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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16/10/15 16:48:27 |
Name | Moira |
Subject | 노벨문학상 제도에 관한 단상 |
1. 논란 파격적인 2016 노벨문학상 수상자 선정 결과를 두고 의견이 분분합니다. 웹상에서 많은 이들이 혹은 호의적으로, 혹은 적대적으로 줄줄이 반응을 쏟아내고 있는데 읽는 재미가 쏠쏠해요. 기자들은 친분 있는 문학/음악평론가, 작가, 교수들에게 열심히 전화를 돌리거나 sns를 뒤져 코멘트를 따내는 데 분주하네요. 대체로 주류는 긍정적 평가인 것 같습니다만 언제나 그렇듯이 부정적인 반응들과 그 디테일이 더 흥미로워요. 긍정은 실정성을 변호하고, 부정은 운동을 추동하지요. [한국일보 계열] 조재룡(문학평론가, 번역가) : "문학에 대한 몰이해이자 테러" "문학과 노래가 같다면 문학인들은 왜 백지 위에 미친 듯이 글을 쓰고 있겠는가" 김정환(시인) : "노벨상엔 대중문화나 연극상 같은 분야도 따로 없지 않나. 노벨문학상이 타 장르로 외연을 넓혀 성격을 다양화하는 것도 살아남는 전략일 수 있다" 정은귀(미국문학 전공) : "엘리엇으로 대변되는 난해한 ‘하이(high) 모더니즘’이 문학으로 인정 받아온 것과 달리 쉽고 대중적이고 소박한 ‘로우(low) 모더니즘’은 제대로 평가 받지 못했다. 딜런의 노벨상 수상은 그 동안 하이 아트에 가려 괄시 받았던 로우 아트에게 주는 스웨덴 한림원의 큰 선물” [조선일보 계열] 정호승(시인) : "시와 노래가 원래 한몸이긴 하지만... 시인이 시를 쓰는데 이것이 어떤 선율로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 방해받아서 시를 못 쓴다." 어수웅(조선일보 기자) : "한림원의 설득처럼 그리스·로마시대의 호머와 현대 미국의 밥 딜런은 같은 무대에서 비교될 수 있는 것일까"혹은 "활자의 좁은 울타리를 넘어 문학의 영토를 한 뼘 더 확장시키고 해방시킨 획기적 결정은 아닐까" 김화영(번역가) : "코미디. 훌륭한 작가가 필립 로스 등 미국에만 해도 넘친다. 문학이라는 큰 배가 타이타닉호가 돼가는 것 같다." 정과리(문학평론가) : "수상 결과에 대해 뭐라고 시비할 수는 없다. 노벨상은 쉽게 말하면 하나의 사설 업체에서 주는 상이다. 권한은 절대적으로 그들한테 있다." 이인성(소설가) : "굉장히 놀랍고, 문학상의 경계를 넓힌 것 같아 흥미롭다. 이 사람의 가사는 처음부터 시(詩)였다" [한겨레 계열] 허문영(영화평론가) : "딜런의 노벨상 수상은 정말 21세기가 멋질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일까. 동의하기 쉽지 않다. 혹시 그 반대는 아닐까. 그 선정이 합당하다면 21세기에 쏟아진 그 많은 문학들이, 이 20세기 가객의 노랫말의 성취에 미치지 못한다는 뜻이 되는 건 아닐까." 최재봉(한겨레 기자) : "스웨덴 한림원의 이번 결정은 ‘문학’의 범주를 한껏 넓힌 ‘사건’으로 받아들여지지만, 논란은 오히려 더 증폭될 것으로 보인다." 해외의 반응들도 많이 소개되고 있는데, 안타깝게도 부정적인(재미있는) 반응을 보인 작가들의 경우 태반이 제가 모르는 작가들이네요. 개중에 눈에 띈 건 딜런의 라이벌이자 친구인 레너드 코헨의 코멘트입니다. "노벨문학상을 싱어송라이터에게 줘야 한다면 합당한 수상자는 딜런이 아니라 코헨"이라는 주장도 종종 눈에 띄었는데, 발표 당일 자신의 새 앨범 발표 현장에서 코헨은 이렇게 말했다네요. 캐나다 식 유머랄지. "내가 보기엔 (이 시상은) 에베레스트 산에다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이라고 메달을 꽂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누구보다 밥 딜런이 잘 알 거예요. 노래는 쓰는(write) 게 아니지요." https://www.theguardian.com/music/2016/oct/14/leonard-cohen-giving-nobel-to-bob-dylan-like-pinning-medal-on-everest 2. 제도 노벨문학상은 문학계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제도입니다. 