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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16/10/15 16:48:27 |
Name | Moira |
Subject | 노벨문학상 제도에 관한 단상 |
1. 논란 파격적인 2016 노벨문학상 수상자 선정 결과를 두고 의견이 분분합니다. 웹상에서 많은 이들이 혹은 호의적으로, 혹은 적대적으로 줄줄이 반응을 쏟아내고 있는데 읽는 재미가 쏠쏠해요. 기자들은 친분 있는 문학/음악평론가, 작가, 교수들에게 열심히 전화를 돌리거나 sns를 뒤져 코멘트를 따내는 데 분주하네요. 대체로 주류는 긍정적 평가인 것 같습니다만 언제나 그렇듯이 부정적인 반응들과 그 디테일이 더 흥미로워요. 긍정은 실정성을 변호하고, 부정은 운동을 추동하지요. [한국일보 계열] 조재룡(문학평론가, 번역가) : "문학에 대한 몰이해이자 테러" "문학과 노래가 같다면 문학인들은 왜 백지 위에 미친 듯이 글을 쓰고 있겠는가" 김정환(시인) : "노벨상엔 대중문화나 연극상 같은 분야도 따로 없지 않나. 노벨문학상이 타 장르로 외연을 넓혀 성격을 다양화하는 것도 살아남는 전략일 수 있다" 정은귀(미국문학 전공) : "엘리엇으로 대변되는 난해한 ‘하이(high) 모더니즘’이 문학으로 인정 받아온 것과 달리 쉽고 대중적이고 소박한 ‘로우(low) 모더니즘’은 제대로 평가 받지 못했다. 딜런의 노벨상 수상은 그 동안 하이 아트에 가려 괄시 받았던 로우 아트에게 주는 스웨덴 한림원의 큰 선물” [조선일보 계열] 정호승(시인) : "시와 노래가 원래 한몸이긴 하지만... 시인이 시를 쓰는데 이것이 어떤 선율로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 방해받아서 시를 못 쓴다." 어수웅(조선일보 기자) : "한림원의 설득처럼 그리스·로마시대의 호머와 현대 미국의 밥 딜런은 같은 무대에서 비교될 수 있는 것일까"혹은 "활자의 좁은 울타리를 넘어 문학의 영토를 한 뼘 더 확장시키고 해방시킨 획기적 결정은 아닐까" 김화영(번역가) : "코미디. 훌륭한 작가가 필립 로스 등 미국에만 해도 넘친다. 문학이라는 큰 배가 타이타닉호가 돼가는 것 같다." 정과리(문학평론가) : "수상 결과에 대해 뭐라고 시비할 수는 없다. 노벨상은 쉽게 말하면 하나의 사설 업체에서 주는 상이다. 권한은 절대적으로 그들한테 있다." 이인성(소설가) : "굉장히 놀랍고, 문학상의 경계를 넓힌 것 같아 흥미롭다. 이 사람의 가사는 처음부터 시(詩)였다" [한겨레 계열] 허문영(영화평론가) : "딜런의 노벨상 수상은 정말 21세기가 멋질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일까. 동의하기 쉽지 않다. 혹시 그 반대는 아닐까. 그 선정이 합당하다면 21세기에 쏟아진 그 많은 문학들이, 이 20세기 가객의 노랫말의 성취에 미치지 못한다는 뜻이 되는 건 아닐까." 최재봉(한겨레 기자) : "스웨덴 한림원의 이번 결정은 ‘문학’의 범주를 한껏 넓힌 ‘사건’으로 받아들여지지만, 논란은 오히려 더 증폭될 것으로 보인다." 해외의 반응들도 많이 소개되고 있는데, 안타깝게도 부정적인(재미있는) 반응을 보인 작가들의 경우 태반이 제가 모르는 작가들이네요. 개중에 눈에 띈 건 딜런의 라이벌이자 친구인 레너드 코헨의 코멘트입니다. "노벨문학상을 싱어송라이터에게 줘야 한다면 합당한 수상자는 딜런이 아니라 코헨"이라는 주장도 종종 눈에 띄었는데, 발표 당일 자신의 새 앨범 발표 현장에서 코헨은 이렇게 말했다네요. 캐나다 식 유머랄지. "내가 보기엔 (이 시상은) 에베레스트 산에다가 '세계에서 가장 높은 산'이라고 메달을 꽂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누구보다 밥 딜런이 잘 알 거예요. 노래는 쓰는(write) 게 아니지요." https://www.theguardian.com/music/2016/oct/14/leonard-cohen-giving-nobel-to-bob-dylan-like-pinning-medal-on-everest 2. 제도 노벨문학상은 문학계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제도입니다. 정과리는 '사설 업체'라고 불렀지만 본인이 심사위원으로 있는 동인문학상보다야 기하급수적으로 막강한 사설 업체죠. 여기서 선정된 수상자 명단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세계문학사를 구성합니다. 편협하고 보수적인, '노인들을 위한 나라'의 문학사이긴 하지만 말예요. 데카르트를 불러다가 감기를 선사해 죽여버린(!) 이기적으로 추운 나라 스웨덴에서 1년에 한 번씩 전 세계 문학인들을 들었다 놨다 하는 행사가 열립니다. 한림원 멤버들은 각계각층에서 추천서가 올라온 2백여 명의 작가 리스트를 다섯 명으로 압축한 뒤 여름 동안 이들의 전작을 읽고 나서 토론 끝에 투표로 수상자를 선정합니다. 그 과정에서 의문의 1승 또는 의문의 1패를 경험하는 수상자들도 당연히 있겠죠. 스웨덴 한림원(Swedish Academy)의 멤버는 18명으로 고정되어 있고 종신직입니다. 전임자가 사망해야 다른 사람이 충원되는 거지요. 현재 최연소 멤버는 올해 들어간 사라 스트리스베리(1972년생)이고 최고령 멤버는 예란 말름크비스트(1924년생)예요. 40대 1명, 50대 4명, 60대 5명, 70대 이상이 8명이나 되는 엄청난 노인정(;;)이죠. 이것도 그나마 최근 몇 년간 90대 노년층 멤버 셋이 사망하고 비어 있던 공석을 상대적으로 젊은 위원들이 채워온 것인데, 작년 이래 노벨문학상 선정에서 드러난 독특한 경향에는 이 멤버 교체가 모종의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작년에 한림원 130년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 사무총장이 나왔고, 그가 올해 밥 딜런의 수상을 발표한 사라 다니우스(1962년생)입니다. 사무총장(permanent secretary)은 대외적으로 한림원의 대변인 같은 역할을 합니다. 문학 하는 사람들, 그것도 조용한 츤데레 타입의 북쪽 나라 사람들이 국제 매스컴에 오르내릴 일은 많지 않죠. 한림원 18인(금속 속에 묻혀 있는 소림사 18동인이 생각나는군요) 명단 가운데 혹시 아는 사람이 있다면 대단한 스웨덴통이라 할 만한데, 그나마 사무총장의 이름은 아주 가끔 - 좋지 않은 일로 - 뉴스에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 2008년에 호라세 엥달(Horace Engdahl, 1999-2009 사무총장) 씨는 "미국인들은 너무 편협한 섬나라 근성에다(insular) 무식해서 유럽 작가들과 경쟁이 안 됨 ㄷㄷㄷ" http://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8/10/02/2008100200007.html 하는 발언으로 미국인들의 노여움을 한몸에 사는 바람에 신나게 뉴스를 장식하고 다음 해에 사무총장 자리에서 물러났습니다. 그는 높은 곳에서 신세계를 측은하게 내려다보는 보수적 유럽 지식인의 전형처럼 보입니다. 이런 해프닝과 함께 지금까지의 엘리트주의적인 노벨상 선정 경향을 고려한다면 올해 밥 딜런의 수상은 정말로 획기적인 - 그러나 너무 뒤늦은 - 사건입니다. 콧대 높은 한림원이 20세기 미국 대중문화를 드디어 역사적인 문학 유산("미국의 노래 전통 내에서 창조된 시적 표현")으로 인정했다는 점은 획기적이고, 전 세계인이 향유하고 지나간 지가 언제인데 지금 와서 뒷북이냐는 말을 들을 만도 합니다. 레너드 코헨의 말처럼 안전빵에 불과하지요. 그래도 안 하는 것보다는 늦은 게 낫다는 생각이 들어요. 베팅리스트에 기십 년째 올라 있으면서 나는 언제, 너는 언제, 하고 기약 없이 순번을 기다리는 작가들은 (밥 딜런보다야 가난하겠지만) 사실 노벨상을 받든 안 받든 크게 상관없는 위대한 사람들이고, 문학상이라는 제도에겐 도박 리스트와 무관하게 새로운 문학적 현상을 발굴하든가 아니면 현상을 추인이라도 할 의무가 있습니다. 현상을 보는 시야는 넓을수록 좋지요. 때때로 제3세계 작가들에게 선심 쓰듯 손을 내미는 데에도 한계가 있고, 한 10년 정도는 대륙별 안배보다는 다양한 문학적 경향과 장르 발굴로 맥을 잡고 가는 게 모든 사람들을 위해 좋겠죠. 어쨌건 열심히 '노벨상용' 작품을 써오던 사람들에겐 한방 먹인 셈이에요. 황석영이 그렇고, 후기 하루키가 그렇죠. 3. 문학사 사라 다니우스는 수상자 발표장에서 고대 그리스 시인 호메로스(서사시)와 사포(서정시)의 예를 들어 밥 딜런과 비견했습니다. 그들도 "연주를 위해 텍스트를 썼고" 문학은 태초부터 노래였으므로 당연히 딜런도 문학을 한 것이다는 이야기죠. 원칙적으로 반박하기 힘들지만 아무래도 좀 와닿지 않는 인용이긴 합니다. 이 시인들의 세계로부터 우리는 2천 500년 이상 떠나와 있으니까요. 그 오랜 세월 동안 문학의 경계, 문학의 정의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단 말인가? 그들이 과연 현대의 문학이 추구해야 할 의미 있는 모델이란 말인가? 문학은 기본적으로 '오락'입니다. 노동을 하지 않는 시간에 아무런 실용적 목적도 보상도 없는 놀이를 하는 것입니다. 그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다른 오락거리들과 문학은 경쟁하고 있고, 대중의 선택 순위에서 점점 뒤쳐지고 있습니다. "웃긴다 차라리 노벨음악상을 만들어라" "노벨영화상을" "노벨게임상을" 같은 이야기가 튀어나오는 것도 당연합니다. (알프레드 노벨이 선구적인 안목이 있었다면 "노벨오락상"을 만들었을 텐데.) 하지만 아직도 꽤 많은 사람들은 문학이 다른 오락거리들보다 가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문자를 읽을 때는 소리를 듣거나 그림/영상을 볼 때보다 한층 적극적인 지적 활동이 이루어진다고, 그리하여 읽기 전의 사람과 읽은 후의 사람을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 놓을 확률이 높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그런 사람들에게 '노래'는 현대문학이 성취해낸 지극히 복잡하고 밀도 높은 결과물들을 위협하는 적입니다. 오락으로 얻을 수 있는 쾌락을 비교한다면, 두 시간 동안 영화를 보는 것, 노래를 듣는 것, 게임을 하는 것, 책을 읽는 것 가운데 가장 강도가 높으면서도 단조로운 쾌락을 주는 것은 아마 게임이겠죠. 게임은 인간의 감각을 가능한 한 한꺼번에 총동원하기 때문에 지성이 개입할 여백을 남겨두지 않습니다. 노래를 듣는 것은 문자를 읽는 것과 영화/게임을 하는 것의 중간 정도에 속하겠죠. 그리하여 이런 물음에 다시 부딪치게 됩니다. 우리는 가요를 문학에 다시금 포함시킴으로써 묵독의 역사, 개별적 지성이 최대한 활동할 수 있는 여백을 남겨두려 애써온 오락의 최대 기준을 포기하는 것이 아닐까? 고은 시인의 장점은 실제로 시 자체가 아닌 퍼포먼스였습니다. 그는 행사에 출연할 때마다 아무리 범상한 시라도 호메로스의 서사시처럼 웅장하고 멋들어지게 낭송해서 청중들을 사로잡았다고 하죠. 아마 고은의 시를 이해하지 못했던 서구인들도 그의 퍼포먼스는 이해했을 것입니다. 가수의 공연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이렌들이 노래를 불러 사람들을 홀리고 파멸로 이끄는 것을 알고 있었던 오디세우스는 노를 젓는 부하들에게 귀를 막도록 시켰습니다. <오디세이아>에서 인물들은 소리꾼이 노래를 부를 때, 즉 모든 사람들이 정신없이 홀려 있을 때 비밀스런 행동과 공작을 시작하곤 합니다. 오디오북과 북콘서트들은 소설을 구연의 영역으로 끌어들였습니다. 모든 퍼포먼스는, 그 자체로 똘똘 뭉쳐서 공연자에게 집중하고 공연의 방해자를 미워하는 공동체를 형성합니다. 롤 같은 게임을 하다가 방해받거나 영화관에서 영화를 볼 때 방해받으면 책을 읽다가 방해받는 경우와는 완전히 질적으로 다른 증오심을 갖게 되지 않습니까? 다니우스가 호메로스와 사포를 인용했을 때 그는 현대 세계가 2500년 전의 예술 수용자 집단과 유사한 소집단들이라고 상정하고 있습니다. 소리꾼이 한번에 만족시킬 수 있었던 청중들은 기껏해야 수십에서 수백 명, 감정이 쉽게 동질화될 수 있는 집단이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오늘날 그러한 공동체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움직임들은 아주 많습니다. 번거롭게 함께 영화 보기, 함께 음악 듣기, 모여서 함께 무언가를 찾아나서기. 하지만 오늘날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이 압도적인 움직임은 함께 모여서 무언가를 찾아나설 필요가 없도록, 그 무언가가 스스로 전파되고 발견되도록 만드는 자본의 움직임입니다. 시(poem)가 아닌 노래(song)는 원천적으로 국지적인 산물입니다. 시는 번역될 수 있지만 가사는 번역되지 않아요. 팝송을 한국어로 번역해서 한국 말로 부르면 완전히 다른 노래가 되고, 그건 번역이 아니라 번안이라고 불러야 할 겁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는 영어로 '부를' 수 없어요. 부르려면 이오니아 방언을 배워야 하는데, 절대 다수에게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밥 딜런의 노래는 대충 따라 부를 수 있어요. 오늘날 절대 다수의 현대인이 막대한 자본을 들여 공교육과 사교육에서 영어를 배우기 때문이지요. 인터넷만 켜면 노래도 흘러나오고 가사도 검색해서 볼 수 있습니다. 현대 문명은 '노래'를 국지적 현상에서 초국적 현상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세계문학'의 언어가 자본의 힘을 빌어 갖게 된 가공할 만한 힘입니다. 자본과 번역은 세계를 평평하게 만듭니다. 평평해진 세계에서 생존하기 쉬운 것은 결국 밀도가 가장 낮은 것들, 응집성 없고 고르게 잘 퍼져나가는 물과 같은 것들, 굳이 찾아나설 필요 없이 가만히 있어도 문앞까지 알아서 배달되는 것들입니다. 예를 들어 하루키가 전율스러운 것은 햄버거나 생수처럼 너무 많이 팔리기 때문입니다. 다른 이유가 없어요. 세계의 어떤 서점에 가든 이미 진열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밀도 높은 작가들은 아무리 노벨상이 후원한들 잘 흐르지 않죠. 밥 딜런이란 세계적 스타를 올해의 노벨상 수상자로 선정함으로써 스웨덴 한림원은 자본이 이미 수십 년간 닦아놓은 길을 편하게 달려간 게으른 배달부가 된 셈입니다. 어떤 트위터러는 "한림원이 딜런을 선정한 이유를 알 만하다. 책을 읽는다는 건 정말 힘든 일이니까."라고 비꼬았죠. 이상이 제가 이번 노벨상에 대한 부정적 반응들의 행간을 대충 생각해본 내역입니다. 그렇다면 한림원의 선택은 결국 무의미한 선택이었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시'가 아닌 '노래'를 문학의 범주로 다시 포괄하려는 시도는 충분히 유의미합니다. 노래를 만드는 사람들에게는 큰 힘이 될 거예요. 창작자의 입장에서 모든 문학 장르는 스스로에게 제약을 주고 시작하는 형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는 운율로, 소설은 분량으로, 가사는 음악으로 스스로를 묶은 다음에 그 형식의 줄이 펼쳐지는 동심원 내에서 움직이며 작품을 만듭니다. 줄을 당겨주는 구심점이 없으면 한없이 멀리멀리 떠내려갈 뿐입니다. 노래의 경우 그 당기는 줄이 좀더 짧을 거예요. 하지만 정호승 시인의 말처럼 "방해받아서 못 쓸" 일까지는 없지요. 하지만 수용자의 입장에서, '노래'의 고대적 공동체성은 오늘날 유의미하게 재생될 수 있을까? 발표 바로 다음날부터 공공 장소에서 울려퍼지는 똑같은 노래들은 좀 섬뜩하지 않은가? 밥 딜런의 노래를 좋아하던 사람들은 밥 딜런에 '노벨상이 묻었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그 아름다움을 주변에 전달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딜런의 '세계적인' 의미를 생각해야 하는 어려움에 봉착하는 것이 아닐까...? 여러 가지 갈피 없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 낭송. 제가 들어본 것들 중에서 가장 깨끗한 발음이네요. 실제 공연할 때에는 훨씬 다채로운 인토네이션과 반주가 사용되었을 것입니다. 50초 정도부터 낭송이 시작됩니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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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메로스 때와는 달라, 지금은 변했어, 라고 한다면, 지금까지와는 달라, 앞으로는 변할거야, 할수도 있는거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밥딜런 수상 소식을 듣는 순간 솔직한 심정은... 맘에 안들었어요. 이유는 글쓴분께서 적어주신것과 거의 비슷하구요. 그런데 곰곰 생각해보면서 나오는 결론은... '뭐 상관없잖아,' 입니다. 상 못받고 묻히는 훌륭한 작가들이 한두명인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들의 문학세계가 무너지는 것도 아니고... 밥딜런 상받았다고 열받아할 시간에 내가 좋아하는 작가 한페이지라도 더 읽는게 내가 이상적으로 여기는 ... 더 보기
호메로스 때와는 달라, 지금은 변했어, 라고 한다면, 지금까지와는 달라, 앞으로는 변할거야, 할수도 있는거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 밥딜런 수상 소식을 듣는 순간 솔직한 심정은... 맘에 안들었어요. 이유는 글쓴분께서 적어주신것과 거의 비슷하구요. 그런데 곰곰 생각해보면서 나오는 결론은... '뭐 상관없잖아,' 입니다. 상 못받고 묻히는 훌륭한 작가들이 한두명인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들의 문학세계가 무너지는 것도 아니고... 밥딜런 상받았다고 열받아할 시간에 내가 좋아하는 작가 한페이지라도 더 읽는게 내가 이상적으로 여기는 문학세계를 지키고 또 확장해가는 훨씬 좋은 방법일 테니까요.
