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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5/06/11 11:20:14 |
Name | 루루얍 |
Subject | 교통체계로 보는 경로의존성 - 1 |
이 글은 제가 강의했던 자료를 기반으로 쓴 글입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하구요 ㅎㅎ 원래 한개 정도 될 줄 알았는데 막상 글로 쓰려니 양이 좀 많아서 앞으로 한 두 편 정도 더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 이 기고문에서 그는 QWERTY가 세상을 지배하게 된 것을 3가지의 이유로 설명합니다. QWERTY가 표준이 되기 직전 세상에는 "독수리 타법(Hunt-and-peck)"을 대신하는 "터치 타이핑"이라는 "기술"이 등장하게 됩니다. 그땐 혁신적이었죠. 이 "기술"은 처음부터 레밍턴 사의 QWERTY 자판을 통해 적용되게 됩니다. 다시 말해 타이피스트들에게는 "터치 타이핑"이라는 소프트웨어가 장착되게 됩니다. 그로 인해, 소프트웨어와 타자기라는 하드웨어 사이에는 "기술적 상호의존성"이 생기게 됩니다. 이것은 타이피스트들이 다른 배열로 넘어가는 것을 어렵게 만듭니다. 이걸 투자의 "준-비가역성"이라고 합니다. 후에 기술혁신으로 타자기가 배열에서 자유로워지게 되자, 오히려 타자기 회사들은 경쟁적으로 QWERTY를 채택하게 됩니다. 이미 배열에 익숙한 타이피스트들을 위한 거였죠. "규모의 경제"가 발생한 겁니다. ![]() <기술적 상호의존성의 적절한 예시> 이러한 과정을 통해 우수한 배열이었던 Dvorak을 QWERTY가 잡아먹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뭐 Dvorak이 진짜 우수한 자판이냐 하는 논쟁이 있었지만 그건 나중 일이니까요. 이 밖에 우리에게 굉장히 잘 알려진 사례는 베타맥스와 VHS가 있습니다. 소니의 독자 비디오 규격이었던 베타맥스는 VHS에 비해 고화질이며, 적은 노이즈를 가지고 있어 일시정지나 빠른감기 때 VHS 특유의 노이즈가 발생하지 않았죠. 하지만 저화질인 VHS는 결국 베타맥스를 잡아먹고 시장을 압도했습니다. ![]() <저는 베타맥스 테이프는 본 적이 없습니다. 출처> 가장 중요했던 이유는 베타맥스의 재생시간은 100분, VHS의 재생시간은 180분이었다는 겁니다. 비디오 대여시장에서, 당시 150분에서 240분 정도의 재생시간을 가진 영화를 빌려줄 때, 베타맥스는 각각 2개, 3개를 빌려야 하지만 VHS는 1개, 2개를 빌리면 되니 가격적 측면에서 훨씬 이득이었습니다. 또 개방형 표준이었던 VHS는 폐쇄형 표준이라 비싼 소니의 VTR을 사야만 했던 베타맥스에 비해 선택의 폭이 넓었죠. 화질? 어차피 방송녹화 화질이고 빨리감기 하면서 영화 보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또 재미있는 사례가 영국의 좌측통행 사례입니다. 영국의 경우 마부 자리가 따로 있는데, 여기에 손님이 같이 탔다고 합니다. 손님이 오른 쪽에 탈 경우, 마부의 채찍이 손님을 치게 되는 참사가 발생합니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마부가 오른쪽에, 마차는 왼쪽으로 가게 되었다는 것이죠. 미국과 유럽의 경우 미국에서 발생한 코네스토가 마차가 많이 사용됐는데, 이 마차의 경우 마부는 말에 타서 조종을 하게 됩니다. 그럼 오른손이 가운데 있는 것이 편하니 자연스레 마부는 왼쪽 말에 앉고, 마차는 오른쪽으로 통행하게 되는 것이죠. 물론 이 내용은 여러 설 중 하나긴 합니다. ![]() ![]() <상: 영국의 마차, 하: 미국과 유럽의 코네스토가 마차> 자 서론이 길었구요, 이제 본격적으로 교통 체계 얘기를 좀 해보겠습니다. 