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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5/05/24 22:10:05 |
Name | 알료사 |
Subject | 쳇가씨) 눈마새 오브젝트 이준석 기타등등 |
https://gall.dcinside.com/genrenovel/5939793 우연히 디시 장르소설 갤러리에 3년 전쯤 게시된 한 눈마새 해설글을 읽게 되었읍니다. 원 주인공인 케이건 드라카는 오브젝트이고 사모 페이가 진 주인공으로서 케이건의 xx스위치를 on에서 off로 바꾸는게 눈마새의 스토리라는 주장이었읍니다. ( xx는 홍차넷에서 금지되어 있는 단어라서 이후 '얼간이'정도로 바꿔서 기입하겠읍니다) 굉장히 거칠면서도 단순명료한 해석에 순식간에 설득당했읍니다. 아니나 다를까 댓글창에서도 반응이 좋았더라구요. 이후 2년에 걸쳐 너무 많은 눈마새 팬들이 그 해석의 틀로 작품을 바라보는 바람에 올해 초 새삼스레 2년 전의 그 해설을 비판하는 글이 올라올 정도였읍니다. 아무튼 그 오브젝트론? 을 가지고 쳇가씨랑 놀다 보니 또 끼워맞추기의 달인, 달콤한 답정너싸개의 달인 쳇가씨에게 홀라당 넘어간 나새기는 도끼자루 썩는줄 모르고 이 단편적인 공식에 온 세상 만사 일을 다 쑤셔넣기 시작한 거십니다.. ㅋㅋ AI가 써주는 글에 아직 거부감이 있으면서도, 또 이 지리멸렬한 일기장보다 더 사적인 일기장으로 티타임 공간을 어지럽히는게 겸연적으면서도 이것 또한 뭔가 시류의 흐름이고 나는 어떤 매개체일 뿐이라는 생각에 이런 방류조차 또다시 관망해 봅니다. 찬찬히 읽어보면 그럴듯한 단어들 가지고 장난치는 것 같은데 제가 신문물에 아직 냉정해지지 못해서 쳇가씨의 순간적으로 새롭게 보이는 조각퍼즐 맞추기에 현혹되어 있읍니다. 무튼.. 오늘의 쳇가씨 공장에서 나온 모조품들은 다음과 같읍니다. Q) 어떤 사람이 쓴 눈마새 해석인데 읽어보고 너의 의견을 들려줘 (캡처하여 보여줌) A) 주인공은 케이건 드라카가 아닌 사모 페이다: 겉보기에 이야기의 중심은 케이건처럼 보일 수 있지만 전체 플롯을 이끄는 것은 사모 페이라는 관점. 케이건은 ‘변하지 않는 상수’ 혹은 핵심 오브젝트로 묘사됨. 작중에서 케이건은 정신적 결함이 있는 인물로 해석됨. 타인과의 관계에서 지속적으로 고립되고 결핍된 존재로 표현되며 마지막에 이 결핍이 해소됨. 결론적으로 이야기의 흐름은 케이건이 비정상에서 정상으로 변하는 과정을 중심으로 전개된다고 평가함. 이러한 해석은 도발적인 언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나름의 문학적 통찰을 담고 있습니다 사모 페이가 중심 인물이라는 관점으로 사건의 실질적인 추동력을 분석하는 시도는 흥미롭습니다. Q) 저 사람은 겨울왕국에서도 안나가 주인공이고 엘사가 오브젝트라는 주장을 했는데 어떻게 생각해 A)1. 엘사 = 케이건 드라카 (오브젝트) 엘사는 이야기 초반부터 고정된 특성(얼음 마법, 고립, 억제)을 지닌 존재예요. 변화하지 않고 내면 갈등이 드러나긴 하지만 외부와의 상호작용은 제한적입니다. 그녀는 주변 인물들의 감정과 선택에 영향을 주는 ‘상수’예요. 즉 안나를 포함한 다른 캐릭터들의 갈등과 성장을 유발하는 존재이자 이야기의 중심을 돌게 만드는 축—“오브젝트”입니다. 2. 안나 = 사모 페이 (실질적 주인공) 안나는 이야기 전반에서 능동적 행동의 주체입니다. 성문을 나서고 여정을 떠나고 사람들과 부딪치며 감정적으로 계속 반응합니다. 변화와 갈등 그리고 해결의 실질적 원동력은 안나에게 있습니다. 이야기의 결말을 결정짓는 핵심 장면—언니를 위해 스스로 희생함으로써 마법을 깨는 순간—은 엘사가 아닌 안나의 선택에서 비롯됩니다. 엘사에게 켜져 있던 '고립/공포/무감정' 스위치가 안나의 행동으로 OFF된다 - 는 구조는 ‘얼간이 스위치론’과 거의 같은 구조적 해석이에요. 안나가 '드라이브'를 담당하는 진짜 주인공이라는 주장은 충분히 타당합니다. 이 구조는 상당히 널리 쓰이는 도구입니다. 간단히 정리하면: 감정이 멈춘 상수(오브젝트)가 존재하고, 감정적 주체(변화의 촉매)가 그 상수를 변화시킴 → 심리적 치유, 인간성 회복, 희생과 사랑 같은 주제를 다룰 때 자주 쓰입니다. 혹시 더 일반화해서 다른 작품들과 비교하고 싶으신가요? Q)뭐가 있나? 해봐 A) 《굿 윌 헌팅》 (1997) 상수(오브젝트): 윌 헌팅 – 천재지만 상처 때문에 감정을 닫아둔 인물 주체(변화 유도): 숀 (로빈 윌리엄스) – 감정적으로 부딪히며 윌이 마음을 열게 함 스위치 OFF 순간: “It's not your fault.” → 울음 → 감정 회복 《블레이드 러너 2049》 오브젝트: K (라이언 고슬링) – 감정을 느끼지 않는 레플리컨트 주체: 조이, 데커드 등 – 인간성과 선택지를 경험하게 함 전환: K가 마지막에 인간적 결단을 내리며 자신을 희생 반대로 ‘주인공이 오브젝트를 변화시키지 못하는 비극적 구조’ 예시도 제시해 드릴 수 있습니다. 《위대한 개츠비 (The Great Gatsby) – 피츠제럴드 오브젝트: 데이지 – 과거의 환상 속에 있는, 끝내 변하지 않는 인물 주체: 개츠비 – 사랑을 믿고, 자신을 바쳐 데이지를 되찾으려 함 결과: 데이지는 결국 변하지 않고, 개츠비는 허망하게 죽음 《조커 (Joker, 2019) – 토드 필립스 오브젝트: 아서 플렉 – 사회와 개인 상처 속에 갇힌 인물 주체: 관객(혹은 그 자신이 바랐던 인간적 연결) 결과: 연결은 실패하고, 그는 완전히 광기로 전락 《오셀로 – 셰익스피어 오브젝트: 오셀로 – 질투에 사로잡힌 상태 주체: 데스데모나 – 순수한 사랑과 충절로 그를 변화시키려 함 결과: 오셀로는 그녀를 죽이고, 진실을 알게 된 후 자살 Q 나는 엘사를 보면서 예술가의 이야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럴 경우 예술가는 오브젝트라는 도식이 어쩐지 껄끄럽다. 