아래로는 이번 수상에 관련해 제가 가장 공감했던 글인데 타임라인에 올리려다가 자리 깔린 김에 이곳에 옮겨봅니다. 디시 마이너 갤러리 <독서 갤러리>의 gksrud님의 글이고 사전에 허락을 구했습니다.
+ + +
왕년의 친구 중에 노래방에 가면 김학래, 임철우 듀엣의 <내가>를 부르는 이가 있었습니다.
그저 대중가요 가사이지만 정말 아름답다고 생각했었습니다. - 무겁지 않으면서도 가슴에 와 닿았죠.
어린시절부터 애니메이션 <미래소년 코난> 한국어 주제곡을 무척 좋아했는데, '새 희망이 넘실거리고 뭉게 꿈이 피어난다'는 가사가 참 마음에 들었습니다. 저를 거꾸로 매달아도 그런 표현은 쓸 수 없다고 생각했죠.
문학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은근히 계층 구조가 있는데...
-창작을 할 수 없지만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은 평론을 하고
-창작을 하긴 하는데 도저히 시를 쓸 수 없는 사람이 소설을 쓰고
-시를 쓰는 것이 가능한 사람은 시를 쓰는 시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시인이 가장 어렵다는 얘기가 되겠죠.
<의상대 해돋이>를 쓴 조종현 시인은 자기 아들이 <태백산맥>을 쓰며 좋은 소설가로 자리매김하였지만
그럼에도 아들 조정래가 시인이 되지 못한 것을 평생 아쉬워했다고 합니다.
문학하는 사람들 의식 속에 산문보다 운문이 어렵고 더 가치있다고 여기는 면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한 예입니다.
문학은 구텐베르그의 인쇄 혁명 이전까지 주로 입으로 말하고 귀로 듣는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유럽의 귀족들이 겨우 내 밤마다 술잔치를 벌이고 음유시인의 노래를 들으면서 시간을 보냈던 이유는
전기라는 게 없던 시절 달리 할 일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 시간이 문화를 향유하는 유일한 시간이기도 했기 때문이죠.
'독서'는 오랜 시간 동안 글을 입으로 읽는 행위를 뜻하는 것이었고
그래서 입으로 떠들었을 때 듣기 좋은 운율이나 대구가 아름답게 어울리는 글이 훌륭하다 평가받았죠.
밥 딜런의 노래를 잘 모릅니다. 제 부모님 세대에 빛났던 가수이거든요.
과거 해외 영화를 한국에서 개봉할 때 제목을 왜 한국어로 표기하지 않을까 의아했던 작품 중 하나가
두 시한부 암환자들이 자동차를 훔쳐 타고 바다로 떠나는 로드 무비 <노킹 온 해븐스 도어>였습니다.
그냥 <천국의 문을 두드린다> 정도로 영화를 개봉하는 편이 더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주제곡으로 쓰인 밥 딜런의 노래가 저보다 한 세대 윗쪽 사람들에게는 너무 유명해서
그 노래 제목을 차용한 영화의 제목도 쉽게 한국어로 바꿀 수 없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죠.
노래 하나를 접하고 그 노랫말의 표현이 정말 멋지다라고 여기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산문을 좋아하고 소설을 좋아하며 시를 잘 이해하지 못하지만
한 구절의 싯귀와 노랫말 하나가 평생 기억에 남는 것이 신기하고 놀랍게 여겨지기도 하죠.
비단 밥 딜런뿐만 아니라 음악을 만들면서 좋은 가사를 쓰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꽤 있고
그 결과물은 사람들 마음 속에 분명 형용하기 어려운 감동을 남기고 있거든요.
이번 노벨문학상은 그런 경험을 안겨 준 것에 대한 감사의 성의 표시 같은 느낌도 듭니다.
아래로는 이번 수상에 관련해 제가 가장 공감했던 글인데 타임라인에 올리려다가 자리 깔린 김에 이곳에 옮겨봅니다. 디시 마이너 갤러리 <독서 갤러리>의 gksrud님의 글이고 사전에 허락을 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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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년의 친구 중에 노래방에 가면 김학래, 임철우 듀엣의 <내가>를 부르는 이가 있었습니다.
그저 대중가요 가사이지만 정말 아름답다고 생각했었습니다. - 무겁지 않으면서도 가슴에 와 닿았죠.
어린시절부터 애니메이션 <미래소년 코난> 한국어 주제곡을 무척 좋아했는데, '새 희망이 넘실거리고 뭉게 꿈이 피어난다'는 가사가 참 마음에 들었습니다. 저를 거꾸로 매달아도 그런 표현은 쓸 수 없다고 생각했죠.
문학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은근히 계층 구조가 있는데...
-창작을 할 수 없지만 문학을 좋아하는 사람은 평론을 하고
-창작을 하긴 하는데 도저히 시를 쓸 수 없는 사람이 소설을 쓰고
-시를 쓰는 것이 가능한 사람은 시를 쓰는 시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시인이 가장 어렵다는 얘기가 되겠죠.
<의상대 해돋이>를 쓴 조종현 시인은 자기 아들이 <태백산맥>을 쓰며 좋은 소설가로 자리매김하였지만
그럼에도 아들 조정래가 시인이 되지 못한 것을 평생 아쉬워했다고 합니다.
문학하는 사람들 의식 속에 산문보다 운문이 어렵고 더 가치있다고 여기는 면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한 예입니다.
문학은 구텐베르그의 인쇄 혁명 이전까지 주로 입으로 말하고 귀로 듣는 경우가 더 많았습니다.
유럽의 귀족들이 겨우 내 밤마다 술잔치를 벌이고 음유시인의 노래를 들으면서 시간을 보냈던 이유는
전기라는 게 없던 시절 달리 할 일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 시간이 문화를 향유하는 유일한 시간이기도 했기 때문이죠.
'독서'는 오랜 시간 동안 글을 입으로 읽는 행위를 뜻하는 것이었고
그래서 입으로 떠들었을 때 듣기 좋은 운율이나 대구가 아름답게 어울리는 글이 훌륭하다 평가받았죠.
밥 딜런의 노래를 잘 모릅니다. 제 부모님 세대에 빛났던 가수이거든요.
과거 해외 영화를 한국에서 개봉할 때 제목을 왜 한국어로 표기하지 않을까 의아했던 작품 중 하나가
두 시한부 암환자들이 자동차를 훔쳐 타고 바다로 떠나는 로드 무비 <노킹 온 해븐스 도어>였습니다.
그냥 <천국의 문을 두드린다> 정도로 영화를 개봉하는 편이 더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주제곡으로 쓰인 밥 딜런의 노래가 저보다 한 세대 윗쪽 사람들에게는 너무 유명해서
그 노래 제목을 차용한 영화의 제목도 쉽게 한국어로 바꿀 수 없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죠.
노래 하나를 접하고 그 노랫말의 표현이 정말 멋지다라고 여기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산문을 좋아하고 소설을 좋아하며 시를 잘 이해하지 못하지만
한 구절의 싯귀와 노랫말 하나가 평생 기억에 남는 것이 신기하고 놀랍게 여겨지기도 하죠.
비단 밥 딜런뿐만 아니라 음악을 만들면서 좋은 가사를 쓰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꽤 있고
그 결과물은 사람들 마음 속에 분명 형용하기 어려운 감동을 남기고 있거든요.
이번 노벨문학상은 그런 경험을 안겨 준 것에 대한 감사의 성의 표시 같은 느낌도 듭니다.
제가 인용한 기사들에도 있지만 사실 현명한 사람들이 딜런의 수상에 왜 저렇게 화를 내는가를 꽤 오래 고민했는데요, 저는 그런 반응들에 좀 당황했거든요. (아니 저가 받을 것도 아닌데...) 곰곰 생각해 보니 유명인들은 자기가 뱉아놓은 말들과 불일치하는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할 거 같더라고요. 문학이란 이런 것이다 이런 작품은 쓰레기다 저 작품은 위대하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자기 발언을 흔들어버리는 제도적 결과가 나오면 글쎄 화가 나겠죠. 사실 저도 딜런을 잘 몰라요. 누가 딜런의 문학성에 관해 간략한 분석글을 써줬으면... 저는... 더 보기
제가 인용한 기사들에도 있지만 사실 현명한 사람들이 딜런의 수상에 왜 저렇게 화를 내는가를 꽤 오래 고민했는데요, 저는 그런 반응들에 좀 당황했거든요. (아니 저가 받을 것도 아닌데...) 곰곰 생각해 보니 유명인들은 자기가 뱉아놓은 말들과 불일치하는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할 거 같더라고요. 문학이란 이런 것이다 이런 작품은 쓰레기다 저 작품은 위대하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자기 발언을 흔들어버리는 제도적 결과가 나오면 글쎄 화가 나겠죠. 사실 저도 딜런을 잘 몰라요. 누가 딜런의 문학성에 관해 간략한 분석글을 써줬으면... 저는 가사 몇 개 읽어보다가 포기했어용.
저는 노벨상이라는 잔치에 초대받는 손님의 수가 늘어나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상당히 어마어마한 배경의 손님을 불러와서 눈꼴이 시리긴 한데. 좀 마이너한 작사가가 발굴되었다면 논란이 이렇게 심하진 않았겠죠. 글을 쓰는 사람들 간에 연대의식이 성립되기가 좀더 쉬우니까요. 예술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가능성과 확정되지 않은 소문들에 기대를 거는 것인데, 노벨상이란 제도는 재능이 한참 전에 소진된 노인들에게 상을 주는 제도라서 참 시대착오적이긴 해요. 그러면서 '이것이 문학의 한 정점이다'라고 할 만한 작품들은 요리조리 피해가곤 하죠. 작품이 아니라 인간에게 주는 19세기식 공로상이라서 그런 듯해요. 좀 바꾸면 좋을 듯.
퍼와 주신 글 잘 읽었어요. 마음이 따뜻한 분 같아요. 근데 시와 소설 구분은 좀... 시는 타고나는 게 맞긴 한데 소설가들이 시를 못 써서 소설을 쓰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아예 마음의 구조가 다른 듯 ㅎㅎ
저는 노벨상이라는 잔치에 초대받는 손님의 수가 늘어나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상당히 어마어마한 배경의 손님을 불러와서 눈꼴이 시리긴 한데. 좀 마이너한 작사가가 발굴되었다면 논란이 이렇게 심하진 않았겠죠. 글을 쓰는 사람들 간에 연대의식이 성립되기가 좀더 쉬우니까요. 예술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가능성과 확정되지 않은 소문들에 기대를 거는 것인데, 노벨상이란 제도는 재능이 한참 전에 소진된 노인들에게 상을 주는 제도라서 참 시대착오적이긴 해요. 그러면서 '이것이 문학의 한 정점이다'라고 할 만한 작품들은 요리조리 피해가곤 하죠. 작품이 아니라 인간에게 주는 19세기식 공로상이라서 그런 듯해요. 좀 바꾸면 좋을 듯.
퍼와 주신 글 잘 읽었어요. 마음이 따뜻한 분 같아요. 근데 시와 소설 구분은 좀... 시는 타고나는 게 맞긴 한데 소설가들이 시를 못 써서 소설을 쓰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아예 마음의 구조가 다른 듯 ㅎㅎ
저는 이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할 지 갈피가 잘 잡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단순히 악마 변호적인 동기에서 한 번 반론을 펴보고 싶습니다. 따라서 반대를 위한 반대가 되겠지만, 단순히 소리내어 말하면서 하는 생각을 듣는 것과 비슷하게 보셔서 관대한 마음으로 나쁘게 받아들이지 않아 주셨으면 하는 생각을 염치없이 해봅니다.
코헨의 말씀을 인용하셨는데, 그 의미를 밥 딜런의 시대는 이미 향유된 과거인데 무의미한 수상이라는 생각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습니다만은, 문학에서 밥 딜런의 음악이 차지하는 위상이 산 중에서 에베레스트가 가장 높... 더 보기
코헨의 말씀을 인용하셨는데, 그 의미를 밥 딜런의 시대는 이미 향유된 과거인데 무의미한 수상이라는 생각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습니다만은, 문학에서 밥 딜런의 음악이 차지하는 위상이 산 중에서 에베레스트가 가장 높... 더 보기
저는 이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할 지 갈피가 잘 잡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단순히 악마 변호적인 동기에서 한 번 반론을 펴보고 싶습니다. 따라서 반대를 위한 반대가 되겠지만, 단순히 소리내어 말하면서 하는 생각을 듣는 것과 비슷하게 보셔서 관대한 마음으로 나쁘게 받아들이지 않아 주셨으면 하는 생각을 염치없이 해봅니다.
