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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6/02/25 04:51:51
Name   No.42
Subject   기숙사령부 이야기
라덴이 녀석이 심각하게 점호판을 들여다본다. 보통 이건 이 녀석이 밑에 애들에게 한 소리 하고 싶을 때의 제스쳐다. 그래서인지 밑의 애들이
침을 꼴깍꼴깍 삼킨다.

라덴... 미군이랑 붙어 일하는 놈 별명이 라덴인 것도 우습긴 하다. 녀석의 생김새는 배우 신현준 저리가라 수준으로 아랍계였고, 신병으로 온 그
날부터 그 녀석은 라덴이 되었다. 워낙에 머리도 좋고 센스도 있는 놈이라, 짬이 차면서는 자신의 그 별명을 이용해서 제법 재미있는 애드립도
심심찮게 날려주는 고마운 녀석이다. 남들은 몇 명씩 있는 동기가 내게는 달랑 한 명. 그나마 그 한 명은 Crew근무로 낮밤이 뒤바뀐 생활을 하는
데다, 성격은 실로 우울하기 그지 없는 나보다 2살 많은 형... 머리에 작대기가 3개가 되는 날까지도 난 그 형이 웃는 걸 한 번도 못봤다... 여자도
그렇게 수줍음 많은 성격은 드물지 싶다. 그런 와중에 제일 처음 내가 받은 한 기수 후임은 가뭄의 단비와 같았다. 전 내무실 120명 병사 중
[말탱이]에서 말탱이 [백바이스](우리 부대에서만 사용하는 용어인듯 하다. Vice는 뭐의 바로 아래니까, Back Vice는 뭐의 바로 위...라는 의미로
사용된 콩글리시이지 싶다.)가 된 것이다. 그 고마운 후임이 바로 라덴이었다. 6주 차이가 나는 한 기수 후임... 그래도 난 여느 동기보다도 이
녀석이 좋았다. 때문에 너무 오냐오냐하고 잔소리도 죄다 커버해줬다. 그래도 크게 빠지지 않고 나름 '잘 커준(?)' 녀석이다. 나이도 동갑에
어차피 짬차면 아래위로 3기수는 까지는 말을 놓고 지내는 게 우리 부대 문화여서, 라덴은 실질적으로 내 동기와 다름이 없었다. 나는 58기,
라덴은 59기... 58기엔 나와 그 샤이보이 형밖에 없어서 내무실 포지션 수행이 힘들었다. 그래서 58, 59기는 셋트로 포지션을 함께 하곤 했다.
그렇게 우리가 맡은 기념비적인 첫 포지션이 바로 [일고]였다. 일병중 최고참...이라는 의미겠지만 보통 상병 1호봉 정도가 맡았다. 일고의 역할은
내무실에서 제법 컸다. 매일매일 이루어지는 내무실 청소와 사역을 맡아 인원배치 및 지휘를 하는 포지션인 것이다. 이를 위해서 내무실에선 매일
[일고 모임]이라는 것이 열렸다. 10개 남짓한 내무실 중 하나를 빌려서 오후 8시부터 8시반까지 30분간 가지는 모임이다. 이 모임이 열리는 내무실엔
일고 위의 고참은 출입할 수 없다. 온전히 일고 이하의 세상이며, 때문에 일고는 입대 이후 최초로 왕의 기분을 맛볼 수 있는 포지션이다. 이를 아주
단적으로 나타내 주는 것이 일고모임의 자리배치이다. 내무실 우측 침상에는 일고 밑의 모든 일, 이병들이 빽빽하게 기수대로 줄서서 앉아있다.
아무리 좁아도 거기에 다 앉아야 한다. 반면 좌측 침상엔 일고와 일고 [바이스](보통 앞뒤가 생략되고 그냥 바이스라고 하면 이 일고 바이스라는
포지션을 말한다.), 즉 일고 바로 밑 기수만이 앉는다. 많아야 너덧명이 벌렁 드러누워 맞은편의 후임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라덴과 내가
말탱이 시절... 일고들은 실로 우상과 같았다. 나도 저 자리까지만 가면 군생활이 정말정말 편할 것 같았다. (물론 아니었지만.) 우리는 두 기수가
함께 일고를 맡았기에, 사실 일은 59기 애들이 다 하다시피 했다. 특기교육 기간이 차이가 나다보니, 라덴이 먼저 오고도 그 뒤로 라덴의 동기 셋이
더 왔다. 하지만 얼마간을 먼저 함께 생활한 라덴이 내게는 '아픈 손가락'이었다. 다른 59기 애들을 받은 날, 나는 라덴을 조용히 외딴 곳으로 불렀다.
지금 신병들 갈구라고 지시가 많이 내려온다... 그래서 내가 너희 동기들에게는 좀 엄하게 하려고 한다. 너도 함께 있으면 당연히 함께 깨지겠지만
이해 좀 해다오...라는 말을 했다. 우리 부대의 문화는 어떻게 보면 퍽 합리적이고 다르게 보면 퍽 사악했다. 일고 밑의 누군가가 잘못을 하면 그 욕은
고스란히 일고가 다 먹는다. 일고 위의 고참은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절대 새까만 후임을 직접 다그치지 [못했다.] 직접 컨택을 하면 그것은 그
선임이 욕먹을 일이 되어버린다. 일고 밑의 일은 일고에게. 그게 철칙이었다. 따라서 당시 일고의 성향에 따라서 일고 밑의 생활은 크게 달라졌다.
일고가 좀 서글서글하면 어지간한 욕은 먹어도 그냥 야 늬들 이건 좀 조심해라... 선에서 끝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는 생지옥을 펼칠 수도 있었다.
고참이 웃으면서 말한 것도 피를 토하며 증폭 전달하는 이도 있었으니 말이다. 여튼간에, 그런 말을 들은 라덴이 한숨을 푹 쉬며 물었다.