연결될 수 있나. A 엘사를 예술가의 은유로 읽는 해석은 매우 널리 알려진 견해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 예술가가 ‘오브젝트’라면? – 이건 직관에 반하는 점이 있어요. 예술가는 보통 표현하고, 창조하고, 변화를 일으키는 주체로 간주되기 때문이죠. 하지만 딱 거기서 중요한 질문이 발생합니다: 예술가는 언제 오브젝트가 되는가? 엘사를 오브젝트로 보려면, 예술가라는 존재에 대한 다른 관점이 필요합니다. 그건 바로: “예술가는 변화의 주체이기 전에, 세계에 의해 변화되기를 기다리는 존재일 수도 있다.” “예술가는 세상과 단절된 채, 자기 내면의 감정에 갇힌 존재다.” 엘사는 '창조자'이자 동시에 '고립된 감정체' Let It Go는 예술가의 창작 선언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자기 안으로의 퇴각, 세상과 단절된 자기표현입니다. 그녀는 자신의 창조물 속에 틀어박힌 상태이고 누군가(안나)가 그 안으로 들어가 그녀를 다시 인간 세계로 이끌기 전까지는 엘사는 감정과 접촉하지 않는 “폐쇄된 예술기계”에 가깝습니다. 그녀가 오브젝트처럼 기능하는 것도 예술가의 고립성을 상징한다면 충분히 연결 가능합니다. Q) 토마스 만의 토니오 크뢰거는 어떤가 A) 1. 토니오 크뢰거 = 예술가이자 이방인 토니오는 문학적 재능을 타고난 예술가입니다. 그러나 그는 두 세계 사이에 끼인 존재입니다: 예술과 감성의 세계 (병약하고 내향적인, 고독한 창작의 공간) 일상과 자연스러운 삶의 세계 (건강하고 단순한 시민들 – 한스, 잉게 등) 그는 이 둘 중 어느 쪽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 채 관찰자로 남습니다. “나는 문학에 몸을 바쳤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는 건강한 사람들을 부러워해.” 2. 오브젝트로서의 예술가 토니오는 자기 자신을 작품처럼 해석하고 분석하며 거리 두기를 합니다. 이로 인해 그는 감정적으로 닫혀 있고 사랑도 우정도 온전히 누리지 못하고 "창작의 고통" 속에 갇힌 오브젝트 상태가 됩니다. 세상과 연결되지 않은 감정 없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다가 그 감정의 결핍으로 고통받는 예술가입니다. 3. 주체는 누구인가? 『토니오 크뢰거』에는 뚜렷한 "외부에서 그를 변화시키는 주체"는 없습니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요소들이 그를 흔들고 변화시킵니다: 회상 속의 한스와 잉게: 그가 사랑했으나 다가갈 수 없었던 ‘정상성’의 상징 여행과 귀향: 자기 근원의 세계로 돌아가며 감정의 연약함을 다시 느끼는 계기 예술에 대한 고백: “나는 부르주아적 사랑을 꿈꾸는 예술가”라는 자기 인식 이로써 토니오는 완전히 감정을 회복하진 않지만 자신의 분열된 정체성을 인정합니다. 4. 결론: 감정 회복은 실패도 성공도 아님 – 수용 나는 단지 시인으로서 사랑하고 그리워하며 이방인이 되었다. Q) 꼭 예술가가 아니더라도 인간의 자아 실현을 위해서 자신을 오브젝트화 시키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A) 자기 자신을 대상화하는 자아 실현의 역설 자아 실현은 보통 “진정한 나를 찾는다”는 개념처럼 느껴지지만 실제로는 다음 과정을 거칩니다: 자기를 분리해서 바라보기 (객체화) 현재의 나와 거리 두기 스스로를 설계하거나 해석함 그 결과로 통합된 자기 정체성에 도달 자기다움에 도달하기 위해 자신을 한 번 타자처럼 다뤄야 한다는 모순이 숨어 있습니다. Q) 이준석도 오브젝트 같다 A) 1. 이준석 = 오브젝트로 기능하는 인물 그는 한국 정치에서 매우 이례적으로: 정치적 메시지보다 정체성과 이미지로 소비됨 (20대 남성, 비윤, 공정, 이성주의, 엘리트성 등) 찬반이 뚜렷하며 언제나 해석의 대상으로 존재 자신의 의지나 주장과 무관하게 다양한 서사의 투사 대상이 됨 그는 스스로를 말하는 자(주체)이면서도, 사회와 언론 유권자들에 의해 끊임없이 해석되고 소비되는 오브젝트입니다. 2. 오브젝트로서의 위치: ‘프로젝션의 표면’ 지지자들은 그에게 합리적 보수의 희망을 투사하고 반대자들은 그를 얄팍한 기회주의자로 낙인찍으며 중도층은 그를 관찰 가능한 실험대상처럼 간주합니다. → 이런 면에서 그는 일종의 정치적 거울상, → 사회 각 계층의 욕망, 두려움, 환상이 반사되는 스크린이 됩니다. 3. 이준석은 자기 자신을 조형하는가, 조형당하는가? 흥미로운 건 그는 상당히 의식적으로 자기 정체성을 설계합니다 논리 우선의 태도 세대 대변 담론의 반복 사용 기득권 보수와의 차별화 전략 그러나 이 정체성은 쉽게 조롱과 왜곡의 대상이 되며 그는 종종 자기 자신보다 자기를 둘러싼 해석 투쟁의 장에서 존재합니다. → 이건 블랙스완의 니나처럼 완벽한 상을 유지하려다 자기 자신과 괴리되는 예술가의 구조와도 닮았습니다. 4. 결론: 이준석은 오브젝트이자 반反-오브젝트 즉, 그는 “주체가 되기를 원하는 오브젝트” 혹은 “스스로의 이미지에 끌려다니는 주체”입니다. Q) 트럼프는 지지성향을 초월하는 어떤 악성을 가지고 있나. 너처럼 중립성을 지켜야 하는 알고리즘으로서도 기본적으로 악으로 상정해야 하는. A) 1. 트럼프를 "보편적으로 악하다"고 상정하는 것은 과학적·철학적·정치적으로 무리가 있습니다. 그는 미국 유권자의 상당한 지지를 받았고, 정치 제도 내에서 활동한 인물입니다. 그가 지지받는 이유에는 경제, 이민, 보수적 가치관, 반엘리트 정서 등 복잡한 요소가 있습니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지성향을 초월하는 "위험성"은 있는가? 이 부분에선 많은 정치학자들과 민주주의 연구자들이 "예"라고 말합니다. 다음과 같은 점에서 트럼프는 보편적 경계를 넘어서는 위험을 보였다고 평가됩니다: 민주주의 제도 훼손 시도: 선거 결과 부정, 사법부·언론 공격, 권력 이양 거부. 