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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5/06/11 09:37:27 |
Name | 사슴도치 |
Subject | 기술이 욕망을 초과한 시대, 소비는 왜 멈추는가 |
오늘날 제조업의 침체는 단순한 경기 불황이나 공급망 위기, 원자재 가격 상승 같은 표면적 요인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 이면에는 기술의 고도화와 시장 구조의 본질적인 변화가 맞물려 만들어낸, 보다 근본적인 소비 정체가 자리하고 있다. 핵심은 이렇다. 제품은 점점 더 좋아지고 있지만, 사람들은 점점 덜 감동하고, 덜 지불하고, 덜 욕망한다. 더 좋은 기술, 더 좋은 성능이 오히려 소비를 유도하지 못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과거에는 품질 차이가 뚜렷했다. 싸구려는 기능이 떨어졌고, 일정 수준 이상의 품질을 기대하려면 반드시 더 많은 돈을 지불해야 했다. 소비자에게 ‘더 좋은 것’을 사는 일은 불가피했고, 그것이 시장의 성장 동력이었다. 하지만 기술이 시장 전반의 ‘품질 저점’을 급격히 끌어올렸다. 이제 저가 제품조차 일정 수준 이상의 성능과 내구성을 안정적으로 제공한다. 다이소의 생활용품이나 유니클로의 의류처럼, 예전 같으면 단기용이나 대체재로 여겨졌을 제품들이 이제는 "굳이 더 나은 걸 살 필요 없어" 라는 인식을 만들어낸다. 소비자의 필요(threshold)는 변하지 않았지만, 공급되는 제품이 그 기준을 너무 쉽게 넘어서게 된 것. 결과적으로 '더 좋은 것'을 살 이유가 사라지고, 그 지점에서 중고가 제품의 의미가 무너진다. 제품은 실용적으로 충분하지만, 감정적으로는 아무런 설득력을 주지 못한다. 만족은 있지만 감동은 없고, 필요는 충족되지만 욕망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건 단순히 가성비 선호의 문제가 아니다. 욕망 그 자체가 시장에서 사라지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소비재를 넘어 럭셔리 시장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명품 브랜드는 오랫동안 ‘기능’이 아니라 ‘상징 자본’을 팔아왔다. 장인정신, 희소성, 브랜드의 역사성 같은 것들. 하지만 최근에는 그 상징마저도 설득력을 잃고 있다. 복제품은 고도화되어 진품과 가품의 구분이 어려워졌고, 실제로 명품 브랜드 다수는 외주 생산과 대량 생산 체계에 기반해 운영되고 있다. 이제는 소비자가 브랜드 택을 제외한 본질적 차이를 체감하기 어렵다. SNS를 통한 과시 소비의 보편화는 브랜드의 희소성과 배타성을 약화시켰고, "모두가 명품을 소비하는 순간, 명품은 더 이상 명품이 아니다" 라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찾아왔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현상이 소비재나 럭셔리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반도체 같은 고부가가치 산업재 시장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과거에는 성능이 떨어지는 칩은 그만큼 제한된 용도에만 쓰였다. 고사양 제품은 고사양이 필요한 애플리케이션에 필수였다. 그러나 기술이 고도화되면서, 가장 낮은 사양의 칩조차도 가전, 자동차, IoT 등 대부분의 산업 수요를 ‘무리 없이’ 충족시킨다. 오히려 구세대 공정에서 생산된 저사양 반도체에 대한 수요가 더 견고해지는 현상까지 벌어진다. 기술은 계속 발전하는데, 수요는 더 나아지지 않는다. 오히려 "이 정도면 충분한데 왜 굳이 더 비싼 걸 써야 하지?"라는 구조적 회의가 B2B 시장에서조차 보편화되고 있다. 여기에 더해, 오늘날의 소비자들은 ‘더 좋은 것’을 가지는 데 점점 피로를 느낀다. 생애주기 비용의 부담, 불확실한 미래, 환경 이슈에 대한 죄책감, 그리고 ‘끊임없이 더 나은 것을 소비해야 한다’는 압박에 대한 반감이 맞물리며, 이제 많은 사람들은 욕망 그 자체를 꺼리는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SNS를 중심으로 확산된 비교와 과시의 피로는, 한때 소비의 동력이었던 ‘탐닉적 욕망’을 ‘소비하지 않는 쿨함’으로 전환시켰고, 브랜드는 더 비싸고 더 좋은 것을 만들수록 오히려 설득하기 어려워졌다. 물론 이 구조가 모든 지역에서 똑같이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한국, 일본, 독일처럼 기술 수용 속도가 빠르고, 실용 중심의 소비 문화가 강한 국가에서는 이 변화가 더욱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반면 일부 신흥국에서는 여전히 브랜드 상징에 대한 집착이나 계층상승 욕망이 살아있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정보의 글로벌화는 그 격차를 빠르게 좁히고 있으며, 이 흐름은 궁극적으로 보편화될 가능성이 높다. 요컨대,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상황은 단순한 수요 부진이 아니라, “기술이 욕망을 초과한 시대”라는 구조적 변화다. 제품은 충분하고 넘치지만, 소비할 이유가 사라진 시대. 더 빠르고, 더 크고, 더 정교하다는 이유만으로는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 시대. 지금 제조업이 마주한 진짜 위기는, 기술이 멈춘 게 아니라, 욕망을 다시 설계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는 데 있다. 왜 이걸 더 비싸게 사야 하는지, 왜 지금 사야 하는지, 왜 이 브랜드여야 하는지를 말할 수 없다면, 제품은 기능적으로 아무리 뛰어나도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앞으로의 경쟁력은 기술이 아니라 정체성, 가격이 아니라 서사, 성능이 아니라 시장이 원하는 욕구의 본질이다. 기술이 욕망을 초과한 이 시대에, 제조업은 다시금 사람의 욕망을 탐구하고 재정의하는 작업부터 시작해야 한다. -----‐----------------- 요즘 다시 이런저런 낙서들을 시작해서 홍차넷에도 공유해보려고 합니다. 오랜만에 글을 쓰려니까 참 어렵네요.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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