오늘은 우리나라 얘기를 할 건 아니고, 해외 얘기를 좀 해보도록 하죠. 교통체계와 정책은 일반적으로 인프라와 강한 연관이 있기 때문에, 굉장히 강한 경로의존성을 가지게 됩니다. 해외의 여러 교통 관련 정책이나 문화들은 어떤 경로의존성을 가지고 있는지, 왜 그렇게 됐는지 한번 살펴보도록 합시다. 1. 미국의 사례 - 자동차 중심 구조의 발생과 고착 원래 미국은 잘 알려져있듯이 철도 중심 국가였습니다. 특히 남북전쟁 당시 북군은 잘 건설된 철도를 통한 병참체계를 가지고 있었고, 이것이 북군의 승리에 상당한 역할을 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후 표준궤를 연방의 궤간으로 통일시키고 전국적인 철도망 확장에 돌입합니다. ![]() <철도를 통한 병참이라는 측면에서는 고증이 대충 맞습니다.> ![]() <19세기 말 뉴욕 중앙역의 역할을 한 그랜드 센트럴 디포> 이것이 전환되게 된 계기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포드의 성공입니다. 포드는 그 전까지 상류층의 물건 취급을 받았던 자동차를 컨베이어벨트 체계를 통해 대량생산을 하며 급속도로 자동차를 보급하는데 성공합니다. 당시 포드 모델 T를 자사 노동자의 2개월치 봉급으로 살 수 있을 정도로 가격을 낮추는데 성공하여 자동차는 급속도로 보급되었고, 여기에 맞춰 지역 내 도로를 건설할 수 밖에 없게 됩니다. ![]() <포드의 생산혁명, 이것이 교통체계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여기에 불을 지핀 것은 1956년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주간 고속도로(Interstate Highways)법안과 이를 통한 연방고속도로국(FHWA)의 발족입니다. 이전까지 철도에 의존하던 지역 간 통행을 자동차로 전환하게 된 핵심적인 내용인데요, 이렇게 된 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2차대전 당시 사령관 출신입니다. 그는 2차대전 당시 독일의 잘 정비된 아우토반을 보고 "우리도 저런 병참 체계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당시 주간 고속도로 지원 법령의 이름 역시 "National Interstate and Defense Hihgways Act(국가주간방위고속도로법)"입니다. 뜬금없이 방위가 들어가는데, 이 이름에는 병참체계에 대한 지원이 포함된 개념이 있었습니다. 철도 역시 병참으로 흥했고, 고속도로 역시 병참으로 흥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죠. 추가적으로 철도의 경우 미국은 전통적인 사철로 철도를 민간사업자가 소유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경쟁철도가 생길 경우에 정치적 마찰이 생길 수 있었죠. 국철을 만들기엔 조세저항이 심했습니다. 이에 비해 고속도로는 정치적 마찰이 적고, 사용자 부담 원칙으로 조세저항을 줄일 수 있었습니다. 이 추세에 다시 한번 기름을 뿌린 건 2차대전 이후의 군인 재조정법, 소위 "GI Bill"이라 불리는 제대군인 지원제도였습니다. 이 제대군인 지원제도는 제대군인들에게 초저금리 주담대를 제공했습니다. 이것을 통해 제대군인들은 매우 낮은 금리로 집을 지을 돈을 빌릴 수 있었지요. 