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 18/01/10 16:03:08 |
Name | 발타자르 |
Subject | 작년에 오랜만에 전태일 평전을 다시 읽었어요. |
그런 다음에 독후감 비슷한 걸 좀 끄적여 두었는데, 결론부는 그때의 제 사적 맥락에서 목적을 갖고 썼던 거라 날려 버리고(처음엔 그렇게 올렸다가 수정해서 상당 부분을 복구...) 보다 순수히 독후감에 해당하는 부분만 올려 봅니다.ㅎㅎ 실은 탐라권 다 쓰고 일에 집중하려 했는데 하나만 더 갖고 싶어서... 것도 그렇고 문통이 위안부 문제를 언급하며 '소녀들을 지켜주지 못한 나라' 같은 표현을 쓴 것 같은데, 가부장적 페르소나로 호명되는 국가를 제가 싫어하기도 하고 해서요. 이 글을 쓸 때쯤에는 문통이 청계천 여공들을 언급했죠. 그때도 기분이 좀 묘했고 그래서 그런 이야기로 시작했던 글... -------------------------------------------------------------------------------------------- 1. 거름과 매장 청계천변 다락방 작업장, 천장이 낮아 허리조차 펼 수 없었던 그곳에서 젊음을 바친 여성노동자들의 희생과 헌신에도 감사드립니다. 재봉틀을 돌리며 눈이 침침해지고, 실밥을 뜯으며 손끝이 갈라진 그 분들입니다. 애국자 대신 여공이라 불렸던 그 분들이 한강의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그것이 애국입니다. 이제는 노인이 되어 가난했던 조국을 온몸으로 감당했던 시절을 회상하는 그 분들께 저는 오늘, 정부를 대표해서 마음의 훈장을 달아드립니다. 2017년 대한민국 새 정부 수장의 현충일 추념사 중 위 부분이 많이 회자된 것으로 안다. 말하자면 인자하고 덕 있는 가부장의 입을 통해 ‘여공’의 선조성이 회귀하는 격세유전의 장면. 여기서 이런 질문을 던져 보자. 그런데 여공으로 대표되는 방직노동자들이 감내해야 했던 노동 착취의 역사가 이렇게 국가의 이름으로 기려지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그러나 약간 ‘톤’이 다르지 않나? 눈이 침침해지고 손끝이 갈라지는 정도였을 뿐인가? 마치 ‘낳아 기르시느라 고생하신 어머니’ 정도의 회상조 아닌가? 한 가족이 그렇게 힘든 한때를 난 것일 뿐일까?). “한강의 기적”을 이룬 ‘국민’이라는 통합의 기표 속에서 노동 착취의 역사는 그 반면인 자본 축적의 역사와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것일까. 자본과 노동의 기나긴 전쟁(특히 신자유주의화 이래로 일방적인 자본의 공세가 도드라진)은 국가의 중재에 의해 타협 국면을 맞을 것인가. 노동 계급의 단결력이 강한 시기라면 순치의 언어라고 흘겨볼 수도 있겠으나 단결은 고사하고 계급 형해화가 운위되는 게 현실이다.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노동자라 말하는 것을 꺼려하며 누군가가 노동자임을 말하는 것도 껄끄러워 한다(‘그냥 직장인이라고 하면 안 돼?’). 노동자, 노동조합. 내가 아닌 누군가들로 이루어진 어떤 이해집단. 그러나 이런 시각도 그저 물리칠 수만은 없는 현실이므로 다시 계급 형해화를 말하게 된다. 그러므로 정부의 수장이 나서서 역사 속 노동의 가치를 높이 사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역시 환영할 일일 것이다. 물론 ‘국가는 결국 자본의 대리 기구’라는 시각에 입각한다면 일종의 ‘역사 훔치기’(노동자 계급 투쟁의 역사에서 좋은 품행을 가려 성 안으로 맞아들이고 나쁜 품행은 내치는)를 통해 현실의 투쟁하는 노동자들이 한층 더 고립되는 효과를 여전히 우려할 수 있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이런 어쭙잖은 논평이 이 글의 목적은 아니다(내 분수에도 맞지 않는다). 