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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17/02/01 04:36:22
Name   새벽3시
Subject   그러하다.

새벽세시, 라는 사람이 책을 냈다고 한다.


그 사람이 인터넷 페이지 같은 것을 운영할 때도 종종 지인들이 "이거 너야?" 하고 묻고는 했다.
나는 매번 어색하게 웃으며 아니라고 같은 대답을 반복하고
그들은 "그래, 힐링하고 위안이 되겠다고 쓰여 있어서 긴가민가했다." 는 말로 웃으며 나를 위로했다.


그 페이지들이 묶여 책으로 출간 되었나보다. 책으로 나오니 다시 또 묻는 사람들이 생겼다.
이번에도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아니라고 말한다.


뭘 자꾸 바꾸지 못하는 성격이라 꽤 오랫동안 같은 닉네임을 여기저기에서 썼고 (심지어 여기 홍차넷에서도 쓰고 있고)
게다가 쓰는 글의 분위기라던가 소재도 굉장히 유사하기까지 해서 다들 금방 나를 떠올렸던 것 같다.


오늘 찾아 볼 책이 있어 들른 서점에 그 책이 있었다. 잠시 서서 읽어보니 비슷하다. 내가 생각하고 썼음직한 말들이 담겨있다.


그렇구나, 그래서 다들 물어봤구나, 하고 돌아섰다.


한때는 이런 글이 나온 책을 보면 화가 났었다.


내가 더 잘 쓰는데. 나도 쓸 수 있는데. 심지어 나는 사진까지도 내가 찍을 수 있는데, 라며.
되지도 않는 오만에 절여진 채로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폄하하고 질투했다.
나를 잘 아는 선배는 너의 그 질투가 글을 쓰게 하고, 너를 성장시킬 거야. 라고 했지만 그 말조차도 분했다.

왜 나는 등단도 못하고, 출판도 못하고, 아무도 읽어주지도 않는 글을 쓰며 계속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화가 났다.
글을 쓰기 위해 일을 줄였다가, 생활고에 치여 일을 늘리고, 일 때문에 글 쓸 시간이 없는 시간들이 반복되고 늘어날수록 더 그랬다.
나이는 자꾸 먹어가고 어느 순간부터는 글 쓴다는 말이 부끄러워 할 수 없어지면서 더더욱 화가 났다.


몇 년 전에는 더 이상 글을 쓰지 않겠다, 고 선언했다. 데뷔도 못한 글쟁이가 절필 선언해봐야 아무도 모르지만 스스로 그랬다.
등단이고 자기만족이고 뭘 위해서든 글을 쓰지 않겠다고. 너무 괴로워서. 너무나 괴로워서 계속 할 수가 없었다.
재능 때문인지 노력 때문인지 스스로를 다그치는 것도, 현실과 꿈 사이에서 고민하는 것도, 스무 살이면 끝날 것 같던 인생이 서른을 향해 가는 것도,
하나 같이 끔찍하고 도망치고 싶어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했다.

 

착실하게 회사 다니면서 돈 벌고, 연애도 하고, 글 같은 건 그냥 취미로나 쓰거나 말거나 하며 살아야겠다고. 사람처럼 살아야겠다고.


그런데 그게 안 되더라. 안 쓰겠다고 하니 모든 게 다 글이었다. 집안은 온통 내가 쓰던 노트와 소설의 인쇄물이 들어차 있었고
뭘 봐도, 뭘 들어도, 뭘 해도 이렇게 쓰면 좋을 텐데. 이 문장이 좋구나. 소설 소재로 딱인데 하는 생각뿐이었다.


내가 썼던 게 자기 위안이든 자기 비하든 일기장에나 쓰고 읽어야할 하찮은 글일지언정 내내 쓰는 것만 생각하며 살아와서
그걸 그만두자, 고 하니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떨쳐내려고 해도 끈질기게 뭔가가 떠오르고 쏟아내야만 했다.


결국 나는 다시 글을 쓰기로 했다. 물론 절필을 아무도 몰랐던 것처럼 다시 쓰기 시작했던 것도 아무도 몰랐지만.
소설도 쓰고, 단문도 쓰고, 생각나는 대로 하고 싶은 대로 썼다. 지금도 그렇다. 나는 그냥 나를 내버려두기로 했다.

써도 괴롭고 쓰지 않아도 괴롭다면 뭔가 하는 쪽이 나은 것 같아서.


최근에는 몇 남지 않은 글을 쓰는 친구와 로맨스 소설에도 도전해봤다.

사실 그 쪽으로 재능이 보이던 친구를 밀어주다가 얼결에 끌려들어가게 됐는데 써보니 이것 역시 쉽지가 않다.
학교 다니던 시절 웹소설이 출간되면 나무야ㅡ 미안해, 하고 사죄하며 비하했던 것을 반성하며 쓰고 있다.