코헨의 말씀을 인용하셨는데, 그 의미를 밥 딜런의 시대는 이미 향유된 과거인데 무의미한 수상이라는 생각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습니다만은, 문학에서 밥 딜런의 음악이 차지하는 위상이 산 중에서 에베레스트가 가장 높은 것만큼 명확하지는 않지 않은가 하고 생각하게 되네요. 에베레스트가 제일 높은 산으로서 상을 받는 것은 우습지만, 밥 딜런의 음악이 노벨 문학상을 받은 것은 여러 사람들의 반감을 일으킨 것이잖아요? 밥 딜런의 음악은 응당 받아야 할 그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밥 딜런의 예술은 음악을 쓰고, 그 가사를 쓰고, 그것을 연주하고 전달하는 것 그 모든 것의 총합이고, 그 개개를 나누어서 본다면 그것이 순문학과 견줄 수 없을 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 모든 것의 총합은 타 문학과 견줄 만 한 것일 지 않을까요?
언급하신 것처럼 가요가 다분히 오락성 기질을 띄고, 가요가 그것들을 소비하는 이들과의 관계에 있어 지적인 깊음이 부족함에 대해 불평할수도 있겠습니다만은, 그것이 문학 그 자체의 가치와 관계가 있는가 하는 것에는 의문이 듭니다. 물론 릴 웨인이나 에미넴이 노벨 문학상을 받는 건 어불성설이지만, 그렇다고 노벨 문학상이 율리시스나 다른 난해한 문학에게만 허용되는 상은 아니지 않습니까. 밥 딜런 정도면 “충분히 깊은” 문학으로서의 가치를 충족시킬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이에 있어 가요의 shareability (한국어 단어를 생각해내기가 어려워서.. 죄송합니다) 도 비슷하게 볼 수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번역에서 잃어버리기 쉬운 미묘한 뉘앙스가 문학에 가치를 부여하지는 않지 않나 싶습니다. 오히려 가치있는 문학이 우연히 이런 성질을 가지는 것이 아닐런지요. 많은 타 언어로 쓰여진 고전이 번역으로 인하여 미묘한 뉘앙스를 잃어버릴 수도 있음에도 번역이 되어 읽히지 않습니까? 가요의 낮은 진입장벽이 그것의 문학적 가치를 꼭 떨어트리는 종류의 성질인지에 의문이 듭니다.
결국 저의 이번 밥 딜런의 노벨 문학상 수상에 대해 반대하고 싶은 마음과 환영하고 싶은 마음이 갈등을 일으키는 것은 저 역시 깊은 내면에 “밥 딜런의 가요는 어떤 모종의 이유로 ‘보통 문학’과 비교할 종류의 것이 아니다” 라는 직관이 있는 반면에, (바로 위의 알료사 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음악…은 사람들 마음 속에 분명 형용하기 어려운 감동을 남기고 있”다는 것을 반대하기가 어렵기 때문이에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코헨의 말씀을 인용하셨는데, 그 의미를 밥 딜런의 시대는 이미 향유된 과거인데 무의미한 수상이라는 생각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습니다만은, 문학에서 밥 딜런의 음악이 차지하는 위상이 산 중에서 에베레스트가 가장 높은 것만큼 명확하지는 않지 않은가 하고 생각하게 되네요. 에베레스트가 제일 높은 산으로서 상을 받는 것은 우습지만, 밥 딜런의 음악이 노벨 문학상을 받은 것은 여러 사람들의 반감을 일으킨 것이잖아요? 밥 딜런의 음악은 응당 받아야 할 그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밥 딜런의 예술은 음악을 쓰고, 그 가사를 쓰고, 그것을 연주하고 전달하는 것 그 모든 것의 총합이고, 그 개개를 나누어서 본다면 그것이 순문학과 견줄 수 없을 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 모든 것의 총합은 타 문학과 견줄 만 한 것일 지 않을까요?
언급하신 것처럼 가요가 다분히 오락성 기질을 띄고, 가요가 그것들을 소비하는 이들과의 관계에 있어 지적인 깊음이 부족함에 대해 불평할수도 있겠습니다만은, 그것이 문학 그 자체의 가치와 관계가 있는가 하는 것에는 의문이 듭니다. 물론 릴 웨인이나 에미넴이 노벨 문학상을 받는 건 어불성설이지만, 그렇다고 노벨 문학상이 율리시스나 다른 난해한 문학에게만 허용되는 상은 아니지 않습니까. 밥 딜런 정도면 “충분히 깊은” 문학으로서의 가치를 충족시킬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이에 있어 가요의 shareability (한국어 단어를 생각해내기가 어려워서.. 죄송합니다) 도 비슷하게 볼 수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번역에서 잃어버리기 쉬운 미묘한 뉘앙스가 문학에 가치를 부여하지는 않지 않나 싶습니다. 오히려 가치있는 문학이 우연히 이런 성질을 가지는 것이 아닐런지요. 많은 타 언어로 쓰여진 고전이 번역으로 인하여 미묘한 뉘앙스를 잃어버릴 수도 있음에도 번역이 되어 읽히지 않습니까? 가요의 낮은 진입장벽이 그것의 문학적 가치를 꼭 떨어트리는 종류의 성질인지에 의문이 듭니다.
결국 저의 이번 밥 딜런의 노벨 문학상 수상에 대해 반대하고 싶은 마음과 환영하고 싶은 마음이 갈등을 일으키는 것은 저 역시 깊은 내면에 “밥 딜런의 가요는 어떤 모종의 이유로 ‘보통 문학’과 비교할 종류의 것이 아니다” 라는 직관이 있는 반면에, (바로 위의 알료사 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음악…은 사람들 마음 속에 분명 형용하기 어려운 감동을 남기고 있”다는 것을 반대하기가 어렵기 때문이에요.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아 사실 저도 확신이 부족한 상태에서 '악마 변호적인 동기'로 글을 쓴 거예요. 저는 딜런의 수상을 반가워한 사람이거든요. 영 엉뚱하게 됐네..ㅎㅎ
항상 그렇지만 어떤 현상을 최초로 긍정하는 게 최초로 부정하는 것보다 어려워요. 저의 반가움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언어를 찾지 못했어요. 왜 반가웠을까 생각해 보면 고리타분한 노인네들이 정신을 좀 차리고 뭔가 새로운 일을 해보려고 하는구나 정도인데, 제도에 변화의 시동을 거는 것 자체는 기대할 만하지만 동시에 의구심이 생기죠. 해서 의구심부터 표현해본 거예요. 막연한 기대를 구체... 더 보기
항상 그렇지만 어떤 현상을 최초로 긍정하는 게 최초로 부정하는 것보다 어려워요. 저의 반가움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언어를 찾지 못했어요. 왜 반가웠을까 생각해 보면 고리타분한 노인네들이 정신을 좀 차리고 뭔가 새로운 일을 해보려고 하는구나 정도인데, 제도에 변화의 시동을 거는 것 자체는 기대할 만하지만 동시에 의구심이 생기죠. 해서 의구심부터 표현해본 거예요. 막연한 기대를 구체... 더 보기
아 사실 저도 확신이 부족한 상태에서 '악마 변호적인 동기'로 글을 쓴 거예요. 저는 딜런의 수상을 반가워한 사람이거든요. 영 엉뚱하게 됐네..ㅎㅎ
항상 그렇지만 어떤 현상을 최초로 긍정하는 게 최초로 부정하는 것보다 어려워요. 저의 반가움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언어를 찾지 못했어요. 왜 반가웠을까 생각해 보면 고리타분한 노인네들이 정신을 좀 차리고 뭔가 새로운 일을 해보려고 하는구나 정도인데, 제도에 변화의 시동을 거는 것 자체는 기대할 만하지만 동시에 의구심이 생기죠. 해서 의구심부터 표현해본 거예요. 막연한 기대를 구체화하는 게 너무 어려움...
말씀대로 딜런은 실제로 글만 쓰는 작가들보다 더 많은 일을 하고 있지요. 작사, 작곡, 노래까지 다 하니까요. 그렇게 보면 게임을 만드는 사람들은 가장 많은 일을 하고 있어요. 그 총합이 문학보다 더 강한 경험을 가능케 해주기도 하고요. 그런데 문자 매체는 그런 강한 경험을 동시에 확 살포하는 일을 저지하는 역할을 해요. 세계화를 지연시키는 장벽이랄까? 그 지연 속에서 새로운 의미가 태어나곤 하고요. 영상이나 음악은 번역이 필요없지만 문자는 번역을 거쳐야 하는데, 그 번역 과정에 새로운 창작 노동이 투입되기 때문에 결국 최종적으로 생산해 내는 정보량은 다른 매체들에 비해 적다고 볼 수 없거든요.
문학보다 더 우수해 보이는 예술 매체들이 많지만, 문학은 아마 알파고가 도달하기 가장 힘든 영역 중 하나일 거라고 생각해요.
항상 그렇지만 어떤 현상을 최초로 긍정하는 게 최초로 부정하는 것보다 어려워요. 저의 반가움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언어를 찾지 못했어요. 왜 반가웠을까 생각해 보면 고리타분한 노인네들이 정신을 좀 차리고 뭔가 새로운 일을 해보려고 하는구나 정도인데, 제도에 변화의 시동을 거는 것 자체는 기대할 만하지만 동시에 의구심이 생기죠. 해서 의구심부터 표현해본 거예요. 막연한 기대를 구체화하는 게 너무 어려움...
말씀대로 딜런은 실제로 글만 쓰는 작가들보다 더 많은 일을 하고 있지요. 작사, 작곡, 노래까지 다 하니까요. 그렇게 보면 게임을 만드는 사람들은 가장 많은 일을 하고 있어요. 그 총합이 문학보다 더 강한 경험을 가능케 해주기도 하고요. 그런데 문자 매체는 그런 강한 경험을 동시에 확 살포하는 일을 저지하는 역할을 해요. 세계화를 지연시키는 장벽이랄까? 그 지연 속에서 새로운 의미가 태어나곤 하고요. 영상이나 음악은 번역이 필요없지만 문자는 번역을 거쳐야 하는데, 그 번역 과정에 새로운 창작 노동이 투입되기 때문에 결국 최종적으로 생산해 내는 정보량은 다른 매체들에 비해 적다고 볼 수 없거든요.
문학보다 더 우수해 보이는 예술 매체들이 많지만, 문학은 아마 알파고가 도달하기 가장 힘든 영역 중 하나일 거라고 생각해요.
이번 수상에 대해 제기될 만한 논점이 무수히 많겠습니다만, 일단 제 생각에 중대한 것이라면
1) 음악을 비롯하여 미술, 연극 등 시청각 예술들을 총 망라하여 문학과 통합적/일원적으로 평가하고 분석할 수 있는 '내러톨로지' 이론이 존재하는가? 뿐만 아니라 광범위한 예술내외적 합의를 이끌어내고 있는가?
2) 그러한 관점에서 볼 때, 밥 딜런이 음악계 내부에서 가장 이론에 부합하는 대상인가? 그리고 그에 대한 합의가 있는가?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은데, 제가 보기에는 스웨덴 아카데미에서 이러한 논의들에 대해 책임질 수 없다고 생각... 더 보기
1) 음악을 비롯하여 미술, 연극 등 시청각 예술들을 총 망라하여 문학과 통합적/일원적으로 평가하고 분석할 수 있는 '내러톨로지' 이론이 존재하는가? 뿐만 아니라 광범위한 예술내외적 합의를 이끌어내고 있는가?
2) 그러한 관점에서 볼 때, 밥 딜런이 음악계 내부에서 가장 이론에 부합하는 대상인가? 그리고 그에 대한 합의가 있는가?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은데, 제가 보기에는 스웨덴 아카데미에서 이러한 논의들에 대해 책임질 수 없다고 생각... 더 보기
이번 수상에 대해 제기될 만한 논점이 무수히 많겠습니다만, 일단 제 생각에 중대한 것이라면
1) 음악을 비롯하여 미술, 연극 등 시청각 예술들을 총 망라하여 문학과 통합적/일원적으로 평가하고 분석할 수 있는 '내러톨로지' 이론이 존재하는가? 뿐만 아니라 광범위한 예술내외적 합의를 이끌어내고 있는가?
2) 그러한 관점에서 볼 때, 밥 딜런이 음악계 내부에서 가장 이론에 부합하는 대상인가? 그리고 그에 대한 합의가 있는가?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은데, 제가 보기에는 스웨덴 아카데미에서 이러한 논의들에 대해 책임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사실 그네들 뿐만 아니라 지구상의 그 어떤 예술가도 오롯이 책임지기 어려운 논점이죠.
물론 모든 반론에 대해 완벽한 답변이 준비 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며, 비약적인 실착이되 용감한 대담성을 '지향'하는 선택은 그 자체로도 의미 있을 수는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if you look far back, 5000 years, you discover Homer and Sappho. They wrote poetic texts which were meant to be performed, and it’s the same way for Bob Dylan. We still read Homer and Sappho, and we enjoy it." "for having created [new poetic expressions within the great American song tradition.]" "[Dylan has the status of an icon]," "His influence on contemporary music is profound, and he is the object of a steady stream of secondary literature." 라는 식으로 한없이 가볍고 상투적이며 주례사 비평적인 선정 이유를 제시한 것은 이해하기 어렵군요. 저런 수상 근거로는 그 '지향성'조차도 드러내지 못합니다. 제 눈에는 저것은 문학 평가의 새로운 장을 제시하고 싶은 도발적인 결정이라기보다는, 고정관념(다양한 것이 좋은 거지)과 통념(일반적인 문학만이 문학의 평가 대상인가? 오픈 마인드!)과 인습적인 저널리즘(밥 딜런 정도면 진지한 예술하는 창작자지) 등에 젖은 나태한 의견처럼 보입니다. 덕질 그 자체에 자족하고 마는 지향성 없는 덕후들조차도 자신의 덕질 대상이 예술이랍시고 빨아제낄 때 저러진 않습니다. 예컨대 숱한 럽폭도들을 봤지만 호머와 사포 드립 치며 럽라 빠는 경우는...없었죠. 결국 한림원이 수상에 필연적적으로 따르는 반론과 논점들에 대해 무책임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비판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편견과는 달리 밥 딜런이 상을 받을 준비가 된 인물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정작 한림원이 밥 딜런에게 상을 줄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 같지는 않으며, 그저 또다른 '편견'을 수용한 것은 아닌가 합니다.
1) 음악을 비롯하여 미술, 연극 등 시청각 예술들을 총 망라하여 문학과 통합적/일원적으로 평가하고 분석할 수 있는 '내러톨로지' 이론이 존재하는가? 뿐만 아니라 광범위한 예술내외적 합의를 이끌어내고 있는가?
2) 그러한 관점에서 볼 때, 밥 딜런이 음악계 내부에서 가장 이론에 부합하는 대상인가? 그리고 그에 대한 합의가 있는가?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은데, 제가 보기에는 스웨덴 아카데미에서 이러한 논의들에 대해 책임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사실 그네들 뿐만 아니라 지구상의 그 어떤 예술가도 오롯이 책임지기 어려운 논점이죠.
