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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1/01/01 18:03:28수정됨
Name   간로
Subject   홍콩의 화양연화(3) 사미인思美人 - 홍콩, 그 아름다운 님이여

香港的 花樣年華

홍콩의 화양연화(3)
사미인思美人
- 홍콩, 그 아름다운 님이여




홍콩을 처음갔을 때, 그곳이 정말 아름답다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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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늦게 도착해서 숙소에 짐을 풀고 나왔을 때 접한 홍콩의 첫 풍광이었다. 



이 몸 삼기실 제 님을 조차 삼기시니,
ᄒᆞᆫᄉᆡᆼ
緣分(연분)이며 하ᄂᆞᆯ 모ᄅᆞᆯ 일이런가.
나 ᄒᆞ나 졈어 닛고 님 ᄒᆞ나 날 괴시니,
이 ᄆᆞ음 이 ᄉᆞ랑 견졸 ᄃᆡ 노여 업다.

 

이 몸 태어날 때 님을 따라 태어나니
한평생의 연분임을 하늘이 모를 일이던가.
나 하나 젊어 있고 님 하나 날 사랑하시니
이 마음 이 사랑 견줄 데가 전혀 없다.

- 정철, 사미인곡(思美人曲)-


우리는 보통 정철의 사미인곡을 다음과 같이 배워왔다.

 

<사미인곡>은 미인을 생각하는 노래라는 뜻으로, 미인은 선조 임금을 비유한 것이다. 선조 임금을 생각하는 간절한 마음을, 임을 그리는 여인의 간절한 마음에 비유하여 자신의 충정을 드러냈다. 


주제: 임금을 향한 일편단심, 연군지정

 

임금에 대한 충절을 아름다운 님에 대한 연심(戀心)으로 빗대어 표현한 작품은 고려시대 정과정부터 조선 후기 윤선도의 견회요에 이를 정도로 반복되어 왔는데, 국민교육은 이들을 통틀어 충신이 임금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님을 그리워하는 사랑에 빗대어 노래한 '충신연주지사(忠臣戀主之詞)'라고 우리를 가르쳐왔다. 

그래서 사미인곡도 충성심만 기억하지 거의 아무도 그 자체로는 사랑노래임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 


이런 사미인곡 모티브의 원형은 따로 있는데, 멀리 춘추전국시대 초나라 굴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思美人兮         아름다운 님을 그리워하며
擥涕而佇貽      눈물을 훔치고서 홀로서서 멀리바라보네 
媒絶路阻兮      중매도 끊어지고 길도 막히고 
言不可結而   할말도 전할 수가 없도다 
- 굴원(
屈原), 사미인(思美人) -

 

제목 '사미인(思美人)'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정철의 ‘사미인곡(思美人曲)’은 여기서 따와서 지은거다. 

이 노래는 충언을 계속하다가 모함을 받아 추방당한 굴원이 당시 초나라 왕(경양왕)을 그리워하며 지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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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굴원이 지은 <사미인>은 <이소(離騷)> 등의 다른 작품과 함께 «초사(楚辭)»라는 책으로 전해져왔고, 동아시아 사회에서 시문학의 고전으로 예로부터 많이 읽던 글이었다. 그러니까 정철도 그렇게 모티브를 따와 사미인곡을 지은 것이고.


여기서 왕에 대한 충심을 현대적으로 말하자면 자신이 속한 정치공동체인 나라에 대한 마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미인곡>은, 그리고 <사미인>은 나라에 대한 마음을 아름다운 님을 향한 그리움으로 그려낸 작품일 것이다. 

그렇다면 반환 이전 홍콩을 그리는 영화인 화양연화도 얼마든지 충신이 임금(나라)을 그리워하는 ‘충신연주지사’라고 말할 수 있다.



이별연습을 하며 모운(양조위)은 리첸(장만옥)에게 다시는 보러 오지 않겠다고 말한다. 그말처럼 그 둘은 다시는 함께 하지 못하는데, 직후의 장면에서 나오는 노래가 영화의 제목인 화양연화(花樣年華)의 모태가 된, 저우쉬안(周璇)의 ‘화양적연화(花樣的年華)’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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驀地裏這孤島籠罩著慘霧愁雲, 慘霧愁雲

, 可愛的祖國 幾時我能夠投進你的懷抱

갑자기 이 외딴 섬이 안개와 구름으로 뒤덮였네

아, 사랑스러운 조국... 언제 너의 품에 안길 수 있을까


-저우쉬안(周璇)의 ‘화양적연화(花樣的年華)’ 중-


영화의 위 장면에서 정확히 이 부분이 흘러나온다. 이 곡은 본래 1946년에 제작된 영화 ‘長相思’에 수록된 곡이며 원래 가사는 1945년 중일전쟁 종전으로 일본 침략으로부터 벗어난 중국인의 애국심을 보여주는 노래였다고 한다. 