이로 인해 발생한 대규모 교외 주택 단지 개발은 우리가 지금 익히 알고있는 미국의 교외(Suburban)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이런 저밀도 광범위 개발 단지 환경은 대중교통에 매우 적대적이었고, 미국의 교외는 승용차가 없이는 이동권이 제공되지 않는 환경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후 자동차라는 것은 이동권의 상징, 어디든 갈 수 있는 "자유로운 정신"을 의미하는 미국 문화의 아이콘이 되게 되었죠. ![]() <예뻐보이지만, 대중교통이 자라날 수 없는 환경입니다. | trongnguyen / Adobe Stock > 정리하자면, 자동차의 보급과 저밀도 교외개발, 주간 고속도로의 개발로 인해 미국의 사실상 거의 모든 교통수단이 승용차로 대체가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문화와 인프라, 도시환경이 모두 승용차 친화적이고 대중교통에 적대적으로 변화되었기 때문에 다시 돌아오기 어려운 강을 건너게 된 것이죠. 재미있는 것은, 이중에 가장 늦게 자리잡은 것이 문화라는 점입니다. 우리는, 심지어 미국인들도 이 문화적 요인을 가장 강하게 느끼고 있겠지만 사실상 이 역사가 그리 길지 않다는 겁니다. 미국에서 이러한 추세에 대해 비교하기 좋은 두 도시가 있습니다. 바로 로스앤젤레스와 샌프란시스코입니다. 같은 캘리포니아에 거리로도 크게 멀지는 않은 두 도시는 20세기 초반까지 잘 발달된 궤도 대중교통수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LA는 레드카, 옐로카라 부르는 세계 최대의 민영 트램망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샌프란시스코는 지금까지도 운영되고 있는 샌프란시스코 시영철도(MUNI)를 통해 지상 케이블카와 트램 시스템을 갖추고 있지요. 이 두 도시는 위의 도로중심의 정책이 진행될 때, 어떻게 보면 사소한 차이로 인해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샌프란시스코는 반도의 끝에 자리잡고 있어 분명한 물리적 확장한계가 있어 고밀도 개발이 됐고, LA는 넓은 평야지대에 자리잡고 있어 상기한 저밀도 교외개발이 이루어졌다는 점입니다. 다른 하나는 LA의 트램망은 민영이었고, 샌프란시스코는 시영이었다는 점이죠. ![]() <세계 최대였던 LA 트램의 몰락> 2차대전 후 대중교통의 몰락기에 GM 등 자동차회사들은 트램 시스템을 인수하여 폐기하는 등의 적극적인 확장 정책을 시도합니다. 이는 "GM 노면전차 음모론" 등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물론 이것만으로 대중교통이 몰락하지는 않았겠지만, 민영이었던 LA 트램은 여기에 속수무책이었습니다. 하지만 샌프란시스코는 좀 얘기가 달랐습니다. 자동차화가 활발히 진행되던 1947년, 샌프란시스코 당국은 적자의 원인이었던 지상 케이블카 라인을 폐지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시민들의 생각은 달랐죠. 샌프란시스코 대중교통의 영웅, "The Cable Car Lady" 으로 지금까지 잘 알려진 프리델 클러스만(Friedel Klussmann) 여사는 여기에 대해 반대 운동을 전개합니다. 그는 케이블카가 교통수단일 뿐만 아니라 샌프란시스코의 정체성이며 관광객 유치에 효용이 있다는 캠페인을 전개했고, 이것이 시민들의 공감을 사서 결국 케이블카 보존안이 시민들의 압도적인 찬성을 이끌어냈습니다. 이후로도 몇 번의 폐쇄 위기가 있었지만, 결국 1964년 샌프란시스코 케이블카가 일종의 국보급인 국가 역사 랜드마크로 지정되어 영구적으로 폐쇄 위기에서 벗어났습니다. ![]() <샌프란시스코의 전설이 된 프리델 클러스만> 결론적으로 이러한 역사를 통해 LA는 지금 세계적인 자동차 의존 도시가 되었고, 샌프란시스코는 비록 중심지에 국한되어 있긴 하지만 미국에 얼마 없는 대중교통 중심 도시가 되었습니다. 2. 일본의 사례 - 독특한 경차 위주의 문화 일본 가보시면 쉽게 알 수 있는데, 얘네 경차가 엄청나게 많습니다. 사실 경차만 많은 게 아니라 전반적으로 차가 좀 좁아요. 