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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18/11/26 21:25:39 |
Name | 파랑새의나침반 |
Subject | 말을 제대로 못 하고 있습니다. 도와주세요. |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전까지는 말을 하지 않아 말을 하지 않는다는 느낌이었지만, 요즘 들어서는 말을 해야 하는 상황임에도 입이 무엇인가 막는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현재 제대로 된 문장구사를 못하고 예 아니오와 간단한 말로 끝나게 되는 상황입니다. 이 글은 왜 말을 안 하게 되었는지의 이유, 머릿속에서 겪었던 그 많은 이유들 중 주요한 영향을 줬던 것을 모아 최대한 뇌 속을 끌어당기며 짜낸 글입니다. 안 되는 것을 최대한 끌어내어 쓰려다보니 너무 힘듭니다. 더 글을 쓰는 게 길게 늘어뜨린다는 느낌밖에 주지 않습니다. 더 글을 쓰는 것이 저에게도 님들에게도 전혀 좋은 일이 아닌 것 같아서 이정도로 미완성으로 둡니다. 읽으실 분들은 다 읽으시고, 읽지 않고 싶다면 오직 대괄호 표시가 되어 있는 부분만 읽고 답해주시면 좋겠습니다.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같은 것만요.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2&aid=0000013753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hm&sid1=102&oid=028&aid=0000115911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79&aid=0000074496 http://www.dailian.co.kr/news/view/280723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308&aid=0000009665 http://news1.kr/articles/?818084 생각을 많이 해 봤을 때, 이것이 가장 옳은 방법이라 생각했습니다. 제가 겪고 있는 언어와의 충돌에 분명한 원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먼저 언급하는 것이 옳다고 보았습니다. 아무래도 이것은 이 혼돈에 많은 영향을 준 거 같습니다. 저에게는 위인의 위치가 없습니다. 위인이나, 존경하는 인물의 위치가 아니라, 저는 그저 어떤 인간이라는 위치를 둡니다. 인간 하나만 두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인간으로 두게 된 경우 저의 됨됨이 속에 그를 집어넣는 방식을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많은 부분에 있어 체화하려고 합니다. 그런 인간의 대상이 되었던 사람입니다. ( 이곳에서는 제가 전에 가진 마음, 그에 대한 칭찬을 하려고 했습니다. 뭐 정치에 들어가지 않고 글쟁이로 활동하겠다는 등 전에 감명받은 이유를 여기다가 쓰고 싶었는데 지금 이거 그때 그 마음처럼 다시 쓰라고 하니 써지지가 않습니다. ) 이 사람이 그런 인간의 대상이 되었었기 때문에 그를 따라 만든 부분들을 다시 고치는 데 많은 시간을 들였습니다. 저는 무엇인가 "끝"을 보려고 하는 데에 너무 힘을 쏟는 사람입니다. 이것 때문에 정신병에 걸리는 게 아닌지 의문입니다. 하지만 그 "끝"을 정의하는 경우는 제가 봐도 논란이 많아 보입니다. 끝이라고 보여지는 경우에 끝내는 것이기 때문에 반대되는 점이 곧 끝이 되는 경우가 많아집니다. 끝까지 분석하고 싶었다는 감정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난 것 같습니다. 결국 이것도 끝이 난 것 같아요. 되어야 할 인물에서 정치인이었던 그저그런 사람으로 생각하고, 거기에서 더 가서 평균 이하의 인물이 되었습니다. [유시민의 “항소이유서”가 좋은 글이라고 평가받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유시민 스스로는 현재 좋은 글이 아니라고 하고는 있지만, 좋은 글이라고 불리는 것은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잖아요. 사람들이 좋은 글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좋은 글이라고 하는 것이죠. 그렇다면, 이것이 좋은 글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영화 1987을 보고 그 일에 대해서 더 깊이 알아보려고 했습니다. 기사들을 읽어보고요. 커버 못한 부분도 많고 다른 스토리도 많더라고요. 말과 현실을 제대로 구분하지 않았던 점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말과 현실이 다른 사람이 있는 것이 영향을 준 거 같습니다. 저는 예전처럼 선악이 이쁘게 나눠지지 않으면 구분을 못하고 혼란에 빠지는 증상이 있는 거 같습니다. 최근 들어 많은 인물들이 그 경계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시간 첫째로 두어야 했던 점은 시간에 있는 것 같습니다. 말을 하다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말이 시간이 지난 이후에도 똑같은 말로 될 수 있는지를 생각했습니다. 일상생활에서도 어떤 말을 하기 전에 그것에 대비할 수 있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날 때 같은 말에 뜻이 변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확정을 하는 말을 할 때가 좋은 사례가 될 것 같습니다. 무엇인가 확정을 할 때에, 과연 그러한 점을 확정할 수 있을지 생각합니다. 시간이 지나 어떤 가능한 상황에서는 거짓이 되는 문장일지도 모르죠. 그 뒤에도 문장에 확정하는 단어들을 나누었을 때도 그것이 맞는 것인지 고민하고. 문장이 있을 때 그것을 원자 단위로 나눠서 판단하며, 그 말이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에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말을 하기 전에 생각을 하는 것이, 말 자체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으로 발전된 것 같습니다. 이 증상이 있기 전에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말이 무엇이고, 언어가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을 하는 일이 잦았습니다. 그렇게 언어가 무엇인지 생각하는 것이 말하는 것에 영향을 끼쳤다고 봅니다. 일반적인 대화를 제외한 모든 말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게 된 것 같습니다. 