화양연화가 반환 전 홍콩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담고 있는 영화라면, 1966년 홍콩 장면 리첸과의 대화에서 집주인이 하는 홍콩이 어수선하다는 말이나 모운이 옛 구씨의 집에서 방문했을 때 그곳에 살고 있는 다른 이가 난리통이니 누군들 떠나지 않겠느냐는 말이 마치 훨씬 훗날의 영화 화양연화 개봉시점이라 할 반환전후의 홍콩시기의 혼란상에 대한 말로 들리게 된다. 

그래서 화양연화 개봉당시 스크린에서 들었을 ‘화양적연화’의 이 가사도 1946년 당시의 애국심으로 느껴지지는 않을 것이다. 

알 수 없는 미래라는 안개와 구름으로 뒤덮인 홍콩섬과 이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 살아온 사랑스러운 조국, 홍콩이라는 곳에 대한 연심이 드러나지 않는가. 마치 정철이, 굴원이 임금에 대하여 노래하듯이.



홍콩은 연심에 빗댈만할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기도 했다.

낮에는 탁트인 푸른빛에 다종다양한 빌딩과 시가의 모습이 청명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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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사추이 뒷 거리의 어지러운듯하면서 묘하게 어우러져있는 간판으로 뒤덮인 모습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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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에도 따뜻한 리펄스베이의 영롱한 바다가 그러했다.


홍콩은 아름다운 곳이었다.




아름다운 님을 그리는 가사인 사미인곡은 아무 맥락없이 그 자체로만 보면 꽤 훌륭한 연가(戀歌)이기도 하다. 

 

ᄒᆞᄅᆞ도 열 두 ᄯᅢ ᄒᆞᆫ ᄃᆞᆯ도 셜흔 날,
져근덧 ᄉᆡᆼ각 마라 이 시ᄅᆞᆷ 닛쟈 ᄒᆞ니,
ᄆᆞ음의 ᄆᆡ쳐 이셔
骨髓(골슈)의 ᄭᅦ텨시니,
扁鵲(편쟉)이 열히 오나 이 병을 엇디 ᄒᆞ리.
어와 내 병이야 이 님의 타시로다.

ㅊㆍㄹ하리 싀어디여 범나븨 되오리라.

곳나모 가지마다 간 ᄃᆡ 죡죡 안니다가,
향 므든 날애로 님의 오ᄉᆡ 올므리라.
님이야 날인 줄 모ᄅᆞ샤도 내 님 조ᄎᆞ려 ᄒᆞ노라.

 

하루도 열두 때 한 달도 서른 날
잠깐 동안 생각을 말고 이 시름을 잊자 하니
마음에 맺혀 있어 뼛속까지 사무쳐 있으니
명의가 열명이 와도 이 병을 어찌하리
아아 내 병은 이 님의 탓이로다
차라리 사라져서 호랑나비가 되리라
꽃나무 가지마다 가는 데 족족 앉았다가
향기 묻은 날개로 님의 옷에 옮으리라
님이야 나인 줄 모르셔도 나는 임을 쫒아가려 하노라

- 정철, 사미인곡(思美人曲)-

 

님을 그리워하는 마음에 병이 들어 차라리 나비가 되어서 님의 옷에 옮아 쫓아가려 하는 심정을 그린 사미인곡을 충절에 대한 내용이라고 넘어가긴 아깝다. 어찌 절절한 사랑노래가 아니라고 할 수 있으랴. 마치 화양연화가 그 자체로 매우 세련되고 감각적인 로맨스 영화인 것처럼.

하지만 화양연화는 로맨스 영화로만 기억되고, 정반대로 사미인곡은 충절에 대한 노래로만 기억된다. 그러나 둘의 모티브는 사실 같지 않을까. 한 쪽에는 로맨스와 반대편에는 나라에 대한 마음이 있고 그 둘을 맞대는. 로맨스로 나라에 대한 마음을 표현하는. 하지만 기존의 이해방식에 따른다면, 우리는 그 둘을 각기 정 반대의 한쪽 편으로만 바라봐왔다. 