심지어 소형트럭이나 버스 같은 상용차들도 우리나라보다 좀더 위로 높고 좁은 느낌이 있습니다. 예전엔 경차를 많이 우대했다고 하던데, 경차 우대가 어느정도 풀리고 있는 지금도 딱히 바뀔 것 같지는 않지요. 일본이 경차 위주의 국가가 된 데에는 전후의 "국민차구상"이 매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전후 피폐했던 일본이 한국전쟁 특수로 인해 경제부흥이 되자, 새로운 차량 보급에 대한 수요가 크게 증가합니다. 여기에, 정부는 1955년 새로운 차량 보급을 위한 요강을 발표하게 되는데 그게 "국민차구상(国民車構想)"입니다. 이 제한을 가진 차량 개발에 성공할 경우, 국가가 제조와 판매를 지원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사양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 최고 속도가 시속 100km 이상일 것 · 승차 정원이 4명, 또는 2명 승차 시 100kg 이상의 화물을 적재할 수 있을 것 · 시속 60km로 평탄한 도로를 주행할 때 연비가 리터당 30km 이상일 것 · 대규모 수리를 하지 않고도 10만 km 이상 주행 가능할 것 · 월간 생산량이 2,000대일 경우, 최종 판매 가격이 1대당 25만 엔 이하일 것 · 성능과 가격을 고려할 때 적정한 엔진 배기량은 350~500cc, 차량 중량은 400kg 이하 이게 사실상 "적당히 달리는 경차를 만들어라"에 가깝지 않습니까. 처음에 이게 발표된 다음에 일본의 자동차 제작사들의 반응은 "되겠냐" 였다고 하더라구요. 그러나 저러나 관제 공업에 가까웠던 일본에서 회사들이 이것을 무시하기는 어려웠고, 1956년부터 제작사들이 속속 계획을 발표하기 시작합니다. ![]() <스바루360, 저런거 보면 입맛이 조금 쓰긴 합니다.> 이 구상에 거의 맞는 최초의 자동차는 1957년 초에 후지중공업(현 스바루)에서 출시한 "스바루360" 이었습니다. 물론 저 구상에는 못미쳤다고 하지만 어느정도 비슷한 수준이었다고 하더군요. 폭발적인 수요증가와 함께 스바루360 역시 큰 인기를 누리게 됩니다. 이런 기념비적인 성과로 인해 스바루360은 일본의 기계 유산으로 등재되어 있기도 합니다. 다만 스바루360은 국민차구상에 의해 개발된 것이 아니라, 시트로앵 2CV의 스펙을 참고했다고 합니다. 이후 1959년 스즈키의 "스즈라이트", 1962년 미쓰비시의 "미니카" , 1966년 다이하츠의 "펠로우" 등이 개발되면서 이 "국민차구상"에 의한 경차들의 전성시대를 맞게 됩니다. ![]() <나가노의 나라이주쿠, 에도시대의 역참마을이라고 합니다.> 일본 사람들이라고 넓은 공간을 싫어하는 건 아닐텐데, 이러한 경차들이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게 된 데에는 또 다른 영향들이 있었습니다. 먼저 도로의 협소함을 들 수 있습니다. 실제 일본에서 운전을 해보면 도시에는 차가 다님에도 불구하고 매우 좁은 골목길들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요, 이는 가마쿠라 시대부터 성곽도시가 발달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에는 도보와 가마 정도가 교통수단의 전부였기 때문에 그렇게 넓은 길이 필요하지 않았던 것이죠. 또한 일본의 경우에 사적 토지권 보호 원칙이 우리나라보다 상당히 센 편이기 때문에, 도로확장시에 수용권한이 매우 제한적입니다. 이러한 배경을 확정적으로 바꾼 것은 전후 재건입니다. 전후와 한국전쟁 특수 이후의 빠른 재건을 위해, 일본 정부는 기존의 골목길을 기반으로 별다른 구획 정비 없이 도로를 재정비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큰 차가 다니기에 매우 불편한 도로 상황이 발생하게 된 것이죠. 