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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5/11/06 20:35:17
Name   nickyo
Subject   못된 아이스크림 때문에


"커피 리필해 드릴까요?"

생글생글 웃으며 커피포트를 들고온 종업원을 살며시 고개를 저어 돌려보냈다. 가지런히 뒤로 망에 넣어 볼록 올린 머리와 하얀 셔츠 사이의 목덜미에 눈이 간다. 까만색 앞치마의 끈이 청바지와 셔츠 사이에 묶여있어서 끈을 슬쩍 뽑아내면 이내 발가벗겨지는건 아닐까 하는 발칙한 상상을 해본다. 다 식어빠져 바닥에 몇 방울 남은 커피를 홀짝인다. 바(Bar)로 돌아간 종업원은 커피잔 바닥을 핥기라도 하려는 듯한 내 모습을 보고는 결국 물 한잔을 내려놓고 돌아선다. 창 밖에는 추적추적 비가 내려 며칠 닦지 않은 카페 유리창의 먼지가 땟국물로 흐른다. 마스카라가 눈물로 번진 여자가 세상을 바라볼때는 이런 풍경일까 싶게 유리창 바깥의 세상도 거뭇거뭇하게 번진다. 뽀드득, 뽀드득 하는 커피잔 닦는 소리와 철벅이는 빗소리가 꽤 어울린다. 스피커에서 은은하게 울리는 클래식음악의 볼륨도 딱 좋다. 그는 이대로 여기서 잠드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한다.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자니 지루하다. 그는 종업원이 한창 바 안에서 스마트폰을 두드리는 걸 가만히 지켜본다. 이내 종업원이 어느 새 바 앞에서 멀뚱히 고개를 괴고 있는 그를 발견한다. 화들짝! 스마트폰이 바 안의 조리대 위에서 춤춘다. 떨어지겠어요. 종업원은 상기된 얼굴로, 무..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라고 당황한 눈치다. 그거 재밌어요? 아, 아.. 그녀의 멋쩍은 웃음이 바를 사이에 두고 흐른다. 리필은 괜찮고요, 뭔가 한 잔 더 마시고싶은데.. 커피가 아닌 다른걸로요? 네. 아, 혹시 아이스크림 있어요? 네? 있어요. 그녀는 겨울이 훌쩍 다가온 이 때 아이스크림을 찾는 사람이 신기하다는 눈치다. 음.. 그럼 아이스크림을 따로 파시나요? 그럼요. 결국 그는 아이스크림을 주문하고 돌아선다. 뒤통수 너머로 맛은 어떤걸로 드릴까요? 하고 묻는 말에 적당히 주세요로 답한다. 적당히는 틀릴 줄을 모른다. 그래서 적당히는 언제든 옳다. 종업원의 손길이 금세 바빠진다. 자리로 돌아와도 비는 여전히 그칠 기세가 없다. 거리에는 사람도 별로 돌아다니지 않고, 그는 가만히 상념에 잠기려 애쓴다. 이건 꽤 그럴싸해 보이는 한 폭의 사진 같은건 아닐까 하고 약간의 나르시즘에도 기대어본다. 그러나 그는 배도 나왔고, 눈가에 주름도 지기 시작했고, 머리숱도 예전만큼 풍성하지가 않다. 그런 화보는 없겠지. 하고 혼자 속으로 키득대지만 얼굴은 웃는 게 어색하기라도 한 듯 표정이 없다.


"아이스크림 여깄습니다."


