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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5/08/12 07:45:24
Name   No.42
Subject   한 폭의 그림같은 직장 이야기 #6
안녕하세요, 42번입니다.
마지막입니다. 공사가 다망하여 인터벌이 길었습니다. 더 이상의 절단신공이 없으므로 안심하시고 솓구치는 울분만 다스리시면 되겠습니다.

그런데 그런 좋은 시절은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회사에서 취미처럼 저지르던 구조조정이 또 벌어졌고, 제가 그토록 좋아하던 팀은 해체당했습니다. 팀장형은
혼자 다른 부서로 가버렸고, 나머지 넷은 둘씩 찢어져야 했죠. 게임 타이틀 별로 구성됐던 지원부서가 역할별로 조정된 겁니다. 저와 같은 일을 하는 OA끼리
한 팀, 제 친구와 같은 일을 하는 SA끼리 한 팀. 그래서 서로 다른 게임을 지원하는 사람들끼리 한 팀에 앉게 되었고, 제가 속한 부서의 팀장으로 온 이는
지원 업무 경력이 전무한 어떤 대리였습니다. 제가 지원하던 게임은 냉정히 솔직히 실패작이었습니다. 수익도 그다지, 사실 게임으로서의 완성도도 별로였죠.
그래도 당시엔 회사의 넘버 2 타이틀이었습니다. 넘버 1 타이틀은 과거에 정말 찬란했었었었었던 그 녀석이 말라 비틀어져서도 여전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헌데, 그 타이틀의 해외지원 OA들은 뭐랄까... 가관이었습니다. 조직개편 이후로 개발부서의 수장으로 온 이는 일본인이었습니다. 일본의
모회사에서 (솔직히 아직까지 이 회사 모르시는 분 안계시죠?) 저희의 CTO로 좌천되어 온 이로서, 전작에서 천문학적인 예산을 말아먹은 전적을 가지고 있었죠.
그래도 그는 기존 임원들에 비해서는 합리적인 이였습니다. 어느날 부서 회의에서 CTO가 저쪽 타이틀 OA 중 선임에게 물었습니다. (저희 타이틀의 OA는
둘이 다 남자, 저쪽 타이틀 OA는 7명이 다 여자였습니다.) 게임 내 텍스트가 전부 몇 자냐고요. 이건 중요한 요소입니다. 모델이나 운동선수에게 넌 체중이
얼마냐고 묻는 것과 비슷합니다. 해외 서비스를 위해서는 텍스트를 통째로 번역하는 일도 있고, OA로서 텍스트 수정을 지시해야 하는 일도 있기에, 당연히
알아둬야 하는 것이죠. 그런데 저쪽 OA 선임이 냅다 모른다고 대답합니다. 거기에 덧붙이길, '그런걸 제가 왜 알아야 되죠?' 직속 상관인 CTO, 이사에게 참
당돌한 의견표명이지요. CTO는 입을 떡 벌리고 실로 벙찐 표정이란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사실 저와 CTO는 그가 CTO로 오기 전부터 안면이 있는
사이였습니다. 일본 통이었던 전 팀의 팀장새퀴 때문에 일본에서 출장 온 그와 함께 일한 일이 있었거든요. 그는 제가 일본어를 어느정도 하는 것을 알아서,
가끔 저를 불러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기도 했습니다. 벙쪄있던 그가 저를 부릅니다. 42군. 넵. 늬 게임은 텍스트가 몇 자냐. 저는 냉큼 대답했습니다. CTO가
이어서 묻습니다. 그거 번역하려면 얼마 드냐. 보통 표준편집문서로 A4 한 장에 얼마니까 얼마 들겠네요...라고 대답을 했고, CTO는 저쪽 OA들에게 폭풍
잔소리를 시전했지요. 그 회의 이후에, 저쪽의 대빵 OA가 제 자리로 오더니 볼멘소리를 합니다. 거기서 그걸 낼름 대답하면 자기가 뭐가 되냐고 하더군요.
그래서 '일 제대로 안하는 사람이요.'라고 대답했더니 이번엔 그 사람이 벙찐 표정을 지었습니다. 사실 얼마동안 같이 일하면서 저쪽 OA들은 정말 무슨 일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냥 놀러 회사오는 이들 같았지요. 팀장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다만 팀장 아가씨는 착하기는 했습니다. 가끔 CTO가
말 안통하는 이들을 거치기 귀찮아서 제게 다이렉트로 오더를 할 때가 있었습니다. 저는 그렇게 받은 일을 꼭 팀장에게 이야기했습니다. 저보다 한 살 어린
그 아가씨가 불쌍해 보일 때도 있었지요. 일을 처리하고는 이거 이사가 시킨 일이니 가져다 보고하쇼...라고 해주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차려준 밥상을 팀장은
매번 걷어찼죠. 아 그거 그냥 42씨가 보고하세요, 라고. 그렇게 굴러가는 팀은 해체된 직전의 팀에 비해 너무 별로였습니다. 세련된 표현이 떠오르지 않네요.
말 그대로 별로였습니다. 의욕도 생기지 않고, 전망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저의 불만과 걱정이 쌓여가며, 가족들에게서도 퇴사에 대한 압박이 오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가족들의 기대에는 못미치는 첫 직장이었습니다. 금융권의
자리를 뿌리치고 선택한 곳이라서 더욱 아쉬움이 컸던 가족이지요. 그래도 저는 '난 넥타이 매고 굽신대는 일은 못해!'라는 중2병 마인드를 기어코 실행에 옮겨
좋아하는 일을 하겠다는 철없는 젊은이의 역을 수행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 열정과 중2병은 현실의 벽에 대고 다 던져버린 것이죠. 저는 퇴사를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팀장과 CTO에게 의사를 전달했습니다. CTO는 절 불러 앉혀놓고 이런 저런 당근과 채찍을 던졌습니다. 사실, 실세 COO에 밀려서 기를 못펴던 그에겐
말이 통하고 자기 사람이 될 가능성이 있는 이는 말단 사원 하나라도 소중한 처지였겠죠. 그래도 중역이 붙잡아 주는데 말단 사원이 걷어차는 것도 우스운
모양새였지만, 저는 그냥 퇴사를 실행에 옮겼습니다. 그렇게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3년의 제 첫 직장 생활은 끝이 났습니다. 무엇을 배웠는지, 무엇이 제 안에
남아있는지 확실치는 않습니다. 그 경험을 통해 제가 성장했는지, 혹은 그냥 병들었는지도 확실하지 않습니다. 그저, 그 기간을 살았다...는 것만이 확실합니다.
군대생활과도 비슷하겠네요. 제 이런 경험이 다른 이보다 특별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절대. 많은 이들이 아직은 불합리한 면이 많이 남은 사회와 조직에서
생존, 생활을 위해서 치여서 굴러가듯 살아가니까요. 지극히 평범한 이 나라 청년의 삶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그 쪽이 더욱 슬픈 일일 수 있겠지만요.