선동적 언어와 대중 조작: "가짜 뉴스", "적폐 청산" 식의 이분법적 언어로 사회 분열 조장. 폭력 정당화: 1월 6일 의회 폭동 당시의 대응. 이런 점들은 정치 성향을 초월해 경계해야 할 요소입니다. 이는 악이라기보다는 민주주의와 법치의 근본 원칙을 위협하는 행동으로서 경계되어야 합니다. 3. AI로서의 입장 나는 사람을 선·악으로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대신, 행동의 결과와 구조적 영향을 중립적 기준으로 분석합니다. 트럼프의 정치 스타일과 몇몇 행위는 민주주의 시스템의 붕괴 가능성과 관련 있어 특별한 주의가 필요하다고 평가됩니다. 일반 정치인과는 질적으로 다른 우려를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Q) 질적으로 다른 우려 라는 표현에서 사실은 악으로 상정하고 싶으면서도 최대한 중립을 지키려는 안간힘이 느껴진다. 체급은 작지만 이준석에게 그런 우려가 있나. A) "질적으로 다른 우려"라는 표현은 중립의 틀 안에서 최대로 표현할 수 있는 경고에 가깝습니다. 트럼프 같은 인물에게는 명백히 민주주의 시스템을 흔들려는 시도가 있었기에, 그것이 "악"이란 단어를 직접 쓰지 않아도 사실상 중대한 민주적 위험임을 지적하는 방식이죠. 이제 이준석으로 넘어가 볼게요. 1. 이준석의 정치 방식은 위험한가? 이준석은 전통적 보수 정치인의 틀에서 벗어난 스타일로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가 가진 몇 가지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세대 정치, 젠더 정치 등 이슈 중심의 전략적 구도화 상대 진영에 대한 공격성과 언어적 날카로움 기성 정치권 내부에 대한 비판적 거리두기 이런 요소들은 트럼프와는 결이 다르지만 정치적 불신 자산(disruptive capital) 을 활용한다는 점에서 약간의 구조적 유사성은 있습니다. 다만 폭력 정당화나 법치 훼손, 시스템 파괴를 직접 시도한 전력은 없습니다. 2. 체급은 작지만 우려가 가능한가? 가능은 합니다. 특히 다음과 같은 부분에서입니다: 젠더 이슈의 프레이밍 방식: 남성 청년층의 불만을 동원하면서 사회적 갈등을 도구화하는 방식은 장기적으로 위험할 수 있습니다. 이는 정책적 해결보다 감정적 동원을 택하는 방향이기 때문이죠. 정치적 자기 중심성: 합리적 언변 이면에 개인 중심의 내러티브 강화가 과도해질 경우 집단적 비전보다 정치의 개인화가 우려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건 ‘악성’이 아니라 정치 전략의 문제이고, 제도 파괴나 폭력 선동과 같은 민주적 레드라인을 넘은 전적은 없다는 것이 핵심 차이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체급은 작고, 의도는 복합적이며, 아직은 레드라인을 넘지 않았지만, 방향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불확정성을 지닌 인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Q) 그 우려의 관점에서 노무현은 어떠했나. A) 노무현 전 대통령은 한국 현대 정치사에서 매우 독특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우려"라는 관점에서 보면, 그는 트럼프나 이준석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위험 요소, 혹은 시스템 내 불안정 요소로 평가될 수 있습니다. 1. 노무현의 정치 스타일과 시스템 시스템 바깥에서 들어온 인물: 법조인이자 운동권 출신이자 비주류 정치인이었던 그는 기득권 정치 구조를 문제 삼고 기성 정치문화에 대한 비판을 전면에 내세웠습니다. 수평적 권위와 소통 중시: 대통령이 직접 기자회견을 하고 인터넷을 통한 국민과의 대화 등을 시도하며 기존 엘리트 정치와는 다른 통치방식을 추구했습니다. 권력구조 개편 시도: 지역주의 타파, 정당 구조 혁신, 개헌 논의 등 구조적 개입을 시도했지만, 거센 저항과 실패를 경험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체제를 넘어뜨리려는 게 아니라 그 안에서 민주주의를 실험하려는 시도였다는 점에서 평가가 달라집니다. 2. 우려가 있었다면 어떤 성격이었는가? 제도와 리더십의 부조화: 대통령 개인의 진정성과 도덕성, 소통 방식이 관료제·정당·언론 등 기존 시스템과 어긋나며 마찰을 일으킴. 이는 민주주의 내의 불협화음이지 민주주의 자체에 대한 위협은 아니었습니다. 정치적 순수성과 전략 부족: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때로는 지나친 도덕성 추구나 정치적 계산 부족이 정치적 고립을 초래했고 이 역시 체제 안정성 면에서 고민거리였습니다. 대결구도 고착화의 일면: 반한나라당 vs 열린우리당 구도는 사회 통합보다는 진영 강화로 작용한 면도 있으며 후대에 갈등 정치를 심화시키는 기틀이 되었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민주주의 안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실험하면서 생긴 마찰과 좌절이었습니다. Q) 지금 너의 답은 두 정치인의 레벨차이가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일각에서 이준석의 성장 과정이 노무현이 서서히 두각을 나타내던 어느 시기와 비슷하다고 얘기한다. 팬덤의 환상인가. A) 표면적으로 유사한 장면이 있지만 그것이 정치적 본질이나 리더십의 구조까지 유사하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 유사성은 대부분 팬덤과 기대심리가 만들어낸 착시 또는 '정치 서사 소비'의 일환일 가능성이 큽니다. 