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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5/07/30 04:58:20
Name   No.42
Subject   한 폭의 그림같은 직장 이야기 #2
기다리시는 분들이 계셨는데, 늦게 올리게 되어 죄송합니다. 식구들이 연합하여 제 컴을 거하게 부수는 바람에 오랜만에 용산바람 좀 쐬었네요;;;

자, 정부 지원금을 받아들고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른 그런 상태로 저는 행복한 생일을 맞았습니다. 국가과제라는 것이 검수만 잘 통과하면 되는 것이고,
그 검수가 그리 빡세지 않은 것이 현실이라 사실 여유가 좀 있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데드라인이라는 것이 있으면 사람이 급해지기 마련이죠. 회사는 당장
오늘 내일을 알 수 없는 상태이기도 했구요. 4월에 지원금을 받고, 중간검수는 12월에 있었습니다. 8개월 동안 우리 이런거 만들었어요라고 할 만한 아웃풋이
나와야만 하는 것이죠. 당장 그 주의 주간회의에서 저는 팀장에게 외주개발업체 선정을 서두르자고 건의했습니다. 팀장은 알았다, 당연하다고 했지요.
...그리고 이 발언은 매주 주간회의마다 계속됐습니다. 외주업체 선정은 골치아픈 일입니다. 일단 우리가 계획한 플랫폼 하에서의 개발력이 있어야 함은
물론이요, 실무팀인 저희 팀의 감사와 법무팀의 감사까지 통과해야 했습니다. 우리 팀은 둘째치고 법무팀 감사가 있는 것은 이놈들이 과연 진짜로 개발력이
있으며 먹튀할 가능성은 없는가를 체크하는 과정이라 보시면 됩니다. 저희 회사가 외주업체에 3도 화상을 꽤 입어본 일이 있어서 말이죠. 때문에 진짜로
아웃풋 폼이라도 내려면 어서 업체를 서칭하고 선정해야 하는 건데, 팀장은 요지부동이었습니다. 제가 나서서 이리저리 알아보고 다니고 있었죠. 그런데
팀장은 제가 알아본 업체들은 제대로 훑어보지도 않고 자신에게 생각이 다 있답니다.

이런 일이 한 달 넘게 계속되고, 저의 불만은 끝없이 쌓이고 있었습니다. 같은 팀 차장님과 담배를 나누며 땅을 좀 꺼뜨려볼 기세로 한숨을 쉬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다가왔습니다. 다른 팀의 C차장님이신데, 저는 사실 얼굴은 자주 봤지만 뭐 하는 분인지는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 분은 팀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
이것저것 물으셨습니다. 사실 뭐 대외비라고 할 만한 사항은 거의 없는 데다가 같은 회사 분이니 저는 그 분의 질문에 꼬박꼬박 답을 해드렸지요. 이러던
즈음에 팀장은 업체가 선정되었다며 제게 기다리던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소개받은 사람은 정부과제 지원할 즈음에 팀장이 데리고 다니던
젊은 외부업체 사장이었죠. 솔직히 전 별로 믿음이 가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과 팀장이 지원서랍시고 써놓은 것을 본 이상 제대로 된 믿음이 생길 리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팀장은 그 사장에게 말도 놓고 후배처럼 대하고 있었고, 계약을 서두르기로 합니다. 그래서 팀 감사와 법무팀의 감사 요청을 진행하려
했습니다. 팀장이 막습니다. 팀 감사는 자기가 다 했으니 됐고, 법무팀은 시간이 없으니 자기가 말해서 패스하겠답니다. 그렇게 법무팀장과 무슨 쇼부를
어떻게 봤는지 과감하게 절차가 생략되었습니다. 사실 팀장은 이것이 특기였습니다. 회사의 정해진 프로세스를 무시하는 것 말입니다. 비용 지급 절차에
따르면 회계팀에 넘어간 차주에 지급이 되는 것이 정상입니다. 하지만 늘 외부에 '오늘까지 넣어드릴게요. 늦어도 내일!'이라고 큰 소리를 친 다음에
회계팀에 돈 일찍 넣어달라고 조르는 것이죠. 물론 자신이 직접 하는 일은 없고 ERP담당인 저를 보냅니다. 저는 가서 갖은 꾸중을 듣고 볼멘소리를 다 듣고
간신히 원하는 결과를 얻곤 했습니다. 당시 회계팀에서 저희 팀을 담당하던 형에게 정말 미안한 마음이었습니다. 결국 법무팀 감사가 생략되었는데, 그간
시간은 자신이 다 끌어놓고 정해진 프로세스를 마음대로 생략하는 것이 영 미덥지 않았습니다. 법무팀 담당자 형도 이에 대해서 당췌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반응이었죠. 하지만 말단들이 무슨 힘이 있습니까. 부장이 밀어붙이는 대로 일은 흘러갔습니다. 저는 세부 기획안을 작성하여 그 사장에게 전달했지요.
대신 저는 직접 개발자와 이야기를 하고 싶으니 회의를 한 번 하자고 했습니다. 아무래도 사장을 한 다리 건너는 것보다는 저희 팀 디자이너와 저, 그리고
그 쪽의 프로그래머가 직접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효율적이니까요. 업체 사장은 알았다며 곧 자리를 만들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한참 아무 소식도 전해주지
않았습니다. 그 와중에 계약과 관련한 비용을 처리하는데, 넋이 나갔습니다. 팀장은 약 9천만원에 이르는 금액을 한 방에 그 쪽에 쏴주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게 맞냐고 팀장에게 거듭 확인했습니다만, 팀장은 여전히 그 특유의 무덤덤한 태도로 그렇답니다. 회계팀 담당자가 달려와서 확인할 정도의 거금이었죠.
저는 법무팀 담당 형에게 대체 계약이 이런 경우도 있는지, 계약금 중도금 잔금 뭐 이런식으로 분할지급하는 게 정석이 아닌지 확인했습니다. 형의 대답은
사규에 그런 식으로 정해진 바는 없으나, 일반적인 상식으로도 계약시 전액을 한 방에 쏘는 것은 이상하다고 합니다. 네, 정말 이상했습니다.