여기에 또 기름을 부은 상황은 일본의 여러 자동차 규제가 있습니다. 먼저, 일본은 1971년부터 "자동차 중량세"라는 것을 내게 되어있습니다. 말 그대로 자동차의 중량에 매기는 세액입니다. 물론 엔진 배기량에 매기는 자동차세도 따로 있습니다. 아, 또 자동차 검사비도 차량의 중량에 따라 내게 되어있습니다. 이것들 다 합치면 일년에 거의 십만엔 단위가 아껴진다고 하더라구요. 이러니 경차의 선택률이 굉장히 높아집니다. ![]() <일본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사설 주차장> 또, 우리에게 잘 알려진 "차고지증명제" 역시 경차의 선택을 강제하는 제도 중 하나로 작용했다고 합니다. 경차의 경우 군청소재지 급의 도시가 아니면 차고지증명제가 면제되어있기도 하고, 차고지증명을 해야하는 곳에서도 경차는 허가제가 아닌 신고제로 되어있기 때문에 그 불편함에서 차원이 다르다고 하더군요. 결론적으로, 이러한 여러 가지 사유로 인해서 일본에서 경차의 판매대수는 전체 차량의 1/3정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별거 아닌가 싶겠지만, 한국의 3배가 넘습니다. 한국은 한자리 퍼센트거든요. 경차가 아닌 차들도 전폭이 좀 좁은 편입니다. 예를들어 도요타 코롤라(카로라)의 경우 일본 사양은 전폭이 1,745mm이고, 수출용은 1,780mm라든지 이런 식으로 일본용 차들의 전폭은 좁은 편입니다. ![]() <일본 도로에 있는 차들이 다 뭔가 좁아보이는 거는 착각이 아닙니다.> 지금 일본 정부에서는 경차의 혜택을 많이 줄여놓은 상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인프라 등이 경차 시장에 맞게 되어있기 때문에 이러한 경로의존성에서 쉽게 탈출하기는 어려운 상태입니다. 실제로, 일본에서 차를 빌려보면 경차나 소형차를 빌리는 게 가장 마음이 편하거든요. 일본 사람들이 뭐 특별히 실용적이라서 경차, 소형차 좋아하는 게 아닙니다. 뜯어보면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다 있는 것이죠.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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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근래에 비슷한 주제인 "비효율적이지만 유효한 시스템"에 꽃혀서 이것 저것 찾아봤었는데 반가운 글이네요.
IT 쪽에도 은근히 이런게 좀 있는데 제일 많이 알려진게 IPv4 주소 체계입니다.
흔히들 알고 계시는 192.168.0.1 같은 0~255 내의 수를 4개 조합해서 주소를 만드는 식인데 이게 최대로 다 긁어다 써도 42억개 정도 밖에 안되거든요.
IPv4 주소 체계를 만들던 당시에는 오늘날처럼 많은 IP 를 필요로 하는 상황을 상상하기 힘들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설령 상상했다고 한들 당시 하드웨어 성능적 한계 ... 더 보기
IT 쪽에도 은근히 이런게 좀 있는데 제일 많이 알려진게 IPv4 주소 체계입니다.
흔히들 알고 계시는 192.168.0.1 같은 0~255 내의 수를 4개 조합해서 주소를 만드는 식인데 이게 최대로 다 긁어다 써도 42억개 정도 밖에 안되거든요.
IPv4 주소 체계를 만들던 당시에는 오늘날처럼 많은 IP 를 필요로 하는 상황을 상상하기 힘들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설령 상상했다고 한들 당시 하드웨어 성능적 한계 ... 더 보기
저도 근래에 비슷한 주제인 "비효율적이지만 유효한 시스템"에 꽃혀서 이것 저것 찾아봤었는데 반가운 글이네요.