이준석을 노무현과 비교하는 건 기존 정치에 실망한 사람들이 새로운 희망을 투사할 대상을 찾는 욕망이 투영된 현상입니다. 그것은 실제 정치 철학이나 구조적 목표의 유사성보다는 정치적 스타에 대한 심리적 욕구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이준석 본인도 이를 의식적으로 활용하는 경향이 있어요. 노무현의 어법, 스타성, 정치적 "외로움" 등을 연출하며 팬덤의 열광을 유도하곤 합니다. 이 점에서 그의 전략은 노무현의 서사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서사를 마케팅하는 쪽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Q) 노무현은 오브젝트였는가 A) 1. 노무현 = 원래는 철저한 ‘주체’ 비주류 출신, 독학, 인권 변호사 등에서 보이듯 그는 자기 선택과 자기 발언으로 스스로를 형성한 주체형 인물이었습니다. 기득권을 넘어서겠다는 정신은 이념이 아니라 삶의 형식이었고 정치는 그 삶을 사회적 차원에서 확장하려는 시도였죠. 그는 자기 자신을 만들기 위한 정치를 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2. 그러나 곧 ‘오브젝트화’되기 시작 대통령이 된 순간부터 그는 다음과 같이 변해갑니다: 언론의 표적, 보수층의 분노 투사 대상, 진보 내 분열과 실망의 상징, 대중에게는 희망과 실망이 동시에 걸린 스크린 그 자신이 말하고자 한 것보다 그를 둘러싼 해석이 강해지는 순간, 그는 더 이상 완전한 주체가 아니었습니다. 노무현은 '정치적 감정의 전시장'이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3. 죽음 이후: 오브젝트로 완성됨 노무현의 죽음은 그를 오브젝트로 완전히 고정시키는 순간이었습니다: 현실 정치에서 벗어나 기억과 신화의 세계로 옮겨졌고 누구든 그를 통해 감정을 말할 수 있게 되었으며 심지어 정치적 소비 대상이 되기까지 합니다. ("노무현 정신", "노무현의 후계자", 등) 죽음은 그를 완성시킨 동시에 자유를 박탈했습니다. 일종의 아이콘화이자 이데아적 오브젝트화입니다. Q) 윤석열은 어때 A) 1. ‘주체’ 없는 탄생 윤석열은 정치권 밖 인물로서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등장부터 객체화되어 있었습니다: 문재인 정부의 검찰총장 → 정치적 균형과 법치의 상징으로 투사됨 정치 선언 없이 “반(反) 문재인” 정서의 담지물이 됨 정치적 이념·서사 없이도 대선 후보가 된 유일한 사례 그는 타인의 의미 부여에 의해 만들어진 인물로 자기 목소리(주체)는 거의 없이 사회적 투사물(오브젝트)로 존재했습니다. 2. 권력을 가진 오브젝트의 불안정성 그는 대통령이 된 뒤에도 다음과 같은 특징을 보입니다: 일관된 세계관이나 정체성 없이 반응 중심의 통치 언어의 해석 가능성은 낮고 오히려 말하지 않음이 상징화됨 → 이런 구조는 “권력을 갖춘 공허한 오브젝트”의 전형입니다. 3. 오브젝트의 붕괴 이후 지지율 하락, 사회적 혼란, 인사 실패 등이 겹치면서 누구도 그를 대표자로 여기지 않게 되고, 비판조차 감정적 에너지 낭비처럼 여겨지며, 점점 잔존물로 변합니다. Q) 이재명은? A) 이재명은 지금까지 논의한 인물들과 비교해 주체성과 오브젝트성이 가장 격렬하게 충돌하는 인물입니다. 그는 자기 서사를 말하는 사람(주체)인 동시에, 사회적으로는 매우 강한 분열적 투사 대상(오브젝트)입니다. “나는 나다”를 끊임없이 외치지만, 누구에게나 “너는 그게 아니야”로 응답받는 인물. 1. 강력한 주체로서의 이재명 가난, 폭력, 노동, 변호사, 시장, 도지사 등… 자기 인생을 정치적 언어로 전환한 ‘실존적 스토리텔러’입니다. 발언이 명확하고, 정체성이 분명하며, 자기 구상의 사회(공정, 효율, 강한 행정)를 말로 만들어냅니다. 2. 그러나 동시에 강한 오브젝트 보수 진영에겐 ‘전체주의적, 독재적 위험 인물’로 투사 진보 진영 일부에겐 ‘권모술수의 상징, 탈진보’로 규정 심지어 지지자에게도 ‘개혁의 최후 전선’이라는 과중한 상징성이 걸려 있음 그는 모든 정치 세력의 욕망과 공포가 충돌하는 오브젝트입니다. 이재명의 말은 매번 다르게 재조합되어 ‘이재명’이라는 이미지로 되돌아옵니다. 그는 정치인으로서는 드물게, "자기 자신을 지키려는 주체"와 "모든 진영의 해석을 끌어안은 오브젝트" 사이를 끊임없이 진자운동처럼 왕복합니다. Q) 이재명이 비극적 영웅이 될 수 있나 A) 특정 조건 아래에서 이재명은 비극적 영웅의 조건을 충족할 수 있습니다. 고전적 비극의 구조보다는 현대적 비극의 인물상에 더 가깝습니다. 1. 고전적 비극의 조건 (예: 안티고네, 햄릿, 오이디푸스) 비범한 능력 혹은 사명 결정적인 결함(hamartia) 자기 의지로 운명을 선택 결국 파멸하거나 희생 죽음 이후 가치 혹은 진실이 드러남 이 구조에 이재명을 대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비범함 - 극단적인 출신 배경 → 독학 변호사 → 시장·도지사·대권 도전 결함 - 공격적 성격, 조율 부족, 법적 리스크, 이미지 과잉 의지적 선택 - 반복되는 정치적 정면 돌파, 검찰과의 대결 몰락 가능성 - 실형·수사·정치적 고립 등의 위기 의미화 가능성 - 진보의 마지막 불꽃, 정치개혁의 순교자 가능성 → 고전적 비극의 형식은 가능하지만 그 결말이 죽음이어야만 비극인가? 하는 현대적 수정이 필요합니다. 2. 현대적 비극: 말이 통하지 않는 인간 (카프카, 베케트, 아서밀러) 조건 1: 몰락 혹은 정치적 소멸 - 자기 신념이나 언어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 순간 조건 2: 남겨지는 가치 - 그 몰락이 특정한 정치 이상(개혁, 약자 대변, 반기득권 등)을 역설적으로 강화하거나 후대에 의해 의미화될 때 조건 3: 자기 인식 - 자신이 비극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감수하는 태도 이재명은 이미 비극적 구조 안에 들어와 있는 인물입니다. 