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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5/07/22 12:40:06 |
Name | 연구개발 |
Subject | 지브리애니를 이제야 처음 본 사람의 천공의 성 라퓨타 감상기 - 지브리와 닌텐도, 평양냉면 |
안녕하세요. 영화를 좋아해서 웬만한 대작은 챙겨보려고 노력하는 나름의 영화매니아입니다. 근데 좀 부끄러운 고백을 하자면, 그렇게 명성이 자자한 지브리 애니메이션을 여태 하나도 본 적이 없었습니다. 하도 명성이 자자해 명작이라는 것은 알지만....뭔가....뭔가였습니다. 그러다 어제 친한 친구가 지브리 딱 하나만 봐야 한다면 무조건 <천공의 성 라퓨타>다 라고 강력 추천해서 드디어 감상해 봤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제 감상은 딱 한마디로 요약됩니다. 이거 완전 애니메이션계의 평양냉면이다.... 분명 걸작이고, 영상미나 음악은 소름 돋게 좋은데... 솔직히 제게는 뭔가 슴슴하게 느껴졌습니다. 왜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제 평소 취향과 맞닿아 있더군요. 저는 <진격의 거인>이나 <강철의 연금술사> 같은 작품에 환장합니다. 이 작품들의 특징은 명확하죠. 촘촘한 복선과 충격적인 반전 -> 이게 여기서 나온다고? 싶은 복선 회수와 뒤통수를 때리는 반전이 쉴 새 없이 몰아칩니다. 도덕적 딜레마와 무거운 주제 -> 선악의 구분이 모호하고, 무엇이 옳은가에 대한 철학적인 질문을 계속 던집니다. 숨 쉴 틈 없는 전개 -> 인물들이 끊임없이 구르고, 싸우고, 죽어 나가면서 극 전체가 엄청난 긴장감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한마디로 첫 입부터 혀가 얼얼해지는 마라탕이나, 온갖 재료가 진하게 우러난 김치찌개처럼 자극적이고 강렬한 맛입니다. 이야기의 힘으로 제 멱살을 잡고 끝까지 끌고 가는 쾌감이 엄청나죠. 이런 제 입맛에 <천공의 성 라퓨타>는 너무나 다른 종류의 음식이었습니다. (like 닌텐도, 평양냉면) 라퓨타에는 <진격의 거인>처럼 세계의 비밀을 파헤치는 복잡한 미스터리는 없습니다. 주인공 파즈와 시타는 순수하고 선하며, 악당 무스카는 명확한 탐욕을 보여줍니다. 갈등 구조가 굉장히 단순 명료하죠. 이 애니의 진짜 힘은 체험 그 자체에 있었습니다. 하늘을 나는 것에 대한 순수한 동경, 미지의 고대 문명에 대한 설렘, 아름다운 비행석과 장엄한 라퓨타의 풍경, 그리고 히사이시 조의 음악이 주는 벅찬 감동. 이는 복잡한 서사가 아닌, 분위기와 감성, 감각으로 즐기는 작품이었습니다. 마치 강한 양념 대신, 은은한 육향과 메밀의 구수함을 오롯이 즐겨야 하는 평양냉면처럼요. 제가 닌텐도 게임을 하면서 느꼈던 감정과 정확히 일치했습니다. 사실 닌텐도 게임들은 정말 명작이라고 명성이 자자한테 제 취향과는 잘 안맞았어요. 게임계 goat라 꼽히는 <야생의 숨결>도 몇 번을 집어던지고, 꾹꾹 참아가며 플레이 했었죠 그래도 게이머라면 해봐야 하지않겠니? 라는 의무감으로요 <야생의 숨결>의 메인 스토리는 가논을 무찌르고 젤다를 구한다는 한 줄로 요약됩니다. 하지만 이 게임의 본질은 스토리가 아니죠. 어디든 오를 수 있는 절벽, 숨겨진 코로그 씨앗을 발견했을 때의 기쁨, 패러세일을 타고 하이랄의 풍경을 감상하는 순간의 자유로움. 즉, 플레이하는 행위 그 자체가 주는 순수한 즐거움이 핵심입니다. 이것 역시 강렬한 서사, 액션(양념)이 아닌, 잘 만들어진 게임 시스템(재료 본연의 맛)을 음미하는 경험입니다. 마치 평양냉면처럼요. 평냉을 처음 먹는 사람은 이게 무슨 맛이야? 라며 밍밍하다고 느끼기 쉽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슴슴함 속에 숨겨진 깊은 육향과 면의 질감을 제대로 느끼는 순간, 비로소 그 진가를 알게 된다고 하죠. <천공의 성 라퓨타>를 보고 난 후, 저는 깨달았습니다. 제가 느낀 슴슴함은 이 작품이 재미없거나 부족해서가 아니라, 제가 그동안 자극적인 맛에만 너무 길들여져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요. 맛없는 것이 아니라 다른 맛이다 라는 것을요 지브리와 닌텐도는 이야기라는 양념을 강하게 치기보다, 모험, 설렘, 성장, 교감이라는 최상급 재료 본연의 맛을 사용자가 직접 음미하도록 차려주는 장인과 같았습니다. 평양냉면 장인이 최고의 육수와 면을 뽑아내는 데 집중하는 것처럼요. 아직 제 입맛이 완전히 평냉파로 돌아선 건 아니지만, 왜 수많은 사람이 이 슴슴한 맛에 열광하고 이를 최고의 맛으로 꼽는지 이제는 확실히 알 것 같습니다. 이건 취향의 차이일 뿐, 우열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혹시 그나마 지브리 애니 중에 이건 평냉보다는 함흥냉면이다! 혹은 평냉이긴 한데 그래도 간이 쎄고 자극적이다! 하는 작품이 있다면 추천 부탁드립니다 다음 감상 후보작으로 올려보겠습니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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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브리 중 미야자키 하야오만 놓고 보자면, 천공의 성 라퓨타는 미래소년 코난의 재탕이고 이게 미야자키 하야오의 더 원이라고 하기엔 미야자키 하야오가 좋아하는 '스타일'만 취한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토토로나 붉은돼지도 그런 맥락의 변주이고, 다만 라퓨타보다는 더 원숙한 스타일이라고 봅니다.
개인적으로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가 미야자키 하야오의 더 원이라고 생각하고, 다만 글쓴이가 쓰신 내용을 감안하면 나우시카의 재탕이지만 더 때깔좋고 조금 더 쫄깃한 면모가 있는 모노노케히메가 가장 나을 것 같습니다.
참고로 저는 벼랑위의 포뇨 부터는 작품을 안 봤으므로 그 때 부터의 작품에 대해는 의견이 없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가 미야자키 하야오의 더 원이라고 생각하고, 다만 글쓴이가 쓰신 내용을 감안하면 나우시카의 재탕이지만 더 때깔좋고 조금 더 쫄깃한 면모가 있는 모노노케히메가 가장 나을 것 같습니다.
참고로 저는 벼랑위의 포뇨 부터는 작품을 안 봤으므로 그 때 부터의 작품에 대해는 의견이 없습니다.
충분히 납득이 가는 리뷰네요.
여담이지만 제 개인 취향으로 미야자키 하야오의 최고작은 2위와 압도적인 차이로 만화판 나우시카라고 생각합니다. (애니판은 순위권 밖)
여담이지만 제 개인 취향으로 미야자키 하야오의 최고작은 2위와 압도적인 차이로 만화판 나우시카라고 생각합니다. (애니판은 순위권 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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