힘듭니다. 더 글을 쓰는 게 길게 늘어뜨린다는 느낌밖에 주지 않습니다. 더 글을 쓰는 것이 저에게도 님들에게도 전혀 좋은 일이 아닌 것 같아서 이정도로 미완성으로 둡니다. 읽으실 분들은 다 읽으시고, 읽지 않고 싶다면 오직 대괄호 표시가 되어 있는 부분만 읽고 답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같은 것만요.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2&aid=0000013753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2&oid=028&aid=0000115911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79&aid=0000074496 http://www.dailian.co.kr/news/view/280723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308&aid=0000009665 http://news1.kr/articles/?818084 생각을 많이 해 봤을 때, 이것이 가장 옳은 방법이라 생각했습니다. 제가 겪고 있는 언어와의 충돌에 분명한 원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먼저 언급하는 것이 옳다고 보았습니다. 아무래도 이것은 이 혼돈에 많은 영향을 준 거 같습니다. 저에게는 위인의 위치가 없습니다. 위인이나, 존경하는 인물의 위치가 아니라, 저는 그저 어떤 인간이라는 위치를 둡니다. 인간 하나만 두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인간으로 두게 된 경우 저의 됨됨이 속에 그를 집어넣는 방식을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많은 부분에 있어 체화하려고 합니다. 그런 인간의 대상이 되었던 사람입니다. ( 이곳에서는 제가 전에 가진 마음, 그에 대한 칭찬을 하려고 했습니다. 뭐 정치에 들어가지 않고 글쟁이로 활동하겠다는 등 전에 감명받은 이유를 여기다가 쓰고 싶었는데 지금 이거 그때 그 마음처럼 다시 쓰라고 하니 써지지가 않습니다. ) 이 사람이 그런 인간의 대상이 되었었기 때문에 그를 따라 만든 부분들을 다시 고치는 데 많은 시간을 들였습니다. 저는 무엇인가 "끝"을 보려고 하는 데에 너무 힘을 쏟는 사람입니다. 이것 때문에 정신병에 걸리는 게 아닌지 의문입니다. 하지만 그 "끝"을 정의하는 경우는 제가 봐도 논란이 많아 보입니다. 끝이라고 보여지는 경우에 끝내는 것이기 때문에 반대되는 점이 곧 끝이 되는 경우가 많아집니다. 끝까지 분석하고 싶었다는 감정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난 것 같습니다. 결국 이것도 끝이 난 것 같아요. 되어야 할 인물에서 정치인이었던 그저그런 사람으로 생각하고, 거기에서 더 가서 평균 이하의 인물이 되었습니다. [유시민의 “항소이유서”가 좋은 글이라고 평가받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유시민 스스로는 현재 좋은 글이 아니라고 하고는 있지만, 좋은 글이라고 불리는 것은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잖아요. 사람들이 좋은 글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좋은 글이라고 하는 것이죠. 그렇다면, 이것이 좋은 글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영화 1987을 보고 그 일에 대해서 더 깊이 알아보려고 했습니다. 기사들을 읽어보고요. 커버 못한 부분도 많고 다른 스토리도 많더라고요. 말과 현실을 제대로 구분하지 않았던 점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말과 현실이 다른 사람이 있는 것이 영향을 준 거 같습니다. 저는 예전처럼 선악이 이쁘게 나눠지지 않으면 구분을 못하고 혼란에 빠지는 증상이 있는 거 같습니다. 최근 들어 많은 인물들이 그 경계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시간 첫째로 두어야 했던 점은 시간에 있는 것 같습니다. 말을 하다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말이 시간이 지난 이후에도 똑같은 말로 될 수 있는지를 생각했습니다. 일상생활에서도 어떤 말을 하기 전에 그것에 대비할 수 있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날 때 같은 말에 뜻이 변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확정을 하는 말을 할 때가 좋은 사례가 될 것 같습니다. 무엇인가 확정을 할 때에, 과연 그러한 점을 확정할 수 있을지 생각합니다. 시간이 지나 어떤 가능한 상황에서는 거짓이 되는 문장일지도 모르죠. 