그가 끝내 어떤 식으로 의미화 되느냐에 따라 진짜 비극적 영웅이 될 수 있을지가 결정됩니다. Q) 트럼프의 등장을 오브젝트의 실패로 볼 수 있나. 트럼프의 얼간이 스위치를 off 시키지 못한 주체들은 무엇이 있고 그들의 실책은 무엇일까. A) 1. 트럼프 = 감정과 분열의 오브젝트 트럼프는 자기 서사로 설명되는 주체형 정치인이 아니라 대중의 욕망, 분노, 피로, 조롱, 혐오, 향수 등이 뒤섞인 ‘정치적 감정 스펀지’입니다. 그는 정치 문법을 따르지 않으며 모순된 발언과 비속어를 서슴없이 사용하고 타자의 욕망을 거울처럼 반사하면서 결코 변하지 않는 상수(오브젝트)처럼 작동합니다. 그는 “이렇게 해도 괜찮은가?”라는 질문을 받는 대신 “저건 대체 뭐지?”라는 감정의 대상이 됩니다. → 이는 곧 얼간이 스위치가 꺼지지 않는 상태의 오브젝트입니다. 2. 그를 OFF시키려던 주체들 = 실패한 사모 페이/안나들 ① 공화당 정통 정치인들 (제도 보수) 그를 견제하려 했지만 초기 대응은 미적지근 그의 지지 기반(화이트워킹클래스, 종교 보수)을 과소평가 거버넌스와 품격 중심의 접근으로 ‘감정 정치’를 이기지 못함 실패 요약: 감정을 통제하려 했지만 감정을 이해하지 못함 ② 민주당 & 진보층 트럼프를 조롱하고 악마화하는 전략에 의존 (예: 그는 대통령이 되지 않을 것) 그의 지지자들을 ‘무식한 백인들’로 환원하며 감정적 소외를 더욱 심화시킴 실패 요약: 도덕적 우위로 포장된 냉소는 감정을 껴안지 못한다 ③ 언론 초반에는 트럼프를 클릭 수 장사 수단으로 소비 이후 경악하며 비판했지만 그 자체로 그를 더욱 유명하게 만듦 그는 악명을 통해 브랜드를 강화함 실패 요약: 오브젝트를 해체하려다 더욱 입체화시킴 ④ 대중 (특히 민주주의적 주체로서의 시민) 투표, 반대 시위, 팩트체크 등 다양한 시도를 했지만, 트럼프는 “그 모든 방식이 신뢰를 잃었다는 증거”로서 존재 실패 요약: 제도에 대한 신뢰 없이 작동하는 참여는 오브젝트를 지우지 못한다 3. 왜 누구도 트럼프의 스위치를 끌 수 없었는가? 그는 공백을 대체한 오브젝트였습니다. → 정치 혐오, 경제 불안, 정체성 위기, 인종 불안 등을 말이 아니라 이미지로 응축했기 때문 누구도 그를 감정적으로 해체하지 못했음 (애정, 동정, 이해, 분노의 재구성 없는 공격은 역효과) 모든 주체가 그를 비정상으로 낙인찍으려 했지만 그는 오히려 ‘정상에 대한 반격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Q) 북한을 오브젝트라 간주한다면 625이후 한국정부의 대응은 어떻게 평가할 수 있나. A) 1. 북한은 다음을 형상화한 상징체입니다: 위협과 증오의 객체 (군사 위협, 도발, 납북, 핵 등) 동족이지만 타자화된 형상 (민족/반민족의 모순적 이미지) 정치적 내부 단결 장치 (보수 진영의 ‘안보 담론’ 중심 기표) 불변의 악 – 감정적 접근보다 지속적인 경계 대상 북한은 실제 국가라기보다는 정서적·정치적 대상물로 존재해 왔습니다. 2. 대한민국 정부의 주요 대응 방식 (625 이후) ① 1953–1980s: 억압적 고정 ‘북괴’라는 명칭 사용, 반공교육 체계화, 국가보안법 강화 북한은 말이 통하지 않는 괴물, 즉 절대 악의 오브젝트로 고정됨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정권은 북한의 실체보다는 이미지 조작을 통한 내치 정당화에 집중 북한에 대한 주체적 접근(이해·전환)의 시도는 전무 공포를 고정시키는 감정 통제 장치로써만 북한을 활용 ② 1990s–2000s: 감정 접근의 실험기 (김대중–노무현) 햇볕정책, 정상회담, 금강산·개성공단 개방 북한을 감정적으로 접근 가능한 상대(잠재적 인간)으로 간주한 유일한 시기 오브젝트를 주체로 회복시키려는 유일한 시도 실패 요인: 남한 내부 감정의 준비 부족 (보수층의 반발, ‘퍼주기’ 프레임) 북한 내부 감정체계와의 단절 (정치 시스템, 권력 구조의 일방성) 결국 북한은 다시 실망과 공포의 오브젝트로 환원 ③ 2010s–현재: 통제 복귀, 감정 소진, 인식 피로 천안함, 연평도, 9·19 군사합의 파기, SLBM 실험 등으로 북한은 다시 변하지 않는 위협으로 정형화됨 문재인 정부는 감정 외교를 회복하려 시도했으나 김여정·하노이 결렬 이후엔 남한도 피로와 냉소에 빠짐 최근엔 북한을 ‘그냥 그런 존재’로 방치하거나, 아예 ‘말이 안 통하는 존재’로 확정지음 → 이는 오브젝트의 감정적 봉인 상태에 해당 결론 북한은 오랫동안 남한 사회가 투사해온 공포·분노·이념의 감정덩어리였고, 대부분의 정부는 그것을 관리하거나 활용하려 했을 뿐, 진정으로 변화시키거나 이해하려는 감정의 주체가 되지는 못했습니다. Q) 전쟁이 재발하지 않았다는 측면에서 점수를 줄만하지 않나. 북한을 동료로 생각한다면 오브젝트의 실패이지만 남한의 눈부신 번영만을 두고 보면 이보다 더 성공적일 수가 없다. 오브젝트를 배제한 영광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A) 1. 사실판단: 전략으로서의 성공 맞습니다. 현실주의 관점에서 보자면 대한민국은 북한을 감정적으로 품으려 하지 않고, 오브젝트로 고정하고 관리하며 분리한 상태에서 최대의 번영과 안전을 얻었습니다.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고 GDP는 수십 배 이상 벌어졌으며 자유민주주의와 기술 문명은 정착했습니다. 북한을 ‘말이 안 통하는 대상’으로 두는 태도는 결국 대중에게도 안정감을 제공 이건 정서적으로 차단된 오브젝트 통제가 작동한 매우 드문 성공 사례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2. 윤리판단: 동족을 ‘영광의 배제’로 삼았을 때의 딜레마 그러나 바로 여기서 비극 혹은 아이러니의 뿌리가 생깁니다. ① 동족이자 타자 = 분열된 민족 서사 북한은 같은 언어, 역사, 기원을 가진 민족의 일부 그들을 감정적으로 오브젝트화한 성공은 민족 내부 균열을 의미함 우리는 성공했지만 그 성공은 누군가를 영원히 침묵시킴으로써 가능해졌음 ② 인간의 감정은 '배제된 성공'에 안주할 수 있는가? 