일상적인 대화가 아니라면, 말을 하기 위해서 말을 건설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생각을 써서, 정보를 알려주기 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위해선 말을 어떻게 건설하는지 생각을 해야 합니다. 저는 말을 잘 하지 못했고, 말을 할 때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말을 하기 위해 말을 건설하는 방법을 다른 사람들에게서 찾으려 했고 말이 주는 명확함을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제가 가장 관심을 가졌던 데는 토론이었습니다. 그 전에도 언어에 대한 여러가지 방법들 중에서 토론은 많이 다른 형태를 하고 있었던 것을 보았고, 그 다른 형태에 대한 설명과 과정이 있던 것이 좋았던 생각이 납니다. 그렇게 글을 찾다가 두고 찾을 수 있게 된 것이 토론입니다. 토론에서 주목한 것은 그것이 준 정보들이 된 것입니다. 어쩌면 가장 토론이 명확한 말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특정 학문에 대한 적극성만이 의미가 있게 되었다고 보여지게 되었습니다. 말을 하는 것들 사이에서 그들의 우수성을 찾아보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우수성들 중에 가장 중요하다 판단된 것은 명확함이었습니다. 정보를 가장 잘 보존하는 것이 명확함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토론의 명확함이 분명 괜찮아 보였습니다. 어떤 장대한 문자의 나열을 끝낼 수 있는 링크의 제시 같은 걸 좋다고 여겼습니다. 모종의 이유 때문에, 그 대화에 나와 있는 정보 부분을 제외한다면, 나머지는 수사학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뒤에 답을 찾으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토론에서 생긴 답이 정해진다고 생각하면 그게 정확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용이 나오는 것이면 그곳에 정보가 있게 됩니다. 사람들의 내용에 있어 그 명확한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토론을 구분했습니다. 토론이고자 하지 않는 토론과 토론이고자 하는 토론으로 나뉜다고 보았습니다. 토론이고자 하지 않는 토론인 경우는 논점회피 / 자명한 문제의 공격 / 언어의 모호성 등을 이용하여 주제가 되는 토론이 되지 못한 경우를 생각했습니다. 논점 자체가 옮겨진 경우거나, 단어의 합의된 뜻이 분리되어 있어서 그곳에 정보를 쓰는 경우, 단어의 재정의에 대한 문제로 토론이 이뤄지지 않은 형태가 있었고, 이를 주로 사용하는 것을 제가 얻어야 할 명확함에서 제거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토론이고자 하는 토론에서 제가 전까지 생각했던 것이 드러났습니다. 거기서 답이 정해진다고 보았습니다. 두 사람이 토론을 하는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두 사람이 의견을 주고받고, 여기서 명확함을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의 사람의 경우를 “미리 의견을 정해두고 말을 만드는 행위”, 확고한 신념으로 원하는 말만을 만드는 것과 같다고 취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의견이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논박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명확성을 얻고 정보를 얻음으로서 토론에서 얻을 점을 얻고, 이 방법을 통해 제가 말하는 방법을 얻으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면 좋은 정보를 얻는 것과 같이 말에서 좋은 명확성을 얻은 채로 말을 할 수 있게 되고, 그 명확성을 가지고 명확함이 필요하다고 보는 다른 말하는 경우에 쓰일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 경우를 이용해서 시간 뒤에도 확정을 하지 못하는 사례와 같이 문장에서 있는 각각의 원자들에 대해 최대한의 명확성을 줄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렇게 하다가 무엇인가 잘못되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이 답을 찾는 방식에는 숨겨진 정리가 하나 필요했습니다. 어떤 대전제가 필요했어요. 토론에서 충분한 정보와 충분한 명확성이 얻어진 경우, 우수한 한 의견만이 결과로서 얻어져야 한다 는 것입니다. 수학에서 나오는 “증명” 처럼 말입니다. 이 대전제가 사실이어야 답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문제는, 이 대전제가 사실이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바로 다음 문제로 넘어가게 됩니다. [만약 충분한 정보와 충분한 명확성이 있음에도 하나가 아닌 다수의 의견을 얻어낼 수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토론이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언어가 토론으로 “낭비되는” 이유가 무엇이냐, 가 제가 말하려고 하는 느낌에 가깝습니다. 토론을 왜 하시나요? 토론을 할 때 무슨 이유로 하십니까? 제가 결론지은 내용은 이것입니다. 그 전제가 사실이 아니라면 토론이라는 행위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입니다. 이제 토론에 대한 대전제에 의문을 품게 되자 그 뒤엔 세계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되었습니다.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겠지만, 그 전까진 토론과 세계에 대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자세히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 보였습니다. 명확함만을 주요하게 여기다 보니 명확함만이 보이게 된 것 같습니다. 명확함에서 벗어난 글, 다른 글이 있었고, 그 다른 글에 담겨 있었던 의미가 있음에도 명확함이란 도구로 걸러내었고 그를 보지 못하게 된 것 같습니다. 다른 의견. 위에서처럼 언제든지 다른 의견이 있는 것이고 이것이 수많은 것들 중 하나뿐인 것입니다. 이것이 어떤 분야로 정해져서 단어가 나와 있는 것 같습니다. materialistic reductionist, 한국말로 한다면 과학 환원주의자가 그것 같습니다. 이것의 문제점은 이것이 아주 명확하다는 점입니다. 다른 것과 비교하여 더 명확한 위치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이를 선택한다는 점입니다. 