정과리는 '사설 업체'라고 불렀지만 본인이 심사위원으로 있는 동인문학상보다야 기하급수적으로 막강한 사설 업체죠. 여기서 선정된 수상자 명단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문학사를 구성합니다. 편협하고 보수적인, '노인들을 위한 나라'의 문학사이긴 하지만 말예요. 데카르트를 불러다가 감기를 선사해 죽여버린(!) 이기적으로 추운 나라 스웨덴에서 1년에 한 번씩 전 세계 문학인들을 들었다 놨다 하는 행사가 열립니다. 한림원 멤버들은 각계각층에서 추천서가 올라온 2백여 명의 작가 리스트를 다섯 명으로 압축한 뒤 여름 동안 이들의 전작을 읽고 나서 토론 끝에 투표로 수상자를 선정합니다. 그 과정에서 의문의 1승 또는 의문의 1패를 경험하는 수상자들도 당연히 있겠죠. 스웨덴 한림원(Swedish Academy)의 멤버는 18명으로 고정되어 있고 종신직입니다. 전임자가 사망해야 다른 사람이 충원되는 거지요. 현재 최연소 멤버는 올해 들어간 사라 스트리스베리(1972년생)이고 최고령 멤버는 예란 말름크비스트(1924년생)예요. 40대 1명, 50대 4명, 60대 5명, 70대 이상이 8명이나 되는 엄청난 노인정(;;)이죠. 이것도 그나마 최근 몇 년간 90대 노년층 멤버 셋이 사망하고 비어 있던 공석을 상대적으로 젊은 위원들이 채워온 것인데, 작년 이래 노벨문학상 선정에서 드러난 독특한 경향에는 이 멤버 교체가 모종의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작년에 한림원 130년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 사무총장이 나왔고, 그가 올해 밥 딜런의 수상을 발표한 사라 다니우스(1962년생)입니다. 사무총장(permanent secretary)은 대외적으로 한림원의 대변인 같은 역할을 합니다. 문학 하는 사람들, 그것도 조용한 츤데레 타입의 북쪽 나라 사람들이 국제 매스컴에 오르내릴 일은 많지 않죠. 한림원 18인(금속 속에 묻혀 있는 소림사 18동인이 생각나는군요) 명단 가운데 혹시 아는 사람이 있다면 대단한 스웨덴통이라 할 만한데, 그나마 사무총장의 이름은 아주 가끔 - 좋지 않은 일로 - 뉴스에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 2008년에 호라세 엥달(Horace Engdahl, 1999-2009 사무총장) 씨는 "미국인들은 너무 편협한 섬나라 근성에다(insular) 무식해서 유럽 작가들과 경쟁이 안 됨 ㄷㄷㄷ" http://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8/10/02/2008100200007.html 하는 발언으로 미국인들의 노여움을 한몸에 사는 바람에 신나게 뉴스를 장식하고 다음 해에 사무총장 자리에서 물러났습니다. 그는 높은 곳에서 신세계를 측은하게 내려다보는 보수적 유럽 지식인의 전형처럼 보입니다. 이런 해프닝과 함께 지금까지의 엘리트주의적인 노벨상 선정 경향을 고려한다면 올해 밥 딜런의 수상은 정말로 획기적인 - 그러나 너무 뒤늦은 - 사건입니다. 콧대 높은 한림원이 20세기 미국 대중문화를 드디어 역사적인 문학 유산("미국의 노래 전통 내에서 창조된 시적 표현")으로 인정했다는 점은 획기적이고, 전 세계인이 향유하고 지나간 지가 언제인데 지금 와서 뒷북이냐는 말을 들을 만도 합니다. 레너드 코헨의 말처럼 안전빵에 불과하지요. 그래도 안 하는 것보다는 늦은 게 낫다는 생각이 들어요. 베팅리스트에 기십 년째 올라 있으면서 나는 언제, 너는 언제, 하고 기약 없이 순번을 기다리는 작가들은 (밥 딜런보다야 가난하겠지만) 사실 노벨상을 받든 안 받든 크게 상관없는 위대한 사람들이고, 문학상이라는 제도에겐 도박 리스트와 무관하게 새로운 문학적 현상을 발굴하든가 아니면 현상을 추인이라도 할 의무가 있습니다. 현상을 보는 시야는 넓을수록 좋지요. 때때로 제3세계 작가들에게 선심 쓰듯 손을 내미는 데에도 한계가 있고, 한 10년 정도는 대륙별 안배보다는 다양한 문학적 경향과 장르 발굴로 맥을 잡고 가는 게 모든 사람들을 위해 좋겠죠. 어쨌건 열심히 '노벨상용' 작품을 써오던 사람들에겐 한방 먹인 셈이에요. 황석영이 그렇고, 후기 하루키가 그렇죠. 3. 