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7/12/19 22:11:07
Name   그리부예
Subject   허수경의 시 <폭발하니 토끼야?>
시장에 토끼가 걸려 있네
털도 가죽도 다 벗기우고 벌겋게 매달려 있네

털과 가죽은 아가들에게로 가서 귀를 덮어 주었지요
고기는 누군가 바구니에 담아갔고요

먼 바다 굴뚝에서 토끼를 제사 지낸 연기가 피어올랐네

오늘은 기름 넣으러 왔어요, 의젓한 척 토끼는 차 안에 앉아 있다 주유소 주인 토끼를 흘낏 보고 혼잣말을 한다

한 줌도 안 되는 게 거들먹거리네

차 안에 앉아 있던 토끼, 씽긋 웃으며 벌건 몸을 가스통에 던진다

폭발하니 토끼야?
그럼!

그러지 말지...

우는 토끼를 달래네
먼 바다 거북 눈을 껌벅거리며 연기를 바라보네

========================================

이 시는 시집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에 실려 있어요. 2001년에 출판됐죠.
전 2002년에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목동에서 자랐고 그때도 이 동네 교육열은 상당했죠. 하지만 저는 공부로 기대받는 애는 아니었어요. 석차는 거의 항상 뒤에서 세는 게 빨랐죠. 사실 다른 뭐로도 기대받는 애는 아니었죠. 어머니로서는 '순하다'는 게 유일한 자랑거리였던? 그랬던 제가 이른바 수능 대박 케이스로 한 큐에 대입을 통과합니다. 생각보다 성적이 잘 나와 버린 바람에 그냥 주위(학교와 학원의 선생님들, 가족 등)에서 쓰라는 곳 쓰고 거기 붙었어요.

종합적으로 열등생이었지만 언어 감각은 좋다는 얘길 듣는 편이었고 아싸 라이프를 이어 오며 공상과 만화, JRPG 같은 '이야기'들에 기호를 형성했기 때문에, 대학 들어가서는 과 생활에는 애초에 별 기대를 하지 않고 곧장 동아리부터 찾아다녔습니다. 처음엔 만화 동아리에 가 봤는데 다들 그림을 잘 그려서 다만 많이 봤을 뿐인 저 같은 애는 어울리기 힘들겠더라고요. 그래서 문학동아리로 갔습니다. 가입 절차가 복잡하지 않고 시키는 게 없어서 좋더라고요. 그래서 그곳을 제 대학 생활의 거점 중 하나로 삼게 됐습니다.

문학동아리에 들어갔으니 문학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남들 뭐 읽나 봤는데 의외로 별 거 안 읽더라고요. 거의 다 좀 유치해 보여서 그냥 서점에 가서 이름만 알던 창비니 문지니 하는 곳들 책을 뒤적거리고 처음으로 문예지라는 것도 사 봤습니다. 그때 거의 처음 집어들었던 시집 중 하나가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였고, 그대로 완전히 반했습니다. 지금도 한국 시인 중에서는 이때의 허수경이 최고라고 생각할 정도예요. 그냥 제 기준이 된 시인, 시집이죠.

아무튼 이때도 어디서 주워 들어서 잠수함의 토끼 이야기는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기묘하게 역전된, 그로테스크하고 슬픈 이야기.
그때도 지금도 속으로 "그러지 말지..." 읊조릴 일이 잦습니다.



6


    호라타래
    싱긋 웃으며 벌건 몸을 가스통에. 사람을 끊어지게 만드는 한순간이 있는 것 같아요.
    그리부예
    그러게요. 사람 착 약한데, 때론 정말정말 약해질 수 있는데, 세상은 고려 안 해 주기도 하죠.
    호라타래
    그러니 우리가 조금이라도 더 고려해주도록 하죠 :)
    그리부예
    (훈훈)
    세인트
    전태일 평전 글 보고 이렇게 좋은 글을 쓰시는 분이 계셨는데 여태 몰랐네 하면서 이 글도 보게 되었습니다.

    [처음엔 만화 동아리에 가 봤는데 다들 그림을 잘 그려서 다만 많이 봤을 뿐인 저 같은 애는 어울리기 힘들겠더라고요] 에서 엄청난 동질감을...
    그럼에도 저는 줏대가 없고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공동체를 제 발로 나가는 것에 대한 트라우마가 커서 그냥 눌러 앉았지요.
    뭐, 결과는 패망이었지만...ㅋ

    아무튼 잘 읽었습니다. 허수경 시인님의 시는... 아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그냥 담배가 땡깁니다. 허허.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공지 티타임 게시판 이용 규정 2 Toby 15/06/19 33213 7
    15473 일상/생각접대를 억지로 받을 수도 있지만.. 2 + Picard 25/05/30 170 3
    15472 일상/생각자동차 극장 얘기하다가 ㅋㅋㅋㅋ 6 + 큐리스 25/05/29 355 0
    15471 일상/생각사전 투표일 짧은 생각 13 + 트린 25/05/29 836 31
    15470 정치이번 선거에서 이재명을 찍을 이유 14 명동의밤 25/05/28 1264 11
    15468 일상/생각감정의 배설 9 골든햄스 25/05/28 646 16
    15467 정치독립문 고가차로와, 국힘의 몰락 16 당근매니아 25/05/28 978 0
    15466 정치이재명식 재정정책은 과연 필요한가. 다마고 25/05/28 533 3
    15465 정치MB아바타를 뛰어넘을 발언이 앞으로 또 나올까 했는데 8 kien 25/05/27 1095 0
    15464 문화/예술도서/영화/음악 추천 코너 19 Mandarin 25/05/27 567 2
    15463 경제[Medical In-House] 화장품 전성분 표시의무의 내용과 위반시 대응전략 2 김비버 25/05/26 385 1
    15462 일상/생각손버릇이 나쁘다고 혼났네요. 8 큐리스 25/05/25 1261 7
    15461 기타쳇가씨) 눈마새 오브젝트 이준석 기타등등 5 알료사 25/05/24 848 13
    15460 정치이재명에게 중재자로의 변화를 바라며 3 다마고 25/05/24 949 3
    15459 일상/생각‘좋아함’의 폭력성에 대하여 13 그르니에 25/05/24 1018 11
    15458 일상/생각변하지 않는것을 들으면 왜 눈물이 날까 1 큐리스 25/05/23 517 4
    15457 정치단일화 사견 13 경계인 25/05/23 1032 0
    15456 오프모임웹소설 창작 스터디 모집합니다. 14 Daniel Plainview 25/05/22 639 2
    15455 정치누가 한은에서 호텔경제학 관련해서 올린 걸 찾았군요. 3 kien 25/05/22 1003 1
    15454 기타쳇가씨 꼬드겨서 출산장려 반대하는 글 쓰게 만들기 2 알료사 25/05/22 449 0
    15453 일상/생각Adventure of a Lifetime 7 골든햄스 25/05/22 417 2
    15452 도서/문학다영이, 데이지, 우리 - 커뮤니티 런칭! (오늘 밤) 2 김비버 25/05/22 612 5
    15451 정치호텔경제학은 달라졌으나, 언론은 달라지지 않았다 9 meson 25/05/21 933 2
    15450 정치이번 대선도 언행이 맘에 드는 후보는 없었다 17 The xian 25/05/21 1687 2
    15449 의료/건강ChatGPT 로 식단+운동관리 받기 수퍼스플랫 25/05/20 520 2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