명확함을 최상위로 올린다면 이 위치로 얻어야 하는 것이죠. 이것을 벗어나려면 토론적이지 않은 글을 보아야 합니다. 비문뿐만 아니라, 보르헤스같은 괴상한 글이 필요했던 거 같습니다. 명확한 것에서 벗어나 짜여져 있지 않은 난잡함이 필요합니다. 세계의 많은 내용은 명확한 글이 아닌 다른 위치에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위치에 있기 위한 글은 무엇이 있을까요? 이런 긴 생각을 하게 된 이유가 있다면 그 전에 기호논리학에 관심을 가졌던 것이 이유가 된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길로, 좀 이상한 길로 왔습니다. 해석학을 공부하다가 그 정리들 증명하는 것이 신기해서 그 증명은 어떻게 확실해지는 것인지 들어가다가 수학적으로 명제를 다루는 곳이 있더라고요. 이렇게 기호논리학이라는 분야로 오게 되었습니다. 그 이상한 길로 가면서 그냥 말로만 들어보았던 러셀과 같은 사람을 다르게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이상한 길에서 언어들을 사용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논리기호가 있는 것처럼 언어를 쓰고, 언어에 대해 최대한 정확하게 쓰려는 것이 맘에 들었습니다. 그러한 명확함에 빠졌던 거 같습니다. 이것을 제외하고, 저에게 영향을 준 사례가 있다면 오토 바이닝거의 성과 성격이라는 책이었습니다. 그 책이 얼마나 논리적으로 구조를 갖추고 써져 있었는지가 놀라웠습니다. 이것도 당연한 반증 사례로 끝낼 수 있지만, 그게 과연 맞는 일일까요? 그렇다고 해서 이 이론이 옳지 않다고 할 수 있나요? 억압이 되었다고 하고 오이디푸스라고 하는 그들의 이론들이 단지 사람 몇명을 불렀다고 해서 반증되지 않는다고 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정말 언어가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가 의문이 들었습니다. 그 책은 마치 가장 언어적인 책 같았습니다. “ 자크 데리다(1930~2004)와의 논쟁도 세기적 논쟁으로 꼽힌다. ‘해체론’을 앞세워 언어를 통한 의미구성 자체에 근본적인 회의를 품었던 데리다는 언어를 통해 더 확장되고 통일된 이해의 가능성이 열린다고 본 가다머의 견해를 반박했다. “ “언어를 통한 의미구성 자체에 근본적인 회의”. 이것인 거 같습니다. 자크 라캉은 인간은 항상 자신의 의견을 그 아래에 두며 일종의 소속감을 느낄 주체를 찾는다고 했는데, 이 생각을 하면서 제 방향을 전혀 찾을 수 없던 저에게 데리다가 정확히 딱 이런 느낌이었습니다. 찾은 것 같습니다. “해석에 끝을 낼 수 있는 해석은 없다.” “기표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은 다른 기표뿐이다.” 가장 괜찮은 해답을 얻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원래부터 이상한 길로 갔던 저로서 그때 말한 이상한 길을 또 가야 한다는 느낌이 왔습니다. 데리다는 너무 어려운 것 같습니다. 가다머는 아마도 ‘통약불가능성(incommensurability)’의 문제를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하다. 그는 데리다가 언어의 통약불가능성을 강조하는 입장이라고 이해한 것 같다. 데리다는 우리가 타자의 견해를 결코 제대로 이해할 수 없으며, 이해는 끊임없이 이해의 실패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 가다머에 대한 두 가지 평가가 가능하다. (1)가다머가 이해한 대로, 확실히 데리다는 통약불가능성을 지지한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이러한 데리다의 입장은 여러 심각한 철학적 문제를 낳을 수밖에 없으므로 수용되기 힘들다. 통약불가능성 주장에 따르면, 타자의 언어는 우리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며 우리가 속한 언어 바깥에 존재한다. 즉, 타자의 언어가 마치 일종의 형이상학적 실재처럼 외부세계에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통약불가능성 주장을 제시할 경우 데리다는 자신이 이미 거부하였던 ‘주체-객체 도식’, ‘형이상학’, ‘로고스중심주의’를 한꺼번에 다시 수용해야 하는 모순에 빠진다. 이 점에서 ‘통약불가능성’에 대한 가다머의 염려와 비판은 정당하다. (2)데리다는 ‘통약불가능성’을 강조하지만 대화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고 생각된다. 다시 말해, 대화를 통해 ‘합의’에 이를 수 있다는 생각을 거부할 뿐, ‘대화’할 수 있다는 생각을 거부하지는 않는 것이다. 오히려 데리다에 따르면, 대화는 끊임없이 실패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대화를 특정 시점에서 완성된 것처럼 고정시키고자 하는 시도는 비판받아야 한다. 우리는 단지 끊임없이 대화해나가야 하며, 이 과정을 통해 역설적이게도 타자에 대한 이해의 실패 속에서 타자와 만나야 한다. 따라서 데리다의 주장은 ‘지평 융합’에 근거한 끊임없는 이해의 운동을 강조하는 가다머의 의견과 다르지 않다. “사람들 둘이 어떤 문제로 싸우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철학을 더 안다면, 둘에겐 더 이상 논쟁의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충분합니다. 둘의 손에 연필을 쥐어준 뒤, 책상에 앉아서 둘이 모여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같이 계산해보자’ 라고요. 과학의 진보에 있었던 그 과학적 문제들처럼, 세상에 있는 정치적 논쟁들과, 사회생활의 문제들, 미학에 대한 문제들까지 그렇게 책상에 앉아서 계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라이프니츠가 생각한 내용입니다. 제가 벗어나지 못한 것이 이 바로 이거 같습니다. [ 저는 한쪽에 아직도 모나드론을 가지고 아직까지 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모르겠습니다. 이 모든 것이 모나드론 같습니다. 저는 그런 것 같습니다. 이 함정을 탈출하기 위한 방법을 설명해줬으면 합니다.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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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이상의 초기 증상 중 하나가 과도한 현학적 사유, 우원증(迂遠症; 말이나 생각이 핵심을 쉽게 짚지 못하고 세부적인 사항에만 겉도는 증상), 혹은 예술성 폭발 같은 형태로 드러날 수 있는 것으로 압니다. 제가 보기에 이 분은 정신병원에 얼른 가셔야 할 분이에요.