문학사 사라 다니우스는 수상자 발표장에서 고대 그리스 시인 호메로스(서사시)와 사포(서정시)의 예를 들어 밥 딜런과 비견했습니다. 그들도 "연주를 위해 텍스트를 썼고" 문학은 태초부터 노래였으므로 당연히 딜런도 문학을 한 것이다는 이야기죠. 원칙적으로 반박하기 힘들지만 아무래도 좀 와닿지 않는 인용이긴 합니다. 이 시인들의 세계로부터 우리는 2천 500년 이상 떠나와 있으니까요. 그 오랜 세월 동안 문학의 경계, 문학의 정의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단 말인가? 그들이 과연 현대의 문학이 추구해야 할 의미 있는 모델이란 말인가? 문학은 기본적으로 '오락'입니다. 노동을 하지 않는 시간에 아무런 실용적 목적도 보상도 없는 놀이를 하는 것입니다. 그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다른 오락거리들과 문학은 경쟁하고 있고, 대중의 선택 순위에서 점점 뒤쳐지고 있습니다. "웃긴다 차라리 노벨음악상을 만들어라" "노벨영화상을" "노벨게임상을" 같은 이야기가 튀어나오는 것도 당연합니다. (알프레드 노벨이 선구적인 안목이 있었다면 "노벨오락상"을 만들었을 텐데.) 하지만 아직도 꽤 많은 사람들은 문학이 다른 오락거리들보다 가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문자를 읽을 때는 소리를 듣거나 그림/영상을 볼 때보다 한층 적극적인 지적 활동이 이루어진다고, 그리하여 읽기 전의 사람과 읽은 후의 사람을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 놓을 확률이 높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그런 사람들에게 '노래'는 현대문학이 성취해낸 지극히 복잡하고 밀도 높은 결과물들을 위협하는 적입니다. 오락으로 얻을 수 있는 쾌락을 비교한다면, 두 시간 동안 영화를 보는 것, 노래를 듣는 것, 게임을 하는 것, 책을 읽는 것 가운데 가장 강도가 높으면서도 단조로운 쾌락을 주는 것은 아마 게임이겠죠. 게임은 인간의 감각을 가능한 한 한꺼번에 총동원하기 때문에 지성이 개입할 여백을 남겨두지 않습니다. 노래를 듣는 것은 문자를 읽는 것과 영화/게임을 하는 것의 중간 정도에 속하겠죠. 그리하여 이런 물음에 다시 부딪치게 됩니다. 우리는 가요를 문학에 다시금 포함시킴으로써 묵독의 역사, 개별적 지성이 최대한 활동할 수 있는 여백을 남겨두려 애써온 오락의 최대 기준을 포기하는 것이 아닐까? 고은 시인의 장점은 실제로 시 자체가 아닌 퍼포먼스였습니다. 그는 행사에 출연할 때마다 아무리 범상한 시라도 호메로스의 서사시처럼 웅장하고 멋들어지게 낭송해서 청중들을 사로잡았다고 하죠. 아마 고은의 시를 이해하지 못했던 서구인들도 그의 퍼포먼스는 이해했을 것입니다. 가수의 공연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이렌들이 노래를 불러 사람들을 홀리고 파멸로 이끄는 것을 알고 있었던 오디세우스는 노를 젓는 부하들에게 귀를 막도록 시켰습니다. <오디세이아>에서 인물들은 소리꾼이 노래를 부를 때, 즉 모든 사람들이 정신없이 홀려 있을 때 비밀스런 행동과 공작을 시작하곤 합니다. 오디오북과 북콘서트들은 소설을 구연의 영역으로 끌어들였습니다. 모든 퍼포먼스는, 그 자체로 똘똘 뭉쳐서 공연자에게 집중하고 공연의 방해자를 미워하는 공동체를 형성합니다. 롤 같은 게임을 하다가 방해받거나 영화관에서 영화를 볼 때 방해받으면 책을 읽다가 방해받는 경우와는 완전히 질적으로 다른 증오심을 갖게 되지 않습니까? 다니우스가 호메로스와 사포를 인용했을 때 그는 현대 세계가 2500년 전의 예술 수용자 집단과 유사한 소집단들이라고 상정하고 있습니다. 소리꾼이 한번에 만족시킬 수 있었던 청중들은 기껏해야 수십에서 수백 명, 감정이 쉽게 동질화될 수 있는 집단이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오늘날 그러한 공동체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움직임들은 아주 많습니다. 번거롭게 함께 영화 보기, 함께 음악 듣기, 모여서 함께 무언가를 찾아나서기. 