-제가 말이 많이 나옵니까?

[말이 나온다]는 것은 직관적 의미 그대로다. 안좋은 이야기, 잔소리가 나왔다는 것이다. 그랬다. 라덴은 행동이 빠르다거나 하진 않았다. 여유가
있었고, 머리가 좋은 녀석이다보니 일에 요령도 피웠다. 하지만 군대에선 일을 효율적으로 하는 게 중요하지 않다.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 부대의 각종 프로세스, [신송]이라고 불리는 절차들은 사실 굉장히 치밀하게 잘 짜여져 있었기에, 그대로 따르지 않으면
어딘가에서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많았다. 군디스 한 개비에 불을 붙여서 라덴에게 건네주었다. 보통 대화가 길어질 때면 나는 담배를 권했다.
말탱이는 고참이 권하지 않으면 담배를 피우기 힘들다. 담배를 사양하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는 일이었지만, 멋대로 피우는 것은 조심해야 했다.
우리는 내무실 뒤편 보일러실 문 앞에 쪼그려서 그렇게 담배를 나눠피우곤 했었다.

그렇게 말탱이 시절을 함께 보낸 라덴이다. 그 녀석도 이제 나와 함께 일고가 되어 좌측 침상에 삐딱하게 앉아있다. 녀석이 인상을 찌푸리고 뭐라고
하는 것을 보니 위에서 말이 나왔나보다. 그렇게 몇 마디인가 하던 라덴이 문득 밑에 애들에게 이런 말을 꺼냈다.

-내가 말 안나오게 하는 법을 알려줘?

일고모임 내내 책을 뒤적거리던 내 귀에 왠지 번뜩 들어오는 말이었다.

-너희들이 이런 저런 생각이 들잖아. 아, 이건 이렇게 하면 좋겠다. 이렇게 하면 편하겠다. 이렇게 해야겠다... 이런 생각들이 들면, 절대 그걸
하지마. 그러면 아무 말도 안나와. 그냥 신송대로만 하면 되는 거야.

얼씨구. 하하하.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오려했다. 내가 웃어버리면 라덴이 애써 잡은 분위기가 물건너가기에 애써 참았다. 라덴은 그렇게 나의
덕분에(?) 근엄하고 무거운 분위기로 훈계를 마쳤다. 말을 마친 라덴이 날 힐끗 바라본다. 같은 일고지만, 그래도 한 기수 위인 내가 해야 하는
권위의 의식 차례가 온 것이다. 나는 무심한 어조로 말한다.