지난 번 글과는 또 느낌이 다르네요. 몇 가지 주제들은 저도 천착했었던 주제인지라 재미있게 읽었어요. 다만 걱정인 것은, 글에서 전반적으로 보이는 끝간데 없는 몰두의 정신이 글쓴이님이 타인과의 대화에 돌입하는 걸 방해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접지에 관해 이야기했던 건 그 때문이었는데(시무룩)...
도와달라고 제목에 적으셨으니 속는 셈 치고 한 번 더 댓글 달아봅니다. 수사학에 낚인 게 아니기를 바라봅니다 ㅎㅎ 이번이 마지막이예요. 데리다와 가다머를 논하기 전에, 왜 사람들이 어느 순간부터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 더 보기
도와달라고 제목에 적으셨으니 속는 셈 치고 한 번 더 댓글 달아봅니다. 수사학에 낚인 게 아니기를 바라봅니다 ㅎㅎ 이번이 마지막이예요. 데리다와 가다머를 논하기 전에, 왜 사람들이 어느 순간부터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 더 보기
지난 번 글과는 또 느낌이 다르네요. 몇 가지 주제들은 저도 천착했었던 주제인지라 재미있게 읽었어요. 다만 걱정인 것은, 글에서 전반적으로 보이는 끝간데 없는 몰두의 정신이 글쓴이님이 타인과의 대화에 돌입하는 걸 방해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접지에 관해 이야기했던 건 그 때문이었는데(시무룩)...
도와달라고 제목에 적으셨으니 속는 셈 치고 한 번 더 댓글 달아봅니다. 수사학에 낚인 게 아니기를 바라봅니다 ㅎㅎ 이번이 마지막이예요. 데리다와 가다머를 논하기 전에, 왜 사람들이 어느 순간부터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지 생각해 보셔요.
저도 언어의 필요성을 고민하다가 말을 잃어버릴 뻔한 적이 있어요. 제 경우에는 원인이나, 추구했던 바가 달랐지만, "입이 무엇인가 막는" 느낌은 알 것 같읍니다. 근데 그거 언어와 사고로 진리를 추구해서 트일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에요ㅠㅠㅠ
언어를 기반으로 하는 사고 혹은 기호작용은 끝간 데 없이 연쇄하고, 그 결과 세계로부터 독립적인 영역으로 나아가게 되요. 기표가 기표만을 낳는다는 주장도 비슷하게 연결해서(동일하지는 않겠지만) 볼 수 있어요. 세계로부터 기인하지만 '세계에 없는' 용, 그리폰, 유니콘 등의 표상 등을 생각해볼 수 있지요. 아니면 요 사이트에서 과거에 일어났던 문학과 세계의 관계에 대한 논쟁들을 참고하셔도 좋고요.
그렇다고 반대로 언어가 아닌 감각이 진리를 보장해주냐면 그것도 아니에요. 감각은 특정한 부분에서는 닫히고, 특정한 부분에서는 열리는 선별을 통해 생산적 혼동을 만들어 내니까요. 그 혼동을 통해 생명 존재가 삶을 나름 성공적으로 재생산해 왔을 뿐이고요.
진리라는 지위를 차지할 수 있는 지식은 획득 불가능하다고(혹은 '진리'는 생산되는 것이다라고), 눈딱 감고 받아들이시고, 그 믿음의 망 위에서 마음을 비우고 접근하시는 게 어떨까요? 잠정적인 앎과 합의의 상태로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어요. 대화의 가능성은 서로의 생산적 한계를 나누면서 잠정적 합의를 조율해 나가는 데 있잖아요. 변증법적 접근은 ㄴㄴ 하고요. 저도 곁가지만 보았지만 퍼지논리학을 재미있게 읽으실 수 있을 것 같네요. 학문/이론적 논의가 지니는 추상화와 보편화를 '진리'에 이르는 도구로 보고 계시다면, 알뛰세르가 지적했던 이론의 차원성 논의를 파보시는 걸 추천해요.
이원론적 주화입마의 결과인지, 어티즘 연속체의 한 지점인지, 약물 치료와 상담이 시급한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생각부터 그만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도와달라고 제목에 적으셨으니 속는 셈 치고 한 번 더 댓글 달아봅니다. 수사학에 낚인 게 아니기를 바라봅니다 ㅎㅎ 이번이 마지막이예요. 데리다와 가다머를 논하기 전에, 왜 사람들이 어느 순간부터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지 생각해 보셔요.
저도 언어의 필요성을 고민하다가 말을 잃어버릴 뻔한 적이 있어요. 제 경우에는 원인이나, 추구했던 바가 달랐지만, "입이 무엇인가 막는" 느낌은 알 것 같읍니다. 근데 그거 언어와 사고로 진리를 추구해서 트일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에요ㅠㅠㅠ
언어를 기반으로 하는 사고 혹은 기호작용은 끝간 데 없이 연쇄하고, 그 결과 세계로부터 독립적인 영역으로 나아가게 되요. 기표가 기표만을 낳는다는 주장도 비슷하게 연결해서(동일하지는 않겠지만) 볼 수 있어요. 세계로부터 기인하지만 '세계에 없는' 용, 그리폰, 유니콘 등의 표상 등을 생각해볼 수 있지요. 아니면 요 사이트에서 과거에 일어났던 문학과 세계의 관계에 대한 논쟁들을 참고하셔도 좋고요.