그 뒤에도 문장에 확정하는 단어들을 나누었을 때도 그것이 맞는 것인지 고민하고. 문장이 있을 때 그것을 원자 단위로 나눠서 판단하며, 그 말이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에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말을 하기 전에 생각을 하는 것이, 말 자체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으로 발전된 것 같습니다. 이 증상이 있기 전에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말이 무엇이고, 언어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을 하는 일이 잦았습니다. 그렇게 언어가 무엇인지 생각하는 것이 말하는 것에 영향을 끼쳤다고 봅니다. 일반적인 대화를 제외한 모든 말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게 된 것 같습니다. 일상적인 대화가 아니라면, 말을 하기 위해서 말을 건설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생각을 써서, 정보를 알려주기 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위해선 말을 어떻게 건설하는지 생각을 해야 합니다. 저는 말을 잘 하지 못했고, 말을 할 때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말을 하기 위해 말을 건설하는 방법을 다른 사람들에게서 찾으려 했고 말이 주는 명확함을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제가 가장 관심을 가졌던 데는 토론이었습니다. 그 전에도 언어에 대한 여러가지 방법들 중에서 토론은 많이 다른 형태를 하고 있었던 것을 보았고, 그 다른 형태에 대한 설명과 과정이 있던 것이 좋았던 생각이 납니다. 그렇게 글을 찾다가 두고 찾을 수 있게 된 것이 토론입니다. 토론에서 주목한 것은 그것이 준 정보들이 된 것입니다. 어쩌면 가장 토론이 명확한 말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특정 학문에 대한 적극성만이 의미가 있게 되었다고 보여지게 되었습니다. 말을 하는 것들 사이에서 그들의 우수성을 찾아보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우수성들 중에 가장 중요하다 판단된 것은 명확함이었습니다. 정보를 가장 잘 보존하는 것이 명확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토론의 명확함이 분명 괜찮아 보였습니다. 어떤 장대한 문자의 나열을 끝낼 수 있는 링크의 제시 같은 걸 좋다고 여겼습니다. 모종의 이유 때문에, 그 대화에 나와 있는 정보 부분을 제외한다면, 나머지는 수사학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뒤에 답을 찾으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토론에서 생긴 답이 정해진다고 생각하면 그게 정확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용이 나오는 것이면 그곳에 정보가 있게 됩니다. 사람들의 내용에 있어 그 명확한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토론을 구분했습니다. 토론이고자 하지 않는 토론과 토론이고자 하는 토론으로 나뉜다고 보았습니다. 토론이고자 하지 않는 토론인 경우는 논점회피 / 자명한 문제의 공격 / 언어의 모호성 등을 이용하여 주제가 되는 토론이 되지 못한 경우를 생각했습니다. 논점 자체가 옮겨진 경우거나, 단어의 합의된 뜻이 분리되어 있어서 그곳에 정보를 쓰는 경우, 단어의 재정의에 대한 문제로 토론이 이뤄지지 않은 형태가 있었고, 이를 주로 사용하는 것을 제가 얻어야 할 명확함에서 제거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토론이고자 하는 토론에서 제가 전까지 생각했던 것이 드러났습니다. 거기서 답이 정해진다고 보았습니다. 두 사람이 토론을 하는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두 사람이 의견을 주고받고, 여기서 명확함을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의 사람의 경우를 “미리 의견을 정해두고 말을 만드는 행위”, 확고한 신념으로 원하는 말만을 만드는 것과 같다고 취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의견이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논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명확성을 얻고 정보를 얻음으로서 토론에서 얻을 점을 얻고, 이 방법을 통해 제가 말하는 방법을 