-밑에서 셋.
-이병 아!무!개!

삼중창의 대답이 들려온다. 역시 나는 시크하고 도도한 고참의 어조로.

-쓸고.
-예, 알겠습니다!
-그 다음 셋.
-이병 아!무!개!
-닦고.
-예, 알겠습니다!

이것은 중요한 일과, 청소의 포지션을 정하는 일이다. 말탱이들이 일고를 가장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쳐다보는, 일고 업무의 하이라이트다.
말탱이때는 저놈의 '밑에서 셋'이 왜 그렇게 멋있어 보이는지... 청소 포지션은 여럿으로 나뉘는데, 당연히 가장 힘든 일이 밑으로 배정된다.
그렇게 밑에서부터 쓸고, 닦고, 마대, 쓰레기, 공함, 독서실이 된다. 그런데 공군 특성상 병장이 인플레이므로, 일고 밑의 청소인원이 그렇게
넉넉하진 않다. 대부분의 경우는 공함 정도에서 인원이 끝나서 독서실은 생략되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어찌어찌 휴가자도 없고 야근하는
놈도 없으면 인원이 남기도 했다. 그래서 일병 중 짬이 좀 찬 녀석들은 가끔 청소 시간에 쉬는 일도 있었다. 그 맛이 또 꿀맛인 것이다. 이제
짬이 조금 됐구나...를 실감시켜주는 계기였다. 그것은 사실 청소 포지션을 맡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만날천날 쓸고만 하던 놈이 갑자기 닦고
하라는 말을 들으면 기분이 째지게 마련이다. 닦고하던 놈이 마대 쥐는 날도 마찬가지고 말이다. 일이 조금 편해지는 것 이상으로 기분이
좋다. 이렇게 한달 남짓마다 짬의 상승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 우리 부대의 병사들 정신이 대체로 건강했던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된다. 뭐,
다른 부대 생활은 안해봤으니 어떨 지 모르겠으나.

청소 포지션이라는 것이 나에겐 조금 놀라운 시스템이었는데, 이것이 실로 톱니바퀴 같았다. 가장 밑이 맡는 [쓸고]는 말 그대로 빗자루로
바닥을 쓰는 일이다. 하지만 말탱이들의 일 답게 여기엔 화장실 청소가 추가된다. 8시 반이 되어서 일고모임이 끝나면 쓸고들은 화장실로
달려가서 변기를 닦는다. 변기를 다 닦을 때 즈음에 손걸레와 각 내무실의 쓰레기통들이 비워져서 화장실로 들어온다. 손걸레를 빨아서 문 앞에
방수턱을 설치하고, 쓰레기통은 물로 씻고 여기에 물을 받아서 바닥 물청소를 한다. 물청소가 끝나면 쓰레기통들은 즉시 화장실 밖에 놓아둔다.
화장실 청소가 마무리될 무렵엔 쓰레기통과 손걸레, 대걸레를 빨아서 정리한다. 대걸레는 따로 화장실 문 앞에 둔다. 그렇게 화장실 청소를 끝내면
3명이서 내무실을 나눠 바닥을 쓸기 시작한다. 침상과 침상 사이의 통로, 복도, 계단을 쓴다. 이때 쓸어낸 먼지와 쓰레기는 큰 쓰레기통에 따로
모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빗자루질이 끝나면 화장실로 다시 돌아간다. 사용된 대걸레들이 놓여있다. 이것을 보통 한 명이 헹궈둔다. 물청소를 한
화장실에 누군가가 들어가면 먼지발자국이 남는다. 그래서 한 명이 들어가고, 나올 때는 발자국을 닦으며 나온다. 여기까지 하면 힘든 쓸고가 끝난다.

