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6/06/09 22:05:10
Name   제주감귤
Subject   [30주차]계간 '홍차문학' 30호 특집
...그런 점에서 읽는 이가 작품의 어느 한 부분에 기대고 있다는 표현은 그 문장의 의미를 전혀 벗어나지 않는 한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녀의 작품이 우리에게 기대고 있는 것이 아니다. 기대는 것은 우리다. 특히...교수, ...평론가와 같은 경우 늙은 문인들의 전형적인 실수를, 여러 사람이 보는 지면에서, 똑같이 저지르는 일에 남다른 취미가 있어 보인다. 그들은 모두 얼마 전에 기고된 글에서 그녀의 작품들을 일별하며 굉장히 고루하고 이중적인 출구를 이용하여 비평적인 책임만을 회피하려 했다...

...그녀의 생애에 대해 밝혀진 것은 거의 없지만...

...얼마 되지 않는 작품들을 읽어보아도 알 수 있듯이, 릴케의 영향을 부분적으로라도 부정할 수 없으며...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여류 시인들과 강한 영향을 주고받았을 가능성...


...그러므로 최근 어느 작은 헌책방에서, 쓰레기처럼(비유로서가 아니라 정말로) 나뒹굴고 있었던 어느 생물학 교과서를 구입한 대학생은 정말 큰 일을 해낸 것이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칭찬해주는 것이 아니다. 이 성실한 대학생은 그 두꺼운 책의 중간쯤을 펼쳤을 때, 분명히 그것은 더럽게 재미없는 부분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엄청나게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음을 직감했다. 거기에는 지금으로부터 백 년도 더 전에 활동했던 어떤 시인의, 알려지지 않은 두 편의 친필 시가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보존상태는 아름답다 할만하다. 재밌는 점은 두 작품이 다른 잉크로, 같은 종이의 양면에 쓰여 있다는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두 작품이 완전히 다른 시기에 쓰였을 가능성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으며, 그것이 꽤 신빙성 있는 의견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점이다...


...아무튼, 나의 지면에서 이 작품을 처음 공개할 수 있게 되어 기쁘다. (물론 정확히는 내 지면이 아니고 이 잡지의 지면이겠지만... 토를 다는 일이 구차해 보이겠지만 이런 시비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다.) 시인은 두 작품에 제목을 달지 않았다. 더욱 많은 사람이 이제는 유명해진, 이 ‘무명 시인’의 시에 관심을 가지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1.

비로드, 비로드. 외할머니는 내 머리카락을 빗으며 그렇게 이야기하셨죠. 나는 하루 종일 선물상자를 짓이기며 놀았구요. 생일이 언제야? 생일이 어떻게 나를 기다려? 생일이 아니더라도 나는 폭군이었습니다. 하지만 헛간에서는 누구보다 분주하고 똑똑한 소녀. 얼굴의 주근깨가 우박처럼 쏟아졌지만, 주워 담지 못하고 키가 자라버린 처녀였죠. 할머니, 나는 할머니처럼 되고 싶어. 할머니 같은 하녀는 아니지만, 할머니 같은 할머니가 될까 싶어. 나는 하녀도 할머니도 아니었지만, 하녀나 할머니처럼 일하곤 했습니다. 우물은 땀을 흘리는 곳. 물을 길어 올릴 때마다 별자리가 쏟아져 들어와 옷자락을 적셨고, 얼음 같은 성운을 말과 함께 씹어먹으며 건강했죠. 건강한 소녀여서 행복했어요. 말머리성운, 가축의 영원한 공간을 들여다보며 울 수 있는 나였습니다. 설탕 병을 깨뜨렸을 때 나의 하루는 길지 않았습니다. 나는 말괄량이니까. 주워 담을 수 있는 시간들이 달콤하고 역했어도, 나의 무릎은 깨끗했죠. 나는 부드러운 양탄자를 갖고 싶었습니다. 올라설 수 있고, 좋은 원목을 얹어놓을 수 있는. 좋은 가위와, 좋은 도자기. 좋은 엄마와, 좋은 아빠. 나에게는 좋은 것들이 더 필요했습니다. 정원에는 아무렇게나 자라난 관목이 필요하겠지. 나는 밖에 있는 나무처럼 속삭였습니다. 할머니, 저는 깨끗한 소녀예요. 건강한 나이야. 숯처럼 달아오르는 얼굴로. 나는 무엇으로도 울지 않을 수 있고 아무렇게나 울 수 있었습니다. 나는 그렇게 좋은 것을 배웠습니다.






2.

