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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16/06/20 21:00:59 |
Name | 커피최고 |
Subject | CFR - 인권과 민주주의의 장, 그 규칙을 설정하는 자들(1) |
피에르 부르디외는 20세기 후반을 대표하는 학자입니다. 그는 구분의 폭력을 경계하면서 다양한 분야와 학문을 넘나들었습니다. 그 사상의 핵심 개념인 장, 아비투스, 상징권력 등등은 각종 사례 분석과 함께 하였습니다. 이 글에서는 부르디외 학파가 분석한 인권과 민주주의의 장에 대해서 살짝 정리를 해보려고 합니다. 첫 대상은 CFR입니다. CFR (Council of Foreign Relation)은 미국의 외교관들을 움직이는 막강한 NGO입니다. 미국의 똑똑한 권력자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NGO를 유용한 도구로 활용해오고 있습니다. CFR은 그 오리지널로, 카네기와 록펠러를 비롯한 대자본과 상업 법률가(로펌), 대학 교수, 그리고 관료들이 주도하여 만든 단체입니다. 미국의 외교 방향이 어디로 가느냐를 파악하기 위해선 美정부 보고서가 나오기 전에 CFR의 보고서를 참고하면 될 정도입니다. CFR은 공식적으로 1921년도에 발족하였으나, 사실은 그보다 빨리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대자본의 박애주의 재단이 중심이 되었는데, 그 배경이 재미있습니다. 원래 미국 연방정부는 나약했습니다. 1920년대 서부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카우보이들이 중세 기사들마냥 설쳐대는 지방분권적인 사회였죠. 중앙집권적이며 총체성을 갖춘 근대 국민국가의 형태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는 동안 남북전쟁 같은게 일어나고, 포드, 록펠러, 카네기 같은 소수의 자본가가 폭리를 취하면서 급격하게 자본을 축적합니다. 그 과정은 불법과 폭력으로 점철되어 있어 이들을 "강도남작(robber baron)" 이라고 부를 정도였습니다. 강도들의 횡포에도 불구하고, 약한 중앙연방정부는 찍소리도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점차 연방정부의 힘이 강해졌고, 반트러스트법을 만들어 본격적으로 강도남작들을 규제하기 시작합니다. 궁지에 몰려있던 대자본가들은 자신들이 사회적으로 반드시 필요한 존재임을 어필할 필요가 생겼고, 머리를 굴린 끝에 만들어낸 모델이 바로 "박애주의 모델"인 셈이죠. 그 실무는 로펌에서 활동하는 상업 법률가들이 맡았고, 대자본가들의 막대한 자본을 통해 빈곤퇴치에 주력하였습니다. 이처럼 박애주의 재단이 주도하는 시민운동은 거의 100년에 가깝게 대규모로 유지되어오고 있고, 그래서 미국은 케인지언의 복지국가 모델을 제외한다면, 이것이 전통적인 '베품'의 모습인 셈입니다. 박애주의 모델의 핵심은 '교육'에 있습니다. 먼저 학교와 학문에 대한 투자를 합니다.(시카고 대학이 대표적이죠.) 그리고 사회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자연과학 등을 지정하고, 그에 대해 막대한 지원을 하죠. 그렇게 하나의 '학문'을 새롭게 만들어내고요. 미국 자본가의 헤게모니를 염두하여 만들어낸 국제 정치 이론이 바로 '현실주의 정치 이론'이기도 하죠. 근대화론도 이렇게 만들어진 거고요. 이러한 시스템 속에서 길러진 학자들을 고용하여 싱크탱크로서도 기능하였습니다. 정책 입안하는데 있어 자문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우리는 자본가가 아니에욧 ㅎㅎ 양심적인 상아탑의 학자들의 연구 결과에욧 ㅎㅎ" 이런 코스프레하면서요. 1918년, 1차대전이 전개되고 있을 때쯤, 미국 엘리트들이 보기에 유럽의 헤게모니가 사라질 것이라 판단하였고, 그 패권을 미국이 쥘 수 있도록 행동에 나서기 시작합니다. Hired gunner라고 불리는 로펌 변호사들과 함께 비공식적으로 CFR을 만들고, 베르사유 조약을 맺기 전 실무 작업하러 보낸 Inquiry라는 전문가 집단을 1921년에 흡수하면서 공식적으로 CFR을 발족합니다. (Inquiry의 구성원은 대개 대학교 교수들이었고, 아이비리그, 동부 명가문 출신들입니다. CFR 구성원들의 후배들이었죠.) CFR은 본격적으로 '인권과 민주주의의 장'의 규칙을 설정하는 작업에 나섭니다. 윌슨 대통령이 1차대전 이후 Inquiry를 유럽에 보냈을 때, 미국이 구상한 세계 질서는 크게 두가지로 나뉩니다. 1. 