[닦고]는 청소가 시작되면 화장실에 정리되어 있는 손걸레들을 가지고 각 내무실의 침상과 책상, TV, TV 테이블, 총기함을 닦는다. 닦는다기보다
먼지와 쓰레기를 침상 사이 통로로 밀어낸다고 보면 된다. 이렇게 내무실 걸레질을 마치면 손걸레를 화장실로 가져가 쓸고들에게 준다. 상기했듯이
그들이 걸레를 방수턱으로 쓰고 빨아서 다시 정리해둘 것이다. 닦고들이 걸레로 먼지와 쓰레기들을 밀어내놓으면 쓸고들이 화장실 청소를 마치고
들어와서 빗자루로 쓸어내는 것이다.

[마대]는 청소가 시작하고도 조금은 여유가 있다. 복도에서 어슬렁대다가 쓸고들이 대걸레를 빨아서 내놓으면 현관 앞을 한 번 닦는다. 여유있게
현관을 닦고나면 쓸고들이 쓸고 지나간 공간들이 생긴다. 그곳을 찾아가서 역시 천천히(쓸고에게 시간을 주기 위해) 꼼꼼히 걸레로 물청소를 한다.
대걸레질이 끝나면 화장실에 대걸레를 가져다 놓는다. 역시 쓸고들이 헹구어서 정리해둔다.

[쓰레기]는 각 내무실 쓰레기통을 비우는 일이다. 각 내무실 쓰레기통을 모아 큰 쓰레기통에 비우고, 쓰레기통은 화장실로 가져가 쓸고에게 준다.
잠시 후에, 화장실 밖으로 깨끗하게 씻겨진 쓰레기통들이 나온다. 그걸 제 자리에 놓아두면 쓰레기의 일은 끝난다.

[공함][독서실]은 일이 거의 없다. 공함은 내무실 현관 중앙의 공함, 즉 공용 책상과 상황판을 깨끗하게 정리하면 끝이다. 독서실은 가서
청소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의자만 대강 정리하면 된다. 독서실은 보통 사용하는 사람이 깨끗하게 사용하는 것이 기본이기에, 청소상태를 가지고
병사들 사이에서 말이 나오는 일은 없다시피 했다. 독서실 청소는 일간 청소인 일고 모임에서 하기보다는 주간청소인 바이스 모임에서 하는 일이다.
공함을 대강 닦고 정리한 후에는 현관 앞에서 고참들과 화기애애하게 노가리를 나누면 된다. 당직하사는 점호인원 확인하러 오가다가 공함과
마주친다. 병장 1호봉 혹은 병장 11호봉이(할 거 다 하시고 정말 하실 게 없는 예비역 진들은 후임들의 당직이나 불침번을 대신 서 주는 것이 주요
일과였다.) 맡는 당직하사가 늘 있던 그 녀석 말고 다른 녀석이 보이면 윙크라도 해주며 씩 웃는다.

-너 벌써 공함하냐? 짬 다 찼네. 크큭

[바이스 모임]은 일주일에 한 번, 일요일 일조점호 후에 이루어진다. 바이스 모임이므로, 바이스와 그 이하로만 모인다. 일고부터는 열외다. 바이스
모임에서는 찌든 때 제거나 독서실 청소, 베갯잎 세탁, 커튼 세탁, 옥상 청소, 화단 정리 등 텀을 두고 해야 하는 청소사역을 실시했다.

내가 직접 화장실에서 칫솔을 들고 치열하게 문지르던 때나, 걸레질을 하던 때엔 잘 몰랐지만, 청소의 단계별로 선후를 나누어 효율적으로 진행되는
시스템이었다. 후일 우리가 내무실장이 되었을 때에 이러저러한 쓸 데 없는 문화나 신송을 많이 없애고 개혁했지만, 청소 시스템 만큼은 전혀 손을
대지 않았었다. 오랜 시간 전의 일이라 상기한 과정들이 정확한 지 자신은 없으나, 정말 틈 없이 잘 짜여져 있었다. 상기 시스템에 문제나 비효율이
있다면, 그건 내 기억의 오류일 것이다. 그래도 나름 4년제 대학 다니다 온 머리깨나 좋다는 이들이 오랜 세월을 두고 다듬었다는 시스템이었다.