그는 조금 놀란 눈치였다. 아이스크림이 무려 네 덩이나 나온것이다. 그것도 하나하나가 애들 주먹만하다. 저, 이렇게 많이 주실필요는 없는데.. 아! 그게 정량이라서요. 아니 그래도.. 종업원은 그의 나머지 말을 들은체 만체다. 일단 아이스크림 한 입을 베어문다. 과연 카페에서 파는 아이스크림답게 스푼을 찔러넣는 순간 쫀득하게 휘감긴다. 스무살, 처음으로 잠자리를 나눴던 한 여선배의 둔부가 떠오르는 것은 비단 그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입에 넣자마자 진득한 단맛이 어금니 사이로 흐른다. 차가움은 언제 그랬냐는 듯 부드럽게 사라진다. 입에서 넘어가는 목넘김 동안에 이미 아이스크림은 없다. 여선배의 손길이 입술에서 가슴팍으로, 가슴팍에서 배꼽으로, 배꼽에서 다시 어깨로, 그러다가 엉덩이를 슬며시 스치고 조심스레 민감하고도 딱딱한, 묵직한 곳에 잠시 머문다. 느끼기도 전에 선배의 손길은 다시 남자가 칠칠맞게 주렁주렁 달아둔 애기씨 주머니를 건드릴 듯 말듯 지나, 그의 허벅지 뒤를 쓸어올리고 허리를 살며시 감아내린다. 두 번, 세 번째 스푼의 아이스크림이 넘어가고 한 스쿱의 아이스크림을 다 먹을쯤에는 그의 귀는 열이라도 나는 듯 뜨끈하다. 그래도 아이스크림은 너무 많다. 그는 볼이 상기된 줄도 모른 채 약간 높아진 목소리로 종업원을 부른다.


"손님도 없는데, 같이 아이스크림 드실래요?"


종업원은 난처한 눈치다. 그는 그녀에게 아무런 마음도 없지만 이게 끼를 부린다고 할 만한 짓임은 어렴풋이 안다. 그래서 남으면 버려야 하니까요. 이걸 포장할 수도 없고... 그러자 포장해드려요! 하고 큰 소리로 외치는 종업원은 도망갈 구멍이라도 찾아낸 쥐처럼 신이 난 눈치다. 쥐보다는 조금 귀엽지만. 하필 떠오르는게 왜 쥐일까 하고 봤더니 입이 약간 돌출형이라는게 눈에 띈다. 그렇다고 절대로 못생긴 얼굴은 아니다. 되려 귀엽고, 턱선보다 얇게 내려 떨어지는 목선은 자연스레 손길이 갈 듯 하다. 목선을 따라 내려오니 하얀 블라우스와 까만 앞치마로 가슴이 가려져 있다는 걸 발견한다. 그는 그 목선에 손을 뻗어 슬그머니 블라우스를 파헤치는 모습을 잠깐이나마 상상한다. 하지만 차분한 목소리는 변함없이, 대신 아이스크림을 포장해서 가져가봐야.. 혼자거든요. 하고 슬며시 웃는걸로 마무리한다. 그러지말고 앉아요. 손님도 없는데.. 다른 뜻 없으니 부담갖지 말고요. 종업원은 난처함과 호기심 사이에서 불편해 하다가 조금 멀찍이 의자를 가져와 앉는다. 그는 슬그머니 한 발짝 그녀의 경계에 몸을 기울인다. 저도 예전에 카페에서 일을 했었거든요. 하루종일 뭐 먹지도 못하고 배고프잖아요. 기억이 날듯 말듯한 오래된 경험을 만지작댄다. 카페에서 일하신 적 있으세요? 그럼요. 저 꽤 본격적이었어요. 이내 몇 마디의 대화가 스스럼없이 이어진다. 종업원은 한결 편해진 눈치다. 그는, 여기 단골이 되어볼까 하는 생각이다. 아이스크림이 금세 사라졌다. 종업원의 표정은 단 맛에 녹진녹진하게 풀어졌다. 괜시리 그는 다리를 한번 꼬며 등을 의자에 기댄다. 약간 거만한 자세로 어깨가 넓게 펴진다. 둘이 먹으니까 금방이네요. 그의 표정도 한 결 편안하다. 끼, 부려볼까. 그러나 서른셋의 아저씨는 스물의 젊은이보다는 조금 겁이 많고 마흔의 어른보다는 좀 더 발칙하다. 종업원은, 아이스크림은 제가 먹었으니 차 한 잔 어떠세요? 한다. 차보다 술은요? 괜찮은 곳을 아는데. 서른셋은 아무래도 마흔보다는 스물 예닐곱에 가까웠는지 툭 하고 잽을 날린다. 그녀는 못 알아 들은 듯 네? 하고 되묻다가 이내 눈동자가 슬며시 커진다. 그는 나온 배를 가리려는 의도는 아니었지만 가을에 딱 어울리는 트렌치 코트를 몸쪽으로 한번 접는다. 스물 예닐곱때의 몸매가 아니라는 점이 내심 아쉽다. 그리고 그게 서른셋의 그를 조금 겁먹게 한다.



