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7/12/18 19:59:47
Name   그리부예
Subject   "체리 맛을 포기하고 싶어요?"
작년인가 끼적인 글의 일부인데 걍 떼어서 올려 봐요.

---------------------------------

2016년 7월 5일의 일이다. 영화감독 압바스 키아로스타미가 타계했다. 나는 그의 팬까지는 아니지만, 그의 어떤 영화들, 어떤 장면들은 거듭 떠올리게 된다. 꼭 그의 것이 아니더라도 이래저래 나름 내외적 위기를 겪을 때마다 떠올리는 작품들이 있고, 나는 항상 그 작품들과 창작자들에게 ‘덕분에 오늘도 무사히’라는 마음을 갖고 있다.
키아로스타미는 추방자의 삶을 살았다. 이란 정부는 그가 영화를 만들고 발표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고, 「체리 향기」는 그런 그의 유폐적 상태를 반영하듯 대부분의 장면이 승용차 안에서 찍혔으며, 영화제에 기습적으로 출품, 공개되었다. 그 과정을 어렴풋이나마 상상해 볼 때, 그것이 보통 노력으로 가능한 일은 아니었으리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때 「체리 향기」는 영화 작업을 위해, 그리고 삶을 위해 마음을 내는 것에 대한 이야기로서 다가온다.
장소는 이란, 소음과 분진이 가득한 공사장을 배경으로 어떤 이유에선가 삶의 의지를 잃어버린 남자가 등장한다. 그는 차를 몰고 산등성이의 공사장을 배회하다가 사람들을 태운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내일 아침에 이 구덩이 앞에 와서 내 이름 ’바디‘를 두 번 불러달라. 대답이 있으면 와서 꺼내 주고, 대답이 없다면 구덩이 위로 스무 번 삽으로 흙을 퍼 덮어달라고. 그렇게만 해준다면 큰 보수를 주겠다.’ 단지 자살이라면 그냥 차를 낭떠러지로 몰면 된다. 총을 구해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남자가 바라는 죽음은 그런 것이 아니다(사실 이걸 ‘바람’이라고 하기도 애매하다. 생사의 결정을 외부에 맡기려는 것, 그것은 필경 죽음으로 이어지겠지만,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아예 닫지는 않는 그런 시도이기 때문이다). 그는 어쩌다 신학도를 태우게 되고 이렇게 말한다. ‘자네는 생사란 신의 소관이라 생각하겠지만, 더 살아갈 수 없는 때도 있다. 너무 지쳐서 하느님의 결정을 기다릴 수 없는 때가 있다’, ‘사람이 불행하면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 법이고, 그건 죄이다. 그것이 어째서 자살보다 낫나?’라고.
남자는 자신의 매장(?)을 도와줄 사람을 좀처럼 구하지 못하다가, 어떤 노인을 태우게 된다. 노인은 남자의 제안을 다 들었고, 이제 그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자기도 젊을 때 너무 힘들어서 자살을 결심한 적이 있다, 새벽 동트기 전에 차에 밧줄을 싣고 나왔다, 그런데 나무에 밧줄을 묶다가 탐스럽게 잘 익은 체리를 발견했고 그 과즙이 가득한 체리를 먹었다, 맛과 향기가 주는 환희에 이끌려 두 개, 세 개 체리를 더 따서 먹었고, 그때 산등성이로 해가 떠올랐으며, 학교에 가는 아이들 소리가 들려오더니 어느새 다가온 아이들이 체리 나무를 흔들어달라고 했고, 그들은 떨어진 체리를 주워 먹었는데, 그때 그걸 보며 그는 행복을 느꼈고, 체리를 주워 집으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남자는 체리를 먹고 마음을 바꿔 죽지 않기로 한들 당신을 둘러싼 문제가 해결될 리는 없지 않냐고 따져묻는다. 노인은 그게 아니라 그 경험이 자신을 바꿨다고 대꾸한다. 그리고 다시 유머를 하나 들려준다. 의사를 찾아간 사람이 손가락으로 몸의 어디를 건드려도 아프다고 말했다. 의사는 그를 상세히 진찰한 끝에 이렇게 말했다. 몸은 다 괜찮은데 손가락이 부러졌다고. 당신의 마음이 그 손가락이라는 것이다.
노인은 대단한 현자가 아니다. 그의 이야기가 흔한 '긍정의 힘'론과 얼마나 떨어져 있달 수 있을까. 사람 좋은 노인이 던질 법한 뻔한 교훈들. 산을 내려오며 노인은 쉬지 않고 떠든다. 삶의 기쁨에 대하여. 그러니 제발 마음을 바꾸라고. "체리 맛을 포기하고 싶어요?"
차에서 내리며 다짐을 받아내려는 남자에게 대답한다. 내일 새벽에 구덩이에 가서 당신을 부르겠다. 대답하면 당신을 꺼내줄 것이고, 대답하지 않으면, 당신은 대답을 할 것이지만, 당신의 요구대로 매장을 하겠다. 남자는 혼자 차를 몰아 공사장을 내려가다 말고 노인이 일한다고 했던 자연사 박물관으로 달려간다. 그는 노인을 불러내 이렇게 말한다, 내일 새벽에 와서 돌을 두 번 던져달라고. 잠들었을 뿐 죽은 게 아닐 수 있으므로. 둘로 부족할 수 있으니 셋을 던지겠다는 노인. 남자는 어깨를 흔들어달라는 부탁도 덧붙인다.
그리고 뇌성이 울리고 먹구름이 가득한 밤, 남자는 약을 먹고 몸을 뉘인 채 눈을 부릅뜬다. 끝없는 잠 속으로 떨어지지 않고 살아가겠다는 듯이. 이것이 이야기의 끝이다. 그리고 말미에는 열악한 화질의 비디오가 하나 더 이어붙는다. 어느 쾌청한 아침, 바디는 동료들과 영화를 찍고 있다.



