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6/09/26 00:29:22
Name   Obsobs
Subject   지진 이후 병원에 방문하시는 분들
9/12일, 9/19일 경주 인근에 지진이 일어나고 많은 사람들이 불안과 공포에 휩싸였었죠. 첫번째 지진 후에는 곧 추석 연휴가 있어서 그렇게 체감되지는 않았는데, 두번째 지진이 오고 난 다음부터는 둔감한 저도 약간 불안하고 신경쓰이고 하더라구요.

저는 정신과 병원에서 근무하는 초짜 의사입니다. 근무하는 병원이 지진 발생 인근 지역이다보니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지진 이후 생긴 불안증상으로 방문하셨었어요. 하루 신환(처음 병원에 방문하시는 환자분) 중 3~4명 꼴로 지진으로 인한 불안감 때문에 오셨으니 많다고 보긴 봐야겠죠. 병원에 저 말고 다른 선생님들도 근무하시니... 아마 더 많았을거 같네요.

저 혼자의 경험이라 일반화하긴 어렵습니다만, 오시는 분들을 보니 특별히 정신과적이나 심리적인 어려움이 없으셨던 분들이 지진 있고 난 다음에 저희과를 찾으시는 경우는 적은거 같았습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어느 정도 수준의 심리적 혹은 정신과적인 어려움을 가지신분들이 훨씬 더 많더라구요. 지진이 방아쇠가 되어서 불안정한 심리상태를 완전 헤집어놓는 듯한 느낌이 들었었습니다. 정신과적으로, 심리적으로 도움을 받으실 필요성이 있는 분들이 이 기회에 방문하시는 거 아닌가 싶기도 했구요. 의외로 기존에 치료받으시던 분들 중에서는 지진 때문에 불안했다고 말하시는 분들은 좀 적었던거 같기도 했어요. 제가 일일이 안 물어봐서 그런건지, 아니면 다른 원인이 있는건지는 잘 모르겠지만요.

저희 집도 그렇고 이웃들도 그렇고 맘스카페 같은곳 분위기도 보면 다들 언제든지 나갈 수 있도록 간단한 짐 하나정도는 다 쌓아놓으셨더라구요. 하지만 동네 분위기도 그렇고 다들 지내는걸 보면 그렇게 break down되지 않은 상태이신거 같았습니다. 일단 대비는 해 놓지만 그 이상으로 심하게 두려워하거나 불안해하지는 않는 정도로요. 안전불감증이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 충격적인 사건으로 인한 심리적 충격에서 서서히 빠져나오게 마련이니깐 꼭 그렇다고도 볼 수 없을거 같아요. 아니면 원전이 멀지 않다보니 다들 반쯤 포기한 마음이 있는건지도 모르겠네요.

불안해서 도움을 청하는 사람들과 일상생활을 유지하는 사람들의 차이를 보니, 자기 자신을 다독이는 능력이 정신적, 심리적으로 건강하냐의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 중의 하나이구나 하는 생각이 다시금 문득 들었었습니다. 지진 때문에 걱정되고 힘들어도 상황을 다시 보고 '니가 생각하는 것 만큼 그렇게 불안해 하지 않아도 돼' 라고 말해주는 내면의 또다른 내가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아니면 '원전이 저리 있는데 심한 지진이면 걍 다 끝장이야. 포기하면 편해' 라고 말하는건지도 모르겠네요.)

내일 아마도 '12일과 19일에 지진 났으니깐 오늘 다시 지진이 나지 않을까 무섭고 불안해요' 라고 말씀하시며 병원에 오실 분들이 좀 있으실거 같아요. 일단은 너무 불안해하고 집에도 못들어가고 잠도 못 주무시는 분들이시라 약 처방해드리면서 '많이 놀라셨겠어요. 그래서 너무 힘드신거 같아보이구요. 당장 지진이 나는 것도 아닌데 지진이 날까봐 불안하신가보네요. 일단은 불안함도 줄이고 잠도 좀 주무실 수 있도록 약을 드릴께요. 자연재해니깐 OO씨가 걱정하고 불안해하신다고 달라질건 없어요. 지진이 났을 때의 대피요령 잘 숙지하시고, 혹시 모르니 대피하거나 할 때 필요한 짐들 챙겨놓으시고 일상생활 잘 유지하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라고 생각하시고 잘 지내보도록 해요. 다음주에 잘 지내셨는지 다시 뵈었으면 좋겠어요.' 라고 이야기하며... 저도 제 속으로는 불안감을 다독이고 있겠죠. 허허.

내일 20시 33분이 지나면 다들 조금은 안심하면서 지낼수 있을까요. 하루하루 안전하게 살 수 있길 그저 바랍니다.



4
  • 덕분에 지진이 안 온 듯요!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5474 요리/음식집에서 스테이크 구우면 맛이가 없는 이유 35 Morpheus 17/04/19 8659 15
7464 요리/음식집에서 뒹굴대는데 부엌에 빵이랑 잼 등등도 같이 굴러다닐 때 25 la fleur 18/05/01 7312 14
9537 기타집에 권연벌레 나왔어여...기분이 좋지않네요 4 맹고 19/08/11 32736 0
13972 일상/생각집앞에서 마약 본 썰 7 당근매니아 23/06/09 3621 1
15189 일상/생각집안에 기강이 안선다고 한마디 들었어요.ㅠㅠ 15 큐리스 25/01/06 2620 2
6380 기타집안 박스 정리하기의 심란함 13 Toby 17/10/07 5545 0
8964 일상/생각집안 문제아.. 다들 있나요?? 16 잘될거야 19/03/15 5725 6
15217 일상/생각집사 7년차에 써보는 고양이 키우기 전 고려할 점 11 Velma Kelly 25/01/18 2304 19
10754 일상/생각집밥의 이상과 현실 42 이그나티우스 20/07/06 6740 43
15119 일상/생각집밥 예찬 2 whenyouinRome... 24/12/09 1998 22
10062 일상/생각집문제로 스트레스 받아서 넋두리 남깁니다. 35 미스터주 19/12/09 7421 18
329 기타집들이 잘다녀왔습니다~ 10 지니 15/06/14 7376 0
10879 일상/생각집돌이 즐겜러의 요즘 6 겨울삼각형 20/08/24 5134 4
3173 정치집도 줘요, 땅도 줘요, 제발 일하러 오세요. 31 눈부심 16/07/02 5497 0
7780 꿀팁/강좌집단상담, 무엇을 다루며 어떻게 진행되는가 3 아침 18/07/02 6257 14
12444 경제집값은 올라가고 있는건가? 내려가고 있는건가? 9 cummings 22/01/15 5488 1
12116 일상/생각집 인테리어하면서 겪은 일. 29 비사금 21/09/27 6028 5
2584 기타집 없는 컴퓨터 9 성의준 16/04/09 5115 1
14429 일상/생각집 밖은 위험합니다 1 mathematicgirl 24/02/01 2848 1
6876 일상/생각집 근처에 고등학교 야구부 있으면 좋은점 7 사람사람 18/01/02 4507 0
14742 일상/생각 4 하얀 24/06/13 2978 26
3710 방송/연예질투의 화신 7화 (개인적으로)재밌는 장면! 6 혼돈의카오스 16/09/15 5257 0
180 기타질병관리본부에서 배포하고 있는 메르스 대응지침서입니다. 11 아나키 15/06/02 10669 0
3912 기타질레트 프로쉴드 행사.jpg 4 김치찌개 16/10/15 5685 0
9767 일상/생각질레트 양날로 돌아오다. 12 다군 19/10/03 5119 6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