얻으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면 좋은 정보를 얻는 것과 같이 말에서 좋은 명확성을 얻은 채로 말을 할 수 있게 되고, 그 명확성을 가지고 명확함이 필요하다고 보는 다른 말하는 경우에 쓰일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 경우를 이용해서 시간 뒤에도 확정을 하지 못하는 사례와 같이 문장에서 있는 각각의 원자들에 대해 최대한의 명확성을 줄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렇게 하다가 무엇인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이 답을 찾는 방식에는 숨겨진 정리가 하나 필요했습니다. 어떤 대전제가 필요했어요. 토론에서 충분한 정보와 충분한 명확성이 얻어진 경우, 우수한 한 의견만이 결과로서 얻어져야 한다 는 것입니다. 수학에서 나오는 “증명” 처럼 말입니다. 이 대전제가 사실이어야 답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문제는, 이 대전제가 사실이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바로 다음 문제로 넘어가게 됩니다. [만약 충분한 정보와 충분한 명확성이 있음에도 하나가 아닌 다수의 의견을 얻어낼 수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토론이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언어가 토론으로 “낭비되는” 이유가 무엇이냐, 가 제가 말하려고 하는 느낌에 가깝습니다. 토론을 왜 하시나요? 토론을 할 때 무슨 이유로 하십니까? 제가 결론지은 내용은 이것입니다. 그 전제가 사실이 아니라면 토론이라는 행위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입니다. 이제 토론에 대한 대전제에 의문을 품게 되자 그 뒤엔 세계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되었습니다.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겠지만, 그 전까진 토론과 세계에 대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자세히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 보였습니다. 명확함만을 주요하게 여기다 보니 명확함만이 보이게 된 것 같습니다. 명확함에서 벗어난 글, 다른 글이 있었고, 그 다른 글에 담겨 있었던 의미가 있음에도 명확함이란 도구로 걸러내었고 그를 보지 못하게 된 것 같습니다. 다른 의견. 위에서처럼 언제든지 다른 의견이 있는 것이고 이것이 수많은 것들 중 하나뿐인 것입니다. 이것이 어떤 분야로 정해져서 단어가 나와 있는 것 같습니다. materialistic reductionist, 한국말로 한다면 과학 환원주의자가 그것 같습니다. 이것의 문제점은 이것이 아주 명확하다는 점입니다. 다른 것과 비교하여 더 명확한 위치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이를 선택한다는 점입니다. 명확함을 최상위로 올린다면 이 위치로 얻어야 하는 것이죠. 이것을 벗어나려면 토론적이지 않은 글을 보아야 합니다. 비문뿐만 아니라, 보르헤스같은 괴상한 글이 필요했던 거 같습니다. 명확한 것에서 벗어나 짜여져 있지 않은 난잡함이 필요합니다. 세계의 많은 내용은 명확한 글이 아닌 다른 위치에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위치에 있기 위한 글은 무엇이 있을까요? 이런 긴 생각을 하게 된 이유가 있다면 그 전에 기호논리학에 관심을 가졌던 것이 이유가 된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길로, 좀 이상한 길로 왔습니다. 해석학을 공부하다가 그 정리들 증명하는 것이 신기해서 그 증명은 어떻게 확실해지는 것인지 들어가다가 수학적으로 명제를 다루는 곳이 있더라고요. 이렇게 기호논리학이라는 분야로 오게 되었습니다. 그 이상한 길로 가면서 그냥 말로만 들어보았던 러셀과 같은 사람을 다르게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이상한 길에서 언어들을 사용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논리기호가 있는 것처럼 언어를 쓰고, 언어에 대해 최대한 정확하게 쓰려는 것이 맘에 들었습니다. 그러한 명확함에 빠졌던 거 같습니다. 이것을 제외하고, 저에게 영향을 준 사례가 있다면 오토 바이닝거의 성과 성격이라는 책이었습니다. 그 책이 얼마나 논리적으로 구조를 갖추고 써져 있었는지가 놀라웠습니다. 이것도 당연한 반증 사례로 끝낼 수 있지만, 그게 과연 맞는 일일까요? 그렇다고 해서 이 이론이 옳지 않다고 할 수 있나요? 