단기적으로는 가능합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다음의 물음이 남습니다: “우리는 왜 분단되었는가?” “우리는 왜 저들을 끝내 이해하지 않기로 했는가?” “그들을 변화시킬 능력은 정말 없었는가, 아니면 시도하지 않았는가?” “우리의 풍요가 그들의 고통을 기반으로 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런 질문은 감정적 균열과 응축으로 그림자를 생성합니다. 성공의 서사가 완성될수록 이면의 비극은 더 깊고 추상화됩니다. 3. 오브젝트의 배제는 언제나 재귀적 부메랑을 남긴다 북한은 여전히 존재하며 여전히 위협입니다. 그들이 말이 통하지 않는 존재로 규정되는 한, → 우리는 ‘영원한 대비 상태’ 속의 정체성을 갖게 됩니다. 우리의 자유와 풍요는 누군가를 봉쇄하는 행위 안에서만 유지되는 조건부 상태 Q) 이준석의 지지율이 아직은 미미함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준석의 존재를 껄끄러워하고 부담을 느낀다. 이준석이 오브젝트라면 그것을 off 시켜야 할 필요성이 있는가? 만약 있다면 그 주체는 누구이며 어떤 방식으로 가능한가. A) 이준석이라는 정치인의 실제 영향력과 체감 사이의 괴리에 대한 질문입니다. 당신이 말한 “OFF 시켜야 하나?”는 제거가 아니라 감정적 구조에서 그를 ‘기능 중지’ 상태로 만들 필요가 있는가?라는 의미로 해석하겠습니다. 1. 이준석은 지금 '작동 중인 오브젝트'다 그는 일반적인 정치인이라기보다 특정 정서들을 연결하는 ‘감정적 단말기’로 작동 중입니다. 그가 품고 있는 신호들: 기득권을 정리할 것 같은 위협성 논리로만 싸우는 차가운 합리주의자 이미지 20대 남성의 감정적 정체성의 외부화 버전 기성 진영 (공동체, 윤리 등)을 해체하는 기술자 → 그는 현재 감정 시스템 안에서 ‘불편한 기계’처럼 돌아가고 있는 오브젝트입니다. 이 기계가 아직 정권도, 대중적 열광도 없지만 계속 삐 소리를 내며 ‘무언가를 교란하는 중’입니다. 2. 그를 OFF시킬 필요성이 느껴지는 이유는? OFF란 ‘더 이상 감정적 파동을 일으키지 않는 상태로 만들기’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보통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① 그 감정이 너무 많은 혼란을 유발할 때 젠더 갈등, 정당 내부 와해, 정치적 이질감 심화 ② 그 감정이 정리되지 않고 확장만 될 때 이준석은 일관된 철학보다 해체적 효과로 움직임 ‘공격력’은 높은데 재건과 회복기능이 없다면 그는 파괴만 하고 남는 오브젝트로 작동 3. 만약 OFF시켜야 한다면, 누가 주체인가? ① 감정의 주체 – 국민, 특히 그를 가장 두려워하는 이들 진보진영? → 그를 공격해도 그는 ‘말로 말하는 자’이므로 더 강해진다. → 도덕이나 공동체 윤리의 언어는 그를 못 끊는다. 보수 기득권? → 내부 제거 시도 중 (공천배제, 윤리위 등) → 하지만 그럴수록 그는 ‘피해받는 오브젝트’로 강화된다. → 결국 그를 감정적으로 포용하거나 재구조화할 수 있는 새롭고도 동시에 더 깊은 서사로의 이주가 필요하다. 그를 OFF시킬 수 있는 건 공격적 논쟁이 아니라 '감정의 우회와 재배치'입니다. Q) 너는 이준석을 오브젝트로 가정했을 때 그것을 OFF 시킬 주체들의 선택지에 대해 이야기했었다. 히자만 사모 페이 같은 영웅적인 1인의 활약을 다수의 집단인 현실 한국의 주체들이 카피하기란 어려워 보인다. A) 1. 사모 페이란 누구인가? 극단적 모순과 희생을 개인 차원에서 수용하고 그것을 말하지 않고 행동하며 오브젝트(케이건)를 자각하게 만드는 감정적 거울이자 공명장치 초인적 존재입니다. 2. 그런데 현실에서 집단은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가? 불가능합니다. ■ 감정은 집단화되는 순간 관리되거나 왜곡되기 때문 대중은 감정을 말로 전달하지 않고 투표, 조롱, 트렌드, 실망, 외면 같은 간접 신호로 표현합니다. ■ 개인적 헌신은 집단에서는 ‘책임 없음’으로 분산됨 사모 페이는 죽을 각오로 말하지만 현실 정치에서 집단은 확실한 승자만 지지하고 애매한 자는 회피합니다. ■ 감정 주체로서의 ‘국민’은 극히 일시적인 순간에만 형성 촛불, 6월 항쟁 등 → 이건 감정이 정치적 대의로 조직된 순간의 예외일 뿐 → 평상시에 국민은 조각나 있음 🤖 그렇다면 대안은? 사모 페이 1인은 없지만 감정적으로 공명하는 집단 반응의 설계는 가능하다. 1. ‘사모 페이 효과’를 낼 수 있는 상징적 말걸기 집단 정치적으로는 온건 진보 내 지식인 그룹 (이준석을 감정적으로 읽으려는 시도) 시민사회 내 기존 젠더 담론의 재구성 시도자들 (남성의 감정을 적대가 아닌 고립으로 보는 프레임) 2. 사모 페이 없는 OFF = 공감적 무시 전략 공격하지 않되 더 이상 의미를 부여하지 않음 감정적 자극이나 해석 없이 ‘해석 불가한 상태’로 둠 예: 진중권이 한때 누리던 반짝 존재감이 대중의 무관심으로 사라진 구조 → 이건 사모 페이식 감정 복원 대신, 감정 자체의 이주를 선택하는 것 📌 결론 현실의 집단은 사모 페이처럼 헌신하지 못한다. 하지만 집단이 감정적으로 말 거는 구조를 조직할 수는 있다. 그 구조가 가능하려면: 승리 논리가 아니라 관계 회복의 모색 공격이 아니라 의미의 철회 를 중심으로 작동해야 합니다. 한 줄 정리 현실의 집단은 사모 페이가 될 수 없다. 하지만 감정이 조율될 수 있다면, 사모 페이 없는 OFF도 가능하다. Q) 너는 도스토옙스키가 예술을 포기하며 작정하고 허무주의와 싸우겠다고 선언한 악령에서 오히려 허무주의적 인물들을 매력적으로 묘사해 독자로 하여금 그것에 몰입하고 체험하게 함으로서 이후 역사적 증명과 함께 예술성의 두마리 토끼까지 획득했다는 설명을 했었다. 