이 이야기를 마치기 전에 꼭 짚고 넘어가고 싶은 부분이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에서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것 같은 생각에 명확하게 적어두고자 합니다.
저는 모범 직원이 아니었습니다. 남들만큼 지각도 하고, 근무시간에 딴 짓도 많이 했습니다. 첫 팀장과 불구대천의 사이가 된 것에는 저의 고지식하고 다혈질인
성격도 크게 한 몫했습니다. 이런 면으로 팀장 뿐만 아니라 글로벌시녀팀의 여러 인물 등등과 충돌도 잦았고, 보다 여유있고 원만하게 넘어갈 일도 과격하게
싸워댔습니다. 지금까지 적은 제 이야기는 지극히 제 주관적인 관점에서 쓴 것이므로, 이 일을 함께 겪은 다른 이의 눈에는 이 이야기가 전혀 다른 양상으로
비췄을 지도 모릅니다. 때문에 이 이야기는 한 폭의 지옥도와도 같습니다. 서로 각자의 고통과 형벌에 악다구니를 쓰는 모양이 그려진 그런 지옥도말이죠.
물론, 이 역시 저 혼자만의 감상입니다. 제게는 결코 다시 겪고싶지 않은 기억이니까요. 정말 힘들었습니다. 그리고 첫 팀의 팀장이라는 작자는 지금 길에서
마주친다면 정말 UFC 스타일로 반 이상 죽여놓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습니다. (저는 평소 이런 마음을 절대 숨기지 않고 주변인에게 표명했으며, 때문에 퇴사
이후 때때로 찾아갈 때마다 그 작자는 절 피해 도망다니는 듯 했습니다.) 그리고 첫 팀장에 대해서 첨언하자면, 그는 리더로서 완전 실격에 소심하고 옹졸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반면 성실한 면은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윗선에 잘 보이려는 노력이 상당량의 지분을 먹었으리라 생각합니다만, 늘
남들보다 일찍 출근하여 늦게까지 자리를 지키고 일을 하는 모습은 인상깊었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하시는 일은 어떠십니까. 힘든 일일지 몰라도, 여러분께서는 일을 하시며 조금씩이나마 늘 보람을 느끼시길 바랍니다. 또한, 여러분께서 흘리신
땀에 꼭 금전적 보상이 아니더라도, 수고했다, 고맙다라는 마음의 보상이라도 반드시 받으시길 바랍니다. 여러분께서 어떠한 일을 도덕과 원칙, 상식과 규범에
따라 도모하실 때에 주변의 모두가 그것을 지지하고 한 방향으로 나아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저의 이러한 바람이 결코 대단하거나 힘든 것이 아니라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 여겨지는 사회가 오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길고 짜증나는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보내주신 응원과 공감에도 감사드립니다.



P.S. 사이다가 없어서 죄송합니다. 이게 사이다가 될 지 모르겠습니다만, 후일담 하나만 소개하자면, 문제의 첫 팀 팀장은 그 이후 COO가 더욱 권력을 키우며
이사로 승진했습니다. 하지만 직함에 비해 보여준 것이 없어서 자회사로 발령이 났고, 거기서도 얼마 가지 않아 자리를 잃고 퇴사하였습니다. 지금은 창업을
했다고 하는데, 성공했다는 이야기는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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