그렇다고 반대로 언어가 아닌 감각이 진리를 보장해주냐면 그것도 아니에요. 감각은 특정한 부분에서는 닫히고, 특정한 부분에서는 열리는 선별을 통해 생산적 혼동을 만들어 내니까요. 그 혼동을 통해 생명 존재가 삶을 나름 성공적으로 재생산해 왔을 뿐이고요.
진리라는 지위를 차지할 수 있는 지식은 획득 불가능하다고(혹은 '진리'는 생산되는 것이다라고), 눈딱 감고 받아들이시고, 그 믿음의 망 위에서 마음을 비우고 접근하시는 게 어떨까요? 잠정적인 앎과 합의의 상태로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어요. 대화의 가능성은 서로의 생산적 한계를 나누면서 잠정적 합의를 조율해 나가는 데 있잖아요. 변증법적 접근은 ㄴㄴ 하고요. 저도 곁가지만 보았지만 퍼지논리학을 재미있게 읽으실 수 있을 것 같네요. 학문/이론적 논의가 지니는 추상화와 보편화를 '진리'에 이르는 도구로 보고 계시다면, 알뛰세르가 지적했던 이론의 차원성 논의를 파보시는 걸 추천해요.
이원론적 주화입마의 결과인지, 어티즘 연속체의 한 지점인지, 약물 치료와 상담이 시급한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생각부터 그만하셨으면 좋겠습니다.
혼자 생각을 못하시는 분에게 철학자고 철학책이고가 다 뭔 소용입니까. 그거 다 쓰레기들이니까 책부터 다 갖다 버리고 시작하세요. 자꾸 철학철학 하시니까 니체 한 구절 인용합니다. '나는 책을 뒤적이며 빈둥대는 자들을 미워한다.' 책에는 어떤 진리도 없습니다. 세상에 있지.
철학자책은전혀도움안될듯여
지금필요한거는진리값의끝을찾아말하는거가아니고
진리값의시작에는머지그거다사고의조작이있다는걸아셔야함선험적인먼가가있다는거누군가시작하지않아도있는출발이있어서철학이나구조가구성되었다는거
반대루말하면어떤이론이든선험적전제가진리인가를파고들면당근빳따잃을수바께없스뮤 선험적전제는수학과달라서그럴수없슴지쯔와수학도수라는선험적전제가있는거니깐여 선험적전제를고려할때눈설명력과정합성과당위중에 어떤것들이잘결합대서작용하는가를 고려해서 받아들이는게편햐요 이게안대면독자적논리체계루다가이론을 만드러야하는거구 근데 그런 독창적시도는 불가능하긴함 이미 많은... 더 보기
지금필요한거는진리값의끝을찾아말하는거가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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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책은전혀도움안될듯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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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값의시작에는머지그거다사고의조작이있다는걸아셔야함선험적인먼가가있다는거누군가시작하지않아도있는출발이있어서철학이나구조가구성되었다는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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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진리의완결성을철학자한테찾지마시구이론들의ㅇ선험적진리성을긍정하세여안그럼상대주의에서비상대성을찾으며헛발질만하게댐다
지금필요한거는진리값의끝을찾아말하는거가아니고
진리값의시작에는머지그거다사고의조작이있다는걸아셔야함선험적인먼가가있다는거누군가시작하지않아도있는출발이있어서철학이나구조가구성되었다는거
반대루말하면어떤이론이든선험적전제가진리인가를파고들면당근빳따잃을수바께없스뮤 선험적전제는수학과달라서그럴수없슴지쯔와수학도수라는선험적전제가있는거니깐여 선험적전제를고려할때눈설명력과정합성과당위중에 어떤것들이잘결합대서작용하는가를 고려해서 받아들이는게편햐요 이게안대면독자적논리체계루다가이론을 만드러야하는거구 근데 그런 독창적시도는 불가능하긴함 이미 많은전제들이고도화되어갈라져따구해써여
그러니진리의완결성을철학자한테찾지마시구이론들의ㅇ선험적진리성을긍정하세여안그럼상대주의에서비상대성을찾으며헛발질만하게댐다
Paraconsitent logic은 이전에 본 적이 없는데 덕분에 재미있는 렌즈를 얻었네요 ㅎㅎ 퍼지논리학은 진리값을 0과 1로 보지 않고, 연속체의 한 지점으로 보기에 언급했던 거예용. 지난 번부터 파랑새님이 진리를 바라보는 관점이 '지평선을 넘어가려는 것' 같다고 느꼈어요. 그 과정을 추구하면서 한걸음 나아가는 스스로를 위로하는 것인지, 아니면 도달가능하다고 보시는지 저는 알 수 없어요. 하지만 확실한 것은 스스로를 돌보셔야 한다는 거예요. 1이 아니라 하더라도 의미가 있으니까, 좀 천천히 가세요. 어휴... 얼마나 힘들었을지... 더 보기
Paraconsitent logic은 이전에 본 적이 없는데 덕분에 재미있는 렌즈를 얻었네요 ㅎㅎ 퍼지논리학은 진리값을 0과 1로 보지 않고, 연속체의 한 지점으로 보기에 언급했던 거예용. 지난 번부터 파랑새님이 진리를 바라보는 관점이 '지평선을 넘어가려는 것' 같다고 느꼈어요. 그 과정을 추구하면서 한걸음 나아가는 스스로를 위로하는 것인지, 아니면 도달가능하다고 보시는지 저는 알 수 없어요. 하지만 확실한 것은 스스로를 돌보셔야 한다는 거예요. 1이 아니라 하더라도 의미가 있으니까, 좀 천천히 가세요. 어휴... 얼마나 힘들었을지...