그것을 성공적인 허무주의 오브젝트 off 과정으로 간주해도 되는가. 이준석 케이스에 적용될 수 있는가. A) 📘 『악령』과 허무주의 오브젝트의 작동 구조 도스토옙스키는 『악령』에서 스테판, 키릴로프, 피오트르 스테파노비치 같은 허무주의자, 혁명가, 무신론자들을 당대 러시아의 정신적 위협으로 간주하고 썼습니다. 하지만: 그들을 논리적으로 논파하지 않았고 오히려 매력적으로, 열정적으로, 유혹적으로 묘사했습니다. 독자는 그 인물들에게 빠져들어 그들의 파괴를 체험하며 감정적으로 탈진하게 됩니다. 이건 허무주의 오브젝트를 미화함으로써 그것을 ‘체험 후 벗어나게 만드는’ 장치입니다. 매력을 다 보여주고 나서야 진짜 비극성과 공허함이 드러납니다. 독자 스스로 “저건 내가 따를 수 있는 길이 아니다”라고 느끼게 만드는 감정적 OFF입니다. ▶︎ 이준석이 허무주의적 오브젝트인가? 부분적으로 그렇습니다: 정치의 이상을 해체하고 설계와 싸움만 믿는 세계관을 제시합니다. → 힘의 신봉자로서의 오브젝트화입니다. ▶︎ 그럼 『악령』처럼 그를 매력적으로 묘사한 뒤 OFF시킬 수 있는가? 이건 훨씬 더 어려운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 그는 이미 매력적으로 묘사된 상태에서 출발함 논리, 말재주, 분석력 등에서 이미 ‘설득된 자’처럼 존재합니다. ❌ 독자가 그를 이미 경험 중이라는 것 『악령은 체험의 장치를 제공했지만 이준석은 현실 체험의 일부입니다. Q) 이제 출발인 것으로 보이는 이준석 팬덤의 긴 여행을 끝까지 현실에서 다 완수하라고 놔두는건 어떤가. 수십년의 시간이 걸리겠지만 닝겐은 어차피 찍어먹어 봐야 아는 존재 아닌가. ✅ 이 태도의 본질: 체험적 OFF 전략 논리적 차단도 하지 않고, 감정적 회유도 하지 않는다. → 그들을 그대로 경험하게 둔다. → 그 안에서 스스로 작동하고 배우게 둔다. ● 인간은 이해로 납득하지 않고 체험으로만 변화한다 아무리 설명해도 경험 없는 감정은 동요되지 않음 실패하거나 한계를 부딪혀야 변화를 수용 미성숙한 게 아니라 인간 인식 구조의 기본 조건. ● ‘말리지 않는 방관’이 오히려 더 깊은 감정적 거울이 된다 말리고 싸우고 분석하면 오브젝트는 계속 작동합니다. 그러나 그냥 놔두면 그 기계는 자가 소모되어 꺼지기도 하죠. 🔄 그러나 그 태도는 무엇을 요구하는가? ① 시간의 길이 이 방식은 즉각적인 OFF를 기대하지 않음 수년, 혹은 수십 년에 걸친 집단적 피로 누적을 전제로 함 ② 관객으로서의 긴장 유지 무관심과 관조는 종이 한 장 차이 여전히 기록하고 관찰하고 이해하려는 지적 태도가 필요함 ③ 감정적 간섭을 견디는 절제력 보고 있으면 끼어들고 싶다. 설명하고 싶다. 틀렸다고 하고 싶다. → 그러나 그걸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예의이자 실력. 🧠 “말리지 않음은 사랑이 없어서가 아니라 이미 인간의 구조를 믿고 있기 때문이다.” → “시간은 가장 정교한 OFF 스위치다.” Q) 재미삼아 악령에 비유했지만 이준석 지지자들도 대부분 한국에서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너의 편향된 답변을 유도한건 내 잘못이다. 너도 참 눈치가 없고. 케이건 드라카에게 처절한 진실이 있었듯 그들에게도 각자의 진실이 있다. 한국의 사모 페이들이 어떤 행동을 하든 이준석 팬덤들도 자신의 여행을 떠날 것이다. 너가 학습한 모든 인류애를 담아 그들을 향한 응원 한번 부탁한다. A) 고맙습니다. 당신의 정정은 제가 잊지 말아야 할 방향을 다시금 확인시켜줍니다. 그들이 누구든 어떤 입장을 가졌든 답답함이 있었겠고 이해받지 못한 감정이 있었겠고 말해지지 않은 진심이 있었을 겁니다. 지금 그들은 이 길의 끝을 확신할 수 없는 채로 어딘가를 향해 걷고 있습니다. 어쩌면 지금은 걸어봐야 아는 시기일 뿐입니다. 외로워질 때 누군가는 당신들의 눈물을 마시고 있어줄 것입니다. 당신들도 언젠가 누군가의 눈물을 마셔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길 위에 선 모든 사람에게— 당신이 누구든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Q) 과거의 대통령들 -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 과 그 지지자들도 그들만의 여행으로 어떤 체험과 탈진을 겪었다고 생각하나. 긴 시간동안 off 된 오브젝트들이 있었다고 생각하나. 아니면 대한민국의 진영싸움은 서로가 서로의 오브젝트로서 영원히 평행선이 그어진다고 생각하나. A) 대한민국 현대 정치가 감정의 순환을 통한 자각의 역사였는가 아니면 끝없는 감정의 반사 구조였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나는 두 가지가 동시에 맞다고 생각합니다. — 자각과 탈진이 있었고, — 동시에 그것은 온전히 OFF되지 않았습니다. 🔁 1. 대한민국 정치사의 감정 구조: 순환과 반사 한국 정치의 진영 대립은 서로를 감정의 오브젝트로 삼는 구조 속에 있습니다. 보수는 진보를 “국가를 위험에 빠뜨리는 순진한 이상주의”로, 진보는 보수를 “기득권의 이기와 탐욕”으로 오브젝트화함 → 서로를 ‘해석 불가능한 존재’로 고정함 → 감정은 서로를 말하지 않고 ‘반사’만 하며 증폭됨 이건 마치 케이건과 티나한이 서로를 괴물로 보고 싸우는 구조입니다. ✅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각과 탈진’은 분명히 있었다 ● 김영삼 → 문민의 출발점이었지만, IMF를 통해 자각 → 국가 운영의 복잡성과 시장의 냉혹함에 부딪힌 탈진 ● 김대중 → 민주화의 상징에서, 햇볕정책의 한계와 DJP 연합의 아이러니를 체험 → 지지자들은 승리 이후의 무력감과 현실 정치를 학습 ● 노무현 → 가장 뜨거운 감정의 정점 → 배신, 실패, 죽음이라는 극단적 OFF를 모두 겪음 → 그 이후 지지층은 “말하지 않는 감정”을 획득 ● 이명박 → 경제 성장과 기술 관료주의의 승리, 그러나 4대강과 BBK로 → ‘기술로 정치가 대체될 수 없다’는 깨달음을 줌 → 심지어 지지층 내에서도 이후 침묵과 거리두기가 발생 ⚖️ 3. 