이렇게 청소를 포지션별로 나눠주면 일고모임이 종료된다. (상당히 많이 되돌아간 느낌이 드는 것은 그저 느낌적인 느낌이다....;;) 일고모임을
마치고 나서면서 나는 라덴을 툭 쳤다.

-댐배나 한 대 물자.
-어

무뚝뚝한 놈. 보일러실 앞에서 담배를 물면서 나는 음흉하게 웃어보였다.

-하늘같은 42 상병님이 글케 존경스러웠어?
-무슨 소리야?
-너 아까 애들한테 했던 말, 임마.
-무슨 말?
-늬들 머리에 생각나는 거 하지 말라는 거.
-그게 뭐?
-임마, 그거 내가 너 말탱이때 내가 너한테 한 말이잖아. 저작권 있는 거야 그거.

라덴 이 자식이 코웃음을 친다. 비록 같은 일고지만 하늘같은 백바이스한테.

-그게 무슨 42샘꺼냐?

[샘][뱀]은 각각 상병님과 병장님의 준말이다. 어린 아이들이 선생님을 쌤이라 부르는 것과 같다. 위 아래로 3기수, 약 4개월 차이까지는 상병을
달면서부터 말을 놓아도 되는 것이 우리 부대의 문화였다. 상병을 단다는 것은 일고가 된다는 것이고, 이때부터는 함께 포지션을 수행하기도 하고,
어느 정도 짬이 차는 시기기에 갈등을 완화하는 효과도 생각할 수 있었다. 그래도 후임이 선임을 이름부르며 야자하는 것은 좀 그런 일 아니겠는가.
그래서 호칭만큼은 샘, 뱀을 사용하는 것이 룰이었다. 특별히 친한 사이에는 생략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더 윗 기수에게 잘못 걸리면 상병이고 뭐고
깨지는 일도 없지 않았다.

-내꺼래두? 너 그거 누구한테 들었는데?
-글쎄... 여튼 42샘은 아냐.
-아놔, 이 자식이... 나라니까? 순수 창작이야 임마. 내가 열라 욕먹어가며 체득한 거라고.

라덴 이놈의 자식이 두 번째로 코웃음을 치며 담배를 툭 끄더니 휘적휘적 가버린다. 나도 내 담배 끄고서 따라갔다. 현관 앞에서 공함 녀석이
노닥거리는 걸 가만히 보고 섰는데, 옆에 섰던 라덴이 슬쩍 한 마디 한다.

-그때는 42샘도 카리스마 있었는데.

싱긋 웃음이 나왔다. 뭐 얼마나 옛날 일이겠는가. 1년 정도 된 이야기다. 저도 잊었을 리가 없는 일인 것을. 폼잡고 팔짱끼고 선 녀석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지금은 없냐, 새캬?
-아! 이거 병영폭력이다? 가혹행위야!
-찔러라, 새캬. 같이 죽자. 기록 한 번 세워보자.

우리 부대엔 가혹행위로 인한 구설수가 없었다고 한다. 뭐, 부대 창설 이후 주욱 없었는 지, 아니면 전해내려올 만큼 가까운 과거부터 없었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언론통제 당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돌아가는 분위기로 보면 아주 없을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기껏
하고 당하는 것이 잔소리나 욕 좀 얻어먹는 것 정도였다. 정말정말 대형사고를 친 녀석은 [튀어], [걸어]의 콤보를 당하기도 했지만, 가뭄에
콩나듯 있는 일이었다. 그게 또 일견 우스운 것이, 튀어라는 것은 그냥 관등성명 엄청 크게 외치면서 버선발로 뛰어나가 꼿꼿하게 서는 것이
전부였고, 걸어라는 것은 침상 양 쪽에 손과 발을 대고 엎드리는 것이다. 엎드려 뻗쳐에 비해서 그닥 힘들지도 않는 기합이고, 그 상태로
푸쉬업을 시키는 것도 아니고, 한 5~10분 걸어놓고 잔소리하는 것이기에 주먹질이 난무하는 방공포나 헌병대에 비해선 낙원이라 할 수
있었다. 그나마도 걸어를 10분 이상 시키거나, 잔소리할 때에 육두문자 섞는 것은 선임이 잘못하는 일로 여겨졌다. 깔 때 까도 신사답고
고참답게 까라...가 신조였다. 후임은 언제라도 펑크를 낼 수 있는 이들이기에 그들이 펑크내는 것은 잔소리로 끝나는 일이지만, 선임들이
선임답지 못한 행동을 하는 것은 좀 더 심각한 문제가 되었다. 일고모임은 비교도 되지 않는 공포의 [상고모임]이 열리기도 하는 것이다.
...뭐 그 상고모임에서도 끽해야 튀고 걸고 말지만.