용, 그리폰, 유니콘 등에서 융을 떠올리신 것은 원형 상징에 관한 것이겠지요? (현대 심리학에서 정상과학으로 받아들여지냐와는 별개로) 원형상징을 언급하면서 융은 집단적 기억을 이야기 했지만, 동시에 꿈의 해석 과정에서 프로이트와는 달리 개인의 기억과 의미를 중시했지요. 그러니 너무 보편에 천착하지 마셔요 ㅋㅋㅋㅋ 물론 제가 위의 상징을 언급한 것은 언어적 사고가 자아내는 탈접지 과정을 강조하고자 했는 것입니당.
어티즘 연속체는 autism spectrum의 제 나름대로의 번역입니다. 장애학에 뿌리를 둔 개념이에요. 흔히 자폐라고 번역되는 특질에 관한 것이고, 위에서도 몇몇 분들이 다소 거칠게 파랑새님의 태도나 관점이 지닌 독특함을 언급하셨어요. 다만 저는 '정상인'은 환상 속에나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각자는 존재 가능한 인간적 가능성의 다양한 지점에 위치한다고 봐요. 연속체라는 표현을 끌어온 건 이러한 점을 강조하고 싶었던 거예요. 누군가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저 또한 이해/용인 불가능한 '타자'겠지만. 뭐 어쩌겠읍니까... 여튼 우리 각자의 독특함이 열어주는 세계의 값들이 있다고 봐요. 다시금 대화의 가능성 논의로 돌아오는 것 같지만 일단은 여기서 끊죠.
생각을 멈추기 위해 철학자의 책을 추천해달라니... 아조씨/아가씨 아직도 멀었군여. '그냥 그래'를 일단 수용하셔야 해요. 그래도 세상이 결딴 안 나요. 믿음의 도약은 저 뿐만 아니라 많은 분들이 댓글로 해주셨는데ㅠㅠㅠ 경로의존성은 어쩔 수 없지만서리... 저도 짬날 때마다 계속 공부하는 지점이라 조심스럽기는 한데, 에두아르도 콘의 「숲은 생각한다」가 이 글의 고민과 가장 맞닿아 있지 않나 싶읍니다. 모나드 이야기를 하시니 가브리엘 타르드 얘기도 해보면 재미있을 것 같은데, 이건 제가 공부를 더하고 나서 8ㅅ8...
여튼 씻고 주무세요.
용, 그리폰, 유니콘 등에서 융을 떠올리신 것은 원형 상징에 관한 것이겠지요? (현대 심리학에서 정상과학으로 받아들여지냐와는 별개로) 원형상징을 언급하면서 융은 집단적 기억을 이야기 했지만, 동시에 꿈의 해석 과정에서 프로이트와는 달리 개인의 기억과 의미를 중시했지요. 그러니 너무 보편에 천착하지 마셔요 ㅋㅋㅋㅋ 물론 제가 위의 상징을 언급한 것은 언어적 사고가 자아내는 탈접지 과정을 강조하고자 했는 것입니당.
어티즘 연속체는 autism spectrum의 제 나름대로의 번역입니다. 장애학에 뿌리를 둔 개념이에요. 흔히 자폐라고 번역되는 특질에 관한 것이고, 위에서도 몇몇 분들이 다소 거칠게 파랑새님의 태도나 관점이 지닌 독특함을 언급하셨어요. 다만 저는 '정상인'은 환상 속에나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각자는 존재 가능한 인간적 가능성의 다양한 지점에 위치한다고 봐요. 연속체라는 표현을 끌어온 건 이러한 점을 강조하고 싶었던 거예요. 누군가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저 또한 이해/용인 불가능한 '타자'겠지만. 뭐 어쩌겠읍니까... 여튼 우리 각자의 독특함이 열어주는 세계의 값들이 있다고 봐요. 다시금 대화의 가능성 논의로 돌아오는 것 같지만 일단은 여기서 끊죠.
생각을 멈추기 위해 철학자의 책을 추천해달라니... 아조씨/아가씨 아직도 멀었군여. '그냥 그래'를 일단 수용하셔야 해요. 그래도 세상이 결딴 안 나요. 믿음의 도약은 저 뿐만 아니라 많은 분들이 댓글로 해주셨는데ㅠㅠㅠ 경로의존성은 어쩔 수 없지만서리... 저도 짬날 때마다 계속 공부하는 지점이라 조심스럽기는 한데, 에두아르도 콘의 「숲은 생각한다」가 이 글의 고민과 가장 맞닿아 있지 않나 싶읍니다. 모나드 이야기를 하시니 가브리엘 타르드 얘기도 해보면 재미있을 것 같은데, 이건 제가 공부를 더하고 나서 8ㅅ8...
여튼 씻고 주무세요.
어티즘은 자폐기질이며, 연속체라는 말은 스펙트럼(Spectrum)을 번역하신 것 같습니다. 자폐기질은 정말 조심스럽게 요약하면 자기자신에 몰입하고 몰두하는 기질이죠. 모든 사람은 자폐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고 다만 사회에서 기능하지 못할 정도로 심하고, 고통스럽다면 병원 치료를 권하게 되는 것이죠.
아 길게 썼는데 쓰다 날라갔어 미쳐
다시 쓰기도 귀찮으니 안 쓸래요
글이 장황하고 주제가 명확하지 않고 가려져 이해가 안되는데 그니까 님은 생각이 그리고 세상이 입을 막아 말을 못하는 거 아니에요? 생각이 너무 많아보여요 이건 진짜 글만 읽어도 알 수 있고요 거기에 생각의 생각끝에 세상을 자기 기준으로 보니까 세상사 답답하고 뭐 그런것 같은데 결론은 제 궁예질임
뭐 그래도 나쁘지 않다 생각해요 저는 님이 이해가 되지 않지만 그냥 그래요 평범한 사람이라 생각하는 저는 그런 고차원적인 생각을 안해봐서...
