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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4/06/06 10:26:47 |
Name | 카르스 |
Subject | 한국 징병제의 미스테리 |
현충일날 갑자기 생각나서 불경을 무릅쓰고 도발적인 발제를 해봅니다. 개인적으로 한국의 저신뢰, 얕은 사회적 자본 이야기 할때마다 제일 해석하기 골치아픈게 '한국사회 징병제의 높은 지속성'입니다. 만약에 한국이 정말로 신뢰수준이 낮고, 사회적 자본이 바닥이라면, 어떻게 1.5-2년간 인생의 청춘기를 충분한 반대급부 없이 국가에 바치는 징병제에 이렇게까지 순응할 수 있을까요? 한국이 정말 그렇게까지 신뢰나 사회적 자본이 없었다면, 국가공동체보다 나를 우선시하는 태도로 병역기피, 병역비리가 만연해져서 징병제는 진작에 형해화되지 않았을까요? 다들 알다시피 한국의 징병제 강도는 복무기간이나 복무율 기준으로 봤을 때 세계에서 최상위권입니다. 1.5년-2년의 복무기간은 과거에 비해 많이 줄었지만, 에리트레아, 북한, 이스라엘, 싱가포르 정도만 한국보다 확실히 길어 세계적으로는 여전히 최상위권입니다. 복무율은 다들 알다시피 85% 정도로 매우 높아서, 신체건강이 나쁜 사람들도 군복무를 해야 할 상황입니다. 사회복무요원으로 복무해야 하는 보충역까지 합하면 95-96% 정도입니다. 복무기간과 복무율의 관점에서 이렇게까지 가혹한(?) 징병제는 북한같은 실패국가를 빼면 이스라엘과 싱가포르 정도밖에 없습니다.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위한 대체복무도 꽤나 강도가 높습니다. (복무기간이 무려 3년!) 심지어 징병군인, 참전용사에 대한 처우과 병영문화 수준은 장기간의 개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박합니다. 최근 벌어진 채상병 사건이나 훈련병 가혹행위 사망사건을 생각해 보시면 이해가 될 겁니다. 그런 면에서 한국인들의 징병제에 대한 순응성은 매우 놀랍습니다. 한국인들의 낮은 신뢰/사회적 자본과 복무기간과 복무율 복무환경을 생각하면, 한국인들의 국군과 징병제에 대한 불신이 고작해야 "뺄 수 있으면 무조건 빼라"는 평범한 준법투쟁 수준에 그친다는 건 놀라운 일입니다. 모병제 이야기는 주기적으로 돌아다니는 떡밥 정도고. 그리고 단순히 뺄 수 없어서 군대에 갈 수밖에 없었다 치부하기엔, 외국 시민권자들의 자원입대가 증가했다는 사회현상이 설명되지 않습니다. 이들은 병역의무가 없어서 가기 싫으면 안 가면 그만입니다. 이들이 왜 굳이 익숙하지 않은 모국에 가서 1.5-2년 간 군 복무를 감수했을까요?https://www.munhwa.com/news/view.html?no=2024011101072930114001 실제로 Hur Aram 정치학 교수는 저서 Narratives of Civic Duty에서 한국의 징병제에 대한 높은 순응을 민족주의와 연결짓고, 시민의 의무에 대한 높은 순응을 높은 시민의식과 연결짓습니다. 그는 한국을 '국가와 민족이 일치한 덕분에 민족주의가 납세, 병역 의무 등 시민적 의무들과 긍정적으로 연관된, 민족주의가 서구의 고정관념과 달리 긍정적으로 작용한 사례'로 소개합니다. 이렇게 저자가 호평한 한국의 시민의식은 한국 사회에 대한 여러 고정관념을 뒤흔든다. 정말로 그렇게 볼 수 있을까요? 한국의 '저신뢰 사회에서 강도 높고 부조리한 면이 있는 징병제에 대한 높은 순응성'이라는 미스테리는 어떻게 설명되어야 할까요? 개인적으로 여러가지 가설이 떠오릅니다. 1. 한국 사회에 뿌리박힌 군대, 병영문화 => 2000년대까지는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해당 문화가 많이 엹어진 2010년대 이후의 한국 사회 풍조와, 결정적으로 해외 한국인들마저 한국에 자원입대하려 오는 심리를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2. 민주화 이후 과거의 만연한 병역기피 등에 대한 시민들의 반발로 병역'형평성'이 강조됨 => 실제로 강인화 교수 등이 지적하는 이야기이고, 일리가 있다 생각합니다. 다만, 병역기피로 인한 불신이 왜 징병제를 약화시키지 않고 강화하는 방향으로 갔는지에 대한 정교한 메커니즘 설명이 필요합니다. 3. 한국 사회는 시민적 신뢰/사회자본이 약할지 몰라도 국가주의적, 공동체주의적인 신뢰/사회적 자본이 강하다. => 충분히 가능성 높은 가설입니다. Hur Aram은 국가주의/공동체주의적인 신뢰/사회적 자본과 시민적인 것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한국인들은 위에서 나오듯 역사적 이유로 국가와 민족이 매우 긴밀하게 연결되었기에 국가공동체 단위로 사고하는 관념이 강합니다. 그렇기에 시민적 신뢰, 사회적 자본이 부족함에도 국가에 대한 신뢰와 충성심은 비교적 높게 유지됩니다. 적대국가와의 휴전 상태가 장기간 유지되는 현 정국을 생각하면 더 높겠지요. 사실, 시민적인 신뢰나 자본이 충분하다기엔 한국의 징병제는 여러 문제가 있습니다. 후진적 병영문화와 열악한 근무환경과 징벌적인 양심적 병역거부제 등등... 다만 이 가설도 문제가 있습니다. 국가주의/공동체주의와 시민적 신뢰/사회적 자본이 그렇게까지 동떨어진 개념일까요? 코로나19 위기 때, Hur Aram 교수의 지적대로, 동아시아 시민들의 방역 정책에 대한 순응은 단순히 국가주의성을 넘어 시민적(civil)이라고 높게 평가받았습니다.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이 필요합니다. 4. 사실 개인에 이득이 되는 군 복무, 그리고 안 할 때 어마어마한 유무형의 페널티. => 최근 병역기피/비리 단속 및 병역판정기준의 강화로 군대를 빼기 매우 힘들어졌고, 군 복무가 유무형의 이득을 주는 면도 있기 때문에 일리가 있습니다. 다만 엄밀한 계량이 필요한 분야입니다. 군대 뺄 때 페널티는 계량화하기 참 어렵거든요. 군 복무가 주는 이득을 논하는 선행연구들이 몇 있는데, 방법론상 충분히 엄밀하지 못한 느낌입니다. 5. 사실 한국의 신뢰/사회적 자본 수준은 그렇게 낮지 않습니다. 신뢰와 사회적 자본은 추상적 개념으로 계량 자체가 어려워서 한국은 과소평가되었으며, 계량적으로 드러난 저신뢰, 낮은 사회적 자본도 선진국들과 비교한 기준입니다. => 이것도 충분히 나올 수 있는 가설입니다. 최근 사회적, 국가적 신뢰가 상승했다는 데이터가 다수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습니다. 다만 보다 엄밀한 데이터 분석이 필요합니다. 무엇이 맞는 이야기인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지만 충분한 분석을 요하는 사회현상이라고 생각해서 긴 글을 올려봅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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