3


    망손꽝손
    키아로스타미.. 정말 ㅠ ㅡ ㅠ 너무 좋아해요. 펑펑 울 것도 아닌데 영화 끝에는 항상 펑펑 울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영화들.. 이란에 갔을 때 난 키아로스타미 영화를 정말 좋아한다고 하면 '아, 그래. 근데 대장금 알어?'하며 대장금만 찾던 이란인들 반응에 슬펐던게 생각나요. 타계하신지 몇 달 안 된 시점이었는데. 그래도 그의 영화는 오래도록 제 가슴 속에 남아있을 거예요. 작은 것들을 보둠고 소중히 여길 힘을 주기를 바라며!
    그리부예
    맞아요 울 것도 아닌데 울게 만드는 사람.ㅎㅎ 이란에서 겪으셨다는 일은 이 영화에서였는지 다른 영화에서였는지 키아로스타미 영화에서 (그것도 주인공이 거의 차 안에서 안 나가는데) 헐리우드 영화 DVD를 파는 사람이 나오는 장면을 떠올리게 하네요.
    호라타래
    그리부예님 글 좋아요 >_<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공지 티타임 게시판 이용 규정 2 Toby 15/06/19 33049 7
    15437 정치민중당, 정의당, 민주노동당. 10 마키아토 25/05/12 481 12
    15436 정치이준석의 일갈 23 + 당근매니아 25/05/12 1026 0
    15435 문화/예술쳇가씨 기성작가 문체모사 - AI시대 바둑의 기풍 2 알료사 25/05/12 258 1
    15434 일상/생각사진 촬영의 전문성을 인정하자는 것. 12 메존일각 25/05/11 627 16
    15433 사회중대재해처벌법은 악법인가 29 당근매니아 25/05/08 1363 23
    15432 방송/연예백종원 사태에 대한 생각 16 Daniel Plainview 25/05/07 1494 19
    15431 정치덕수옹은 대체.. 16 Picard 25/05/06 1752 0
    15430 방송/연예2025 걸그룹 2/6 15 헬리제의우울 25/05/05 630 15
    15429 음악오늘 유난히도 다시 듣게 싶어지는 곡들 이이일공이구 25/05/05 474 0
    15427 육아/가정광명역에서 세 번의 목요일, 그리고 어머니 22 그런데 25/05/05 762 48
    15426 정치운석은 막을 수 없다: 정상성(Normality)의 관점에서 8 meson 25/05/05 702 13
    15425 정치내각제와 대법원 4 당근매니아 25/05/04 605 13
    15424 정치한국현대사에 파시즘 정권이 존재했는가? 10 meson 25/05/04 589 2
    15423 스포츠[MLB] 김혜성 LA 다저스 콜업 김치찌개 25/05/04 316 0
    15422 정치당연히 이재명이겠거니 하는 공유된 태도 29 명동의밤 25/05/03 2233 19
    15421 일상/생각옛생각에 저도 suno로 하나 만들어봤어요. 1 큐리스 25/05/02 531 0
    15420 정치양비론이 가소로워진 시대 1 meson 25/05/01 812 11
    15419 게임(ChatGPT게임) 2025 콘클라베 - 루이스 안토니오 타글레 시뮬레이션 똘빼 25/05/01 388 0
    15418 도서/문학백종원과 신창섭 사이에는 무슨 관계가 있을까? 2 구밀복검 25/05/01 764 6
    15417 정치오늘의 일에 부쳐 영원한웬디 25/05/01 654 3
    15416 오프모임서양근대사 세미나에 참여하실 회원을 모집합니다 3 영원한웬디 25/05/01 592 1
    15415 창작탐라를 지키는 100명의 회원들 MV 13 수퍼스플랫 25/05/01 692 11
    15414 기타노트북LM으로 만들어본 팟캐스트 16 토비 25/04/30 671 9
    15413 일상/생각나아가고 있겠죠? 9 골든햄스 25/04/29 797 28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