그냥 좀 힘내셔서 님이 바라는 답을 찾으셨으면 좋겠어요 여기에 물어본다고 원하는 답이 나오지 않는거 아실테고.
다시 쓰기도 귀찮으니 안 쓸래요
글이 장황하고 주제가 명확하지 않고 가려져 이해가 안되는데 그니까 님은 생각이 그리고 세상이 입을 막아 말을 못하는 거 아니에요? 생각이 너무 많아보여요 이건 진짜 글만 읽어도 알 수 있고요 거기에 생각의 생각끝에 세상을 자기 기준으로 보니까 세상사 답답하고 뭐 그런것 같은데 결론은 제 궁예질임
뭐 그래도 나쁘지 않다 생각해요 저는 님이 이해가 되지 않지만 그냥 그래요 평범한 사람이라 생각하는 저는 그런 고차원적인 생각을 안해봐서...
그냥 좀 힘내셔서 님이 바라는 답을 찾으셨으면 좋겠어요 여기에 물어본다고 원하는 답이 나오지 않는거 아실테고.
뇌과학 책 읽어보니까 보는거랑 생각하는거랑 말하는 거랑 다르다고 하네요
글쓴이님도 아시죠? 세상에 딱 정해진 답이 있지 않다는거
그리고 답이었던 것도 계속 변한다는거
찾지마세요 파랑새는 원래 없습니다
삶은 나침반이 시키는대로 따라가는게 아니라 자기가 정해서 가는거죠
글쓴이님도 아시죠? 세상에 딱 정해진 답이 있지 않다는거
그리고 답이었던 것도 계속 변한다는거
찾지마세요 파랑새는 원래 없습니다
삶은 나침반이 시키는대로 따라가는게 아니라 자기가 정해서 가는거죠
사실 윗 분들의 진단에 어느 정도 동의하는 부분이 있습니다만, 직접 대화를 나눈 것이 아니므로 가능하시면 이런 언급은 피하시는 게 어떨지요. 대괄호 부분의 답을 원하시니 하나씩 달아보기로 하지요.
[유시민의 “항소이유서”가 좋은 글이라고 평가받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런 질문은 주술관계를 착각한 데서 나와요.
"유시민의 항소이유서는 ~라서, ~ 때문에 좋은 글이다"가 아니죠. "유시민의 항소이유서는 좋은 글인데 그 이유는 ~이다"가 맞습니다. 좋은 글임을 판단하게 되는 이... 더 보기
[유시민의 “항소이유서”가 좋은 글이라고 평가받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런 질문은 주술관계를 착각한 데서 나와요.
"유시민의 항소이유서는 ~라서, ~ 때문에 좋은 글이다"가 아니죠. "유시민의 항소이유서는 좋은 글인데 그 이유는 ~이다"가 맞습니다. 좋은 글임을 판단하게 되는 이... 더 보기
사실 윗 분들의 진단에 어느 정도 동의하는 부분이 있습니다만, 직접 대화를 나눈 것이 아니므로 가능하시면 이런 언급은 피하시는 게 어떨지요. 대괄호 부분의 답을 원하시니 하나씩 달아보기로 하지요.
[유시민의 “항소이유서”가 좋은 글이라고 평가받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런 질문은 주술관계를 착각한 데서 나와요.
"유시민의 항소이유서는 ~라서, ~ 때문에 좋은 글이다"가 아니죠. "유시민의 항소이유서는 좋은 글인데 그 이유는 ~이다"가 맞습니다. 좋은 글임을 판단하게 되는 이유는 글 속에 있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이집트의 상형문자로 적은 누군가의 글은 당대의 명문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그 시대를, 체계를, 소위 컨텍스트를 상실한 우리에게 그 글은 정보값 이상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그 글은 명문일까요?
유시민의 항소이유서가 좋은 글인 이유는 쓰여졌던 시기, 쓰여진 사람의 위치, 쓴 사람의 발화 방식을 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저에게 그 글이 좋은 이유란 무엇이냐, 고 물으면 엄혹하던 시절 한 지식인 청년이 책에서 빠져나오는 순간을 보여주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할겁니다.
[만약 충분한 정보와 충분한 명확성이 있음에도 하나가 아닌 다수의 의견을 얻어낼 수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토론이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충분한 정보와 충분한 명확성이라는 기준은 어디에 있나요? 이 질문도 마찬가지예요. 거꾸로 되어 있지요. 첫째, 토론이 일어나게 된 이유는 충분한 정보와 충분한 명확성이 없어서 벌어진 일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의견이 나타났다면, 그것은 충분한 정보와 충분한 명확성으로 결정될 수 있는 사안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것 아닙니까?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한 다음에 출발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여전히 비트겐슈타인의 논고, 또는 전기 철학이 오해받고 있는데, 그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논리 실증주의의 주장처럼 말할 수 없는 것은 없다는 게 아니었지요. 이 점에서 칸트와 비트겐슈타인은 동일한 주장을 폅니다. 신학에서 자연과학을 분리하고자 했던 칸트, 당위를 말하는 담론에서 사실 판단을 구분하고자 했던 비트겐슈타인은 같은 작업을 했다고 봐도 무방해요. 왜 그랬을까요? 당연히 시대상 때문입니다. 교회와 자연과학이 싸우고 있었던 18세기, 정치, 사회와 과학 일반이 싸우고 있었던 19세기 말에 대한 이해 없이 두 사상가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저는 한쪽에 아직도 모나드론을 가지고 아직까지 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모르겠습니다. 이 모든 것이 모나드론 같습니다. 저는 그런 것 같습니다. 이 함정을 탈출하기 위한 방법을 설명해줬으면 합니다.]