그저 그 ‘여공’의 시대로 들어갈 실마리를 찾던 중에 마침 저 추념사를 접한 것뿐이다. 우리는 ‘대통령’에게 ‘여공’들에 대한 처우를 시급히 개선해야 한다며 절박한 어조로 편지를 쓴 한 노동운동가의 이름을 안다. 전태일의 편지는 1969년 11월에 쓰인 것으로 알려져 있으니, 그로부터 약 47.5년이 흘러 대통령의 답이 도달한 것이다. 시대의 둑을 넘어서고자 ‘법 앞에서’ 희망하고 절망하고 호소하고 분노했던 이가 있은 지 반백 년이 흘러 문이 열렸다. 누가 훈장을 받으러 그 문을 들어서고 있는가. 평화시장에서 현충원으로 향하는 유령의 행진을 목격한 이 누구인가. 생물이 거름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죽어야 한다. 그리고 ‘적절하게 매장’되지 않아야 한다. 장사란 온존되어 조상으로서 숭배될 유체와 썩어 무화되고 생태계로 환원될 사체를 구분하는 기법이다. 장사의 한 극단은 신체를 방부 처리하는 것이다. 그 사례를 우리는 파라오나 이건희에게서 찾을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신체는 국가의 역사 속에 기입된다. 다른 한 극단에 유기가 있다. 유기된 것은 부패의 과정을 거쳐 분해되고 거름이 된다. 2. “사회의 현실입니까? 빈부의 법칙입니까?” 전태일은 “어린 소녀들이 때 묻고 부한 자의 거름이 되는” 현실을 목도했다. 그는 어린 시절 가진 것 없는 자들을 거부하고 내치는 “부한 환경” 속에서 자신의 존엄이 산산이 무너지는 경험을 한 바 있다(이하 조영래, 『전태일 평전』, 돌베개, 2001). 한때는 대구에서 공장노동자로서 노동조합 활동에도 참여했던 그의 아버지는 몰락한 가내 수공업자로서 가정 폭력을 일삼는 사람이었고 가계는 그리 건강지 못한 어머니의 날품팔이 노동으로 간신히 지탱되거나 그러지 못하고 무너지곤 했다. 비참한 산업예비군의 저수지 시절을 지나 그가 서울 평화시장이라는 뭍으로 ‘공급’된 것이 1964년, 그의 나이 16세 때의 일이다. 서울의 임금노동자 수는 1960년에서 1966년 사이에 130만 명에서 210만 명으로, 다시 1970년까지 340만 명으로 증가하는데 이 시기는 전태일이 노동자로서, 그리고 노동운동가로서 살아간 시간과 일치한다(구해근, 『한국노동계급의 형성』, 창비, 2002). 이 기간 동안 한국의 산업 구조는 수출제조업 부문 중심으로 재편되었고 권위주의 정권하에서 끔찍한 자본의 치부가 진행되었다. 그러므로 다시 거름이다. 빈부의 법칙이다. 부는 빈의 거름을 먹고 자란다. 잉여가치를 향한 자본의 갈망으로 추동되는 산 노동과 죽은 노동의 순환, 그 톱니바퀴가 내는 굉음 속에서 거름이 되어 가는 아동노동자들을 보며 전태일은 분노했다. 『전태일 평전』에 따르면, 보통 ‘평화시장’이라고 할 때는 서울 동부 청계천 6가에서 동대문운동장 쪽으로 약 600미터에 걸쳐 뻗어 있는 3층 연쇄건물인 평화시장과 그 인근의 동화시장, 통일상가의 3개 시장 및 부근 작업장들을 통칭한다. 작업장 총 수는 800여 개에 달했고 노동자 수는 2만여 명에 달했는데, 이는 노동청 집계를 2~3배씩 웃도는 것이었다. 평화시장 일대의 업종은 피복제조업으로, ‘기존의 수공업 노동을 합친’ 매뉴팩처 노동의 성격을 가졌다. 이 안에서 피복 제조 노동은 재단사, 미싱사, 미싱보조, 재단보조, 시다로 직종이 분화되는데, 그 최대 다수가 시다와 미싱사(보조 포함)였고 이들 대부분은 빈곤층의 미취학 12~15세 아동 여성이었다. 그 노동의 내용은 위에 인용된 대통령의 추념사에서 유추할 수 있듯 “다리미질과 실밥 뜯는 일, 실과 단추를 나르는 일”부터 여러 잔심부름으로 이루어졌다(남성 숙련공들은 재단사가 되어 여공들보다 훨씬 많은, 그러나 역시 충분치는 않은 노임을 받았다). 