계속 글을 쓴다고해도 상황은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글 쓴다, 고 말해도 아직도? 라는 대답을 듣는데 게다가 로맨스 소설을 쓴다, 고 말하면 사람들은 대부분 같은 표정을 짓는다.

그 표정 속에 어떤 말들이 내포되어 있는지 알기에 불쾌하지만 쓰고 있는 나조차도 최근에야 인식이 바뀌었기에 그 시선을 탓 할 수도 없다.

그저 친구 녀석과 "우린 문학계의 불가촉천민이야." 라는 말로 농을 하고 넘긴다. 그래도 같이 농담 할 친구가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그렇게 글을 쓴다. 쓰고 있다.


물론 여전히 종종 질투에 휩싸이고, 말도 안 되는 책이 출판되면 화가 나고, 이런 인재를 못 알아보나-하며 한탄하지만 그래도 괜찮다. 나는 여전히 쓰고 있으니까.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한결 같다. 공감해주고 싶어서. 세상에 이런 생각을 하고, 이런 감정을 느끼는 사람이 나 혼자 뿐이라 나만 미친 사람 같고 절망에 휩싸여 죽고 싶기만 한 그 사람에게 공감해주고 싶다. 적어도 그렇게 몇 사람은 세상에 혼자가 아닌 기분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하면 좋겠다.


그러니 괜찮다. 등단을 못 해도, 화려하지 않아도, 가난하고 불편해도 나는 계속 글을 쓰고 있으니까.

아, 물론 돈도 벌고, 종이책도 내고, 베스트셀러도 되고 그럼 더 좋을 것 같다.






13
  • 춫천
  • 추천.


삼공파일
에에... 속마음 인증도 하셨군요. AMA에서 등단이니 데뷔니 하는 질문을 했던 기억이 나는데 왠지 죄송해요. 박경리 할머니가 글을 쓰려고 해서 쓰는 것이 아니라 글쓰기가 계속 자신을 찾아온다고 했던 말이 생각나네요. 힘드시겠지만 그게 계속 찾아오고 집요하게 괴롭히는 이유가 있을 겁니다. 운도 많이 따라주시고 기운도 내시고 하시길!
새벽3시
아니, 불끄고 주무신다더니?! 의도치않게 자꾸 삼공파일님을 사과하게 만드네요. 그게 더 마음에 걸려요 ㅎㅎ 글 쓴다고 하면 항상 듣는 질문이라 사람입니까? 하면 네, 하고 대답하는 정도의 느낌이에요. 담담하게 쓴건데 위로를 받게 됐군요. 더 많이 열심히 쓰면 잘 되겠죠. 감사합니다 :)
베누진A
글이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저자와 독자가 서로의 감정에 공감하는 그 장이 열린다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인지!

새벽세시님의 글을 읽다보면..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계속 추구하는 것에 대한 어떤 신념, 그리고 인간 감정에 대한 따뜻한 배려가 느껴집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새벽3시
과분한 칭찬 고맙습니다. 홍차넷이 따뜻해서 자꾸 속마음도 얘기하게 되고 그러네요.
베누진A
사실 저도 새벽세시님처럼 작가를 꿈꾸고 있기 때문에 이 글에 더 공감이 가는 듯 해용.. 15년 후에 과학만화를 기획하고 있뜸요.. 소근소근
알료사
도박빚에 시달려가며 글을 썼던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중 한 구절입니다. 어찌됐건 글 쓰는게 좋은 사람은 글을 써야 합니다..

맹세하거니와 나는 지금 내 손으로 쓴 것을 단 한 마디도 믿지 않는다. 나 자신이 뻔뻔스런 거짓말을 늘어놓고 있는 것만 같아 마음에 걸린다. '뭣 때문에 이런 걸 썼는가?'라고 당신들은 물을 것이다. '너는 생활에 굶주리고 있기 때문에 인생의 여러 문제를 혼란스런 논리로 해결하려 한다. 입으로는 대담한 소리를 뇌까리면서도 줄곧 겁을 먹고 변명을 한다. 아무것도 겁날 게 없다고 ... 더 보기
도박빚에 시달려가며 글을 썼던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생활자의 수기>중 한 구절입니다. 어찌됐건 글 쓰는게 좋은 사람은 글을 써야 합니다..