물론 모든 반론에 대해 완벽한 답변이 준비 되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며, 비약적인 실착이되 용감한 대담성을 '지향'하는 선택은 그 자체로도 의미 있을 수는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if you look far back, 5000 years, you discover Homer and Sappho. They wrote poetic texts which were meant to be performed, and it’s the same way for Bob Dylan. We still read Homer and Sappho, and we enjoy it." "for having created [new poetic expressions within the great American song tradition.]" "[Dylan has the status of an icon]," "His influence on contemporary music is profound, and he is the object of a steady stream of secondary literature." 라는 식으로 한없이 가볍고 상투적이며 주례사 비평적인 선정 이유를 제시한 것은 이해하기 어렵군요. 저런 수상 근거로는 그 '지향성'조차도 드러내지 못합니다. 제 눈에는 저것은 문학 평가의 새로운 장을 제시하고 싶은 도발적인 결정이라기보다는, 고정관념(다양한 것이 좋은 거지)과 통념(일반적인 문학만이 문학의 평가 대상인가? 오픈 마인드!)과 인습적인 저널리즘(밥 딜런 정도면 진지한 예술하는 창작자지) 등에 젖은 나태한 의견처럼 보입니다. 덕질 그 자체에 자족하고 마는 지향성 없는 덕후들조차도 자신의 덕질 대상이 예술이랍시고 빨아제낄 때 저러진 않습니다. 예컨대 숱한 럽폭도들을 봤지만 호머와 사포 드립 치며 럽라 빠는 경우는...없었죠. 결국 한림원이 수상에 필연적적으로 따르는 반론과 논점들에 대해 무책임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비판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고.
편견과는 달리 밥 딜런이 상을 받을 준비가 된 인물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정작 한림원이 밥 딜런에게 상을 줄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 같지는 않으며, 그저 또다른 '편견'을 수용한 것은 아닌가 합니다.
한림원 사무총장의 설명은 사실 무책임하죠. 아니 여름 내내 읽고 토론을 했으면 그 독회록을 공개하든지.. 어떤 수위에서 논쟁이 진행됐는지 도통 알 수가 없잖아요. 스웨덴어로 뭔가 보고서를 쓰는지는 모르겠는데 암튼 코끼리 다리 만지는 거 같다는. 근데 항상 이랬다니까 뭐. 열리지 않는 블랙박스를 놓고 토론을 하기는 사실 힘들지요.
저는 이런 상황에서 한림원의 결정을 일단 실정성을 획득한 종교제도 비슷한 걸로 놓고 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말하자면 점복관의 신탁이 누구에게 떨어졌는가 하는 것인데, 그 결과나 과정 자체는 합리적으로 납... 더 보기
저는 이런 상황에서 한림원의 결정을 일단 실정성을 획득한 종교제도 비슷한 걸로 놓고 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말하자면 점복관의 신탁이 누구에게 떨어졌는가 하는 것인데, 그 결과나 과정 자체는 합리적으로 납... 더 보기
한림원 사무총장의 설명은 사실 무책임하죠. 아니 여름 내내 읽고 토론을 했으면 그 독회록을 공개하든지.. 어떤 수위에서 논쟁이 진행됐는지 도통 알 수가 없잖아요. 스웨덴어로 뭔가 보고서를 쓰는지는 모르겠는데 암튼 코끼리 다리 만지는 거 같다는. 근데 항상 이랬다니까 뭐. 열리지 않는 블랙박스를 놓고 토론을 하기는 사실 힘들지요.
저는 이런 상황에서 한림원의 결정을 일단 실정성을 획득한 종교제도 비슷한 걸로 놓고 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말하자면 점복관의 신탁이 누구에게 떨어졌는가 하는 것인데, 그 결과나 과정 자체는 합리적으로 납득할 수 없지만 그 결과를 이끌어낸 정치사회적, 이론적 배경들은 추론할 수 있는. 구밀복검님이 던진 논점에 대해서 우리끼리 논쟁은 가능할 텐데, 한림원의 발언을 레퍼런스로 놓고는 도저히 논쟁할 수 없을 듯해요
전 예술의 통합적 내러톨로지 이론 --> 이런 거 좀 만들어 봐 주세요 ㄷㄷㄷ
밥 딜런은 부합하는 대상인가? --> 이건 진짜로 밥 딜런을 들입다 분석해 봐야 약간이라도 알 수 있겠는. 토스토스.
뭐 밥 딜런은 노벨상을 받을 준비가 차고 넘치죠... 아닌가?!
---- 추가
두번째 질문, 밥 딜런은 부합하는 대상인가? 에 대한 대답은 첫번째 질문을 건너뛰고 나이브하게는 가능할 것 같아요. 뮤지션 가운데 제도권 안에 가장 잘 안착한 사람이 딜런이라서 그렇겠죠, 아마도. 영미권에선 대학에서 텍스트 분석도 하고 있고 논문과 연구서도 나왔고. 팬심이나 여타의 수상 실적뿐 아니라 학문 제도적인 문학적 검증을 어느 정도 통과해 있는 사람이라는 점, 다른 뮤지션들 중에서 그런 단계에 있거나 넘어선 사람들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어쨌든 안전한 선택이긴 한데, 그걸 놓고 그것밖에 못 하느냐 vs 그거라도 해서 다행이다 둘로 관점이 갈리는 듯...
저는 이런 상황에서 한림원의 결정을 일단 실정성을 획득한 종교제도 비슷한 걸로 놓고 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말하자면 점복관의 신탁이 누구에게 떨어졌는가 하는 것인데, 그 결과나 과정 자체는 합리적으로 납득할 수 없지만 그 결과를 이끌어낸 정치사회적, 이론적 배경들은 추론할 수 있는. 구밀복검님이 던진 논점에 대해서 우리끼리 논쟁은 가능할 텐데, 한림원의 발언을 레퍼런스로 놓고는 도저히 논쟁할 수 없을 듯해요
전 예술의 통합적 내러톨로지 이론 --> 이런 거 좀 만들어 봐 주세요 ㄷㄷㄷ
밥 딜런은 부합하는 대상인가? --> 이건 진짜로 밥 딜런을 들입다 분석해 봐야 약간이라도 알 수 있겠는. 토스토스.
뭐 밥 딜런은 노벨상을 받을 준비가 차고 넘치죠... 아닌가?!
---- 추가
두번째 질문, 밥 딜런은 부합하는 대상인가? 에 대한 대답은 첫번째 질문을 건너뛰고 나이브하게는 가능할 것 같아요. 뮤지션 가운데 제도권 안에 가장 잘 안착한 사람이 딜런이라서 그렇겠죠, 아마도. 영미권에선 대학에서 텍스트 분석도 하고 있고 논문과 연구서도 나왔고. 팬심이나 여타의 수상 실적뿐 아니라 학문 제도적인 문학적 검증을 어느 정도 통과해 있는 사람이라는 점, 다른 뮤지션들 중에서 그런 단계에 있거나 넘어선 사람들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어쨌든 안전한 선택이긴 한데, 그걸 놓고 그것밖에 못 하느냐 vs 그거라도 해서 다행이다 둘로 관점이 갈리는 듯...
아 참 한림원은 50년이 지난 후에 후보 리스트는 공개하잖아요. (노친네들 느리기는 엄청...) 위키를 보니 62년도에 스타인벡이 수상했을 때 논란이 엄청 많았고 수준도 안 되는 작가에게 시상했다고 까였는데 50년 뒤에 공개된 최종 리스트를 보고 경위를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고 해요. 최종 후보 5명이 다 고만고만해서 그나마 개중에 뽑은 거라고. 로버트 그레이브스, 장 아누이, 로렌스 뒤렐(누구지 이이는;;), 카렌 블릭센이 최종심에 올랐다는군요. 이번에 최종심에 누가 올라갔는지 알면 정말 불이 나게 까이겠죠.
그런데 한국의 문학상들도 수상에 대해 성의 있는 설명을 하거나 하지는 않죠? 한국 문인들이 동인문학상 같은 제도에 대해 어떤 평가를 하고 있는지 궁금하긴 해요.
그런데 한국의 문학상들도 수상에 대해 성의 있는 설명을 하거나 하지는 않죠? 한국 문인들이 동인문학상 같은 제도에 대해 어떤 평가를 하고 있는지 궁금하긴 해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원래 제가 쓰려던 글 내용의 일부를 이 글의 테마와 맞추어서 여기에 리플로 쓸 수 있게 되었어요. 어째 글의 궁극적인 주제와는 상관없는 리플이 되어버렸지만, 글의 뒷받침하는 내용과는 상당히 상관이 있을 것 같은 제 나름의 망상을 써보았습니다.;; 혹시 무례한 것이라면 죄송합니다. 그리고 이 리플의 사실관계에 대해서도 많이 지적해주세요. (욕하지는 말아주세요 ㅠㅠ) 제가 글솜씨가 딸리고 또 생각이 말로 정리가 잘 안 되어서, 글을 여러 번 퇴고하고서야 이 리플을 답니다. 그래도 약간 문장이 만연체?인듯
노래...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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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감사합니다. 원래 제가 쓰려던 글 내용의 일부를 이 글의 테마와 맞추어서 여기에 리플로 쓸 수 있게 되었어요. 어째 글의 궁극적인 주제와는 상관없는 리플이 되어버렸지만, 글의 뒷받침하는 내용과는 상당히 상관이 있을 것 같은 제 나름의 망상을 써보았습니다.;; 혹시 무례한 것이라면 죄송합니다. 그리고 이 리플의 사실관계에 대해서도 많이 지적해주세요. (욕하지는 말아주세요 ㅠㅠ) 제가 글솜씨가 딸리고 또 생각이 말로 정리가 잘 안 되어서, 글을 여러 번 퇴고하고서야 이 리플을 답니다. 그래도 약간 문장이 만연체?인듯
노래를 문학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는가? 이 논의는 어찌보면 그냥 단순하게 처리할 수 있는 문제이기도 하고, 어찌보면 매우 유의미한 토론거리이기도 해요.
1. 이 논의는 그냥 별 거 아닌 문제이다. 쪽으로 생각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뉴턴 역학의 시간, 공간 개념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의 시공간 개념은 그 기저에 깔려있는 패러다임 자체가 다릅니다. 당연히 이 개념들은 상당히 불연속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두 개념 사이에서 (같다고는 보지 못하지만) 어떤 연속적으로 이어지는(연속적-이라는 이 표현이 대단히 맘에 안 들지만 어쨌든) 특징적인 뭔가를 느끼기 때문에, 고전역학의 time & space 에서 -> 상대성이론의 spacetime 으로 같은 용어를 연속적으로 (합치면서) 사용함으로써, 대응되는 두 개념을 인지적으로 함께 묶어서(혹은 상호적으로 견주어서) 생각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뭐, 실제로도 일상적인 환경 – 뉴턴 역학이 적용되는 환경 - 에서 이들 개념이 근사적으로 상당히 같은 현상을 보여주기 때문이기도 하지만요)
마찬가지로 데모크리토스의 원자 개념도 현대 화학의 원자 개념과 불연속적으로 다르겠죠. 하지만 똑같이 ‘원자’라는 용어를 이들에 대해서 쓰죠. 어떠한 개념에 대한 인간의 생각은 (어떤 공통된 특징에 의해서든, 혹은 다른 기제에 의해서든) 유연하게 변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과학적인 개념도 이렇게 이론에 따라 불연속적으로 바뀌지만, 그 이론 하의 개념들 사이에서도 꽤나 사람들은 어떤 일련의 특징의 연속성을 느끼기 때문에, 인지적으로 그 개념들을 함께 묶어서 생각할 수 있는(공통된 용어를 사용할 수 있는) 것이죠.
한편, 과학적인 개념과 달리 인문적 개념은, 그 개념들간의 경계를 나누는 작업의 기준이 상당히 사람들의 주관에 달린 성격의 것이어서(사람들마다 "자기 취향에 따라" 특정 인문적 개념에 대해 그 개념의 어떤 특징을 그 개념의 본질로 여기느냐가 다르겠죠), 그 개념들간의 경계가 달라지는 현상이 발생합니다. 게다가 개념의 본질적 특징이란 것은 "어떤 이론 하에 있느냐에 따라서도" 얼마든지 변할 수도 있는 것이에요. 이런 의미에서 어떤 사람은 노래를 문학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도 있는 것이고, 다른 어떤 이는 그렇지 않을 수 있는 거겠죠. ‘자신이 생각하는 문학의 본질적 특성은 이것이니, 문학의 범주는 여기까지여야 해!’ 이거를 타인에게 강요하면 안 된다고 봅니다.
따라서 저는 어디까지가 문학의 범주인지(노래를 문학의 범주에 포함시켜야 하는지) 자체에 대해서는 하등 관심이 없어요. 사람마다 그 판단이 다를 수 있는 사안이고, 이를 존중해야죠. (무슨 반인륜적이거나 정말 터무니없는 주장이거나 정말 보편적으로 주장할 수 없는 성격의 것만 아니라면 말이죠) 다만 여기에서 저는 무언가 제 머릿속에 원래 들어있었던 것을 이 글의 가르침을 빌어서 되새겨 보려 합니다.
2. 이 논의는 매우 유의미한 토론거리이다. 쪽으로 생각해봅니다. 그래서, (노래를 그 범주에 포함하지 않는 정의 하에서의) 문학이 다른 오락들과 무엇이 다른 특징을 갖고 있다는 말인가? 에 대해 본문이 제시하는 것들에 관련한, 제가 지금까지 갖고 있었던 생각을 꺼내 봐요.
본문에서 느낀 것은 다음 두 가지입니다.
1> 문학은 음(音)이라든지 그림이라든지 영상이라든지에 구속받지 않는다. 따라서 수용자가 생각할 만한 ‘여백, 공백’을 많이 남기기 때문에, 더 활발하고 깊이있는 지적활동이 가능해진다.
2> 문학은 퍼포먼스를 필연적으로 수반하지는 않기 때문에, (노래 등등이 만드는) 어떤 공동체적인 이끌림보다는 (그 문학 특유가 만드는) 개별적 지성들이 활동할 수 있는 여지를 강하게 만들게 된다. (더구나 현대에 이르러서는, 자본의 힘 때문에 이 노래의 공동체적인 ‘이끌림’은 공동체적인 ‘어느곳에서나의 쏠림’이 되어서 공동체적인 ‘스스로 마음먹고 어딘가로 움직임’의 모습을 형성하기도 힘들게 되어버렸다.)
이 두 가지에 상당히 관련되어있다고 나름대로 생각해온 것들을 쓸게요. 저는 문학 이론이라든지 미디어 이론이라든지를 전혀 모르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냥 쓸게요. 말이 안 되는 생각은 피드백받으면서 고쳐나가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매체’의 형식에 대해서 그동안 느낀 것을 쓸게요.
옛날에 저는 라디오보다 TV가 더 고등의 매체인 줄 알았어요. 하지만 아니더군요. 라디오는 음성만 전하고, TV는 음성+영상을 전해요. 그래서 옛 생각에 저는 “라디오는 1(음성)개의 형식만 전하고 TV는 2(음성+영상)개의 형식만 전하니, 당연히 TV는 라디오보다 더 고등의 매체이다”라고만 생각했어요. 반대로, 지금 와서 드는 느낌은, ‘동시에 어떤 형식의 내용을 여럿을 전송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생산자와 수용자가 주고받을 수 있는 내용의 가능성을 어떻게든 더 제약하는 것이 아닌가, 라는 겁니다. 동시에 어떤 음성과 어떤 영상을 전송하는데, 이것이 어떤 대단한 예술적 효과를 내는 것을 의도하지 않는 한은, 이 두 형식에 담긴 내용들은 서로 어떠한 연결점(접점)이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음성으로는 진지한 다큐멘터리가 나오는데 영상으로는 개그콘서트가 나올 수는 없잖아요. 물론 몇몇 예술적인 만화(만화의 형식 : 글+그림)에서, 어떤 cut에 나오는 말풍선의 글과 해당 cut을 채우는 그림이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평행선을 달리는 듯한 전개를 보이는 것도 보긴 봤었는데, 이건 대단히 드문 case라고 생각합니다. 요약하자면, ‘어떤 생산자가 자신의 창작물을 어떤 수용자에게 전달할 때, 그 창작물의 내용을 담는 매체가 동시에 전송할 수 있는(아니, 보내야 하는) 형식의 개수가 많을수록, 오히려 그 생산자와 소비자는, 그 매체가 형식의 개수를 많이 가짐에 따라서, (그 형식들이 각각 별개의 매체들에 들어있다고 가정시에는, 누릴 수도 있었던) 내용의 다양함에 더 심한 제약을 받습니다.