나의 잠은 멀리 가는 당신이 꾸는 꿈,
당신의 꿈은 한 철도 살지 못한 나의 고향입니다
숨 쉬고, 여전히 숨 쉬다가, 기적이 울리면
기차는 머리카락 속으로 미끄러져 오지만
여행은 삯을 받지 않고도 떠날 수 있는 것
당신이 직업을 잃고 흥건했을 때,
당신은 직업을 잃고 이곳으로 흘러들어왔고
나는 비 오는 날 꿈을 꿀 때마다
뱃속에서 소독된 달을 꺼내는 심정이었죠
당신은 기분에 따라 말을 꺼냈고,
나는 그 기분의 사다리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하지만 편백 따라 세운 담벼락, 하얗고 할 일 없는 소음들과
같이 걷는다는 건 또 무슨 의미일까요
어렵고 힘든 일에는 얼마나 많은 귀들이 달렸는지,
어떻게 그 많은 이야기를 달래주어야 했는지
당신은 알지 못하겠지만
이건 저의 이야기가 아니고
이곳은 저의 고향입니다 당신은 이쪽으로 돌아서는군요
나의 소네트가 들리는 쪽으로
나의 소네트는 짝사랑이고
짝사랑은 놓아주고 싶은 동물처럼 지저귀죠
하지만 읽어주고 싶은 한 문장, 결정적인 한 구절처럼,
입을 벌려 나만 아는 생각을 들켜보고 싶어도
나의 일부는 육지에 있고, 나의 절반은 우상을 위한 것
때로는 우러러보기도 들떠있기도 하면서 온 생애가
물고기처럼 놓여날 줄만 알았습니다
저는 놓아주는 법을 모릅니다
하지만 당신은 놓아주려고 만든 인형 같아요
축제가 끝나고 나는 인형 같은 당신과 함께 있었습니다
얼그레이, 아쌈, 다즐링, 높은 곳에서 피우는 시가,
은제 송곳에 말아놓은 레이스의 화려한 무늬,
당신을 온전히 알아가길 바라는 시도들로는
어떤 헛된 것도 만들 수 없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나는 무언가를 만들고 있습니다
익지 않고, 혼자서 향기를 내는 과일,
빛바랜 거울에 비친 할례 받는 그림자
나는 침대맡에서 차가운 뭍에 오릅니다
단지 나의 절반으로,
당신에게 걸어둘 수 없는 나의 절반으로



3
  • 오. 참신!!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3089 창작[조각글 31주차] 대답 6 얼그레이 16/06/21 4131 1
3088 창작[창작] 이상형 이야기 3 레이드 16/06/21 3320 0
3083 창작쯧, 하고 혀를 찼다. 4 nickyo 16/06/21 3795 2
3071 창작[조각글 31주차] 오뎅의 추억 2 우너모 16/06/19 3648 2
3048 창작[31주차] 밝은 시 7 제주감귤 16/06/16 3349 1
3029 창작[31주차 조각글 주제발표] 가장 밝은 글 2 얼그레이 16/06/15 5424 0
3028 창작[30주차] 쌍안경 2 헤베 16/06/15 3919 0
3022 창작[30주차]길들이기, 길들여지기. 1 에밀리 16/06/14 4705 0
3021 창작[30주차] 미끄럼틀 3 얼그레이 16/06/14 4326 1
2985 창작[30주차]계간 '홍차문학' 30호 특집 3 제주감귤 16/06/09 3357 3
2976 창작[30주차 조각글 주제발표] 짝사랑, 홍차, 잠 8 얼그레이 16/06/08 3841 0
2966 창작[29주차]눈에 띄는 자 3 에밀리 16/06/08 4725 0
2964 창작[조각글 29주차] 졸업 2 우너모 16/06/07 3272 0
2963 창작[29주차] 추억의 소녀 1 레이드 16/06/07 3302 0
2942 창작[29주차 주제]무언가 잃어버리는 이야기 1 얼그레이 16/06/03 3318 0
2928 창작[28주차] 디어 3 묘해 16/06/01 4097 1
2927 창작[28주차] 좋아해서 이해해 3 레이드 16/05/31 2912 0
2912 창작[단편] 인필드 플라이Infield Fly(2) 4 당근매니아 16/05/28 3241 3
2911 창작[단편] 인필드 플라이Infield Fly(1) 1 당근매니아 16/05/28 3906 3
2901 창작[28주차 조각글]소통같은 소리 하고 있네! 8 난커피가더좋아 16/05/27 3789 2
2898 창작[28주차 주제] 대화와 소통 7 얼그레이 16/05/26 3197 0
2895 창작[27주차]그래비티 2 에밀리 16/05/25 4264 0
2890 창작[조각글 27주차] 야간비행 4 선비 16/05/25 3003 0
2888 창작[27주차]우울증이거나 알코올 중독이거나 외로운 거겠지. 4 틸트 16/05/25 3502 0
2874 창작[조각글 27주차] 곱등이 3 헤베 16/05/24 4038 0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