IT 쪽에도 은근히 이런게 좀 있는데 제일 많이 알려진게 IPv4 주소 체계입니다.
흔히들 알고 계시는 192.168.0.1 같은 0~255 내의 수를 4개 조합해서 주소를 만드는 식인데 이게 최대로 다 긁어다 써도 42억개 정도 밖에 안되거든요.
IPv4 주소 체계를 만들던 당시에는 오늘날처럼 많은 IP 를 필요로 하는 상황을 상상하기 힘들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설령 상상했다고 한들 당시 하드웨어 성능적 한계 때문에 더 큰 주소 공간을 사용하기는 어려웠다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 90년대에 인터넷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이거 IPv4 계속 쓰다가는 고갈되겠다 싶어서 부랴부랴 IPv6 체계를 만들었습니다.
2001:0db8:85a3:0000:0000:8a2e:0370:7334 <- 요런 식인데 많이들 생소하실 겁니다.
IPv4 때의 고갈 사태에서 배운 교훈으로 주소 공간을 빵빵하게 잡아놓긴 했지만 이게 또 문제가
전세계 방방곳곳에 깔린 네트워크 관련 장비들이 모두 IPv6 를 지원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드웨어 벤더들이 IPv6 를 모두 지원할 때까지 버텨보자하면서 많이 사용된 기술이 NAT 인데
이건 기존 IPv4 주소 체계하에서 하나의 IP 를 나눠쓰는 느낌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IPv6 가 보급되기까지 NAT 로 존버가 들어가는데...
문제는 NAT 가 일을 제법 잘해서 불편함을 못느끼게 됩니다.
뭐 아무튼 요런 연유로 아직까지 IPv4 가 현역이고 앞으로도 상당기간 현역으로 남지 않을까 싶습니다.
IT 쪽에도 은근히 이런게 좀 있는데 제일 많이 알려진게 IPv4 주소 체계입니다.
흔히들 알고 계시는 192.168.0.1 같은 0~255 내의 수를 4개 조합해서 주소를 만드는 식인데 이게 최대로 다 긁어다 써도 42억개 정도 밖에 안되거든요.
IPv4 주소 체계를 만들던 당시에는 오늘날처럼 많은 IP 를 필요로 하는 상황을 상상하기 힘들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설령 상상했다고 한들 당시 하드웨어 성능적 한계 때문에 더 큰 주소 공간을 사용하기는 어려웠다는 것 같습니다.
그러다 90년대에 인터넷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이거 IPv4 계속 쓰다가는 고갈되겠다 싶어서 부랴부랴 IPv6 체계를 만들었습니다.
2001:0db8:85a3:0000:0000:8a2e:0370:7334 <- 요런 식인데 많이들 생소하실 겁니다.
IPv4 때의 고갈 사태에서 배운 교훈으로 주소 공간을 빵빵하게 잡아놓긴 했지만 이게 또 문제가
전세계 방방곳곳에 깔린 네트워크 관련 장비들이 모두 IPv6 를 지원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드웨어 벤더들이 IPv6 를 모두 지원할 때까지 버텨보자하면서 많이 사용된 기술이 NAT 인데
이건 기존 IPv4 주소 체계하에서 하나의 IP 를 나눠쓰는 느낌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게 IPv6 가 보급되기까지 NAT 로 존버가 들어가는데...
문제는 NAT 가 일을 제법 잘해서 불편함을 못느끼게 됩니다.
뭐 아무튼 요런 연유로 아직까지 IPv4 가 현역이고 앞으로도 상당기간 현역으로 남지 않을까 싶습니다.
웹이 "웹 문서"에서 "웹 애플리케이션"으로 진화하고 있는 방향성도 말씀하셨던 것처럼 연속된 "준-비가역성"에 따른 선택의 결과인 것 같습니다.