앞서 팀의 일에 대해서 이것저것 물어봤다는 C차장님이 계셨죠. 사실 그 분은 컴플라이언스 팀이라는 곳의 팀장이셨습니다. 쉽게 말하면 내부감사팀이죠. 제가
신입사원일 때 받은 교육에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컴플라이언스 팀은 CEO직속이며, 이 곳에서 요청하는 자료에 대해서는 적극 협조하라고. 그리고 저는 그
때 즈음에 그 컴플라이언스 팀에서 자료 요청을 받게 되었습니다. 거액이 한 번에 지급된 정황을 포착한 그 쪽에서 이 일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죠. C차장은
팀장에게는 비밀로 하고 그간 오간 이메일과 회의록 등의 자료를 요구했습니다. 저는 낼름 넘겨줬습니다. 저 스스로도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일이었으며, 사규에
적극 협조하라고 되어있고, 교육도 그렇게 받았으니까요.

저희 팀도 이렇게 파도와 바람을 얻어맞고 있을 때, 회사 역시 크게 요동치고 있었습니다. 구조조정은 매달 이루어지고 있었고, 오늘 출근한 사람이 내일은
없어지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그렇게 없어진 사람 중에는 저희 본부장도 있었습니다. 저희 팀이 속한 본부는 해체되고 저희 팀의 간판이 바뀌며, 본부장은
퇴사하기로 했다는 겁니다. 사실 모회사에서 건너온 경영진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칼을 휘두른 것이었습니다만, 그 속에는 모회사 측과 미리 친분을 쌓았던
내부 인력들의 정치놀음이 정말 찐득하게 배어있었습니다. 그런 정치꾼들 중에 대표적으로 꼽히던 것이 다름아닌 저희 팀장이었습니다. 모회사에서 건너와
단숨에 실세 of 실세, 사실상 CEO로 등극한 COO와 그는 상당한 친분이 있었던 겁니다. 이런 연줄로 그는 자신의 위에 있던 본부장을 치우는 데까지 성공했죠.
하지만 국회에 정당이 여럿이라서 개싸움이 나듯이, 회사에도 세력은 여럿 있었습니다. 새로운 본부를 만들어 본부장 직함 한 번 따본다는 그의 야망은 다른
세력들의 저지로 좌절되고, 저희 팀은 다른 본부에 소속되게 되었습니다. 이런 뒷 이야기는 저처럼 말단 사원에 정치 비슷한 것에도 두드러기가 나는 고지식한
놈이 알기 힘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제가 줄줄이 읊을 수 있느냐, 그것은 퇴사를 앞둔 본부장이 저를 불러 일러주었기 때문입니다. 본부장은 저를 불러서
내가 내 밑의 팀장에게 배신을 당해 이렇게 밀려날 줄 몰랐다는 넋두리를 하면서 온갖 이야기를 다 해주었습니다. 사실 본부장도 제 선배를 배신한 히스토리가
있는 이였습니다만, 막상 자기 등에 칼이 꽂히니 퍽 아팠던 모양입니다. 그러면서 본부장은 제게 자신에 대한 억하심정이 남아있는지 확인합니다. 저는 사실
용서못해...!!!류의 감정은 가지고 있지 않았고, 형들에게 들은 말도 있어서 괜찮다고, 뽑아주신 분이니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전했습니다. 그렇게 말하자, 본부장은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습니다.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1. 팀장은 지금 하고 있는 일 외에도 개인적으로 뭔가를 하려고 한다. 그 일에 연루된 것이
외부업체 사장이며, 그 일이 뭔지는 본부장 자신도 모른다. 하지만 팀이 망가져도 본인은 살아남으려는 의도라는 것은 확실하다. 2. 팀장은 현재 컴플라이언스
팀에서 자신을 주목하는 것을 알고 있으며, 팀원이 자료를 넘겨준 사실도 다 알고 있다. 3. 팀장은 휴가와 관련하여 너의 뒷조사를 했으며, 너에 대해서 상당한
악감정을 품고 있다. 대강 이런 얘기였습니다. 1번은 그렇다치고 2번은 놀라웠습니다. 신입사원 교육에서 협조 요청엔 적극 협조하라. 비밀은 보장된다... 고
했었거든요. 예, 제가 이렇게 순진합니다. 결과를 미리 말하자면, 컴플라이언스 팀은 정말 아무것도 한 일은 없이 자료만 잔뜩 가져가고선 그 자료를 넘겨준
저를 보호하지도 못하고 팀장의 포화 속에 그냥 내밀어 줍니다. 그렇게 날뛰는 팀장과 상대하는 것은 온전히 제 몫이었지요. 휴가와 관련한 뒷조사라는 것도
기가 막힌 이야기인데, 이렇습니다.