거기에다가, 그 형식 각각이 함의할 수 있는 경우의 수도 그 형식들의 특성마다 다를 겁니다. 추상적인 언어로만 표현되어 있는 문학은, 그것을 보고 수용자가 생각할 수 있는 유의미한 구체성을 띤 현실세계의 경우의 수가 상당히 많겠죠. 음악은, 뭔가 시각적인 형태는 부여하지 않지만, 그 웅장함이라든가 멜랑꼴리함이라든가 등등의 분위기를 전달하는 (사람을 압도하는) 멜로디를 전달함으로 인해서, 그것을 보고 수용자가 생각할 수 있는 유의미한 구체성을 띤 현실세계의 경우의 수가 문학의 그것보다 더 줄어들 것입니다. 아예 시각적인 것을 전달할 수 있는 매체는 더더욱 그 경우의 수가 줄어들 겁니다.(추상화가 아닌 다음에야..) 따라서 수용자는 문학->음악->시각적 매체로 갈 수록, 자신이 주체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영역이 줄어든다는 결론을 얻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자신만의 역할’이 줄어드는 만큼, 더 깊은 사고를 하기 힘듭니다. 대신에 자극을 더 자극적으로 입력받기 용이해질 겁니다.(+ 글을 다 쓰고 난 후, 지금 생각해보니 문학과 음악에 대해 이 단락에서 내린 판단에 좀 회의가 듭니다. ㅠㅠ)
하지만 이러한 것은 어떨까 싶네요. 어떤 매체가 형식이 n개라도, 1개의 주요 형식이 있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n-1)개의 보조 형식들이 있어서, 이 (n-1)개의 보조 형식들이 수용자에게 꽤나 자극적이지 않고 또 꽤나 다양한 맥락에서의 해석이 가능하게끔 하는 거죠. 아니면 진짜 n개 중 복수의 주요 형식들이 수용자의 감성에 거슬리지 않으면서도 나름 평행을 달리는 의미있는 각자만의 작품세계를 형성한다든지. 혹은, 개개의 형식들로는 구현하기 힘든 내용이, 그 형식들이 다중으로 동시에 합쳤을 때만 비로소 상당히 특출나게 이룩할 수 있는 내용도 있을 수 있겠죠(창발?). 이런 구상이 어떻게 가능할지, 제 머리로는 구체적으로 상상이 안 가지만요.
(...문장이 이상해.. 글 다듬기가 이렇게 힘들다니 ㅠㅠ 죄송합니다)
노래를 문학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는가? 이 논의는 어찌보면 그냥 단순하게 처리할 수 있는 문제이기도 하고, 어찌보면 매우 유의미한 토론거리이기도 해요.
1. 이 논의는 그냥 별 거 아닌 문제이다. 쪽으로 생각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뉴턴 역학의 시간, 공간 개념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의 시공간 개념은 그 기저에 깔려있는 패러다임 자체가 다릅니다. 당연히 이 개념들은 상당히 불연속적으로 다른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두 개념 사이에서 (같다고는 보지 못하지만) 어떤 연속적으로 이어지는(연속적-이라는 이 표현이 대단히 맘에 안 들지만 어쨌든) 특징적인 뭔가를 느끼기 때문에, 고전역학의 time & space 에서 -> 상대성이론의 spacetime 으로 같은 용어를 연속적으로 (합치면서) 사용함으로써, 대응되는 두 개념을 인지적으로 함께 묶어서(혹은 상호적으로 견주어서) 생각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뭐, 실제로도 일상적인 환경 – 뉴턴 역학이 적용되는 환경 - 에서 이들 개념이 근사적으로 상당히 같은 현상을 보여주기 때문이기도 하지만요)
마찬가지로 데모크리토스의 원자 개념도 현대 화학의 원자 개념과 불연속적으로 다르겠죠. 하지만 똑같이 ‘원자’라는 용어를 이들에 대해서 쓰죠. 어떠한 개념에 대한 인간의 생각은 (어떤 공통된 특징에 의해서든, 혹은 다른 기제에 의해서든) 유연하게 변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즉, 과학적인 개념도 이렇게 이론에 따라 불연속적으로 바뀌지만, 그 이론 하의 개념들 사이에서도 꽤나 사람들은 어떤 일련의 특징의 연속성을 느끼기 때문에, 인지적으로 그 개념들을 함께 묶어서 생각할 수 있는(공통된 용어를 사용할 수 있는) 것이죠.
한편, 과학적인 개념과 달리 인문적 개념은, 그 개념들간의 경계를 나누는 작업의 기준이 상당히 사람들의 주관에 달린 성격의 것이어서(사람들마다 "자기 취향에 따라" 특정 인문적 개념에 대해 그 개념의 어떤 특징을 그 개념의 본질로 여기느냐가 다르겠죠), 그 개념들간의 경계가 달라지는 현상이 발생합니다. 게다가 개념의 본질적 특징이란 것은 "어떤 이론 하에 있느냐에 따라서도" 얼마든지 변할 수도 있는 것이에요. 이런 의미에서 어떤 사람은 노래를 문학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도 있는 것이고, 다른 어떤 이는 그렇지 않을 수 있는 거겠죠. ‘자신이 생각하는 문학의 본질적 특성은 이것이니, 문학의 범주는 여기까지여야 해!’ 이거를 타인에게 강요하면 안 된다고 봅니다.
따라서 저는 어디까지가 문학의 범주인지(노래를 문학의 범주에 포함시켜야 하는지) 자체에 대해서는 하등 관심이 없어요. 사람마다 그 판단이 다를 수 있는 사안이고, 이를 존중해야죠. (무슨 반인륜적이거나 정말 터무니없는 주장이거나 정말 보편적으로 주장할 수 없는 성격의 것만 아니라면 말이죠) 다만 여기에서 저는 무언가 제 머릿속에 원래 들어있었던 것을 이 글의 가르침을 빌어서 되새겨 보려 합니다.
2. 이 논의는 매우 유의미한 토론거리이다. 쪽으로 생각해봅니다. 그래서, (노래를 그 범주에 포함하지 않는 정의 하에서의) 문학이 다른 오락들과 무엇이 다른 특징을 갖고 있다는 말인가? 에 대해 본문이 제시하는 것들에 관련한, 제가 지금까지 갖고 있었던 생각을 꺼내 봐요.
본문에서 느낀 것은 다음 두 가지입니다.
1> 문학은 음(音)이라든지 그림이라든지 영상이라든지에 구속받지 않는다. 따라서 수용자가 생각할 만한 ‘여백, 공백’을 많이 남기기 때문에, 더 활발하고 깊이있는 지적활동이 가능해진다.
2> 문학은 퍼포먼스를 필연적으로 수반하지는 않기 때문에, (노래 등등이 만드는) 어떤 공동체적인 이끌림보다는 (그 문학 특유가 만드는) 개별적 지성들이 활동할 수 있는 여지를 강하게 만들게 된다. (더구나 현대에 이르러서는, 자본의 힘 때문에 이 노래의 공동체적인 ‘이끌림’은 공동체적인 ‘어느곳에서나의 쏠림’이 되어서 공동체적인 ‘스스로 마음먹고 어딘가로 움직임’의 모습을 형성하기도 힘들게 되어버렸다.)
이 두 가지에 상당히 관련되어있다고 나름대로 생각해온 것들을 쓸게요. 저는 문학 이론이라든지 미디어 이론이라든지를 전혀 모르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냥 쓸게요. 말이 안 되는 생각은 피드백받으면서 고쳐나가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매체’의 형식에 대해서 그동안 느낀 것을 쓸게요.
옛날에 저는 라디오보다 TV가 더 고등의 매체인 줄 알았어요. 하지만 아니더군요. 라디오는 음성만 전하고, TV는 음성+영상을 전해요. 그래서 옛 생각에 저는 “라디오는 1(음성)개의 형식만 전하고 TV는 2(음성+영상)개의 형식만 전하니, 당연히 TV는 라디오보다 더 고등의 매체이다”라고만 생각했어요. 반대로, 지금 와서 드는 느낌은, ‘동시에 어떤 형식의 내용을 여럿을 전송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생산자와 수용자가 주고받을 수 있는 내용의 가능성을 어떻게든 더 제약하는 것이 아닌가, 라는 겁니다. 동시에 어떤 음성과 어떤 영상을 전송하는데, 이것이 어떤 대단한 예술적 효과를 내는 것을 의도하지 않는 한은, 이 두 형식에 담긴 내용들은 서로 어떠한 연결점(접점)이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음성으로는 진지한 다큐멘터리가 나오는데 영상으로는 개그콘서트가 나올 수는 없잖아요. 물론 몇몇 예술적인 만화(만화의 형식 : 글+그림)에서, 어떤 cut에 나오는 말풍선의 글과 해당 cut을 채우는 그림이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평행선을 달리는 듯한 전개를 보이는 것도 보긴 봤었는데, 이건 대단히 드문 case라고 생각합니다. 요약하자면, ‘어떤 생산자가 자신의 창작물을 어떤 수용자에게 전달할 때, 그 창작물의 내용을 담는 매체가 동시에 전송할 수 있는(아니, 보내야 하는) 형식의 개수가 많을수록, 오히려 그 생산자와 소비자는, 그 매체가 형식의 개수를 많이 가짐에 따라서, (그 형식들이 각각 별개의 매체들에 들어있다고 가정시에는, 누릴 수도 있었던) 내용의 다양함에 더 심한 제약을 받습니다.
거기에다가, 그 형식 각각이 함의할 수 있는 경우의 수도 그 형식들의 특성마다 다를 겁니다. 추상적인 언어로만 표현되어 있는 문학은, 그것을 보고 수용자가 생각할 수 있는 유의미한 구체성을 띤 현실세계의 경우의 수가 상당히 많겠죠. 음악은, 뭔가 시각적인 형태는 부여하지 않지만, 그 웅장함이라든가 멜랑꼴리함이라든가 등등의 분위기를 전달하는 (사람을 압도하는) 멜로디를 전달함으로 인해서, 그것을 보고 수용자가 생각할 수 있는 유의미한 구체성을 띤 현실세계의 경우의 수가 문학의 그것보다 더 줄어들 것입니다. 아예 시각적인 것을 전달할 수 있는 매체는 더더욱 그 경우의 수가 줄어들 겁니다.(추상화가 아닌 다음에야..) 따라서 수용자는 문학->음악->시각적 매체로 갈 수록, 자신이 주체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영역이 줄어든다는 결론을 얻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자신만의 역할’이 줄어드는 만큼, 더 깊은 사고를 하기 힘듭니다. 대신에 자극을 더 자극적으로 입력받기 용이해질 겁니다.(+ 글을 다 쓰고 난 후, 지금 생각해보니 문학과 음악에 대해 이 단락에서 내린 판단에 좀 회의가 듭니다. ㅠㅠ)
하지만 이러한 것은 어떨까 싶네요. 어떤 매체가 형식이 n개라도, 1개의 주요 형식이 있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n-1)개의 보조 형식들이 있어서, 이 (n-1)개의 보조 형식들이 수용자에게 꽤나 자극적이지 않고 또 꽤나 다양한 맥락에서의 해석이 가능하게끔 하는 거죠. 아니면 진짜 n개 중 복수의 주요 형식들이 수용자의 감성에 거슬리지 않으면서도 나름 평행을 달리는 의미있는 각자만의 작품세계를 형성한다든지. 혹은, 개개의 형식들로는 구현하기 힘든 내용이, 그 형식들이 다중으로 동시에 합쳤을 때만 비로소 상당히 특출나게 이룩할 수 있는 내용도 있을 수 있겠죠(창발?). 이런 구상이 어떻게 가능할지, 제 머리로는 구체적으로 상상이 안 가지만요.
(...문장이 이상해.. 글 다듬기가 이렇게 힘들다니 ㅠㅠ 죄송합니다)
제가 본문에 쓰지 못한 내용까지 잘 정리하고 패러프레이즈해서 써주셔서 고마워요. (욕하긴 뭘 욕해요 ㅎㅎ;;)
1번은 제가 잘 몰라서 뭐라고 하기 힘든 분야의 비유와 설명인데요, 아마 단어의 가족유사성 비슷한 것을 말씀하셨다고 이해하면 되지 않을까? 싶어요. 말씀하신 내용은 충분히 이해가 됐어요. 그런데 '노래도 문학이다'라는 명제는 반박할 수 없는 것이긴 해요. 모든 문학 교과서들이 노래부터 가르치니까... 다만 구체적으로 '오늘날 노래를 compose하는 사람을 문학 생산자의 범주에 넣는 것은 유의미하다, 아니다 다른 범주로... 더 보기
1번은 제가 잘 몰라서 뭐라고 하기 힘든 분야의 비유와 설명인데요, 아마 단어의 가족유사성 비슷한 것을 말씀하셨다고 이해하면 되지 않을까? 싶어요. 말씀하신 내용은 충분히 이해가 됐어요. 그런데 '노래도 문학이다'라는 명제는 반박할 수 없는 것이긴 해요. 모든 문학 교과서들이 노래부터 가르치니까... 다만 구체적으로 '오늘날 노래를 compose하는 사람을 문학 생산자의 범주에 넣는 것은 유의미하다, 아니다 다른 범주로... 더 보기
제가 본문에 쓰지 못한 내용까지 잘 정리하고 패러프레이즈해서 써주셔서 고마워요. (욕하긴 뭘 욕해요 ㅎㅎ;;)
1번은 제가 잘 몰라서 뭐라고 하기 힘든 분야의 비유와 설명인데요, 아마 단어의 가족유사성 비슷한 것을 말씀하셨다고 이해하면 되지 않을까? 싶어요. 말씀하신 내용은 충분히 이해가 됐어요. 그런데 '노래도 문학이다'라는 명제는 반박할 수 없는 것이긴 해요. 모든 문학 교과서들이 노래부터 가르치니까... 다만 구체적으로 '오늘날 노래를 compose하는 사람을 문학 생산자의 범주에 넣는 것은 유의미하다, 아니다 다른 범주로 보는 것이 생산적이다'가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것 같아요.
2번에 서술하신 내용은 제 생각의 흐름과도 거의 비슷해요. 저도 라디오나 TV, 영화, 게임에 관해서 비슷한 생각을 했더랬어요. 그리고 제안하신 마지막 문단처럼, 많은 사람들은 매체의 진화에 따라 감각을 진화시키고 있다는 생각도 해요. 예를 들어 저보다 나이 많은 세대들은 만화책을 보는 것을 너무나 어려워했어요. 글과 그림을 동시에 지각하는 것이 힘든 거였죠. 영화나 게임도 마찬가지고요. 그래서 미래의 인간은 다종의 지각을 동시에 발현하고 자극을 수용할 수 있는 멀티플레이어가 될 것인지, 인간의 감각과 지각 능력이 환경과 함께 어디까지 공진화할 것인지 궁금하고요. 사실 저는 게임을 하면서 다른 음악을 틀어놓거나 드라마를 한쪽에 조그만 창으로 띄워놓거나 하는 사람들이 너무 경이롭다는...도대체 그런 사람들은 어떻게 그렇게 여러 가지를 동시에 할 수 있는 거죠? ㄷㄷㄷ
이렇게 쓰고 있으니까 내가 진짜 구세대가 됐구나 싶어요. 엥...;;;
1번은 제가 잘 몰라서 뭐라고 하기 힘든 분야의 비유와 설명인데요, 아마 단어의 가족유사성 비슷한 것을 말씀하셨다고 이해하면 되지 않을까? 싶어요. 말씀하신 내용은 충분히 이해가 됐어요. 그런데 '노래도 문학이다'라는 명제는 반박할 수 없는 것이긴 해요. 모든 문학 교과서들이 노래부터 가르치니까... 다만 구체적으로 '오늘날 노래를 compose하는 사람을 문학 생산자의 범주에 넣는 것은 유의미하다, 아니다 다른 범주로 보는 것이 생산적이다'가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것 같아요.
