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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18/09/14 11:16:17 |
Name | 소라게 |
Subject | 닉네임 이야기 |
최근 나는 관심병에 걸렸다. 아니, 관심 증후군 정도로 하자. 병이라고 하면 왠지 가슴이 쿡쿡 찔리니까. 이 증후군은 주기적으로 찾아오는데, 뭐 조금 버티면 사라지고는 하지만 발병할 시기에는 이만큼 사람을 괴롭히는 병, 아니 증후군도 없다. 병원에 이 병을 들고 가 봤자 피로에 쩐 의사 선생님이 아마 이렇게 말할 것이다. "별로 해 드릴 게 없는데요." "하지만 정말 심각하다고요." "그렇죠. 처방전 드리겠습니다." 처방전에는 뭐가 적혀 있을까. 프로작? 아니면 벤조디아제핀? 그것도 아니라면 감기약? 아무튼 나는 심각한 병을 앓고 있지만 누군가를 괴롭힐 생각은 없고, 그러니까 좀 더 평화로운 방법으로 이걸 치료해 보기로 했다. 글을 쓰는 거다. 여기에 가입한 건 삼 년 전의 일이었다. 아마도 우르르, 이 사이트가 생기고 사람들이 가입했던 시기였을 거다. 나는 텅 빈 닉네임 란을 보고 머리를 긁적이기 시작했는데, 그건 거기에 뭘 써야할지 도대체 알 수 없어서였다. 사실 뭐, 1234정도로 적어도 되겠지만 그러기는 싫었다. 나는 책장을 휘휘 둘러보다가 모 만화책 이름으로 닉네임을 지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게 썩 마음에 들지 않았던 나는 일 년 정도 여기에 대한 관심을 쭉 끊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관심이 돌아왔을 때는 다시 한 번, 닉네임 변경 창을 앞두고 있을 때였다. 전에 쓰던 닉네임은 맘에 들지 않고. 솔직히 말하자면 그 전 닉네임으로 예전 남자친구에 대한 글을 썼기 때문에 더 싫은 거였지만. 뭐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책장을 보지 않기로 했다. 책 제목 봐서 뭐 해. 그거 맨날 그지같이 지어서(다들 나 같지는 않지만) 사장에게 구박이나 늘 당했는데 거기서 힌트 얻어봐야 뻔하지 뭐. 인터넷 창을 의미없이 슥슥 내리다 보니 마땅한 생물이 하나 보였다. 소라게였다. 버지니아 울프는 여자에게는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고 했다. 나는 방은 필요 없다. 그건 너무 넓어서 이런 관심 증후군 환자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내게 필요한 건 굴이다. 나만의 굴. 내게 굴과 방이 다른 건 아마도 크기 때문일 것 같다. 물론, 굴 중에 만장굴이니 뭐니 커다란 굴이 있다는 걸 몰라서 하는 말은 아니다. 그치만 내가 말하는 굴은 나 이외에 누구도 들어오지 못할 사이즈여야 한다. 그리스 모 거인의 침대처럼 아예 딱 맞아야 한다는 건 아니다. 그러니까 높이는 내 키 반만하고, 너비는 팔을 쭉 벌릴 수 있는 정도면 좋겠다. 그런 크기의 굴을 떠올려 보니 이미 완제품으로 시장에 나온 게 있다. 관. 그렇지만 관은 내가 즐기기에 딱 좋은 굴은 아니다. 그건 사방이 막혀 있다. 종종, 범죄 드라마에 나오는 시체 넣는 냉장고도 그래서 부적합하다. 나는 굳이 따지자면 신선한 공기를 맡으면서 자연스럽게 썩어가는 걸 선호하는 편이다. 뭐 어때. 내 냄새는 나는 못 맡을 텐데. 그러니까 한쪽 벽면은 뚫려있으면 좋겠다. 비는 맞고 싶지 않으니까 천장은 막혀 있어야 한다. 굳이 비가 맞고 싶을 때면 손을 쭉 내밀면 기분이 좋을 것 같다. 그렇다. 손바닥 위를 빗방울이 톡톡 두드리면 기분이 안 좋을리가 없다. 이 문장만 떼어놓고 보면 어딘가 소녀적인 기분도 드는데, 문제는 그 소녀가 손을 뻗고 있는 곳이 관처럼 생긴 동굴이니. 내가 그렇지 뭐. 기왕이면 그 굴이 이동도 하면 좋겠다. 난 뭐든지 좀 빨리 질리는 편이라, 한 풍경만 계속 보고 있으면 지루해서 몸을 비틀다 뛰쳐나갈 것이다. 굴에 바퀴를 달고, 손으로 직직 끌며 다니기에는 무거울 것 같은데. 그러니 소라게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적당히 내가 짊어질만한 무게의 집을 지고 톡톡톡 모래밭을 뛰어다닌다. 남들이 보면 그건 뛰는 게 아니고 기는 거고, 그 옛날 융통성이라고는 새끼손톱의 반의 반만큼도 없었던 우리 상사가 보면 '그건 잘못된 표현'이라고 입을 비죽비죽거리겠지만 안 고칠 거다. 되려 그 사람이 싫어할 거라고 생각해 보니까 한 다섯 번쯤 더 적고 싶다. 뛴다. 달린다. 또 뛴다. 어쨌든 내달린다. 한번 남았나. 심술 부리려니까 또 귀찮네. 심술이라는 심술은 다 부린 뒤에 흡족한 얼굴로 닉네임 란에 소라게라고 세 글자를 적었다. 그 뒤로 해가 바뀔 때마다, 아니 정직하게 말하자면 똥글을 할당량 이상으로 쓸 때마다 닉네임을 바꿀까 나 아닌척할까 하고 여러번 고민했지만 이것보다 마음에 드는 이름은 찾을 수가 없었다. 옛날 사주를 보러 가니 점술가가 이런 말을 했던 기억이 난다. "음, 선생님에게는 그게 있군요." 왜 꼭 점술가들은 지시대명사부터 말해야만 하는 걸까. 묻고 싶었지만 나는 사람들이 뭘 싫어하는지 아는 현명한 여성이다. 그래서 음, 하고 고개만 끄덕거렸다. "선생님께 해외 기운이 느껴집니다." 이게 무슨 소린가 싶겠지만, 이건 최신 역술 용어다. 아무래도 역마살이라고 하면 화개 장터나 장돌뱅이나 그런 느낌이 느껴지는지, 요새는 듣는 족족 '역마살'을 '해외 기운'이라고 한다. 저 말을 처음 들은 뒤에 하도 신기한 단어라 역학책을 빌려 열심히 찾아봤더니 그게 그 말이었다. 내가 딱히 해외에 오래 나가 있을 일은 없었지만, 굳이 밖으로 나가지 않더라도 엄청나게 나돌아다니는 사람인 건 맞으니 그래, 뭐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귀찮을 때만 적당히 운명론자가 되는 사람답게, 역마살이 있으니 나는 닉네임을 이 이상 어떻게 지어야할지 모르겠다. 사실은 귀찮은 거지만 운명입네 뭡네 끌어다 쓰니까 약간 있어보이는 기분이다. 어딘가 또 훌쩍 떠나고 싶어질 때면 이렇게 바꾸는 것도 좋겠다. 소라게(해외기운). 아, 괄호는 안 됐던가. 그러면 이렇게. 소라게_on vacation 수다를 이만큼 떨고 났더니 관심병이 좀 가라앉는다. 아니, 관심 증후군이었던가. 뭐 어쨌든. 치료가 다 됐으니 그러면 이만 끝.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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