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주제에 대해 자유롭게 글을 작성하는 게시판입니다.
Date 15/08/18 00:27:29
Name   세상의빛
Subject   하기 싫은 이야기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글 올립니다.
저번에 검진에 대한 글을 쓰고 기약 없이 시간만 보냈었는데, 이것저것 하느라 바빴습니다. 네. 핑계죠. 게으른 저를 반성합니다.

얼마 전의 일입니다. 64세의 여자 분이고, 우리 병원에서 검진을 받으셨습니다. 요새 몸이 이상이 있는 것 같아 궁금해서 검진을 받게 되었다고 말씀하시는 그 분은 수수한 옷차림이었지만 기품이 있으신 분이었습니다.

평소 주 3회 피트니스 센터에서 운동을 하며, 주말에는 골프를 즐기시는 분으로 평소 건강에는 자신 있었는데 12개월 전 당뇨병을 진단받고 나서는 몸이 이상해졌다고 합니다. 어떤 점이 이상해지셨냐고 여쭤보니 체중이 8Kg 빠지고, 혈당 조절이 잘 안된다고 합니다. 당뇨병이 있으면 체중이 빠지고 혈당 조절도 잘 안 될 수도 있다고 말씀드리니, 그 정도는 이제 본인도 잘 아니까 혹시 다른 원인은 없을까 물어보시더군요. 몇 가지 가능한 원인을 말씀드리고 검사 결과를 보자고 하였습니다.  그 후 일주일이 지나고, 전공의 선생님이 검진 결과 판정을 봐달라고 해서 보던 중 cancer list에 ‘pancreatic cancer(췌장암)’가 쓰여 있던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환자 명을 보니 그 분이더군요.

보통 검진 중 발견되는 암은 대부분 ‘조기 위암’이 대부분이고, 그 다음은 ‘진행성 위암’,‘대장암’, ‘갑상선암’ 등이 뒤를 따르는 편이죠. 물론 검진센터 별로 차이는 있습니다. 하지만 췌장암은 그렇게 흔하지는 않지만 잊을 만하면 튀어나오는 녀석입니다. 그리고 검진하는 의사 입장에서는 가장 골치 아픈 질환이기도 하죠.

건강 검진의 목적 중의 하나는 암의 조기 진단입니다. 빨리 발견하여 치료함으로써 높은 생존율의 향상을 기대하는 것이죠. 조기 암이라는 명칭이 붙으려면 발견된 암에 대하여 적절한 치료를 제공하면 5년 생존율이 적어도 80-90% 정도는 기대되어야 합니다. 근데 췌장암의 5년 생존율은 5% 미만입니다. 또한 현재까지 췌장암에 대한 유일한 치료는 수술적 완전 절제 뿐인데, 수술을 받은 환자도 5년 생존율이 30%을 넘지 못합니다. 조기 위암 혹은 조기 대장암과 같이 좋은 예후를 보이는 조기 췌장암을 임상적으로 정의할 수 없는 문제가 있는 것이죠.

문제는 이 뿐만이 아닙니다. 췌장암을 조기에 진단할 수 있는 적절한 검사방법이 없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선별검사(screening test)로 쓰일만한 검사가 없습니다. CT, MRI, MRCP(자기공명 췌담관 조영술), EUS(내시경 초음파) 등 여러 검사 방법이 연구되었지만 아직까지 선별검사에 적합한 검사는 없는 실정입니다. 위암과 대장암에서 내시경이라는 훌륭한 도구가 있는 것과는 정반대의 상황이죠.

다시 환자 분 이야기로 돌아가면, 전화로 검진 결과를 상담하기로 했던 환자 분은 질환이 질환이니만큼 제가 직접 전화 드려서 병원으로 오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 CT와 CA 19-9(췌장암 표지자인데 진단적 가치는 없는 검사입니다) 검사 결과를 설명해드렸습니다. “현재까지 의학으로는 환자 분의 병은 고칠 수 없다.” “죄송하지만 제 능력 밖의 문제라서 이 분야를 전공한 다른 의사를 소개시켜드리겠다.” 언제나 하기 싫은 말이지만, 꼭 드려야 하는 말씀이니까 최대한 충격을 덜 받으시도록 노력했습니다. 환자 분은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수분 간의 정적이 흐른 뒤 그 분은 다른 병원에 가서 진단을 다시 받아보겠다고 하시며 일어나셨습니다. 저는 말없이 그 분의 뒷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언젠가 국가 암검진에 췌장암이 들어가게 되는 그 날을 기대하면서 글을 마칩니다.



0


    목록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4188 방송/연예왕좌의 게임 블루레이 세트 구입! 5 Leeka 16/11/19 7057 0
    11920 기타쿠팡 마켓플레이스 판매자 후기 9 R4tang 21/07/26 7056 2
    9249 일상/생각게임 중독에 대한 5년간의 추적연구 34 멍청똑똑이 19/05/29 7056 5
    11548 게임스타여캠) 안시성 14 알료사 21/04/05 7055 10
    1766 도서/문학새로 지정된 표준어들 (이쁘다, 찰지다 등...) 17 西木野真姫 15/12/14 7055 3
    1117 일상/생각아이고 의미없다....(11) - 그런 곳에 쓰는 대자보가 아닐텐데...? 5 바코드 15/09/29 7055 0
    10547 게임동물의 숲을 즐기면서 적는.. 소소한 팁들 8 Leeka 20/05/04 7054 1
    614 기타심심할땐 장기 묘수풀이 한판 하세요. (댓글에 해답있음) 15 위솝 15/07/18 7054 0
    10834 영화야구소녀 26 알료사 20/08/01 7053 7
    9979 의료/건강의사는 어떻게 사고하는가 - 3. 치료 13 세란마구리 19/11/12 7052 17
    9572 일상/생각해방후 보건의료 논쟁: 이용설 vs 최응석 5 OSDRYD 19/08/23 7052 11
    7592 게임보드게임 - Heaven and ale (천국과 맥주) 8 Redcoffee 18/05/27 7052 4
    404 기타번개모임 추가 공지입니다. 3 동동 15/06/22 7052 0
    1642 일상/생각정신을 똑바로 차려야지!! 16 세상의빛 15/11/27 7051 0
    10317 일상/생각세무사 짜른 이야기. 17 Schweigen 20/02/23 7050 38
    3855 의료/건강오메가3/오메가6 균형 3 모모스 16/10/09 7050 2
    809 의료/건강하기 싫은 이야기 16 세상의빛 15/08/18 7050 0
    4309 일상/생각작금의 문과는 어떻게 취업하는가 - introduction 29 1숭2 16/12/06 7049 2
    6135 일상/생각우리 시대 새로운 화폐, 치킨. 5 프렉 17/08/21 7045 7
    5128 기타달콤창고, 홍차상자 그리고 이타적 인간 39 호라타래 17/03/09 7045 29
    2417 정치세계화와 국제화의 차이, 그리고 NGO 2 커피최고 16/03/17 7045 1
    1796 기타오늘 커뮤니티 베스트 & 실시간 검색어 요약 정리(12/16) 9 또로 15/12/16 7044 7
    1612 일상/생각태어나 이렇게 열뻗치는 드라마는 처음... 11 눈부심 15/11/22 7042 0
    5811 일상/생각자캐 커뮤니티에 대한 공격에 대해 19 사악군 17/06/19 7040 6
    9469 역사고려청자의 위상은 어느 정도였을까? 17 메존일각 19/07/24 7039 27
    목록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4시간내에 달린 댓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