극단적 저임금의 현실 속에서(전태일은 하루 숙박비의 반도 안 되는 일당으로 노동자 생활을 시작했다) 팽창적 자본 축적이 진행되어 업주들은 “경기만 제대로 타면 미싱 서너 대를 놓고 시작한 업주가 불과 1~2년 사이에 스무 대, 서른 대의 미싱을” 구비한 사업장을 꾸릴 수 있었던 반면, 시다들은 “스스로의 젊음과 소망과 건강과 생명을 그날그날 갉아먹으며 살아야만 하는 피팔이 인생들”로서 정액 월급제도 아닌 작업량에 따른 도급제 임금을 받으며 열악한 작업 조건 속에서 노동을 해야 했고, 결과 (전태일과 바보회의 1970년 조사에 따르면) 거의 모든 평화시장 노동자가 심각한 기관지 질환과 위장병, 안질 등의 질병에 시달려 “평화시장 여공은 시집 가도 삼 년밖에 못 써먹는다”는 말이 나오기까지 했다. 아동기 여성들의 삶을 불과 몇 년 사이에 수십 년치 착취해서 자본이 축적된다. 그리고 작업장이라는 착즙기에서 생명력의 마지막 진액까지 뽑혀 피폐해진 신체는 공장 밖으로 내쳐진다. 원래 빈민 아동들은 ‘거리의 천사’라는 이름으로 구휼과 교정이라는 관리 실천의 대상으로서 재현되고 있었다. 산업의 재편, 자본의 집중과 함께 그들은 이제 값싼 노동력 상품, 잉여가치의 원천으로 재현된다. 그리고 지독한 노동 착취의 결과 본래 자신에게 속했던 노동을 자본 속에 잉여가치로서 적치한 신체는 쓰레기(즉 과거에는 유용물이었던 무엇)가 되어 버려진다.(* 1) 전태일의 표현을 빌리자면 “현실이 쓰다 버린 쪽박”, “깨진 쪽박”이다. 둘로 쪼개진 쪽박 중 한 쪽은 “자진해서 쓰레기통에 기어들어가 눈을 감고 죽어”버린다. 다른 하나는 “어떻게든지 다시 물기를 빨아들여 비틀어졌던 육체를 다시 펴고 어떡해서든 그 전체 속에 다시 뭉쳐보기를 희망”한다. 이때의 전체란 곧 저 저주받아 마땅한 현실, “부한 환경”이다. 여기서 다시 ‘거름’이라는 비유를 떠올려 보자(그리고 비유를 통한 논리 전개에 따를 비약과 무리를 감수하기로 하자). 거름은 땅을 기름지게 해주는 물질을 뜻하는데, 이때 깨진 쪽박 중 자본주의 국가의 거름(애국의 이름으로 헌액될 자격을 지니는 것)이 되는 쪽은 어느 쪽일까. 역시 전체 속에 뭉쳐진 부분으로서의 잉여가치 아닐까. 이름이 지워졌던 죽은 노동에 여공이라는 이름이 붙여져 이 자본 축적의 역사 속에서 긍정될 때, 깨진 쪽박의 다른 한 쪽은 어디에 있는 걸까. 여기서 전태일이 소망했던 것은 “그 뭉친 덩어리를 전부 분해해 버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소망이 그의 안에서 떠올랐을 때, 그는 당대 노동의 풍경 자체를 자신의 시각 안에서 해체한 것이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인간의 존재 조건과 현실의 존속 조건이 괴리를 빚을 때, 전자에 눈을 감는 게 아니라 그 반대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것은 현실에 부과된 가치 체계, 가시성의 체계를 부정한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어떤 ‘보이지 않는’ 것들의 비가시성은 결국 ‘보지 않는’ 의지의 산물임을 드러낸다. 전태일은 “생존경쟁이라는 없어도 될 악마”라는 표현을 썼다. 없어도 될 것이 있다면 그것은 결국 그것이 있게 하는 의지의 산물이다. 누가 이 악마적 현실을 원하는가. 누가 이 부한 환경을 원하는가. 누가 이 노동의 풍경이 존속하기를 원하는가. 말하자면 이때 전태일은 공상의 영역으로 나아갔다. 이 공상 속에서 모든 인간은 각자에게 “전체의 일부”이다. 그러므로 누구도 부스러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 인간은 인간을 필요로 하며, 그로부터 인간 가치의 동등성이 도출된다. 이 공상에 사로잡혀 그는 “나의 또 다른 나들이여” 읊조린다. 그들에게 “많은 사람들의 공통된 약점은 희망함이 적다는 것”이니 상품이 아니라, 화폐가 아니라, 타자를 희망하라고 말한다. 