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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16/08/18 12:08:15 |
Name | April_fool |
Link #1 | https://www.youtube.com/watch?v=wfYbgdo8e-8 |
Link #2 | https://www.youtube.com/watch?v=JQVmkDUkZT4 |
Subject | 분할뇌 문제와 테세우스의 배 패러독스 |
어제 타임라인에 쿠르츠게작트 동영상 하나를 올렸다가, 문득 [분할뇌 문제]와 [테세우스의 배] 패러독스를 하나로 묶는 동영상을 보았습니다. (한국어 자막 있음) 인간의 뇌는 좌반구와 우반구로 나뉘어 있고, 이 사이는 뇌량이라는 굵직한 신경 다발로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1960년대에 뇌전증(간질)을 치료하기 위해서 뇌량을 일부러 끊어버리는 수술이 고안되었는데, 이 수술을 받은 환자들은 간질발작은 호전되었지만 [외계인 손 증후군]과 같은 특이한 증상이 새로 생기고 말았습니다. 이를 설명하는 것이 위의 첫번째 동영상입니다. 고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영웅 테세우스는 라비린토스에 있던 미노타우루스를 죽이는 업적을 달성한 뒤 배를 타고 아테네로 돌아왔습니다. 아테네 사람들은 테세우스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그가 타고 온 배를 길이길이 보존했는데, 이 과정에서 배의 판자가 썩으면 그 부분을 새 판자로 교체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역사가 플루타르코스는 ‘언젠가 배의 판자가 모조리 새 것으로 바뀌어도 그 배는 여전히 테세우스의 배가 맞는가?’라는 유명한 역설을 제기했는데, 이것을 인간의 몸에 적용하여 해설한 것이 바로 위의 두번째 동영상입니다. 이 두 가지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 두 가지를 하나로 엮어서 생각한다는 발상은 지금껏 미처 하지 못했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데카르트가 제시했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얼핏 보기에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만 같던 명제는 실은 매우 취약한 것입니다. 대체 그 ‘나’(我)라는 것은 뭘까요? ‘나’라는 것은 나를 이루는 모든 구성요소와 그 상호작용의 합이라고 가정할 수도 있겠지만, 실은 그것조차도 쉽게 둘로 쪼개질 수 있다는 사실은 ‘나’라는 존재가 실은 허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들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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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는 개념이 절대적인 관점에선 다분히 작위적이고 허상이 가까운 것이라는걸 인정하면 역설이라고 보기 힘들죠. 그런데 '나'라는 개념이 굳이 아니더라도 이렇게 근원을 파고 들면 그 어떤 개념도 그 자체로 자명할 수 없습니다. A와 B가 구분되는 것이다라는 구획이 실재한다는 것을 절대적인 차원에선 보장할 수가 없기 때문이죠. 이를 해소하려고 플라톤은 이데아를 설정하고 아우구스투스는 신을 설정하고 데카르트는 정신과 연장에 절대성을 부여한 것이고요. 결론은 이데아/신/정신/연장 등의 절대성을 부여하는 순간 그 절대성의 절대성은 누가 보... 더 보기
'나'라는 개념이 절대적인 관점에선 다분히 작위적이고 허상이 가까운 것이라는걸 인정하면 역설이라고 보기 힘들죠. 그런데 '나'라는 개념이 굳이 아니더라도 이렇게 근원을 파고 들면 그 어떤 개념도 그 자체로 자명할 수 없습니다. A와 B가 구분되는 것이다라는 구획이 실재한다는 것을 절대적인 차원에선 보장할 수가 없기 때문이죠. 이를 해소하려고 플라톤은 이데아를 설정하고 아우구스투스는 신을 설정하고 데카르트는 정신과 연장에 절대성을 부여한 것이고요. 결론은 이데아/신/정신/연장 등의 절대성을 부여하는 순간 그 절대성의 절대성은 누가 보증하느냐는 고리에서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에 논리의 내적인 하자가 있죠. 이건 물리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해소가 안될거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런식으로 모든걸 해체해서는 우리의 지엽적인 삶에서 얻을 수 있는 실익이 없으니... 이게 아마 현대철학의 결론이자 인문학의 위기의 핵심이 아닌가 싶습니다.
데카르트의 해당 명제에 대한 미셸 앙리의 해석을 좋아합니다. 기술적으로 표현하면 현상성의 현상화 (phenomenalisation of phenomenality)라고 하고, 좀 더 일상적인 표현으로 치환하여 말하자면 자기에 의한 자기체험을 표현하는 언명이라고해요. 그러니까, 인지자가 타자를 체험하는 게 아니라 인지자가 인지자를 체험한다는 건데, 구체적으로는 명상체험과 비슷해요. 집중력을 높여서 의식의 각성 정도 (awareness)를 고양시키면 무언가를 보고 듣고 있는 나를 내가 재차 보고 듣고있는 듣한 느낌이 드는데 이 체험을 하... 더 보기
데카르트의 해당 명제에 대한 미셸 앙리의 해석을 좋아합니다. 기술적으로 표현하면 현상성의 현상화 (phenomenalisation of phenomenality)라고 하고, 좀 더 일상적인 표현으로 치환하여 말하자면 자기에 의한 자기체험을 표현하는 언명이라고해요. 그러니까, 인지자가 타자를 체험하는 게 아니라 인지자가 인지자를 체험한다는 건데, 구체적으로는 명상체험과 비슷해요. 집중력을 높여서 의식의 각성 정도 (awareness)를 고양시키면 무언가를 보고 듣고 있는 나를 내가 재차 보고 듣고있는 듣한 느낌이 드는데 이 체험을 하지 않고서는 위와 같은 확신성을 얻기 힘들다고 해요.
이 체험을 겪고 나면 이원론적 세계관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대요. 왜냐하면, 내가 나를 체험하는 경험으로부터 얻은 확실성을 내가 남을 체험했을 때는 결코 느낄 수 없기 때문이지요. 앙리는 여기서부터 더 파고들어 새로운 이원론을 만들어내게 되는데... 그 내용이 어땠는지 잘 기억이 안나네요 -_-; 너무 어려워서..
이 체험을 겪고 나면 이원론적 세계관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대요. 왜냐하면, 내가 나를 체험하는 경험으로부터 얻은 확실성을 내가 남을 체험했을 때는 결코 느낄 수 없기 때문이지요. 앙리는 여기서부터 더 파고들어 새로운 이원론을 만들어내게 되는데... 그 내용이 어땠는지 잘 기억이 안나네요 -_-; 너무 어려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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