맹세하거니와 나는 지금 내 손으로 쓴 것을 단 한 마디도 믿지 않는다. 나 자신이 뻔뻔스런 거짓말을 늘어놓고 있는 것만 같아 마음에 걸린다. '뭣 때문에 이런 걸 썼는가?'라고 당신들은 물을 것이다. '너는 생활에 굶주리고 있기 때문에 인생의 여러 문제를 혼란스런 논리로 해결하려 한다. 입으로는 대담한 소리를 뇌까리면서도 줄곧 겁을 먹고 변명을 한다. 아무것도 겁날 게 없다고 호언하면서도 우리의 환심을 사려고 한다. 너는 너 자신의 농담이 재미도 없고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 문학적 가치에 사뭇 만족해하고 있다. 너는 하잘것없는 허영심에 사로잡혀 자기의 진실을 자랑하려고 시장 바닥에 전시해 오히려 망신만 당하고 있다. 뭔가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서도 너는 두려움 때문에 그 마지막 한마디를 감추고 있다. 너는 그럴 결단력이 없는 겁쟁이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와 같은 당신들의 말은 지금 나 자신이 지어낸 것이다. 도대체 나는 뭣 때문에 당신들을 '여러분'이라 부르며 독자를 대하기라도 하는 태도를 취하는 걸까. 내가 하려는 고백은 활자로 인쇄해서 남에게 읽게 할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저 머릿속에 한 가지 공상이 떠올라서 그걸 실현하고플 뿐이다. 누구나 절친한 친구 이외엔 아무에게도 털어놓을수 없는 일이 있다. 그것도 아주 은밀히 고백할 수밖에 없는 일, 심지어는 자기 자신에게조차 고백하기 두려운 일. 나 자신도 최근에 지난 어떤 일을 회상하기로 결심했고 불안감 때문에 항상 피해 왔지만 그걸 회상하는데 그치지 않고 글로 남겨 놓기로 결심한 지금으로서는 과연 나 자신에 대해 숨김없는 태도를 취하고 모든 진실을 꺼려하지 않을 수 있을는지 스스로 그것을 시험해 보고 싶은 심정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에 관해선 반드시 거짓말을 하기 마련이므로 정확한 자서전이란 있을 수 없다. 루소가 참회록에서 자신을 헐뜯는 것도 허영심 때문에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것이 어떤 종류의 허영심인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다만 나 자신을 위해 쓸 것이다. 따라서 이 글의 형식에 그 어떤 구속도 받고 싶지 않다. 순서니 체계니 아랑곳않고 그저 생각나는 대로 써 나갈 뿐이다. 당신들은 나의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면서 '네가 정말로 독자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그런 설명이나 변명을 뭐하러 하느냐'고 따질지도 모른다. 내가 겁쟁이어서일수도 있고 아니면 내가 이 글을 써 나가는 데 있어 예의를 지키기 위해서 일부러 눈앞에 대중을 상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대중을 위해서가 아니라면 구태여 종이에 옮겨 적을 것 없이 마음속으로 죄다 상기하면 족하지 않은가. 물론 그렇다. 하지만 종이에 적으면 어쩐지 엄숙해지는것 같다. 뭔가 그럴듯해 보이고 자기비판도 철저해질거 같고 그럴싸한 말도 떠오를거 같다. 그러니까 한 번 그렇게 해본다고 해서 나쁠건 없지 않은가. 무엇보다도 나는 언제나 심심하니까. 뭔가를 글로 쓴다는 건 정말 일답게 느껴지니까.
엄마곰도 귀엽다
글쓴다는게 그래요. 나를 다독여주는 친구이다가도 내가 이것밖에 안되나하고 의심하는 순간 나를 찌르는 가시가 되죠.
등단이라는걸 못한 글쟁이는 작아지고 초라해지고...

괜찮아요. 세벽3시님만 그러는거 아니니까요.
동지가 있다는건 참 위안이 되는 일이잖아요?
힘내요. 괜찮아요. 잘하고 있어요:)
파란아게하
이런 분이 글을 써야합니다.
제가 글을 쓰려고 했던 이유는
작가란 타이틀이 멋있어서 였거든요.
좋은 글 많이 쓰셔요. 댓글 달아드릴게용.
문알못 모태이공계인이지만 올리시는 글마다 맘에 콕콕 박히고 또 진짜 넘나 술술 읽혀요 8ㅅ8 꿀잼!! 넘나 멋지신 것.... 거기다 존예시고...!! 엉엉 ㅠㅠㅠㅠ
마투잘렘
[안 쓰겠다고 하니 모든 게 다 글이었다. 집안은 온통 내가 쓰던 노트와 소설의 인쇄물이 들어차 있었고
뭘 봐도, 뭘 들어도, 뭘 해도 이렇게 쓰면 좋을 텐데. 이 문장이 좋구나. 소설 소재로 딱인데 하는 생각뿐이었다.]


격하게 공감합니다. 얄미운 고양이 같아서 내려놓고 있으면 자꾸 찾아오고, 마음먹고 찾아가면 또 엉뚱한데로 숨는게 글인 거 같아요. 비록 취미로 글을 쓰는 글쟁이지만, 쓰신 글에 절절하게 공감합니다.
전기장판
돈도 버시고, 종이책도 내실 거고, 베스트셀러도 되실 겁니다. 응원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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