그로부터 그는 “자신의 인격적인 의무”를 여공들에게로 확장했고, 그의 인식은 “인간을 물질화하는 세대, 인간의 개성과 참 인간적 본능의 충족을 무시당하고 희망의 가지를 잘린 채, 존재하기 위한 대가로 물질적 가치로 전락한 인간상을 증오”하는 데로 나아갔다. ‘부한 환경’의 현실은 “저희들의 전체의 일부를 메마른 길바닥 위에 아무렇게나 내던져버렸다”. 전체, 즉 사회는 이윤을 낳고 발전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의 함께함을 위해 필요한 것임에도.(* 2) 그런데 이것이 정말 다만 공상일까. ‘저절로 춤추는 의자’와 같은 공상일까. 평전의 저자인 조영래는 이 공상에서 “한 병약한 인간이 어떠한 굴종의 성채도 파괴해 버리는 저 처절한 분노와 사랑의 불길”을 본다. 나는 이러한 유토피아적 충동이 단지 공상만으로 구성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해본다. 거기에는 동물적 본능의 요소가 포함될 것 같다. 전태일은 평화시장이라는 짓누르는 노동의 풍경에 억울함과 울분을 느꼈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는 울부짖음에는 인간이 처해서는 안 될 환경에 대한 감각이 있다.(* 3) 평화시장 노조 조직화에 한 차례 실패한 후 그는 평화시장을 떠난다.(* 4) 막노동판에도 가 보지만 자기 안에서 현실이 부과하는 가시성의 체계를 전복한 그의 감각에는 만원 버스 안의 사람들이 모두 ‘산소’이고 그 산소들은 존재하기 위한 최소한의 공간이라도 확보하려고 동물처럼 신음을 낸다. 어디에서나 그는 같은 노동의 풍경을 보고 같은 신음을 듣고 같은 공기를 마시므로, 결국은 자신이 투쟁을 시작했던 곳인 평화시장으로 돌아오게 된다. 전태일은 노동자 대투쟁의 ‘때’(크로노스)를 살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 자신이 바로 ‘때’(카이로스)가 되었다. 그가 목도했던 잔인한 노동의 풍경이, 그 이미지가 현실에서 완전히 쓸려나가지 않는 한, 그는 “나의 또 다른 나들”을 통해서 끊임없이 현실로 돌아온다. 그의 유령과 더불어 우리는 결단하고 기회를 갖는다. 또한 현실의 ‘전체’에 합쳐지지 못한 채 죽어 간 한 쪽의 역사가 이 ‘때’에 잠재되어 있다. 3. 2017년, 자본의 퍼스펙티브 글을 마치기 전에 2017년 현재를 한 번 짚어 보고 싶다. 원래 포부는 더 원대했는데 막상 쓰려니 그저 일별하기에도 벅찰 것 같다(또 쓸데없이 크고 헛짚는 이야기가 될까 두려움이 든다). 전태일과 청계노조의 시대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자본과 노동의 전쟁은 진행 중이긴 하되, 말하자면 자본에 의한 노동의 식민화 정도가 높다는 평가를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식민화라 하면서 내가 생각한 것은 피식민자의 식민자에 대한 동화 욕구이다. 서두에서도 언급했듯 오늘날 한국에서 노동자 정체성은 도덕적 자긍심 등과 결부되기도 어렵고, 노동조합은 ‘경제성장의 훼방꾼’에서 자신보다 가난하고 약한 자들에게 등 돌리는 이기적 집단의 혐의를 받기에 이르렀다. 이런 혐의가 얼마나 적실한가를 떠나 그 결과로서 노동자 정체화의 동기 부여가 극히 부족해졌다는 문제가 있는 반면, 전 사회에서 신자유주의적 전환이 일어나는 가운데 적자생존 논리는 기업가적 진취성과 능력주의의 문제로 도덕적 세탁을 거쳤고 금융화의 과정 속에서 대중의 일상적 생활 감각은 투자와 리스크 관리의 언어에 물들었다. 정체성 혐오의 극단은 그 정체성의 해체에 있을 것이다. 노동자 정체성의 해체. 전태일이 언제든 돌아온다고 말하는 것은 한편으로 전태일에게로 돌아가고 싶은 욕망의 반영일 수 있다. 긍정적 노동자 정체성의 마르지 않는 수원으로서의 전태일로 말이다. 요즘에 와서 전태일만큼 시대착오적인 이름도 드물 것이다. 