그 해에 저희 연로하신 외할머니께서 작은 수술을 받으시다가 마취가 잘못되었는 지 어쨌는지 쇼크를 받으셔서 중환자실로 잠시 들어가신 일이 있었습니다.
집에서 연락을 받은 저는 오후 반차를 내고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상태가 얼른 좋아지지 않으셔서 저는 다음날에도 연차를 내고 병실을 지켰습니다. 할머니의
상태가 호전되셔서 저는 다음날부터는 정상 출근을 했지요. 그런데 이렇게 연차를 1.5일 쓴 것이 팀장은 영 맘에 들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본부장의 말에 따르면
팀장은 제 개인정보를 가지고 있으니 이를 이용해서 저희 집, 그러니까 부모님과 할머니가 사시는 친가로 전화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답니다. 무슨무슨
보험공단 사람인데 혹시 아무개씨(할머니 성함) 댁이 맞냐고. 전화를 받은 어머니는 그렇다고 대답을 하셨죠. 팀장은 처리할 일이 있어서 그런데 혹시 아무개씨
최근에 수술받으신 적 있냐고 물었습니다. 대답은 아니라고 했답니다. 그래서 팀장은 제가 뭔가 거짓말을 하고 휴가를 썼다며 길길이 날뛰었다고 합니다. 저는
실로 언짢았습니다. 사실 연차라는 것이 마음대로 쓰라고 주는 휴가인데, 저는 거짓핑계도 아니고 진짜 집안일로 휴가를 1.5일 썼을 뿐입니다. 전 당장 집에
연락해서 혹시 그런 전화를 받은 일이 있냐고 물었고, 어머니는 그렇다고 했습니다. 뭔가 굉장히 스팸성을 느끼고는 그런 일 없으니 전화하시지 말라고 하고
끊었답니다. 팀장은 그 대답을 듣고는 제가 거짓말을 해서 휴가를 썼다고 생각한 겁니다. 한숨이 나왔습니다.

다음 날, 본부장의 책상은 비워졌고, 너무나 자연스럽게 팀장이 그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그리고 쥐새끼같은 눈빛(이것은 감정적인 묘사가 아닙니다. 실제로
딱 보면 쥐...라고밖에 표현하지 못합니다. 정밀 묘사라고 생각해 주십시오.)으로 저를 쏘아보았습니다. 이제 저는 팀장과 한 판 벌여야 하는 말단사원이 된
것입니다.

졸려옵니다. 역시 다음 번에 이어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아름다운 새벽이네요.

P.S. 쓰다보면 어떤 회사일지 결국 다 티가 날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제 입으로 밝히지는 않으려 합니다. 그런데, 이따위 스토리의 용의선상에 복수의
회사가 오르내린다는 사실이 너무 슬프네요. 전 재직시에 이런 막장은 하나도 너무 많다고 생각했습니다... 순진하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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