2번에 서술하신 내용은 제 생각의 흐름과도 거의 비슷해요. 저도 라디오나 TV, 영화, 게임에 관해서 비슷한 생각을 했더랬어요. 그리고 제안하신 마지막 문단처럼, 많은 사람들은 매체의 진화에 따라 감각을 진화시키고 있다는 생각도 해요. 예를 들어 저보다 나이 많은 세대들은 만화책을 보는 것을 너무나 어려워했어요. 글과 그림을 동시에 지각하는 것이 힘든 거였죠. 영화나 게임도 마찬가지고요. 그래서 미래의 인간은 다종의 지각을 동시에 발현하고 자극을 수용할 수 있는 멀티플레이어가 될 것인지, 인간의 감각과 지각 능력이 환경과 함께 어디까지 공진화할 것인지 궁금하고요. 사실 저는 게임을 하면서 다른 음악을 틀어놓거나 드라마를 한쪽에 조그만 창으로 띄워놓거나 하는 사람들이 너무 경이롭다는...도대체 그런 사람들은 어떻게 그렇게 여러 가지를 동시에 할 수 있는 거죠? ㄷㄷㄷ
이렇게 쓰고 있으니까 내가 진짜 구세대가 됐구나 싶어요. 엥...;;;
응 글이 길고 빽빽하더라도 글쓴이의 사고의 전개를 드러내는 단초들이 있으면 잘 읽히는 거 같아요. 이렇게 생각했는데-> 이런 지점에서 어떤 구체적인 계기로 수정됐고 -> 생각 -> 수정 -> 그러다 보니 여기까지 왔다 하는 과정이 독자에게 길잡이 역할을 해줘서요. 그런 거 없이 결론만 제시하면 배경을 몰라서 좀 당황스러울 때가 있지요. 저도 제 사고의 전개를 재구성하는 게 되게 힘들어요 헉헉. 늘 현재의 내 생각이 절대적으로 옳은 것처럼 느껴지는데 그건 기만이지 말예요.
위에 쓰신 댓글은 잘 읽고 따라갔어요. 제가 알고 있는 지식이나 생각의 깊이가 얕아서 좋은 답변을 드리지 못해서 미얀...
위에 쓰신 댓글은 잘 읽고 따라갔어요. 제가 알고 있는 지식이나 생각의 깊이가 얕아서 좋은 답변을 드리지 못해서 미얀...
아니면 그 여럿을 하나로 인지하는 것이기도.
http://www.ppt21.com/pb/pb.php?id=free2&no=53329&divpage=11&ss=on&sc=on&keyword=멀티태스킹
http://www.ppt21.com/pb/pb.php?id=free2&no=53329&divpage=11&ss=on&sc=on&keyword=멀티태스킹
2. 1> 에 대해서는... 문학은 음이라든지 그림이라든지 영상이라든지에 구속받지 않는다기보다는 지원을 못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활발하고 깊이있는 지적 활동은 음,그림,영상이 없어서 생긴 여백,공백 때문이 아니라 음,그림,영상으로 표현될 수 없고 글자로면 표현될 수 있는 부분이 아주 많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생각하구요. 수용자의 주체적 생각 영역이 중요한게 아니라 생산자가 전달하려는 수단으로서 그 생산자에게 어떤 것이 유용하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글자가 유용해서 그걸 선택한 사람은 작가가 되는거고 음을 잘 다루는 사람은 ... 더 보기
2. 1> 에 대해서는... 문학은 음이라든지 그림이라든지 영상이라든지에 구속받지 않는다기보다는 지원을 못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활발하고 깊이있는 지적 활동은 음,그림,영상이 없어서 생긴 여백,공백 때문이 아니라 음,그림,영상으로 표현될 수 없고 글자로면 표현될 수 있는 부분이 아주 많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생각하구요. 수용자의 주체적 생각 영역이 중요한게 아니라 생산자가 전달하려는 수단으로서 그 생산자에게 어떤 것이 유용하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글자가 유용해서 그걸 선택한 사람은 작가가 되는거고 음을 잘 다루는 사람은 음악가가 되는거고 영상을 잘 다루는 사람은 드라마나 영화 쪽으로 가겠지요.
2. 2> 에 대해서... 오만과 편견을 예로 들면, 영화에서 엘리자베스가 다아시의 집을 방문하는 장면에서 개인적으로 감탄을 했습니다. 소설을 읽으면서 대충 부자집이니까 크고 화려하겠지... 정도로 생각했던 것을, 영상으로 생생하게 보여주니 어느정도 압도당하면서 이런것은 영화가 좋긴 하네... 하는 생각을 했었죠. 이것은 수용자가 주체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영역을 빼앗겼기 때문에 생기는 장점입니다. 영화의 생산자가 보여주려는대로 받아들여야 가능한 것이죠. 반면에 심리적인 부분은 영화에서 영 표현을 못합니다. 영상,배경음악,배우들의 표정과 대사에서 수용자가 주체적으로 상상해야 하죠. 그런데 소설은 글자로 심리를 직접 묘사하기 때문에 수용자의 주체성은 없어집니다. 하지만 생산자의 의도가 더 잘 전달되기 때문에 이 부분에선 소설이 압도적이죠.
영화평론가 이동진이 영화와 소설을 비교한 적이 있는데 영화로는 생산자 쪽에서 뭔가를 해보기에는 역부족이다... 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는데 가장 큰건 너무 많은 사람이 참여하기 때문에 그만큼 여러 이해관계에 얽매여야 하고 어느 하나를 무시하지 못하다보니 어정쩡한 결과물이 나올수밖에 없다는 거였죠. 영화 상영시간의 제약도 있구요.
저는 소설을 읽을 때 장면장면에 맞는 음악이 나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상상을 했었습니다. 예를 들어 죄와 벌을 읽을 때 로자가 살인을 저지른 후 기나긴 독백이 나오는 장면에서는 데스노트의 L테마 BGM이 나오면 몰입도가 장난이 아니거든요. 스마트폰으로 E북 제작이 가능해졌는데도 그런 배경음악을 제공 못하는것은 독자마다 읽는 속도가 다르기 때문일텐데 게임에서는 이게 가능합니다. 특정 분량의 택스트를 사용자가 버튼을 누를 때마다 보여지게 하는게 가능하기 때문에 거기에 맞춰 배경음악이 나오면 되거든요. 거기에다 게임은 영상도 지원 가능하고, 음악이나 영화처럼 시간의 제약이 있는것도 아닙니다. 매체에 맞는 재구성을 할 필요도 없어요. 그냥 소설 택스트 100% 똑같이 옮긴 다음에 버튼으로 진행 가능하게 하고 거기에 맞는 영상,음악 지원하면 됩니다. 그런데다가 만약 게임만의 장점인 유저의 조작으로 인한 멀티 스토리 진행이나 손맛 같은걸 적용시킬 수 있다면 이건 정말 무적의 매체가 되는거 아닐까 생각하는데... 이런걸 만들 생각을 하는 생산자가 있을런지는 모르겠네요 ㅋ
2. 2> 에 대해서... 오만과 편견을 예로 들면, 영화에서 엘리자베스가 다아시의 집을 방문하는 장면에서 개인적으로 감탄을 했습니다. 소설을 읽으면서 대충 부자집이니까 크고 화려하겠지... 정도로 생각했던 것을, 영상으로 생생하게 보여주니 어느정도 압도당하면서 이런것은 영화가 좋긴 하네... 하는 생각을 했었죠. 이것은 수용자가 주체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영역을 빼앗겼기 때문에 생기는 장점입니다. 영화의 생산자가 보여주려는대로 받아들여야 가능한 것이죠. 반면에 심리적인 부분은 영화에서 영 표현을 못합니다. 영상,배경음악,배우들의 표정과 대사에서 수용자가 주체적으로 상상해야 하죠. 그런데 소설은 글자로 심리를 직접 묘사하기 때문에 수용자의 주체성은 없어집니다. 하지만 생산자의 의도가 더 잘 전달되기 때문에 이 부분에선 소설이 압도적이죠.
영화평론가 이동진이 영화와 소설을 비교한 적이 있는데 영화로는 생산자 쪽에서 뭔가를 해보기에는 역부족이다... 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는데 가장 큰건 너무 많은 사람이 참여하기 때문에 그만큼 여러 이해관계에 얽매여야 하고 어느 하나를 무시하지 못하다보니 어정쩡한 결과물이 나올수밖에 없다는 거였죠. 영화 상영시간의 제약도 있구요.
저는 소설을 읽을 때 장면장면에 맞는 음악이 나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상상을 했었습니다. 예를 들어 죄와 벌을 읽을 때 로자가 살인을 저지른 후 기나긴 독백이 나오는 장면에서는 데스노트의 L테마 BGM이 나오면 몰입도가 장난이 아니거든요. 스마트폰으로 E북 제작이 가능해졌는데도 그런 배경음악을 제공 못하는것은 독자마다 읽는 속도가 다르기 때문일텐데 게임에서는 이게 가능합니다. 특정 분량의 택스트를 사용자가 버튼을 누를 때마다 보여지게 하는게 가능하기 때문에 거기에 맞춰 배경음악이 나오면 되거든요. 거기에다 게임은 영상도 지원 가능하고, 음악이나 영화처럼 시간의 제약이 있는것도 아닙니다. 매체에 맞는 재구성을 할 필요도 없어요. 그냥 소설 택스트 100% 똑같이 옮긴 다음에 버튼으로 진행 가능하게 하고 거기에 맞는 영상,음악 지원하면 됩니다. 그런데다가 만약 게임만의 장점인 유저의 조작으로 인한 멀티 스토리 진행이나 손맛 같은걸 적용시킬 수 있다면 이건 정말 무적의 매체가 되는거 아닐까 생각하는데... 이런걸 만들 생각을 하는 생산자가 있을런지는 모르겠네요 ㅋ
약간 인지적 부담이랄까 그런 측면으로만 보았는데,
인간이 어떠한 개념을 머릿속에서 입력받고 출력할까-에 대부분의 상황에서 가장 적합한 것이 글자, 언어인 것 같네요.
소설에서 어떤 '광경을 묘사'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말로 이러쿵저러쿵 늘어뜨리는 것보다 영화처럼 한번에 생생한 영상과 음악과 배우들의 연기로써 보여주는 것이 나을지도. 반면 '내면 심리를 묘사'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영화적인 요소들로 이리저리 보여주면서 독자보고 스스로 상상하게 하는 것보다는 소설처럼 직접 묘사하는 것이 나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이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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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어떠한 개념을 머릿속에서 입력받고 출력할까-에 대부분의 상황에서 가장 적합한 것이 글자, 언어인 것 같네요.
소설에서 어떤 '광경을 묘사'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말로 이러쿵저러쿵 늘어뜨리는 것보다 영화처럼 한번에 생생한 영상과 음악과 배우들의 연기로써 보여주는 것이 나을지도. 반면 '내면 심리를 묘사'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영화적인 요소들로 이리저리 보여주면서 독자보고 스스로 상상하게 하는 것보다는 소설처럼 직접 묘사하는 것이 나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이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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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 인지적 부담이랄까 그런 측면으로만 보았는데,
인간이 어떠한 개념을 머릿속에서 입력받고 출력할까-에 대부분의 상황에서 가장 적합한 것이 글자, 언어인 것 같네요.
소설에서 어떤 '광경을 묘사'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말로 이러쿵저러쿵 늘어뜨리는 것보다 영화처럼 한번에 생생한 영상과 음악과 배우들의 연기로써 보여주는 것이 나을지도. 반면 '내면 심리를 묘사'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영화적인 요소들로 이리저리 보여주면서 독자보고 스스로 상상하게 하는 것보다는 소설처럼 직접 묘사하는 것이 나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이 들어요.
영화가, 그 매체적인 요소들만을 순수히 살리기 위해, 큰 자본과 많은 사람들이 참여함에도 작가가 자신의 정신세계를 제대로 그 영화에 구현할 수 있다면은 더 대박일 듯 해요. 나중에 CG가 발달하고 영화 제작 비용이 더 싸지면 가능하려나요.
옛날에 YS가 나오는 어떤 어린이책이 있었어요. 44페이지를 읽으면 81페이지로 가는 1선택지, 39페이지로 가는 2선택지가 있어요. 1선택지를 택하면, YS가 사탕을 줘요. 여기에서 99페이지로 가는 3선택지(사탕을 먹고 승리자가 된다), 28페이지로 가는 4선택지(사탕을 거절하고 1페이지로 돌아간다)가 나오고.. 또 2선택지를 택하면, ... 이런 식의 구성이었어요.(구체적인 내용은 제가 꾸며낸 겁니다만, YS가 이 책에 나온 것은 사실입니다) 사실 독자가 스스로 시퀀스를 새로이 구성하게끔 하는 어떤 미디어 형식적인 시도를 했던 책인 것 같아요. 비록 3류 어린이책에 불과했지만요. 여기에 음악, 영상 등등의 적용은 컴퓨터-인터넷을 이용하면 충분히 구현할 수 있을 법해요. 이론상으로는.
인간이 어떠한 개념을 머릿속에서 입력받고 출력할까-에 대부분의 상황에서 가장 적합한 것이 글자, 언어인 것 같네요.
소설에서 어떤 '광경을 묘사'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말로 이러쿵저러쿵 늘어뜨리는 것보다 영화처럼 한번에 생생한 영상과 음악과 배우들의 연기로써 보여주는 것이 나을지도. 반면 '내면 심리를 묘사'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영화적인 요소들로 이리저리 보여주면서 독자보고 스스로 상상하게 하는 것보다는 소설처럼 직접 묘사하는 것이 나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이 들어요.
영화가, 그 매체적인 요소들만을 순수히 살리기 위해, 큰 자본과 많은 사람들이 참여함에도 작가가 자신의 정신세계를 제대로 그 영화에 구현할 수 있다면은 더 대박일 듯 해요. 나중에 CG가 발달하고 영화 제작 비용이 더 싸지면 가능하려나요.
옛날에 YS가 나오는 어떤 어린이책이 있었어요. 44페이지를 읽으면 81페이지로 가는 1선택지, 39페이지로 가는 2선택지가 있어요. 1선택지를 택하면, YS가 사탕을 줘요. 여기에서 99페이지로 가는 3선택지(사탕을 먹고 승리자가 된다), 28페이지로 가는 4선택지(사탕을 거절하고 1페이지로 돌아간다)가 나오고.. 또 2선택지를 택하면, ... 이런 식의 구성이었어요.(구체적인 내용은 제가 꾸며낸 겁니다만, YS가 이 책에 나온 것은 사실입니다) 사실 독자가 스스로 시퀀스를 새로이 구성하게끔 하는 어떤 미디어 형식적인 시도를 했던 책인 것 같아요. 비록 3류 어린이책에 불과했지만요. 여기에 음악, 영상 등등의 적용은 컴퓨터-인터넷을 이용하면 충분히 구현할 수 있을 법해요. 이론상으로는.
http://redtea.kr/?b=34&n=328&c=1255
위 링크의 "게임 시나리오가 작품성이 좋으면 노벨문학상을 받을 수 있는가" 문제가
단순히 언어의 형태 이상의 차원에서 논의되어야 할 문제라는 것을 알겠어요.
