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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19/09/29 23:58:10 |
Name | 밤 |
Subject | 따뜻함에 대해서 |
참 이상하다. 일년 전만 하더라도 어떻게든 꺼내 볼 반들반들하고 예쁜 기억들이 많이 있었다. 누군가에게 초콜릿 케이크를 구워 준 일, 누군가와 함꼐 걸었던 일, 누군가의 눈을 계속해서 쳐다보면서, 오늘 나에게 가장 행복한 건 이 사람의 눈에 비춰지는 일일거야 하고 생각했던 것처럼. 한 장 한 장 넘겨 보면 거기엔 반드시 꺼내볼 만한 것들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넘겨 봐도 그렇게 다정하고 친절한 기억들이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주위를 너무 의식하게 된 탓일지도 모른다. 언제부터 나는 앞으로 나아갈 때, 뒤로 물러날 걸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을까. 안 그랬는데. 부담스러울 정도로 앞으로 뛰어나가는 게 그토록 좋았는데. 나는 꽃무늬를 좋아한다. 그 중에서도 따스한 색감이 좋다. 어딘가 노란빛을 머금은 듯한, 햇살이 어른어른 비추는 창가에서 볼 법한 그런 색깔들을 좋아하는 편이다. 내 자신이 차갑고 세련된, 그런 색감들이 안 어울려서도 그렇지만, 좋은 건 좋은 거니까.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오늘 죽어도 이 사람이랑 끝까지 사랑하고 다 불타 버렸으면 좋겠다. 아예 재나 되어 버렸으면 좋겠다 하고. 난 이십대의 전부를 어쩌면 그것과 비슷한 마음으로 보냈던 것 같다. 그래서 어긋나버리고 늘 삐걱대고, 주변에서는 왜 그런 연애를 하느냐는, 걱정과 조롱 비슷한 이야기들을 항상 듣고는 했지만. 최근엔 조용하다. 재가 되고 싶은 생각은 있다. 그런데 한번에 타오르지 않으면 좋겠다. 거세게 불타서 사라지기보다는 훈제가 되는 게 나을 것 같아.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건 참 뜬금없게도, 피부과 의사에게 반 영업을 받아서 한 스케일링 시술 때였다. 난 그걸 중학교 때 받고는 한번도 받지 않았다. 그러니 아 그래 피부에 호강이나 시켜주지 하고 충동적으로 결정한 거다. 그런데 시술이 시작하자마자, 난 어렸을 때의 그 기억이 떠오르고 말았다. 난 어느정도가 되어야 아프다고 말해야 할지 잘 모르는 사람이다. 아주 어렸을 때였나. 뇌수막염으로 병원에 입원했던 기억이 난다.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커다란 주사를 잔뜩 맞았던 것 같은데. 울지 않고 떼를 안 부려서, 간호사 언니가 손바닥에다가 우리 ㅇㅇㅇ는 착해요, 하고 글씨를 적어 주었다. 더 크고 나서는, 집에 항상 나보다 더 아픈 사람이 있었다. 가끔 학교에서 열이 나거나 몸이 아파서 집에 돌아오고 싶었는데, 내가 생각해도 내가 무슨 응급 환자는 아니었다. 그래도 쉬고 싶어서 꾀가 나서 집에 돌아오면, 아프지도 않은데 참을 줄 모른다고 야단을 맞곤 했다. 나중에는 조퇴를 하고도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모르겠다. 그 시절 엄마와 나는 뭐가 그렇게 안 맞고 문제였는지. 그런데 그 날은 왜 그랬을까. 피부과에 간 그날. 스케일링 시술을 하는데 온 얼굴이 바늘로 쿡쿡 찌르는 것처럼 아팠다. 평소라면 꾹 참고 말았을 텐데, 눈물이 퐁 하고 나왔다. 그러고는 스스로 당황스러울 정도로 눈물이 나왔다. 항상 나를 나무라던 엄마가 어찌나 열심히 달래주던지. 그래서 더 그랬던 걸까. 창피하니까 제발 좀 그러지 마. 너 때문에 다시는 거기 못 가겠어. 병원에서 나오자 엄마는 돌변했다. 아예 다른 사람인 것처럼. 하긴. 창피하긴 했을 거다. 나라도 열다섯살 짜리 여자애가 거기서 고거 좀 한다고 통곡을 하고 있으면 그랬겠지. 그때 기억 때문인지, 한번도 스케일링은 받지 않았는데. 그날 누워서 스케일링을 받으면서 그날 생각이 났다. 그리고, 그날처럼 어찌나 아팠던지. 나는 다시는 이걸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제 알아 버렸으니 못 하는 거다. 재가 되고 싶지만 불타고 싶지 않은 것처럼. 정말로 헛소리지만, 그럴 수밖에 없다. 불구덩이에 뛰어들 수 있는 건 불이 얼마나 뜨거운지 몰랐을 때 뿐이니까. 그래도 이런 건 따뜻하지 않다. 죄다 미지근할 뿐. 불에 타 버리고 싶지는 않지만 따스해졌으면 좋겠다. 잠들기 전, 종종 그때 생각들이 날 때가 있다. 요새는 그런 생각을 하곤 한다. 그 사람들이 그리운 걸까. 아니면 누군가를 좋아하던 나 자신이 보고 싶은 걸까 하고. 요즘에는 요리를 아주 열심히 한다. 꼭 누구에게 해 주는 건 아니더라도 어쩐지 요리는 연애와 닮았다. 공들여서 팬을 데우고, 재료들을 하나씩 넣는다. 열심히 굽고, 뿌리고, 그러다 보면 그 냄새가 난다. 내가 좋아하는 공간에서 나던 냄새. 접시에 공들여 요리를 하나씩 올리고, 천천히 접시를 밀어주면 그 사람이 내게 짓던 표정같은 것들이, 냄새에 녹아 흘러나온다. 요리의 끝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데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설거지라는 점이, 사실은 연애랑 가장 닮지 않았을까. 항상 끝은 성가시고 지저분하고, 내버려두면 더욱 더 곪아버린다는 점이. 아직도 재가 될 거란 생각은 포기하지 않았다. 아니면 아예 녹아 버려도 괜찮을 것 같아. 누군가가 말하길 사람이 죽음을 원하는 방식이, 가장 그 사람의 욕망과 가까이 있다던데. 아프지 않게 불로 확 타서 다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 생각하는 형태는 바뀌지 않는데 나이가 들수록 거기에 꾀만 많아지는 기분이다. 아프지 않게, 질질 끌지 말고, 한 순간에. 세상에 그런 건 없으니. 내가 바라는 재는 되지 못하고 한 덩이의 햄처럼 익어가고 있다. 괜찮지 뭐. 햄은 엄청 맛있잖아. 뜨겁진 않아도 아직 따뜻하고.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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