기존의 식민 강대국이 가지고 있던 블록경제의 해체. 당시 세계는 크게 두가지 블록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영국의 파운드 블록과 프랑스의 프랑 블록이죠. 그러다보니 독일이나 미국처럼 자본주의의 발전이 상대적으로 늦었던 국가들은 다른 해외시장을 확보할 수가 없었습니다. 구매력있는 시장은 이미 영국과 프랑스가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미국이 발전시킨 담론이 바로 '자유주의' 담론입니다. "쟤네는 지들끼리만 자유주의고! 그 바깥은 보호주의다!!! 다 때려부수고 자유경쟁해야한다!!!" 이렇게 이야기하면서 식민 정책을 비판한거죠. 인권외교를 도구로서 활용한 셈입니다. '민족자결주의'는 그렇게 탄생하였고요. 2. 유럽의 각 세력들 사이의 균형 유지. 1차 대전 이후로 프랑스는 독일의 재결집을 두려워하였고, 이를 아예 방지하기 위한 여러 시도를 합니다. 하지만 미국이 보기에 그렇게 되면 유럽에서 프랑스의 힘이 너무 강해질 거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독일을 수복하는 데 힘을 좀 썼죠. 군비 문제도 좀 봐주고, 프랑스의 배상금 촉구도 덜어줬습니다. 독일은 그러한 혜택을 입고 조금씩 회복하기 시작하죠.(그리고 히틀러가 뻥터집니다.) Inquiry의 밑그림은 CFR의 존재 목적에 부합하였습니다. 세계 질서와 미국 자본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런 CFR의 조직원리는 엘리트주의와 비밀주의, 두 가지입니다. 전통적인 자유주의는 대중을 굉장히 위험한 존재로 봅니다. 자유주의 관점에서 인간은 개개인으로 분리되어 있을 때 자기성찰이 가장 합리적으로 가능하다고 봅니다. 집단적 존재를 멸시하죠. 오직 엘리트들만이 합리적인 개인이라고 보는 겁니다. 또한, 자신들의 행동이 바깥에 알려지면 무지몽매한 대중과 언론이 이를 문제제기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비밀주의를 고수하게 됩니다. 문제는 이러한 조직원리로 인하여 사람들과 단절되어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아무리 대중을 멸시하더라도, 결국 그들을 자극하지 않으면 안되니깐요. 그래서 CFR은 대중과의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새로운 고급저널을 만들어냅니다. 그 유명한 "Foreign Affairs"는 바로 CFR의 기관지입니다. CFR의 방향성에 알맞는 학자들은 이 저널을 통해 학계의 스타가 됩니다. 폴 크루그만이 대표적인 케이스 중 하나입니다. 1980년대 말, 버블버블 열매를 먹은 일본이 미국을 상대로 엄청난 무역 흑자를 보고 있었을 때, 포린 어페어즈에서 내놓은 의제가 바로 "일본에 대해 자유주의 유지할 것인가? 보호주의로 갈 것인가?" 였습니다. 여기서 후자의 논리를 과학적으로 구성한 것이 바로 폴 크루그만이었습니다. <전략적 무역 이론>이라는 저서가 그 내용을 담고 있고요. 포린 어페어즈가 1925년에 창간된 이후로, 그 편집정책은 한번도 수정된 적이 없습니다. 크게 세 가지 프로세스를 거치는데, 먼저 편집진이 CFR의 오더를 받아 이슈를 하나 던집니다. 그 다음에는 해당 이슈에 대해 미국 상하원의원들이 논쟁을 벌입니다. 입법안에 대한 실무적 차원의 논쟁이죠. 마지막으로 각 정치세력을 서포트하는 학자들이 이론적인 논쟁을 벌이는 거죠. 재미있는 점은 레닌도 이걸 받아보았다는 점입니다. 포린 어페어즈의 첫 주제가 바로 "러시아 혁명은 과연 사회주의 혁명인가?" 였다는 점은 의미심장한 대목이죠. (이에 대한 CFR의 결론은 '아니다'였습니다. 제대로 된 사회주의 혁명이 아니기에 결국은 자본주의화될 것이라 보았고, 박애주의라는 키워드로 굶주리던 러시아 사람들을 지원해주죠. 물론 러시아와 전쟁을 치루던 유럽국가들이 반발할 것이기에 국가가 아니라, NGO차원으로 지원하였습니다. CFR의 기가 막힌 작품이었죠.) 이처럼 CFR은 포린 어페어즈라는 미디어를 활용하여 지식인 사회와 대중들에게 확실한 상표를 박아넣습니다. 각 장에서 CFR은 주류 세력이 되었고, 그 장의 규칙을 설정하기에 이릅니다. CFR은 이제 또 다른 프로젝트를 진행하기에 이릅니다. 2차대전 이후의 판도를 어찌 잡을 것이냐가 그 주제입니다. 이후는 다음 기회에 작성할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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