사실 웹의 태생 자체는 비약을 좀 보태자면 논문 돌려보라고 만들어놓은 시스템이고
그래서 HTML 의 기본 문법 자체도 "문서의 형식"을 포함하기 위한 성격이 짙죠.
그러다보니 초기의 웹이란 건 "미리 준비된" 정적인 문서를 서빙하는 정도의 역할만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cgi 라는 걸 만들어서는 동적으로 그때 그때 문서를 만들어내는 기능을 끼얹고
javascript ... 더 보기
사실 웹의 태생 자체는 비약을 좀 보태자면 논문 돌려보라고 만들어놓은 시스템이고
그래서 HTML 의 기본 문법 자체도 "문서의 형식"을 포함하기 위한 성격이 짙죠.
그러다보니 초기의 웹이란 건 "미리 준비된" 정적인 문서를 서빙하는 정도의 역할만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cgi 라는 걸 만들어서는 동적으로 그때 그때 문서를 만들어내는 기능을 끼얹고
javascript ... 더 보기
웹이 "웹 문서"에서 "웹 애플리케이션"으로 진화하고 있는 방향성도 말씀하셨던 것처럼 연속된 "준-비가역성"에 따른 선택의 결과인 것 같습니다.
사실 웹의 태생 자체는 비약을 좀 보태자면 논문 돌려보라고 만들어놓은 시스템이고
그래서 HTML 의 기본 문법 자체도 "문서의 형식"을 포함하기 위한 성격이 짙죠.
그러다보니 초기의 웹이란 건 "미리 준비된" 정적인 문서를 서빙하는 정도의 역할만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cgi 라는 걸 만들어서는 동적으로 그때 그때 문서를 만들어내는 기능을 끼얹고
javascript 라는 놈도 갑자기 만들어서 문서 자체에도 동적인 요소를 집어넣기 시작하더니
ajax 며, 잠깐 유행했던 RIA 며, 이젠 client-side 의 코드를 전문적으로 작성하는 frontend 개발자 직업군까지 생겼슴다.
그 결과로 요즘엔 찾아보면 웹에서 게임도 돌리고 포토샵도 돌리고 별걸 다돌리죠.
옛날같았으면 데스크탑 애플리케이션으로 할만한 일들도 대부분 웹 위에 올라가는 방향인 것 같습니다.
문서나 보여주려고 만들었던 빈약한 토대위에 만들어진 웹 위에서요.
만약에 오늘부터 이전까지 쓰던 웹 기술들은 전부다 버리고 오늘부터 웹 기반 기술을 새롭게 설계한다고 하면
현재의 기술과는 그 토대가 많이 달라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실 웹의 태생 자체는 비약을 좀 보태자면 논문 돌려보라고 만들어놓은 시스템이고
그래서 HTML 의 기본 문법 자체도 "문서의 형식"을 포함하기 위한 성격이 짙죠.
그러다보니 초기의 웹이란 건 "미리 준비된" 정적인 문서를 서빙하는 정도의 역할만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cgi 라는 걸 만들어서는 동적으로 그때 그때 문서를 만들어내는 기능을 끼얹고
javascript 라는 놈도 갑자기 만들어서 문서 자체에도 동적인 요소를 집어넣기 시작하더니
ajax 며, 잠깐 유행했던 RIA 며, 이젠 client-side 의 코드를 전문적으로 작성하는 frontend 개발자 직업군까지 생겼슴다.
그 결과로 요즘엔 찾아보면 웹에서 게임도 돌리고 포토샵도 돌리고 별걸 다돌리죠.
옛날같았으면 데스크탑 애플리케이션으로 할만한 일들도 대부분 웹 위에 올라가는 방향인 것 같습니다.
문서나 보여주려고 만들었던 빈약한 토대위에 만들어진 웹 위에서요.
만약에 오늘부터 이전까지 쓰던 웹 기술들은 전부다 버리고 오늘부터 웹 기반 기술을 새롭게 설계한다고 하면
현재의 기술과는 그 토대가 많이 달라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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