자연어(한국어, 영어, ...)이냐 프로그래밍 언어(if ~ then -)이냐보다 더 심오한 개념이 숨어있었다니.
위 링크의 "게임 시나리오가 작품성이 좋으면 노벨문학상을 받을 수 있는가" 문제가
단순히 언어의 형태 이상의 차원에서 논의되어야 할 문제라는 것을 알겠어요.
자연어(한국어, 영어, ...)이냐 프로그래밍 언어(if ~ then -)이냐보다 더 심오한 개념이 숨어있었다니.
아 그런 것인가? 제가 이번에 좀 멀찌감치서 쌍안경으로 보고 있다는 느낌은 있어요. 아마 고지식한 모범생 기질 비슷한 것이 남아 있어서 그런지도 몰라요. 한국문학은 공무도하가부터, 서양문학은 일리아스부터 펼쳐놓고 레퍼런스로 찾는 습관 비슷한 거예요. 그게 저한테는 너무 당연한 일이다 보니 다니우스가 뭐랄까 뻔한 소리를 순진하게 하고 있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크게 반감이 생기지는 않았거든요. 물론 밥 딜런의 예술을 설명하면서 호메로스나 사포를 예로 드는 것은 너무나 헐겁고 무의미한 일이긴 하지요. 딜런의 영감의 원천 가운데 그리스가 있다면 몰라도... 다만 '노래<=문학'이란 명제 자체는 반박할 수 없었어용.
하시는 말씀이야말로 스웨덴 한림원의 오만을 보여주는 게 아닌가요. 그네가 생각하기에 자신들이 표방하는 세계문학계가 음악계보다 철저히 우위에 있다고 생각해야 본문처럼 그 가치를 '인정'해줘야할 당위가 생길테니까요. 어이없는 노릇이죠. 지네가 주거나 말거나 그 세계는 지들의 내적 기준에 입각해서 알아서 굴러갑니다. 지금부터 노벨 문학상이 노벨 예술상, 혹은 노벨 서사학상이 될 게 아닌 한에야(몸젠이나 처칠 등의 사례를 생각해본다면 딱히 이런 이벤트성 수상 이후로 그리 될 리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저러한 고려 위에 선 수상이란 도리어 철저히 파인 아트와 대중예술을 갈라놓고, 그 대중예술 중 정말 위대한 성취를 이룬 소수만이 파인 아트로 올라설 자격을 얻는다는 우열 구도 속에서나 가능할텐데요. 코헨이 말 잘했네요.
아, 저는 이게 이벤트인지 아닌지 내년까지는 일단 기다려볼까 해요. 작년에 알렉시예비치에게 상을 주는 걸로 변화(?)의 신호탄을 쏜 셈인데, 그때는 그냥 늘 있던 일회성 해프닝이겠거니 했거든요. 사실상 러시아-우크라이나 간의 국제정치적 고려만 크게 보였고요. 그리고서 올해 결과를 봤더니 2연벙을 치는 게 정말 뭔가 키를 틀긴 튼 거 아닌가 하는 느낌적 느낌이 왔어요. (뭐 물론 증거는 없고 느낌요. 사설업체의 속을 어찌 알..) 3연벙이면 좀더 확실해지겠죠.
한림원이 오만이란 게 사실 게으른 관료주의가 아닌가 싶어요. 외부 시선... 더 보기
한림원이 오만이란 게 사실 게으른 관료주의가 아닌가 싶어요. 외부 시선... 더 보기
아, 저는 이게 이벤트인지 아닌지 내년까지는 일단 기다려볼까 해요. 작년에 알렉시예비치에게 상을 주는 걸로 변화(?)의 신호탄을 쏜 셈인데, 그때는 그냥 늘 있던 일회성 해프닝이겠거니 했거든요. 사실상 러시아-우크라이나 간의 국제정치적 고려만 크게 보였고요. 그리고서 올해 결과를 봤더니 2연벙을 치는 게 정말 뭔가 키를 틀긴 튼 거 아닌가 하는 느낌적 느낌이 왔어요. (뭐 물론 증거는 없고 느낌요. 사설업체의 속을 어찌 알..) 3연벙이면 좀더 확실해지겠죠.
한림원이 오만이란 게 사실 게으른 관료주의가 아닌가 싶어요. 외부 시선으로 감시받지 않는 권력은 내부정치에만 몰두하면서 관례적으로 하던 짓만 계속하기 마련인데, 그나마 달라지려고 하는 움직임이 보인다 싶으면 외부에서 긍정의 시그널을 주는 편이 낫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있고요.
저는 대중예술과 소위 고급예술 둘 사이에 차이가 실제로 존재함을 부정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두 층이 영원히 서로 접점 없이 가는 이상 결국 독자를 잃고 더 빨리 망하는 건 고급예술 쪽이 아닐까 싶고, 그래서 한림원이 딜런에게 구애를 보내고 '이쪽으로' 끌어들이려고 하는 공작(?)에 큰 반감은 없다는...
한림원이 오만이란 게 사실 게으른 관료주의가 아닌가 싶어요. 외부 시선으로 감시받지 않는 권력은 내부정치에만 몰두하면서 관례적으로 하던 짓만 계속하기 마련인데, 그나마 달라지려고 하는 움직임이 보인다 싶으면 외부에서 긍정의 시그널을 주는 편이 낫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있고요.
저는 대중예술과 소위 고급예술 둘 사이에 차이가 실제로 존재함을 부정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두 층이 영원히 서로 접점 없이 가는 이상 결국 독자를 잃고 더 빨리 망하는 건 고급예술 쪽이 아닐까 싶고, 그래서 한림원이 딜런에게 구애를 보내고 '이쪽으로' 끌어들이려고 하는 공작(?)에 큰 반감은 없다는...
아니요. 반대로 섞이면 섞일수록 파인 아트가 더 먼저 저뭅니다. 밥 딜런이 가진 내러톨로지를 탐구할 문학도는 그가 노벨상을 타든 말든 있을 거에요. 하지만 어느 밥 딜런팬이 그의 노벨상 수상을 계기로 문학에 관심 가지리라고 생각하긴 어렵죠. 마이클 잭슨 뮤직비디오에 아카데미 작품상을 준다고 전세계 잭슨매니아들이 쉰들러리스트를 챙겨볼까요. 차라리 뮤직비디오나 광고 영상 매체도 수상 리스트에 혼재되어 아카데미가 본래 가져야할 영화수상 집단으로서 잣대가 흔들릴 여지가 많겠죠. 아니, 정말 모이라님 말대로 된다면 백퍼센트 그리 될 겁니다.... 더 보기
아니요. 반대로 섞이면 섞일수록 파인 아트가 더 먼저 저뭅니다. 밥 딜런이 가진 내러톨로지를 탐구할 문학도는 그가 노벨상을 타든 말든 있을 거에요. 하지만 어느 밥 딜런팬이 그의 노벨상 수상을 계기로 문학에 관심 가지리라고 생각하긴 어렵죠. 마이클 잭슨 뮤직비디오에 아카데미 작품상을 준다고 전세계 잭슨매니아들이 쉰들러리스트를 챙겨볼까요. 차라리 뮤직비디오나 광고 영상 매체도 수상 리스트에 혼재되어 아카데미가 본래 가져야할 영화수상 집단으로서 잣대가 흔들릴 여지가 많겠죠. 아니, 정말 모이라님 말대로 된다면 백퍼센트 그리 될 겁니다. 감당 못할 정도로 범위가 늘어나면 언제나 수상이야 구색 맞추기로 들어가기 십상이니까요. 아, 그럴수록 더욱 중시될 잣대란 매체 내적 완성도보단 그놈의 정치적 올바름과 사회적 문제의식일테니 한림원 입장에선 참으로 바람직한 방향이려나요.
별로 그럴 거 같진 않지만 이번 수상을 계기로 노벨상의 기조가 노벨 서사학상쯤으로 바뀐다고 한번 생각해볼까요? 음... 글쎄, 전 대체 프로야구 올해의 선수상이 올해의 야구인상으로 바뀌어 선수/감독/구단 프론트/심판/팬 등등 누구 하나 골라준다고 하는 것과 어떤 차이를 지닐지 모르겠네요. 대체 이게 변변한 의미값을 지니기나 할까요. 기존 야구선수의 활약에 대한 내적/물질적 보상체계라는 의미값조차 퇴색되기 십상이겠죠(말하고 보니 밥 딜런 수상 이전부터 노벨 문학상은 충분히 올해의 야구인상스러웠다는 게 걸리긴 하네요.). 정 그런 게 필요한 거 같으면 새로 만들던가요. 그래서 전 노벨상이 걍 문학상에만 그쳤으면 좋겠습니다. 평론은 철저히 아카데미의 영역인 만큼 예술계의 내적 보상 체계로 온전히 기능하긴 어렵고 때문에 문학예술계가 갖고 있는 최고 권위의 보상 체계는 노벨상일 수밖에 없어요. 대중예술은 굳이 스웨덴 한림원이 나서서 설치지 않아도 체제 내적 보상이 알아서 굴러갑니다. 그중에서도 밥 딜런은 더 이상 그런 게 필요없을만한 위상임이 증명된 케이스고요. 알렉시예비치로 대변되는 저널리즘에 호소하는 수상도 마음에 안 드는데(정작 그러면서 살만 루슈디는 지들 목숨이 아까운지 줄 생각도 않는 쫄보 근성이란... 제놈들의 말잔치가 결국 학삐리의 군자연이란 거죠) 저딴 짓이나 하고 있으니 참 심란하기 그지 없습니다.
문학계 많은 이들이 이번 수상에 한마디씩 하는 걸 두고 자신의 발화가 갖는 의미값에 훼손으로 느껴 저러는 것 같다고 말씀하셨는데요. 차라리 전 더 이상 얼마 남아있지 않은, 그중에서도 믿을만하지 못했으나 그 이름값으로 인해 최고 권위의 보상체계로 군림하던 잣대가 결국 그 보상체계로서 기능할 수 없게 된 현실에 대한 박탈감과 설움에 가까워 보이네요.
별로 그럴 거 같진 않지만 이번 수상을 계기로 노벨상의 기조가 노벨 서사학상쯤으로 바뀐다고 한번 생각해볼까요? 음... 글쎄, 전 대체 프로야구 올해의 선수상이 올해의 야구인상으로 바뀌어 선수/감독/구단 프론트/심판/팬 등등 누구 하나 골라준다고 하는 것과 어떤 차이를 지닐지 모르겠네요. 대체 이게 변변한 의미값을 지니기나 할까요. 기존 야구선수의 활약에 대한 내적/물질적 보상체계라는 의미값조차 퇴색되기 십상이겠죠(말하고 보니 밥 딜런 수상 이전부터 노벨 문학상은 충분히 올해의 야구인상스러웠다는 게 걸리긴 하네요.). 정 그런 게 필요한 거 같으면 새로 만들던가요. 그래서 전 노벨상이 걍 문학상에만 그쳤으면 좋겠습니다. 평론은 철저히 아카데미의 영역인 만큼 예술계의 내적 보상 체계로 온전히 기능하긴 어렵고 때문에 문학예술계가 갖고 있는 최고 권위의 보상 체계는 노벨상일 수밖에 없어요. 대중예술은 굳이 스웨덴 한림원이 나서서 설치지 않아도 체제 내적 보상이 알아서 굴러갑니다. 그중에서도 밥 딜런은 더 이상 그런 게 필요없을만한 위상임이 증명된 케이스고요. 알렉시예비치로 대변되는 저널리즘에 호소하는 수상도 마음에 안 드는데(정작 그러면서 살만 루슈디는 지들 목숨이 아까운지 줄 생각도 않는 쫄보 근성이란... 제놈들의 말잔치가 결국 학삐리의 군자연이란 거죠) 저딴 짓이나 하고 있으니 참 심란하기 그지 없습니다.
문학계 많은 이들이 이번 수상에 한마디씩 하는 걸 두고 자신의 발화가 갖는 의미값에 훼손으로 느껴 저러는 것 같다고 말씀하셨는데요. 차라리 전 더 이상 얼마 남아있지 않은, 그중에서도 믿을만하지 못했으나 그 이름값으로 인해 최고 권위의 보상체계로 군림하던 잣대가 결국 그 보상체계로서 기능할 수 없게 된 현실에 대한 박탈감과 설움에 가까워 보이네요.
음 저는 노벨문학상쯤 되는 제도(100년 이상의 역사, 서구어로 미번역 포함 전 세계의 출판물 대상, 상금 10억)에는 합리적 보상체계로서의 의무보다 더 중요한 상징적 의무들이 있다고 생각해요. 합의된 계 내에서 합당한 자에게 합당한 몫이 돌아가는가, 창작자들이 노력하면 언젠가는 그 체계 내에서 정당한 보상을 받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좀더 로컬한 하위 수상 시스템들로도 해결 가능하다고 보고요. 보상체계가 얼마 남아 있지 않다고 하셨는데 제가 과문해서 맨부커나 카프카나 공쿠르 뷔히너를 위시해서 해외 문학상들이 그렇게 망가졌는지? 어떤지는 잘 몰라요. 사실 그건 궁금하긴 하네요. 이번에 한강의 맨부커인... 더 보기
음 저는 노벨문학상쯤 되는 제도(100년 이상의 역사, 서구어로 미번역 포함 전 세계의 출판물 대상, 상금 10억)에는 합리적 보상체계로서의 의무보다 더 중요한 상징적 의무들이 있다고 생각해요. 합의된 계 내에서 합당한 자에게 합당한 몫이 돌아가는가, 창작자들이 노력하면 언젠가는 그 체계 내에서 정당한 보상을 받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좀더 로컬한 하위 수상 시스템들로도 해결 가능하다고 보고요. 보상체계가 얼마 남아 있지 않다고 하셨는데 제가 과문해서 맨부커나 카프카나 공쿠르 뷔히너를 위시해서 해외 문학상들이 그렇게 망가졌는지? 어떤지는 잘 몰라요. 사실 그건 궁금하긴 하네요. 이번에 한강의 맨부커인터내셔널 수상을 보고 약간 뜨아 하긴 했는데, 뭐 한국문학이야 그들에게 미지의 영역이니 그럴 수 있겠는...
보상체계에 대한 기대 문제에 관해 첨언하자면, 영미 독자들이 이 수상에 흥분하는 건 뭐 이해가 가요. 나름 동일 언어 생태계 내에서 밥 딜런의 언어를 좀더 잘 이해하고 평가할 수 있는 사람들의 공고한 취향이 그렇게 만드는 거라고 생각할 수 있으니까. 저 같아도 만일 신경숙 같은 사람이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그러면 당연히 크게 열을 받겠죠. 그때는 당연히 노벨상의 '정당한 보상체계'로서의 기능을 떠올릴 것이고, 한림원 이것들 미쳤네 하고 생각할 거 같아요. 그렇게 공정성에 대한 의문과 분노가 일어나려면 '도저히 받을 수 없는 사람이 받았다'는 확신이 필요해요. 구밀복검님은 예전에 (http://redtea.kr/?b=34&n=328&c=1235) 밥 딜런의 전 앨범을 들어보셨다고 하셨고 짤막하게 문학 내적인 평가의 코멘트를 해주셨지요. 그렇다면 그 기반에서 딜런을 높이 평가하는 독자들과 토론을 출발시킬 수 있겠지요. 딜런의 노랫말들이 정당한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인지 과장된 것인지.