하지만 오늘날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이 압도적인 움직임은 함께 모여서 무언가를 찾아나설 필요가 없도록, 그 무언가가 스스로 전파되고 발견되도록 만드는 자본의 움직임입니다. 시(poem)가 아닌 노래(song)는 원천적으로 국지적인 산물입니다. 시는 번역될 수 있지만 가사는 번역되지 않아요. 팝송을 한국어로 번역해서 한국 말로 부르면 완전히 다른 노래가 되고, 그건 번역이 아니라 번안이라고 불러야 할 겁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는 영어로 '부를' 수 없어요. 부르려면 이오니아 방언을 배워야 하는데, 절대 다수에게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밥 딜런의 노래는 대충 따라 부를 수 있어요. 오늘날 절대 다수의 현대인이 막대한 자본을 들여 공교육과 사교육에서 영어를 배우기 때문이지요. 인터넷만 켜면 노래도 흘러나오고 가사도 검색해서 볼 수 있습니다. 현대 문명은 '노래'를 국지적 현상에서 초국적 현상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세계문학'의 언어가 자본의 힘을 빌어 갖게 된 가공할 만한 힘입니다. 자본과 번역은 세계를 평평하게 만듭니다. 평평해진 세계에서 생존하기 쉬운 것은 결국 밀도가 가장 낮은 것들, 응집성 없고 고르게 잘 퍼져나가는 물과 같은 것들, 굳이 찾아나설 필요 없이 가만히 있어도 문앞까지 알아서 배달되는 것들입니다. 예를 들어 하루키가 전율스러운 것은 햄버거나 생수처럼 너무 많이 팔리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유가 없어요. 세계의 어떤 서점에 가든 이미 진열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밀도 높은 작가들은 아무리 노벨상이 후원한들 잘 흐르지 않죠. 밥 딜런이란 세계적 스타를 올해의 노벨상 수상자로 선정함으로써 스웨덴 한림원은 자본이 이미 수십 년간 닦아놓은 길을 편하게 달려간 게으른 배달부가 된 셈입니다. 어떤 트위터러는 "한림원이 딜런을 선정한 이유를 알 만하다. 책을 읽는다는 건 정말 힘든 일이니까."라고 비꼬았죠. 이상이 제가 이번 노벨상에 대한 부정적 반응들의 행간을 대충 생각해본 내역입니다. 그렇다면 한림원의 선택은 결국 무의미한 선택이었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시'가 아닌 '노래'를 문학의 범주로 다시 포괄하려는 시도는 충분히 유의미합니다. 노래를 만드는 사람들에게는 큰 힘이 될 거예요. 창작자의 입장에서 모든 문학 장르는 스스로에게 제약을 주고 시작하는 형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는 운율로, 소설은 분량으로, 가사는 음악으로 스스로를 묶은 다음에 그 형식의 줄이 펼쳐지는 동심원 내에서 움직이며 작품을 만듭니다. 줄을 당겨주는 구심점이 없으면 한없이 멀리멀리 떠내려갈 뿐입니다. 노래의 경우 그 당기는 줄이 좀더 짧을 거예요. 하지만 정호승 시인의 말처럼 "방해받아서 못 쓸" 일까지는 없지요. 하지만 수용자의 입장에서, '노래'의 고대적 공동체성은 오늘날 유의미하게 재생될 수 있을까? 발표 바로 다음날부터 공공 장소에서 울려퍼지는 똑같은 노래들은 좀 섬뜩하지 않은가? 밥 딜런의 노래를 좋아하던 사람들은 밥 딜런에 '노벨상이 묻었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그 아름다움을 주변에 전달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딜런의 '세계적인' 의미를 생각해야 하는 어려움에 봉착하는 것이 아닐까...? 여러 가지 갈피 없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 낭송. 제가 들어본 것들 중에서 가장 깨끗한 발음이네요. 실제 공연할 때에는 훨씬 다채로운 인토네이션과 반주가 사용되었을 것입니다. 50초 정도부터 낭송이 시작됩니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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