모나드를 놓지 못하셨다면 신에 의한 최선의 선택 법칙 또한 받아들이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누군가의 이론을 취사선택할수는 없습니다. 이 세계가 신에 의한 최선의 선택이라면, 사람들이 모여서 계산하지 않는 이 세계 또한 최선인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계산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닌가요?
어디 인용문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중간에 데리다에 대한 오해가 있어서 한 마디만 거들면, 데리다의 초기 작업만 보면 통약불가능성에 천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그러나 후기 작업까지 모두 참조할 때, 데리다는 현재의 담론은 허물어질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했다고 봐야해요. '허물어질 수 있다는 것'과 '허물어질 수 있으므로 허물어져야 한다는 것'은 당연히 다른 이야기입니다. 데리다는 변화의 가능성을 (또는 그의 표현을 빌려 '유령'을) 보고 싶었던 것이지 모든 세상의 논의는 다 쓸데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유시민의 “항소이유서”가 좋은 글이라고 평가받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런 질문은 주술관계를 착각한 데서 나와요.
"유시민의 항소이유서는 ~라서, ~ 때문에 좋은 글이다"가 아니죠. "유시민의 항소이유서는 좋은 글인데 그 이유는 ~이다"가 맞습니다. 좋은 글임을 판단하게 되는 이유는 글 속에 있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이집트의 상형문자로 적은 누군가의 글은 당대의 명문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그 시대를, 체계를, 소위 컨텍스트를 상실한 우리에게 그 글은 정보값 이상으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그 글은 명문일까요?
유시민의 항소이유서가 좋은 글인 이유는 쓰여졌던 시기, 쓰여진 사람의 위치, 쓴 사람의 발화 방식을 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저에게 그 글이 좋은 이유란 무엇이냐, 고 물으면 엄혹하던 시절 한 지식인 청년이 책에서 빠져나오는 순간을 보여주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할겁니다.
[만약 충분한 정보와 충분한 명확성이 있음에도 하나가 아닌 다수의 의견을 얻어낼 수 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토론이 일어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충분한 정보와 충분한 명확성이라는 기준은 어디에 있나요? 이 질문도 마찬가지예요. 거꾸로 되어 있지요. 첫째, 토론이 일어나게 된 이유는 충분한 정보와 충분한 명확성이 없어서 벌어진 일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의견이 나타났다면, 그것은 충분한 정보와 충분한 명확성으로 결정될 수 있는 사안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것 아닙니까?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한 다음에 출발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여전히 비트겐슈타인의 논고, 또는 전기 철학이 오해받고 있는데, 그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논리 실증주의의 주장처럼 말할 수 없는 것은 없다는 게 아니었지요. 이 점에서 칸트와 비트겐슈타인은 동일한 주장을 폅니다. 신학에서 자연과학을 분리하고자 했던 칸트, 당위를 말하는 담론에서 사실 판단을 구분하고자 했던 비트겐슈타인은 같은 작업을 했다고 봐도 무방해요. 왜 그랬을까요? 당연히 시대상 때문입니다. 교회와 자연과학이 싸우고 있었던 18세기, 정치, 사회와 과학 일반이 싸우고 있었던 19세기 말에 대한 이해 없이 두 사상가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저는 한쪽에 아직도 모나드론을 가지고 아직까지 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모르겠습니다. 이 모든 것이 모나드론 같습니다. 저는 그런 것 같습니다. 이 함정을 탈출하기 위한 방법을 설명해줬으면 합니다.]
모나드를 놓지 못하셨다면 신에 의한 최선의 선택 법칙 또한 받아들이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누군가의 이론을 취사선택할수는 없습니다. 이 세계가 신에 의한 최선의 선택이라면, 사람들이 모여서 계산하지 않는 이 세계 또한 최선인 것 아닙니까? 그렇다면, 계산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닌가요?
어디 인용문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중간에 데리다에 대한 오해가 있어서 한 마디만 거들면, 데리다의 초기 작업만 보면 통약불가능성에 천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그러나 후기 작업까지 모두 참조할 때, 데리다는 현재의 담론은 허물어질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어했다고 봐야해요. '허물어질 수 있다는 것'과 '허물어질 수 있으므로 허물어져야 한다는 것'은 당연히 다른 이야기입니다. 데리다는 변화의 가능성을 (또는 그의 표현을 빌려 '유령'을) 보고 싶었던 것이지 모든 세상의 논의는 다 쓸데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이 분의 예전 글을 살펴보면, 정신병원 폐쇄병동에 대한 언급이 처음부터 나옵니다. 이 정도면 빼박캔트지요.
https://redtea.kr/pb/pb.php?id=free&no=8254
https://redtea.kr/pb/pb.php?id=free&no=8254
예, 다른 글도 본 기억이 있어서 April_fool님이나 다른 분의 말씀에는 동의해요. 그저.. 넌 정신병이야, 빨리 치료 받아야 해라는 말을 계속 해 주는 게 좋은 일인지 잘 모르겠어서요..
말을 제대로하시고 싶으시다면 의사 도움+심리치료사분 도움+가족의 지원 그리고 본인의 의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위 지원/조건중에 어떤 부분이 미약하신지 비교해보시고 부족한 면은 도움을 받고 차근차근 본인을 믿으시고 조언을 따르시면 그 과정중에 본인이 기대하신것 이상으로 좋은 결과를 얻으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위 지원/조건중에 어떤 부분이 미약하신지 비교해보시고 부족한 면은 도움을 받고 차근차근 본인을 믿으시고 조언을 따르시면 그 과정중에 본인이 기대하신것 이상으로 좋은 결과를 얻으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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