전태일에 대해서 하고 싶은 말이 있는 사람들의 수가 전태일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을 생각이 있는 사람 수보다 과연 많을까? ‘고용 없는 성장’의 시대란 말은 결국 생산 요소로서 노동력 비율의 하락, 자본의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라는 현실을 나타내는 말이다. 맑스가 전망했던 바처럼 자본 집중의 고도화가 노동자 계급의 밀집, 그에 따른 세력화의 용이성으로 나아간 게 아니라 선별적 노동 포섭의 실행과 노동 계급에의 재생산 의무 전가로 나아간 현실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된다. 고용 없는 성장 속에서 떨려난 노동자들은 치킨집과 스타트업이라는 두 극단 사이의 어딘가에서 자리를 잡으려 노력할 것이다. 그러기 위한 대출도 여의치 않은 실업자라면 SNS 서비스의 사용자로서 글로벌 기업의 광고 수입 원천이라는 생산적 기능을 담당할지언정 안정적인 고용의 기회는 가질 수 없다. 그런 이들이 어떻게 “나의 또 다른 나”를 간구해 서로를 찾을 것인가. 한편 사무직 중심화가 진행된 오늘날의 작업장 환경은 적어도 산업 안전과 위생의 관점에서는 과거보다 현격히 나아진 것처럼 보인다. 비록 장시간 사무 노동이 다년간 지속되었을 때 그것이 인간 신체와 정신에 미칠 영향에 대한 연구가 얼마나 이루어져 있는지는 의구심이 들지만 말이다. 또 비록 재벌 출신 정치인이 노량진 고시원에 들어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긴 하지만 그래도 문을 나서며 ‘우리 아버지 전쟁통에 사셨다는 판잣집에 비할 바는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지 않을까. ‘세상 참 많이 좋아졌다.’ 원래 내가 목적했던 것은 세 개의 노동 풍경을 평화시장의 그것에 잇는 것이었다. 첫째는 배달 노동자나 프랜차이즈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노동 환경이 평화시장에서 구현되었던 그것의 현대판임을 보이는 것이었다. 그 구체적 사례로서는 알바노조 맥노날드 분회의 경우를 살피려 했다. 둘째는 ‘크런치 모드’(주 80시간 근무 체제)라는 명칭으로 알려진 게임 개발 업계의 노동 현실을 보고 싶었다. 거대 게임 퍼블리셔인 넷마블이 젊은 노동자들을 문자 그대로 상품 속에 갈아버린 행태를 같이 들여다보면 좋을 것 같았다. 셋째는 종로구 익선동에서 벌어지고 있는 젠트리피케이션 과정 속에서 노동의 현주소를 발견하는 것이었다. 특히 내가 주목한 사례는 ‘동네에 가게를 운영할 계획이 있는 사람들에게 컨설팅 서비스를 제공한다’고 주장하는 기업 익선다다와 장신구 공방 월인공방 사이의 갈등이었다. 월인공방 공방주가 블로그에 공개한 익선다다 사장에 대한 “사과문”이라는 제목의 고발문(http://wol-in.com/?p=19132)은 내게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익선동에는 낡은 한옥들이 많고 저임금 비정규직 노동으로 생계를 이어나가는 노령 인구가 많다. 젊은 소생산자, 창작자들이 땅값이 싼 곳을 찾아 익선동으로 모여든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이들이 이 낡은 풍경 속에서 생계를 꾸리게 된 것은 그것이 멋스러웠기 때문이 아니라 값이 쌌기 때문이다. 허물고 새로 짓거나 전면 개수할 경제적 능력이 안 되므로 다 허물어져 가는 한옥을 어떻게든 개보수해 사용한다. 깨진 보도블럭은 정감 가는 풍경의 요소가 아니라 관절이 불편한 노인 노동자들의 장해물일 뿐이다. 그러니까 공방주의 글은 내게 그의 노동 수기로 읽혔다. 따라서 더 길게 부연하기보다는 다른 분들도 한 번 읽어 보실 것을 권한다. 한편 젊은 사업가들에 의해 운영되는 익선다다는 현대 한국에서 자본이 취할 수 있는 어떤 이상형 중 하나를 보여 주는 것 같았다. 