종업원은 고집스레 차를 들고 온다. 아마도 그게 익숙할 것이다. 그의 앞에는 따뜻한 쟈스민 차가, 그녀의 앞에는 까만색 커피가. 씁쓸하고 고소한 커피의 향과 꽃의 부드러운 향기로움이 테이블 위에서 몸을 섞는다. 종업원은 몇 모금의 침묵이 두려웠는지 마감까지 시간이 많이 남았다는 말 끝을 흐린다. 손가락 끝이 커피잔의 입가를 살그머니 쓸어넘긴다. 그는 그 가느다란 손가락이 자신의 몸 위에서 걷는 것도 썩 괜찮을 듯하다고 생각했다. 쟈스민 차 두어 모금을 더 홀짝이며 마음에도 없는 시시껄렁한 잡담으로 화제를 넘긴다. 그게 종업원에게는 훨씬 편안했는지 바뀐 화제에 금세 기운차다. 그는 건성으로, 그러나 건성이 아닌 것처럼 거만한 어깨를 좁히고 고개를 내밀어 그녀의 말을 경청한다. 그러나 속으로는, 이미 그녀의 앞치마 끈을 쏙 뽑아낸지 오래다. 여린 목선을 타고 어깨를 꾸욱 누르고 싶다. 저 가느다란 어깨 양 쪽을 커다란 두 손으로 꾹, 푹신한 침대에 눌러 놓고 싶다.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게. 그녀는 몇 번이고 몸을 옴짝달싹 대지만 이내 남자의 체중은 그보다도 훨씬 무겁고 무서운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녀의 바쁘게 열리고 닫히는 입술을 당장이라도 헤집을 것이다. 그러고 나면 그녀의 무력한 손을 밀어내고, 무릎을 슬그머니 밀어넣을 것이다. 그녀의 허벅지보다 두 배는 둔탁한 다리는 그것만으로도 가쁜 숨을 들이키게 할 것이다. 조금의 긴장이 땀방울에 맺힐 무렵이면, 그녀는 더 이상 어깨를 누르지 않았는데도 침대 밖으로 도망치지 않는다. 그는 다만, 몇 가지 상투적이면서도 달콤한 말을 귓가에 슬그머니 흘리는 것 만으로도 마지막 그녀의 죄책감에 면죄부를 줄 수 있음을 안다. 이윽고 달궈진 쇠막대기 같은 것이 텅 빈 몸에 꽉 차고나면 그 때부터는 언어는 꽤 쓸데없는 것이 될 것이다. 다 쓰고 버려진 콘돔만도 못한 말들은 집어치운 채, 그는 그녀의 안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봉긋하게 솟은 가슴이 거친 숨소리를 따라 흔들릴 때 마다 그의 몸놀림은 더욱 바빠질 것이다.


딸랑딸랑


하고 카페의 문소리가 들린다. 종업원은 아까보다 훨씬 푸근한 미소를 짓는 그를 외면하고는 새 손님을 맞이하러간다. 그는 사정 직전에 여선배의 룸쉐어를 하던 동기가 돌아왔던 자취방을 떠올린다. 한껏 격양된 엉덩이를 내비친 그 기억에 아쉬운 입맛을 쩌억 다신다. 그녀의 뒷모습은 앞치마 끈이 정갈하게 묶여있는 채다. 어느새 비는 그쳐가는 듯 하고 거무잡잡하게 창문을 타고 흐르던 빗방울은 느릿느릿, 땅을 향해 하나둘 미끄러진다. 그는 마지막 남은 쟈스민 차 한 모금을 자리에 두고 일어선다. 갈색 구두에 검은색 정장바지, 파란색 목도리와 그 커다란 몸을 덮은 트렌치코트. 큰 키에 딱 어울리는 태를 내면서, 뜨끈한 아랫배에 이제야 조금 부끄러운 짓을 했다는 눈치다. 종업원은 커피를 내리느라 분주하다. 별 다른 인사 없이 카페를 빠져나가고, 남자는 세피아 톤 물결 사이로 어느새 사라져 눈에 띄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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