그런데 지금 한국의 독자들, 평론가들이 흥분하는 지점은 밥 딜런 작품의 내적 완성도 문제가 아니거든요. 조재룡 씨의 표현이 상당히 상징적인데,
"어차피 관심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필립 로스가 받으면 좋겠다고 어렴풋이 생각하고 있었고 하루키나 뭐 다른 후보 중 누구에게 돌아가도 이유는 찾을 수 있다…그런데 이건 좀 웃기다. 밥 딜런?(…) 고작 밥 딜런? 개인적으로 밥 딜런 음악을 전혀 좋아하지 않아서 그런지, 아니면 이와 별개도 몹시 기분이 나쁘기까지 하네. 문학이 노래로 표현될 거였으면 왜 백지 위에 미치도록 글을 쓰겠는가? 노벨음악상? 노벨 가사상? 노벨 서정적 노래 잘하기 아름다운 자연 예찬 통기타 반주상" (http://news.joins.com/article/20723900)
이런 거거든요. 하루키는 되지만 밥 딜런은 안 된다는 건, '순번 정해져 있는 밥그릇 뺏아서 다른 집 애한테 주지 말라'는 이야기처럼 편협하고 방어적으로 들려요. 그의 페이스북 계정을 찾지 못한 탓에 더 이상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됐는지 모르겠네요. 제 입장에서는, 정확하게 말하자면 하루키에 관해서는 나름대로 문학적 평가를 일단 내리고 있으나 딜런은 아직 잘 모르는 입장에서는 조재룡 씨와는 정반대의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어요. 아마 대다수 한국인 독자들이 저와 비슷한 처지일 텐데, (조재룡 씨가 밥 딜런을 그렇게 잘 이해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인간이 자기가 모르는 존재에 대해 분노하는 현상은 좀 야만적이지 않은가요.
섞일수록 고급예술이 먼저 저문다, 는 말씀에 대해서는 글쎄요. 일단 제 이야기를 해보자면, 저는 밥 딜런의 노래를 듣기는 이런 저런 경로로 조금씩 들어 보았지만 굳이 그의 노랫말을 뜯어볼 생각은 해본 적이 없어요. 영어를 편안하게 느끼지 않는 저 같은 사람한테 외국어 가사 해석은 품이 꽤 많이 드는 노동의 영역이거든요. 그런데 밥 딜런의 가사에 노벨문학상의 가치가 있다는 문학적 해석이 나왔어요. 그러면 수용자든 창작자든 자세가 달라지죠. 저 같은 사람들은 노래를 들을 때 가사에 좀더 관심을 기울여 들을 것이고, 창작자들은 작사를 할 때 그들이 생산한 작품을 '문학적 기준'으로 평가하고 있는 청중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거예요. '내가 왜 이 따위 바보같은 노래를 하고 있는가'에 의문을 품는 가수들이 과감하게 발언을 할 수 있는 가능성도 생길 수 있고요.
연관된 문제로 기존의 밥 딜런 팬들이 문학에 관심을 가지게 될 것인가, 저는 관심을 가질 거 같은데... 저는 밥 딜런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미 어느 정도 문학적 취향을 가진 사람들일 거라는 선입견이 있어요. 밥 딜런은 솔직히 가창력도 떨어지고;; 마잭 같은 월드스타도 아니고 그런데요. 순진한 의문이지만 딜런을 좋아한다면 당연히 가사를 좋아하는 거 아닌가요? 최소한 평범 이상의 독해력을 가진 독자들이라는 건데, 문학이 그런 사람들을 (잠정적) 독자로 상정하지 않는다면 누구를 상정해야 할지 있을까 의문이에요. 최소한 밥 딜런 연구서를 찾아볼 딜런 팬들은 있겠죠. 문학 연구서를 읽어볼 엄두가 안 나던 사람들이 밀도 있는 독서의 기회를 가질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렇게 해서 생각지 못했던 쪽으로 독서가 확장될 수도 있고요. 실제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급 독서'에 갈증을 느끼고 있으면서도 뭘 읽을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지, 아니 읽을 마음을 내는 것 자체가 얼마나 힘든지 3, 40대 직장인들, 특히 여성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면 금방 알 수 있어요. 그게 영미권이라고 특히 다를 거 같진 않아요. 일정 수준 이상의 독해력과 취향, 감식력을 갖춘 독자 대중을 얼마나 많이 확보하는가 하는 것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현재 고급문학의 생존이 걸린 문제인데, 그 문제에 대한 대답이 '밥 딜런 no, 하루키 yes'? 혹은 사회 현상이나 저널리즘, 정치이념에서 멀리 떨어져 초연하게 대학가와 문학판 바깥으로 결코 나오기 힘든 작가들? 그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보상체계에 대한 기대 문제에 관해 첨언하자면, 영미 독자들이 이 수상에 흥분하는 건 뭐 이해가 가요. 나름 동일 언어 생태계 내에서 밥 딜런의 언어를 좀더 잘 이해하고 평가할 수 있는 사람들의 공고한 취향이 그렇게 만드는 거라고 생각할 수 있으니까. 저 같아도 만일 신경숙 같은 사람이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그러면 당연히 크게 열을 받겠죠. 그때는 당연히 노벨상의 '정당한 보상체계'로서의 기능을 떠올릴 것이고, 한림원 이것들 미쳤네 하고 생각할 거 같아요. 그렇게 공정성에 대한 의문과 분노가 일어나려면 '도저히 받을 수 없는 사람이 받았다'는 확신이 필요해요. 구밀복검님은 예전에 (http://redtea.kr/?b=34&n=328&c=1235) 밥 딜런의 전 앨범을 들어보셨다고 하셨고 짤막하게 문학 내적인 평가의 코멘트를 해주셨지요. 그렇다면 그 기반에서 딜런을 높이 평가하는 독자들과 토론을 출발시킬 수 있겠지요. 딜런의 노랫말들이 정당한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인지 과장된 것인지.
그런데 지금 한국의 독자들, 평론가들이 흥분하는 지점은 밥 딜런 작품의 내적 완성도 문제가 아니거든요. 조재룡 씨의 표현이 상당히 상징적인데,
"어차피 관심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필립 로스가 받으면 좋겠다고 어렴풋이 생각하고 있었고 하루키나 뭐 다른 후보 중 누구에게 돌아가도 이유는 찾을 수 있다…그런데 이건 좀 웃기다. 밥 딜런?(…) 고작 밥 딜런? 개인적으로 밥 딜런 음악을 전혀 좋아하지 않아서 그런지, 아니면 이와 별개도 몹시 기분이 나쁘기까지 하네. 문학이 노래로 표현될 거였으면 왜 백지 위에 미치도록 글을 쓰겠는가? 노벨음악상? 노벨 가사상? 노벨 서정적 노래 잘하기 아름다운 자연 예찬 통기타 반주상" (http://news.joins.com/article/20723900)
이런 거거든요. 하루키는 되지만 밥 딜런은 안 된다는 건, '순번 정해져 있는 밥그릇 뺏아서 다른 집 애한테 주지 말라'는 이야기처럼 편협하고 방어적으로 들려요. 그의 페이스북 계정을 찾지 못한 탓에 더 이상 이야기가 어떻게 진행됐는지 모르겠네요. 제 입장에서는, 정확하게 말하자면 하루키에 관해서는 나름대로 문학적 평가를 일단 내리고 있으나 딜런은 아직 잘 모르는 입장에서는 조재룡 씨와는 정반대의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어요. 아마 대다수 한국인 독자들이 저와 비슷한 처지일 텐데, (조재룡 씨가 밥 딜런을 그렇게 잘 이해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인간이 자기가 모르는 존재에 대해 분노하는 현상은 좀 야만적이지 않은가요.
섞일수록 고급예술이 먼저 저문다, 는 말씀에 대해서는 글쎄요. 일단 제 이야기를 해보자면, 저는 밥 딜런의 노래를 듣기는 이런 저런 경로로 조금씩 들어 보았지만 굳이 그의 노랫말을 뜯어볼 생각은 해본 적이 없어요. 영어를 편안하게 느끼지 않는 저 같은 사람한테 외국어 가사 해석은 품이 꽤 많이 드는 노동의 영역이거든요. 그런데 밥 딜런의 가사에 노벨문학상의 가치가 있다는 문학적 해석이 나왔어요. 그러면 수용자든 창작자든 자세가 달라지죠. 저 같은 사람들은 노래를 들을 때 가사에 좀더 관심을 기울여 들을 것이고, 창작자들은 작사를 할 때 그들이 생산한 작품을 '문학적 기준'으로 평가하고 있는 청중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거예요. '내가 왜 이 따위 바보같은 노래를 하고 있는가'에 의문을 품는 가수들이 과감하게 발언을 할 수 있는 가능성도 생길 수 있고요.
연관된 문제로 기존의 밥 딜런 팬들이 문학에 관심을 가지게 될 것인가, 저는 관심을 가질 거 같은데... 저는 밥 딜런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미 어느 정도 문학적 취향을 가진 사람들일 거라는 선입견이 있어요. 밥 딜런은 솔직히 가창력도 떨어지고;; 마잭 같은 월드스타도 아니고 그런데요. 순진한 의문이지만 딜런을 좋아한다면 당연히 가사를 좋아하는 거 아닌가요? 최소한 평범 이상의 독해력을 가진 독자들이라는 건데, 문학이 그런 사람들을 (잠정적) 독자로 상정하지 않는다면 누구를 상정해야 할지 있을까 의문이에요. 최소한 밥 딜런 연구서를 찾아볼 딜런 팬들은 있겠죠. 문학 연구서를 읽어볼 엄두가 안 나던 사람들이 밀도 있는 독서의 기회를 가질 수도 있는 거잖아요. 그렇게 해서 생각지 못했던 쪽으로 독서가 확장될 수도 있고요. 실제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고급 독서'에 갈증을 느끼고 있으면서도 뭘 읽을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지, 아니 읽을 마음을 내는 것 자체가 얼마나 힘든지 3, 40대 직장인들, 특히 여성들과 이야기를 나눠보면 금방 알 수 있어요. 그게 영미권이라고 특히 다를 거 같진 않아요. 일정 수준 이상의 독해력과 취향, 감식력을 갖춘 독자 대중을 얼마나 많이 확보하는가 하는 것이 동서양을 막론하고 현재 고급문학의 생존이 걸린 문제인데, 그 문제에 대한 대답이 '밥 딜런 no, 하루키 yes'? 혹은 사회 현상이나 저널리즘, 정치이념에서 멀리 떨어져 초연하게 대학가와 문학판 바깥으로 결코 나오기 힘든 작가들? 그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런 맥락이면 보다 먼저 조앤 롤링에게 수상이 돌아갔어야죠. 그럼 전 이해해줄 용의가 있습니다. 아니, 말씀하신대로 신경숙에게 줘도 이렇게 빡치진 않겠네요. 근데 밥 딜런은 아니네요. 님께서 말씀하신 어떤 부분을 곱씹어봐도 굳이 문학상이 음악가에게 수여될 당위를 만들어줄 순 없어요. 밥 딜런이 아니라 파르치팔이나 니벨룽의 바그너라고 해도 그에게 먼저 문학상을 준다면 전 기함할 겁니다. 그리고 한국 스놉들의 문제적 태도에 대한 반감이 있으시다면 그냥 그 이야기부터 하시면 될 일 아닌지요. 그놈들을 욕먹이기 위해 굳이 한림원의 헛짓거리를 비호할 이유는 없어보이네요.
아, 롤링이나 하루키한테 상이 주어질 경우를 생각해 봤어요. 그런데 그럴 경우 새로운 독자, 그러니까 고급문학의 새로운 독자가 생길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여요. 롤링이나 하루키를 진지하게 다루는 강단 학자나 연구서가 있는지, 있다 하더라도 이들의 팬들이 굳이 관련 레퍼런스를 찾아 읽어가면서 독서폭을 넓힐 가능성이 있을지 의문이거든요. '드디어 세력으로 인정받았다'는 만족감이 중요하지 더 공부해서 롤링/하루키의 위상을 더 높여야겠다는 생각을 할 이유가 없죠. 그런데 딜런은 좀 달라요. 그동안 문학에서 비가시적 영역으로 남아 있던 분야... 더 보기
아, 롤링이나 하루키한테 상이 주어질 경우를 생각해 봤어요. 그런데 그럴 경우 새로운 독자, 그러니까 고급문학의 새로운 독자가 생길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여요. 롤링이나 하루키를 진지하게 다루는 강단 학자나 연구서가 있는지, 있다 하더라도 이들의 팬들이 굳이 관련 레퍼런스를 찾아 읽어가면서 독서폭을 넓힐 가능성이 있을지 의문이거든요. '드디어 세력으로 인정받았다'는 만족감이 중요하지 더 공부해서 롤링/하루키의 위상을 더 높여야겠다는 생각을 할 이유가 없죠. 그런데 딜런은 좀 달라요. 그동안 문학에서 비가시적 영역으로 남아 있던 분야가 새로 떠오른 거잖아요. 그러면 당연히 호기심을 갖는 사람들이 생기죠.
조재룡 씨를 스놉이라고 반감을 가진 적은 없어요. 그분의 책도 호의적으로 읽었고요. (아니 적당한 스놉들은 정신건강에 이로움을 주는...) 제가 괴로운 건 그렇게 현명한 사람들이 왜 제가 납득할 수 없는 반응을 보이는가 하는 것인데, 진짜 잘 모르겠어죠. 문학에 대한 이해에서 근본적인 괴리가 있다는 거겠죠. 저는 그리고 한림원의 지금까지 시상 리스트를 보건대 유별난 '헛짓거리'라고 생각할 이유를 딱히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음...
조재룡 씨를 스놉이라고 반감을 가진 적은 없어요. 그분의 책도 호의적으로 읽었고요. (아니 적당한 스놉들은 정신건강에 이로움을 주는...) 제가 괴로운 건 그렇게 현명한 사람들이 왜 제가 납득할 수 없는 반응을 보이는가 하는 것인데, 진짜 잘 모르겠어죠. 문학에 대한 이해에서 근본적인 괴리가 있다는 거겠죠. 저는 그리고 한림원의 지금까지 시상 리스트를 보건대 유별난 '헛짓거리'라고 생각할 이유를 딱히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음...
저는 딜런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의 텍스트와 해설을 뿌리고 다니기를 기다리고 있어요.ㅎ 줍줍하려고
말씀하신 뉴요커 글이 이건가요? http://www.newyorker.com/magazine/2016/10/17/leonard-cohen-makes-it-darker 이 할아버지도 정말 정정해요. 여든 두 살에 앨범을 내고.
격렬한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기운 같은 게 있기는 있는 거 같아요. 한국 같으면 386인데 그 시기 뒤를 살아간 사람들은 왠지 약간 외로운 느낌이 들기도 하고요.
말씀하신 뉴요커 글이 이건가요? http://www.newyorker.com/magazine/2016/10/17/leonard-cohen-makes-it-darker 이 할아버지도 정말 정정해요. 여든 두 살에 앨범을 내고.
격렬한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기운 같은 게 있기는 있는 거 같아요. 한국 같으면 386인데 그 시기 뒤를 살아간 사람들은 왠지 약간 외로운 느낌이 들기도 하고요.
네. 그 기사예요. 제가 뉴요커의 글을 참 좋아해요. 글이 잡지의 글치고는 문학적인 향이 많이나잖아요.
딜런의 작품에 대한 철학적 해석에 관심이 있으시면 아래 링크의 책을 한 번 읽어보세요. 꽤 재미있게 읽었었어요.
https://books.google.com/books/about/Bob_Dylan_and_Philosophy.html?id=JaOqtb977hQC
딜런의 작품에 대한 철학적 해석에 관심이 있으시면 아래 링크의 책을 한 번 읽어보세요. 꽤 재미있게 읽었었어요.
https://books.google.com/books/about/Bob_Dylan_and_Philosophy.html?id=JaOqtb977hQ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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