이들은 한 인터뷰에서 자신들이 “이 골목을 우연히 발견”했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2017년 대한민국 서울의 한복판에서 말이다. 콜럼버스입니까? 달걀은 삶아 오셨습니까? 이 “한옥섬”의 가치를 자신들이 알아봤으며 그것을 “젊은 사람들과 같이 공유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골목활성화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주체로서 법인 익선다다를 설립했다는 것이다. 이 첨단적인 전형성에 나는 깜짝 놀랐다. 이들은 서울에 몇 남지 않은 저비용 거주 구역의 가난을 상품으로 개발하는 눈을 지녔다. 이들은 가난을 조망할 수 있는 부티크 호텔을 만들며 “단순한 숙박 시설이 아닌 사유하는 공간을 제공”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그 사유란 어떤 사유인가. 저 가난한 풍경을 관람하는 고급스러운 취향의 소비자인 나라는 정체성의 향유 이상일 수 없지 않을까. 이들은 겸손하게도 ‘우리는 (비록 우리가 개발한 가치에 사회적 의미가 듬뿍 담겨 있다고는 생각하지만) 사회적 기업은 아니다’라고 말할 줄까지 안다. 또한 자신들이 ‘젠트리피케이션으로부터 이 풍경의 가치를 지키는’ 이들이라고 주장하기에 이른다. 나는 이들의 언어에서 이른바 사회적 경제 담론의 전형적 수사들을 다수 발견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로부터 사회적 경제 담론에 내재한 착한 자본과 (직접 이야기되지는 않지만 그 급부로서 전제되는) 착한 노동의 이데올로기에 다가가 보고 싶었다. * 1: “폐병 3기”의 여공이 해고되는 장면은 전태일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고 그는 그 상처에 완전히 강박되었던 것 같다. 그래서 한 차례 노동조합 조직화의 쓰라린 실패로 평화시장을 떠났음에도 그는 다시 평화시장에 돌아오게 된다. * 2: 한편 맑스는 자유인들의 연합체를 검토하며 물신주의가 사라진, 매개된 사회성이 아닌 직접적 사회성의 사회를 말한 바 있다. * 3: “어지럽게 들려오는 쇠금속 소리, 짜증 섞인 미싱사들의 언성, 무엇이 현재의 실재인지를 분간 못하면서, 그 속에서 나도 부지런히 그들과 같이 해나갔다.” “실제의 나는 일의 방관자나 다름없다. 내 육신이 일을 하고, 누가 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때까지의 육감과 이 소란스런 분위기가, 몇 인치 몇 푼을 가리키는 것이다.” * 4: 여기서 바보회, 그리고 ‘바보’에 대해 몇 마디만 얹어 두자면, 익히 알려져 있듯 원래 ‘바보’란 명칭은 전태일이 현실을 모르고 설친다는 재단사 선배들의 조롱 어린 평가에서 온 것이다. 하지만 전태일과 동료들은 “세상의 거꾸로 된 가치관에 대한 도전”으로서의 ‘바보’라는 새로운 가치 부여로 나아간다. 인간 존엄 위로 오랫동안 쌓인 회의와 냉소를 떨어내는 실천의 언어였던 것이다. 그들에게는 바보회를 노동조합으로까지 발전시켜 나간다는 상이 있었으나 현실의 벽은 높았다. 위험분자로 소문 나 일자리를 잃고 그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빚을 지게 되었다. 바보회는 동력을 잃어 가고 해체에 이른다. 이 동력을 잃는 과정에서 시청 근로감독관의 역할이 컸다. 그가 보여 준 국가 행정의 민낯. 노동청 진정도 소득이 없었다. “기업주들과만 투쟁하면 되는 줄로 생각해 왔었다.”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현실의 조롱과 냉소가 너무나도 잔혹하고 괴로웠다”라고 토로한다. 5
이 게시판에 등록된 발타자르님의 최근 게시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