억압이 되었다고 하고 오이디푸스라고 하는 그들의 이론들이 단지 사람 몇명을 불렀다고 해서 반증되지 않는다고 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정말 언어가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가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 책은 마치 가장 언어적인 책 같았습니다. “ 자크 데리다(1930~2004)와의 논쟁도 세기적 논쟁으로 꼽힌다. ‘해체론’을 앞세워 언어를 통한 의미구성 자체에 근본적인 회의를 품었던 데리다는 언어를 통해 더 확장되고 통일된 이해의 가능성이 열린다고 본 가다머의 견해를 반박했다. “ “언어를 통한 의미구성 자체에 근본적인 회의”. 이것인 거 같습니다. 자크 라캉은 인간은 항상 자신의 의견을 그 아래에 두며 일종의 소속감을 느낄 주체를 찾는다고 했는데, 이 생각을 하면서 제 방향을 전혀 찾을 수 없던 저에게 데리다가 정확히 딱 이런 느낌이었습니다. 찾은 것 같습니다. “해석에 끝을 낼 수 있는 해석은 없다.” “기표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은 다른 기표뿐이다.” 가장 괜찮은 해답을 얻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원래부터 이상한 길로 갔던 저로서 그때 말한 이상한 길을 또 가야 한다는 느낌이 왔습니다. 데리다는 너무 어려운 것 같습니다. 가다머는 아마도 ‘통약불가능성(incommensurability)’의 문제를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하다. 그는 데리다가 언어의 통약불가능성을 강조하는 입장이라고 이해한 것 같다. 데리다는 우리가 타자의 견해를 결코 제대로 이해할 수 없으며, 이해는 끊임없이 이해의 실패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 가다머에 대한 두 가지 평가가 가능하다. (1)가다머가 이해한 대로, 확실히 데리다는 통약불가능성을 지지한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이러한 데리다의 입장은 여러 심각한 철학적 문제를 낳을 수밖에 없으므로 수용되기 힘들다. 통약불가능성 주장에 따르면, 타자의 언어는 우리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며 우리가 속한 언어 바깥에 존재한다. 즉, 타자의 언어가 마치 일종의 형이상학적 실재처럼 외부세계에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통약불가능성 주장을 제시할 경우 데리다는 자신이 이미 거부하였던 ‘주체-객체 도식’, ‘형이상학’, ‘로고스중심주의’를 한꺼번에 다시 수용해야 하는 모순에 빠진다. 이 점에서 ‘통약불가능성’에 대한 가다머의 염려와 비판은 정당하다. (2)데리다는 ‘통약불가능성’을 강조하지만 대화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고 생각된다. 다시 말해, 대화를 통해 ‘합의’에 이를 수 있다는 생각을 거부할 뿐, ‘대화’할 수 있다는 생각을 거부하지는 않는 것이다. 오히려 데리다에 따르면, 대화는 끊임없이 실패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대화를 특정 시점에서 완성된 것처럼 고정시키고자 하는 시도는 비판받아야 한다. 우리는 단지 끊임없이 대화해나가야 하며, 이 과정을 통해 역설적이게도 타자에 대한 이해의 실패 속에서 타자와 만나야 한다. 따라서 데리다의 주장은 ‘지평 융합’에 근거한 끊임없는 이해의 운동을 강조하는 가다머의 의견과 다르지 않다. “사람들 둘이 어떤 문제로 싸우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철학을 더 안다면, 둘에겐 더 이상 논쟁의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충분합니다. 둘의 손에 연필을 쥐어준 뒤, 책상에 앉아서 둘이 모여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같이 계산해보자’ 라고요. 과학의 진보에 있었던 그 과학적 문제들처럼, 세상에 있는 정치적 논쟁들과, 사회생활의 문제들, 미학에 대한 문제들까지 그렇게 책상에 앉아서 계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라이프니츠가 생각한 내용입니다. 제가 벗어나지 못한 것이 이 바로 이거 같습니다. [ 저는 한쪽에 아직도 모나드론을 가지고 아직까지 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모르겠습니다. 이 모든 것이 모나드론 같습니다. 저는 그런 것 같습니다. 이 함정을 탈출하기 위한 방법을 설명해줬으면 합니다.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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