앞선 글들에서 이야기했듯이 영화 화양연화는 홍콩 반환을 전후로 하는, 아름다웠던 홍콩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건 연주지사라는 맥락에서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화양연화를 로맨스 영화로'만' 기억하는 것은 사미인곡을 군주에 대한 충성심으로'만' 새기는 단선적인 이해만큼이나 협소한 시각 아닐까?

어쩌면, 오해라고까지 말해도 되지 않을까. 우리가 사미인곡을 충신이 임금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연심에 빗댄 사랑노래라고 바라본다면 화양연화도 그러하다고 봐야 한다. 그리고 대다수가 사미인곡을 이해하는 시각으로 화양연화를 본다면, 화양연화의 진짜 얘기는 로맨스가 아니라 나라, 홍콩을 향한 그리움이 더 주된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홍콩의 밤은 놀라웠다. 어느곳보다도 화려한 밤풍경이 진짜 홍콩이라는 평에 동감을 표할 밖에 없었다. 

대표적인 거리인 네이선로드를 가면 이게 무슨 말인지 격하게 동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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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으로 가득했던 빅토리아 피크, 홍콩의 야경이 한 눈에 내려다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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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곳에서는 보기힘든 독특한 매력으로 가득 차 있는 곳이 홍콩이다. 


이런 홍콩을 아름다운 이에 빗대어도 되지 않을까. 사실 반해버렸다.



'사미인'이나 '화양연화'나 모두 나라에 대한 마음을 님에 대한 연심으로 그려낸 작품이라 한다면. 과감하게 말하고 싶기도 하다. 화양연화는 현대 홍콩의 '충신연주지사'인지도 모른다고. 반환 이전의 홍콩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모운과 리첸의 옛 시절에 대한 절절한 마음으로 그려낸 영화라고 말이다.(이렇게 보면, 영화의 정서는 아름다운 시절이던 1962년이 아니라 그게 모두 지나가버린 1966년이 나오는 영화 말엽에 응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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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씨가 떠난 집에서 살던 이는 모운과 떠나버린 구씨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며 위와 같이 말한다.


그렇게 이해한다면 로맨스로 포장된 스크린의 행간에 이별연습 후에 쓸쓸한 두 사람에게 울려퍼지는 ‘화양적연화’나 66년 장면에서 홍콩의 상황이 어수선하고 난리통이라는 대화, 캄보디아에서의 드골 장면 등 삐죽삐죽 튀어나오는 부분에서 그 근저에 깔려있는 옛 시절 홍콩에 대한 그리움이 진하게 묻어나온다. 근저의 지나가버린 옛 시절에 대한 안타까움과 진한 그리움이야말로 진짜 담겨 있는 정서이리라.

화양연화의 주된 내용은 도리어 옛 시절, 그 아름다웠던 홍콩에 대한 연모가 진짜 이야기라 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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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이 정말 그립다. 언제까지고 그곳에 있기를



命則處幽吾將罷兮  운명이라면 그윽한 곳에 처하며 장차 마치며

願及白日之未暮     저 해가 저물지 않기를 바랄 뿐이로다.

焭焭而南行兮   홀로 외로이 남녘으로 가면서

思彭咸之故也        팽함*의 옛 일 그리워하노라.

- 굴원(屈原), 사미인(思美人)-

 

*팽함: 은()나라[상()나라]의 충신으로, 임금에게 직언했으나 이를 듣지 않자, 스스로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이소(離騷)>에서 굴원은 나의 말을 알아주는 이가 없다며 절망하면서 팽함을 따와 그처럼 죽어야겠다고 한탄하기도 했다. 훗날 굴원의 충언을 듣지않던 초나라의 국운이 기울자, 굴원은 정말 돌을 가슴에 안고 멱라강에 스스로 뛰어들었는데, 동아시아권의 명절인 '단오'는 굴원의 이 일을 기리면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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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편 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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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양연화, 그 꽃다운 옛 시절의 조건







15
  • 정말 잘 읽었습니다.


토오끼코오끼리
[홍콩이 정말 그립다. 언제까지고 그곳에 있기를] 하 ㅠㅠㅠ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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