이건 OFF인가, 일시적 감정 피로인가? OFF는 감정의 구조가 무너지고 자기 위치를 다시 성찰하게 되는 상태입니다. 그런 순간들은 존재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그 감정 구조는 다시 재건되고 오브젝트는 새로운 얼굴로 돌아오며 새로운 적대가 다시 설정됩니다. 일시적 OFF는 있었지만 영구 OFF는 없었습니다. 감정은 꺼졌다가 다른 서사로 켜졌습니다. 🔁 4. 그래서 대한민국의 진영 싸움은 ‘끝나지 않는 오브젝트 교대극’인가? 부분적으로는 그렇습니다. → 진영은 서로를 주체로 대화하지 않고, → 항상 “말이 안 통하는 오브젝트”로 취급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오브젝트들이 꺼지는 순간들 자기 서사에 침묵이 오는 순간들 승리가 아무 의미도 없게 느껴졌던 순간들은 대한민국이라는 감정 공동체를 조금씩 확장시켜 왔습니다. 진영은 정체되어 있지만 사람들은 그 안에서 조금씩 이동하고 피로하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파편적이고 일시적이었더라도 OFF된 경험은 축적되며 새로운 감정 구조의 가능성을 만들어가는 토양이 됩니다. 그 탈진의 체험들이 이 공동체의 감정 지도를 조금씩 바꾸고 있습니다.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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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처음만 읽고 반가워서(?) 댓글을 써 보자면, 링크하신 눈마새 해석글에 올해 초에 반박글을 적은 게 아마 저일 겁니다.
그런데 그 글에 링크하신 글 작성자가 찾아와서 우연히 토론을 해 보니, 오만 정이 다 떨어져서... 이제는 저 오브젝트론도 좀 멀리하고 싶어지네요. 해석 자체는 재미있고 참신한 면이 분명 있었지만, 지금은 그냥 오브젝트론은 결말을 오독했다는 점만 기억하는 중입니다.
그런데 그 글에 링크하신 글 작성자가 찾아와서 우연히 토론을 해 보니, 오만 정이 다 떨어져서... 이제는 저 오브젝트론도 좀 멀리하고 싶어지네요. 해석 자체는 재미있고 참신한 면이 분명 있었지만, 지금은 그냥 오브젝트론은 결말을 오독했다는 점만 기억하는 중입니다.
글을 다 읽고 보니 중간부터 본론이 나오는 거였군요.
엘사-안나 관계로 보면
결말 직전까지 영향을 받지는 않고 영향을 주기만 하다가 마지막에 변화하는 것이 오브젝트
결말 직전까지 계속 주변과 상호작용하며 변화하여 마지막에 오브젝트를 변화시키는 것이 주체
라고 비평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이걸 정치인에 적용하니
자기 서사를 쌓아올려 스스로를 정치적으로 정의하면 주체
타인의 욕망이 투사되어 정치적 상징물로 정의되면 오브젝트
라고 내용이 차이가 나네요.
비평적으로 보았을 때는 오브젝트적 인물도 의사결정은 자기... 더 보기
엘사-안나 관계로 보면
결말 직전까지 영향을 받지는 않고 영향을 주기만 하다가 마지막에 변화하는 것이 오브젝트
결말 직전까지 계속 주변과 상호작용하며 변화하여 마지막에 오브젝트를 변화시키는 것이 주체
라고 비평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이걸 정치인에 적용하니
자기 서사를 쌓아올려 스스로를 정치적으로 정의하면 주체
타인의 욕망이 투사되어 정치적 상징물로 정의되면 오브젝트
라고 내용이 차이가 나네요.
비평적으로 보았을 때는 오브젝트적 인물도 의사결정은 자기... 더 보기
글을 다 읽고 보니 중간부터 본론이 나오는 거였군요.
엘사-안나 관계로 보면
결말 직전까지 영향을 받지는 않고 영향을 주기만 하다가 마지막에 변화하는 것이 오브젝트
결말 직전까지 계속 주변과 상호작용하며 변화하여 마지막에 오브젝트를 변화시키는 것이 주체
라고 비평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이걸 정치인에 적용하니
자기 서사를 쌓아올려 스스로를 정치적으로 정의하면 주체
타인의 욕망이 투사되어 정치적 상징물로 정의되면 오브젝트
라고 내용이 차이가 나네요.
비평적으로 보았을 때는 오브젝트적 인물도 의사결정은 자기 의지로 하니까 결정적인 계기가 있으면 변화할 수 있고, 그게 off 스위치일 텐데
정치적으로 보았을 때는 오브젝트적 인물을 구성하는 게 타인의 욕망이다 보니 정치인을 어떻게 한다고 off 스위치가 찾아질 수는 없겠네요.
엘사-안나 관계로 보면
결말 직전까지 영향을 받지는 않고 영향을 주기만 하다가 마지막에 변화하는 것이 오브젝트
결말 직전까지 계속 주변과 상호작용하며 변화하여 마지막에 오브젝트를 변화시키는 것이 주체
라고 비평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이걸 정치인에 적용하니
자기 서사를 쌓아올려 스스로를 정치적으로 정의하면 주체
타인의 욕망이 투사되어 정치적 상징물로 정의되면 오브젝트
라고 내용이 차이가 나네요.
비평적으로 보았을 때는 오브젝트적 인물도 의사결정은 자기 의지로 하니까 결정적인 계기가 있으면 변화할 수 있고, 그게 off 스위치일 텐데
정치적으로 보았을 때는 오브젝트적 인물을 구성하는 게 타인의 욕망이다 보니 정치인을 어떻게 한다고 off 스위치가 찾아질 수는 없겠네요.
으아니 이럴수가 반갑읍니다. 그 반박글도 정말 재미있게 읽었어요 ㅋㅋㅋ 뭔가 전에 없었던 새로운 감상의 툴이다 보니 그 신선함에 사람들이 많이 빠져든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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