-찌르랬다? 내일 주임원사실에서 보자.
-몇시에 볼지 홍샘한테 물어봐.

주임원사실 근무하는 홍샘은 나보다 3기수 위, 55기다. 남자답고 착한 고참이었다. 다방커피도 맛있게 잘 타주고, 재미있는 담배친구였다.

-뭘 시간을 정해. 전화할게.
-엉, 그려.

청소가 마무리되고 있었다. 점호 준비를 위해 슬슬 들어가야 할 때다. 맞은편 내무실의 타부대 병사들이 이쪽을 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여러 부대가 함께 주둔한 우리 기지에서, 내가 있는 이 부대는 조금 특별하다. 한국군 부대 중엔 최상위 부대였고, 다른 부대들과는 다른
독특한 문화가 많았다. 때문에 타부대 병사들은 우리를 '기숙사령부'라고 조롱하곤 했다. 당나라 군대라는 관용어도 늘 따라다녔다. 우리는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았다.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치열한 군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병사들끼리 갈등 없이 친하게 지내는 것이
어디에서 비난받을 일이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우연찮게도 이 기지에는 내 고교 동창생이 몇 명인가 함께 있었다. 그 중에도
쌈바라는 녀석은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함께 나온 녀석이었는데, 바로 맞은편 내무실에 살고 있었다. 그 녀석도 날 볼 때면 늘
'기숙사령부'운운하면서 비꼬곤 했다. 나는 대답했다.

-쌈바 너 부대가 외우냐?
-부대가?
-너희 부대가 있잖아.
-몰라.
-우리는 120명이 부대가 다 외운다. 우리 학교에서 술먹고 응원가 부르는 것처럼 흥날때 합창한다.
-그게 뭐?
-적어도 우린 임마, 함께 사는 우리 부대, 공동체에 대한 애정이 있다. 그런게 전우애 아냐? 그런게 더 좋은 공동체고 부대 아니냐?
-...

그랬다. 우리는 정말 기숙사처럼 생활했을 지도 모른다. 선임, 후임이 아니라 선배, 후배처럼, 또 형과 아우처럼, 친구처럼. 적어도 내무실에선
그렇게 살 수 있기에, 힘든 회사생활(120명 전원이 행정병인 우리 부대는 조기출근, 야근, 철야, 제대로 쓰지 못하는 휴가, 정치 등... 회사원이
겪는 애로를 그대~로 다 겪으며 살았다.)을 버틸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서른줄을 넘어 마흔줄이 보이는 때까지도 서로들
연락을 하고 형님, 아우하며 술잔을 기울이는 관계도 아직 촘촘하게 남아있다. 친구놈이나 누군가가 기숙사령부라든가 편한 군대니 당나라
군대 외인부대에서 생활하고 왔니 하는 말을 할 때면 나는 그래, 나 내무실은 천국이었다고 대답한다. 전역을 하고, 졸업을 하고, 사회라는
탁류에 몸을 던진 이후에는, 우습게도 가끔 군대 시절이 그립다. (어디까지나 가끔이다.) 그때에도 거지같은 상관들이 넘쳤고, 별 같잖은 꼴은
남부럽지 않게 여럿 보았지만 적어도 함께 쌍욕을 하며 그것을 나누어줄 형제가 110명 남짓 있었다. 그 천군만마같은 응원이 그리울 때가 있다.

그 날 주임원사실에서 보자던 라덴의 얼굴은 아직도 생생한 기억 중 하나다. 소중한 기숙사령부의 추억 중 하나가 되어 있다.



2
  • 제 옛날 군생활을 떠오르게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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